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事 (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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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家事文學觀 앞의 피리 부는 少年上

家事 (歌辭)는 朝鮮 에서 時調 와 함께 流行했던 文學 樣式으로, 歌詞 文學 이라고도 부른다. 高麗 말에 發生하였으며 朝鮮 初期 士大夫層 에 依해 確固한 文學 樣式으로 자리잡았다.

4音 4補格을 基準 律格으로 할 뿐, 行에 制限을 두지 않는 連續體 律文 形式을 갖고 있다. 主要 作家層은 士大夫 階層이나 장르 自體가 지닌 폭넓은 開放性으로 兩班家 婦女子 , 僧侶 , · 庶民 等 技術 能力을 갖춘 모든 階層이 參與했던 慣習的 文學 樣式이다. 家事(歌詞), 家事(歌辭), 街ㅅㆍ 等의 名稱이 慣習的으로 通用되었으나 오늘날에는 文學 장르의 名稱으로서 一般的으로 歌詞(歌辭)라고 부른다. [1]

처음에는 歌詞는 노래로 불렸고 兩班 男子들 사이 流行했다. 16世紀 詩人인 鄭澈 의 家事는 完成度 높다고 評價받고 있다.

朝鮮 前期의 歌詞 [ 編輯 ]

景幾體歌의 殘影 [ 編輯 ]

高麗歌謠 樂譜 와 아울러 宮中의 宴饗歌詞로 傳來해 내려오는 한便, 一般 文人 社會에서는 翰林別曲體의 景幾體歌 가 流行하고 安軸 의 <關東別曲>, <竹溪別曲>을 거쳐 朝鮮에 들어와서도 倦勤 의 < 霜臺別曲 >, 변계량 의 <華山別曲>, 정극인 의 <不憂軒曲>이 出現했다. 또 金九 의 <花田別曲>, 주세붕 의 <道東曲>, <儼然曲>, <太平曲> 等이 創作되었으나, 차츰 세퇴해여 宣祖 때에 이르러서는 권호문 의 <獨樂曲>을 말기로 하여 景幾體歌는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 代身 單價, 卽 時調型에의 接近은 이른바 莊哥라는 聯時調型과 對峙하게 되었다. 勿論 이 聯時調型은 歌辭인 <어부사>의 系列을 받은 것이 確實하지만 高踏的인 景幾體歌 는 한글의 創製와 새로운 長歌型 歌詞의 出現으로 말미암아 그 機能을 잃고 消滅하고 말았다.

歌詞의 發生 [ 編輯 ]

歌詞의 發生도 어느 때부터인지 그 時代를 確定하기는 어려우나, 只今까지의 通說은 朝鮮 成宗 때 정극인(丁克仁)의 < 賞春曲 (賞春曲)>을 그 嚆矢로 삼고, 그 發生도 <賞春曲> 直前으로 推測해 왔다. 大體로 歌詞의 發生은 韓國語 文學이 韻文 文學 에서 散文 文學 으로 넘어가는 途中에서 생긴 文學의 形態라 할 수 있다. 처음 歌詞의 出現은 窓(唱)으로만 傳하는 高麗歌謠의 새로운 散文 精神에 이끌려 形成된 것이며 모든 韓國語으로의 創作的 表現이 律文(律文)으로 되었던 그 當時에 單價型의 扮裝(分章) 形式에 滿足하지 못하고 노래로 읊을 만한 시형(詩形)으로 發展한 것이 이 歌詞體이다. 정극인은 景幾體歌度 지었으나 特히 그의 作品으로 後代에 發刊된 <賞春曲>은 松江(松江) 鄭澈 의 < 關東別曲 >, < 思美人曲 (思美人曲)>, < 續美人曲 (續美人曲)>과 아울러 文學史的으로 重要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제까지 分裝飾 歌辭體와 景幾體歌 聯時調體(連詩調體)가 다 같이 共存하다가 歌辭體의 形成으로 말미암아 各其 자취를 감추고, 歌詞와 時調가 두 個의 큰 潮流를 이루어 흘러내려오게 되었다.

