김종한
(金宗漢,
1844年
~
1932年
)은
舊韓末
의 高位官僚이며
日帝强占期
의 朝鮮貴族이다. 雅號는 유하(游霞)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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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安東 金氏
(新 安東 金氏) 家門에서 親아버지 김계진과 親어머니
安東 權氏
아들로 태어나 金京鎭에게로 入籍되었다. 養아버지 金京鎭은 安東 金氏가 勢道 政治를 펼칠 때
吏曹判書
를 지낸 人物이다. 김종한은
純宗
의 丈人이자
親日派
로 有名한
윤택영
과
윤덕영
兄弟에게는 外四寸 兄이 된다.
젊었을 때에는 開化派에 參加하여
甲午更張
當時
軍國機務處
會議員으로서
김홍집
의 親日 內閣과 함께 改革을 推進했고, 禮曹判書, 宮內府大臣 等으로 要職을 맡았다.
金九
가 남긴 記錄 等에 따르면, 김종한은 開化派로 活動할 當時
安重根
의 아버지
안태훈
과 交分이 있었다.
[1]
김종한은 開化派 靑年으로 政治를 始作했으나 自身을 起用해준 金弘集 內閣이 崩壞하고
俄館播遷
으로 親러派가 執權하는 等의 情勢 變化에도 變함없이 高位職에 머무르면서 時流에 迎合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名門 兩班家 出身답지 않게 本來 李縡(理財)에도 밝아 獨特한 面貌를 보였다. 官職에 있으면서도 일찍부터 現職 高官이라는 身分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高利貸金業으로 收益을 올리고 있었다.
이러한 資質을 살려
1896年
朝鮮銀行
,
1903年
漢城銀行
(銀行長
이재완
)에 參與하여 近代的인 銀行業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 過程에서 그는 日本의 金融 資本과 癒着하게 되었고, 89歲까지 長壽하는 가운데
一齊
의 買辦資本으로 많은 財産을 蓄積했다.
韓日 倂合 條約
締結 戰後에 親日 團體를 結成하여 倂合을 위한 여러 活動을 벌였다.
1909年
日本의
신토
를 崇尙하는 親日團體 神宮鳳敎會(神宮奉敎會)를 組織했고, 그해
國民演說回
에도 參加했다. 當時
이완용
系列과
이용구
系列은 韓日 倂合 條約 締結을 놓고 功勞 競爭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는 이완용 系列에 加擔했다. 이듬해에는 亦是 李完用이 操縱해 設立한 親日 團體인
政友會
總裁를 맡았다.
1910年
韓日 倂合 以後 倂合에 協調한 功勞를 認定받아
男爵
의 爵位를 받았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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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年
發表된
親日派 708人 名單
과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에서
친일인명사전
에 收錄하기 위해 整理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 自身의 爵位를 習作 받은 養孫子
김세현
과 함께 選定되었다.
2007年
大韓民國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195人 名單
에도 들어 있다.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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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親祖父 : 김대균(金大均)
- 아버지 : 金京鎭(金敬鎭)
- 어머니 : 이정완(李正完)의 딸
- 親아버지 : 김계진(金啓鎭)
- 親어머니 : 권용경(權用經)의 次女
- 兩家 庶弟 :
김영한
(金榮漢, 1857年 ~ 1927年)
- 政友會
그外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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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現在의
新韓銀行
의 母體인
조흥은행
을 創立하기도 하였다.
- 所有한 下人과 護衛 武士의 數가 600餘 名에 이르렀다.
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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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反民族問題硏究所 (1993年 2月 1日). 〈김종한 : 高利貸金業으로 置簿한 買辦資本의 先頭走者 (장석흥)〉. 《親日派 99人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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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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