歌詞 文學의 發展 [ 編輯 ]

歌辭體(歌辭體)의 生成에는 中國의 浮體(賦體)인 漢詩의 影響을 입은 듯하고, 또 景幾體歌에서 發展, 朝鮮 初에 이르러 <賞春曲>에서 그 典型的인 모델을 보였다. 이렇게 <賞春曲>에서 本格的 軌道에 오른 歌詞 文學은 차천로 (車天輅)의 <江村別曲(江村別曲)>, 오세문 (吳世文)의 <歷代歌(歷代歌)>, 宋純 의 <俛仰亭歌> 等을 거쳐 정철과 後期의 박인로(朴仁老)에 걸쳐 大聲하니 이른바 歌詞 文學의 黃金 時代를 이루었다. 鄭澈 의 < 關東別曲 >, < 思美人曲 >, < 續美人曲 >, < 星山別曲 >은 家事界(歌辭界)의 白米를 이루고 있으며, 後期에 이르러 좀 衰退했으나 박인로 의 <莎堤曲(莎堤曲)>, <陋巷詞(陋巷詞)>, <독락당(獨樂堂)>, <蘆溪歌(蘆溪歌)> 等으로 如前히 歌詞 文學의 傳統을 이어가면서 朝鮮 前期의 歌辭文學을 形成하게 되었다. 그러나 後期에는 散文 精神과 迎合하여 多分히 敍事的 隨筆 文學 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자나 官僚들의 紀行과 流配를 素材로 한 長篇의 出現을 보았고 또 이것이 文學熱이 旺盛한 平民 또는 婦女들의 世界에서 歡迎을 받아 平民歌詞(平民歌辭), 內房歌詞(內房歌辭)가 發生하였다. 그리하여 歌詞 文學은 마침내 朝鮮 時代 를 통해 兩班 , 平民 , 父女 等의 廣範圍한 階層에서 享有되었다.

정극인 [ 編輯 ]

朝鮮 太宗-成宗 때의 文人·學者. 號는 不憂軒(不憂軒). 벼슬이 司諫院 정언(司諫院正言)에 이르렀으며, 端宗 廢位에 즈음해서 벼슬을 그만두고 故鄕 태인에 돌아가 後進을 가르쳤다. 그의 精誠이 成宗에게 알려져 三品 敎官(三品敎官)을 받았고, 이에 感動하여 <不憂軒曲>을 지었다. 또 歌詞 <賞春曲>을 지었으니 이는 宣祖朝 歌詞의 始初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不憂軒歌>가 傳하여 文集에 <佛語헌집>이 있다.

不憂軒集(不憂軒集) [ 編輯 ]

朝鮮 正祖 때(1756) 丁克仁의 後孫 정효목(丁孝穆)李 丁克仁의 글을 모아 엮은 文集. 이 속에는 漢文으로 된 그의 詩文 外에 景幾體歌인 <不憂軒曲>, 朝鮮 頌祝歌人 <不憂軒歌>와 家事 <賞春曲> 等이 있음.

不憂軒歌(不憂軒歌) [ 編輯 ]

朝鮮 成宗 때 丁克仁이 지은 變形 俗謠. 그가 故鄕 態인(泰仁)에 돌아가 後進을 가르칠 때 成宗이 이를 가상히 여겨 가자(加資)를 내리자 이에 感動하여 지었다 한다. 歌詞는 그의 文集 <不憂軒集(不憂軒集)>에 실려 傳하는데, 內容은 그의 映畫를 그리고 임금의 恩惠가 至重함을 읊은 것이다. 形式은 單加髢를 取했고 歌詞의 가운데 句節을 들면 다음과 같다. "뵈고시라 不憂軒翁 뵈고시라 時政惠養하신 口之於味 뵈고시라 뵈고뵈고시라 三品儀章 뵈고시라 光被聖恩하신 馬首腰問 뵈고시라."

不憂軒曲(不憂軒曲) [ 編輯 ]

朝鮮 成宗 때 丁克仁이 지은 景幾體歌.모두 6章으로 全員의 閑暇한 情緖와 임금의 恩惠를 노래함. 이두문으로 되었는데 그中 첫 張을 들면 다음과 같다. (世界文學 22卷 參考)

賞春曲(賞春曲) [ 編輯 ]

朝鮮 成宗 때 丁克仁이 지은 歌詞.歌詞 文學의 嚆矢가 되는 作品으로 <不憂軒集>에 실려 傳한다. 이는 作家가 故鄕 態인(泰人)에 돌아가 살 때의 봄의 景致를 읊은 것으로, 形式은 3·4兆 또는 4·4條의 完全한 歌詞 形式을 갖춘 노래이다. 그 一部를 들면 다음과 같다. "…엇그제 겨을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 桃李杏花난 夕陽裏例 퓌餘 잇고 綠楊芳草난 細雨中에 프르도다. 칼로 말아낸가 붓으로 그려낸가 造化神功이 物物마다 獻辭롭다…"

金九 [ 編輯 ]

朝鮮 中宗 때의 文人·西島가. 號는 자암(自庵). 朝鮮 서도 4大家의 한 사람. 景幾體歌 <花田別曲>도 지었고, 時調 몇 수도 傳해 온다.

花田別曲(花田別曲) [ 編輯 ]

朝鮮 中宗 때 文人 자암(自庵) 金絿(金絿)가 지은 景幾體歌. 모두 6章으로 이루어졌다. 그가 南海로 귀양갔을 때 그 곳의 承旨(勝地)火田의 風景과 生活을 그린 것이다. 文集 <자암집(自庵集)>에 傳한다.

주세붕 [ 編輯 ]

周世鵬 (1495-1554) 朝鮮 中宗 때의 學者. 벼슬이 大司成에 이르렀고 우리나라에 最初의 書院을 세웠다. 그의 市街는 모두 留學을 主題로 삼고 있는 것이 特徵이며, 景幾體歌로 <道東曲> <儼然曲> <太平曲> <六賢歌>의 4篇과 始祖로 <五倫歌(五倫歌)> <君子가(君子歌)> 等 14首가 傳함. 片書(編書)로 <竹溪誌(竹溪志)>가 있다.

儼然曲(儼然曲) [ 編輯 ]

朝鮮 中宗 때 周世鵬이 지은 景幾體歌. 모두 7章으로 內容은 君子의 儼然한 德을 읊은 것.

太平曲(太平曲) [ 編輯 ]

朝鮮 中宗 때 周世鵬이 지은 景幾體歌. 모두 5章으로 內容은 歷代 聖君의 恩德을 稱頌한 것이다. 이 歌謠는 形態가 허물어져 거의 歌詞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中 1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몸愛蘭 允恭하시고 사람애란 克讓하시니(再唱) 偉 唐堯聖德이 하날 가타샷다."

道東曲(道東曲) [ 編輯 ]

朝鮮 中宗 때 周世鵬이 지은 景幾體歌. 內容은 儒敎의 內容과 性理學의 大家 安珦(安珦=安裕)의 德을 노래한 것. 모두 9章으로 그의 詩文集 <무릉잡고(武陵雜稿)>에 傳한다.

六賢歌(六賢歌) [ 編輯 ]

朝鮮 中宗 때 周世鵬이 지은 景幾體歌. <道德歌> 中의 하나로 모두 6張이다. 形式은 정이천(程伊川)·장횡거(張橫渠)·所要部(邵堯夫)·私馬공(司馬公)·한偉功(韓魏公)·범문정(范文正)에 對한 讚辭이다.

권호문 [ 編輯 ]

獨樂八曲(獨樂八曲) [ 編輯 ]

朝鮮 明宗- 成宗 때의 學者 權好文(權好文)이 지은 景幾體歌. 景幾體歌로서 最後의 作品이며, 權好文의 文集 <송암續集(松巖續集)>에 收錄되어 있다. 모두 8曲으로 景幾體歌의 最後 作品인 만큼 基本 音數律이 깨뜨려져 歌詞에 接近되어 있음.

宋純 [ 編輯 ]

朝鮮 中宗-明宗 때의 學者.號는 俛仰亭 또는 기촌(企村). 退溪(退溪) 李滉 (李滉)의 先輩이며, 農巖(聾巖) 이현보 (李賢輔)의 後輩로 벼슬은 右參贊에 이름. 뒤에 벼슬에서 물러나 故鄕에 살면서 俛仰亭을 지어 圖書와 始作으로 晩年을 보냈다. 文集으로 <기촌집(企村集)>이 있고, 作品으로 漢譯된 <俛仰亭歌>와 始祖로 <황국화가(黃菊花歌)> <致詞가> 두 首가 傳해옴. 그中 <황국화가>를 보면 다음과 같다. "風霜 섯거 틴 날의 잇 갓 퓐 황국화랄 銀盤의 것거 다마 玉堂으로 步內實샤 道理(桃李)야 곳理論量 마라 님의 뜨들 알卦라."

俛仰亭歌 [ 編輯 ]

朝鮮 中宗 때 俛仰亭 宋純이 지은 歌詞. 모두 79具. 朝鮮 歌詞 中 뛰어난 것의 하나로서 <賞春曲> <松江歌辭>의 中間的 位置를 차지함. 內容은 그가 晩年에 故鄕인 潭陽(潭陽)에 돌아가서 기촌(企村) 第月俸(霽月峯) 밑에 俛仰亭을 짓고 餘生을 보낼 때 그 곳 景致를 읊은 것이다. 歌詞의 첫머리를 紹介하면 다음과 같다. "無等山(无等山) 한 活氣 뫼히 東多히로 뎌려이셔, 멀리 뗴쳐와 除月棒에 되여거날, 無邊大野의 무삼 짐쟉 하노라 일곱 勾配 한대 움쳐 믄득믄득 버러나 닷… " 이 作品은 描寫가 極히 진솔(眞率)하게 나타났으며 또한 松江은 俛仰亭을 先輩로 모시고, 始作(詩作)을 했다 하니 松江의 歌詞는 宋純의 影響이 컸으리라 斟酌된다. <俛仰亭歌>는 원歌詞가 傳하지 않아 그 참다운 맛을 찾을 길 없으나, 形式이나 構成 自體가 <賞春曲>과 <松江歌辭>의 中間에 位置하고 있음은 그 書經(敍景)과 構成에서도 一脈 相通하고 있다.

차천로 [ 編輯 ]

朝鮮 宣祖 때의 文臣·文章家. 號는 烏山(五山). 徐坰德(徐敬德)의 文人으로 東邦 文士로서 中國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文集에 <五山集(五山集)>이 있고 作品에 家事 <江村別曲>이 있음.

江村別曲(江村別曲) [ 編輯 ]

朝鮮 宣祖 때의 文人 車天輅가 지은 歌詞. 그 形式은 典型的인 4·4條이며, 兩班 歌詞로 注目됨. 시끄러운 政治界를 被害, 景致 좋은 自然에 묻혀서 한가롭게 生活하는 情景을 읊은 것. <靑丘永言>에 실려 傳함. 그 첫머리는 "平生 아재(我才) 쓸 데 없어 世上 公明 下直하고 上山(商山) 風景 바라보며 四號(四皓)遺跡 따르리라"로 始作됨. 이 作品의 지은이를 成婚(成渾)이라고도 하고 曺植(曹植)이라고도 函.

鄭澈 [ 編輯 ]

朝鮮 宣祖 때의 文臣·詩人.者는 계함(季涵), 號는 松江(松江)으로 벼슬이 左議政에 이르렀다. 徐人波의 鬪士로서 黨爭의 渦中 속에서 몇 次例 波瀾과 귀양살이를 겪었다. 그는 또한 詩人으로서 天才的 資質을 나타내어 많은 傑作 歌詞를 남겼다. 그의 歌詞는 從來의 漢文套를 벗어나 3·4條의 韻律에 依해 自由自在로 우리말을 驅使했으며, 그의 豪宕하고도 圓熟한 詩風은 歌辭文學의 最高峯이라 일컬어진다. 作品에 明宗 15年 金成願을 위해 지은 <星山別曲>, 宣祖 13年 江原道 觀察使로 갔을 때 지은 <關東別曲>, 宣祖 18年-21年 全羅道 昌平에 隱居했을 때 지은 <思美人曲>·<續美人曲> 等 4篇이 있고, 辭說時調 <將進酒辭> 1篇과 單價 77首가 <松江歌辭>에 실려 傳함. 그는 歌辭文學의 代價로 時調의 孤山(孤山) 尹善道(尹善道)와 더불어 韓國 市價思想 雙璧으로 일컬어진다. 文集으로서 <松江集> <송강별집追錄類似(松江別集追錄遺詞)>가 傳한다. 特히 <將進酒辭>는 耽美主義的인 향략 思想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술에 對한 讚歌라기보다 道家的(道家的)인 體驗을 읊은 것으로 朝鮮 儒學者로서의 一面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의 歌詞 作品 5篇에 나타난 時事(詩思)·구상·情緖에 있어 實로 朝鮮 文學의 壓卷(壓卷)이라 할 만하다.

松江歌辭(松江歌辭) [ 編輯 ]

鄭澈의 詩歌를 모은 媤家집. <關東別 曲> <思美人曲> <續美人曲> <星山別曲> 等의 歌詞 外에 <將進酒辭> 1篇과 그가 지은 時調 77首가 실려 傳한다.

關東別曲(關東別曲) [ 編輯 ]

朝鮮 宣祖 때 鄭澈이 지은 歌詞. 歌辭文學의 白眉(白眉)를 이루는 作品으로 그의 作品 中에서도 雄壯한 것으로 代表的이다. 그가 45살에 江原道 觀察使로 있을 때 關東八景을 두루 돌아, 그 路程의 아름다운 山水·風景·風俗 等을 읊은 것이다. 그 絶景의 1節을 보면 다음과 같다. "圓筒(圓通)골 가난 길로 사자봉을 次子가니 그 알牌 너러바회 화룡쇠 되여셰라. 千年 盧龍이 勾配勾配 셔려이셔 듀야의 흘녀내여 창해예 니어시니 風雲을 언제 어더 三日雨를 디련난다…"

思美人曲(思美人曲) [ 編輯 ]

朝鮮 宣祖 때 鄭澈이 지은 歌詞. 鄭澈이 50歲 때 벼슬에서 물러나와 昌平(昌平)에 있던 3年 동안에 지은 것. 自身을 離別한 男便을 그리워하는 젊은 女人의 몸에 依託하여 임금에 對한 그리움을 읊은 것으로 先祖에 對한 煙軍(戀君)의 뜻을 나타냈다. 歌詞의 첫머리를 紹介하면 다음과 같다. "이 몸 三길실 第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生 緣分이며 하날 모랄 일이런가. 나하나 졈어 잇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암 이 사랑 見卒 臺 勞餘 업다. 坪生涯 원下腰帶 寒帶녜子 하얏더니 늙거야 므社 일로 외오두고 글아난고 … "

續美人曲(續美人曲) [ 編輯 ]

宣祖 때 鄭澈이 지은 歌詞. <思美人曲>의 續篇으로 1585-1589年 동안 그가 昌平에 물러나 살 때에 임금을 그리워하여 지었다. 임금을 그리워함을 女人이 離別한 男便을 그리워하는 것에 比喩하여, 두 仙女의 對話體로 되어 있다. 國文學史上 絶唱이라 할 만하다. 歌詞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뎨 가난 뎌 각시 본듯도 한뎌이고, 텬上(天上) 白玉京(白玉京)을 엇디하야 니別(離別)하고, 해다 뎌져믄 날의 눌을 보라 가시難高. 어와 네女이고 내 社셜 드러보오. 내 얼굴 이 擧動(擧動)李 님 괴얌즉 하냐마난, 엇딘디 날 보시고 네로다 녀기실새, 나도 님을 美더 軍 쁘디 全혀 업서, 이래야 嬌態野 魚鮓러이 區돗떤디, 반기시난 낫비치 녜와 엇디 다라申告…"

星山別曲(星山別曲) [ 編輯 ]

明宗 때 鄭澈이 지은 歌詞. 鄭澈이 黨爭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全羅道 昌平(昌平)에 가 살 때 當時 風流人 金成願(金成遠)을 위해 지은 것이라 函. 原文은 原電에 따라 若干 다른 것이 있음. 內容은 城山 기슭에 있는 서하당(棲霞堂), 식영정(息影亭)을 中心으로 斜視 風景의 變化와 김성원의 風流를 稱讚한 것임. 그 歌詞의 一部를 들면 다음과 같다. "…人生 셰간의 됴흔 일 하건 마난 엇디 한 江山을 가디록 나이 女겨 젹幕 山듕의 들고 아니 나시난고. 숑筋(松根)을 다시 쓸고 듁상(竹床)의 자리보와, 져근덧 올라 안자 엇던高 다시 보니, 텬便(天邊)의 떳난 구름 셔셕(瑞石)을 집을 사마, 나난 닷 드난 羊이 쥬인고 엇더한고…"

將進酒辭(將進酒辭) [ 編輯 ]

鄭澈이 지은 辭說時調. 內容은 勸酒歌로 素朴한 가운데 近代 耽美主義에 通하는 享樂思想이 담겨 있다. 이는 술에 對한 讚歌라기보다 肯定的인 人生觀과 道家的(道家的) 諦念을 읊었다 하겠다. 그 專門을 들면 다음과 같다. "河 盞(盞) 먹새근여 또 한 盞 먹새근여, 곳것거 산(算)노코 無盡無盡 먹새근여, 이몸 主根 後(後)면 지게 遇害 거적 덥虛 주리혀 매여 가나, 流蘇洑쟝(流蘇寶帳)의 萬人이 우러녜나, 어욱새 속새 덥街나某 백양(白楊) 俗埃 가기곳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난 비 屈筋 눈 쇼쇼리 바람 불 제 뉘 한盞 먹쟈 割股, 下믈며 무덤 遇害 盞납이 파름 불 제야 뉘웃찬달 엇디리."

朝鮮 後期의 歌辭 [ 編輯 ]

鄭澈(鄭澈)·朴仁老(朴仁老)를 頂點으로 하던 家事는 한동안 주춤하였다가 小說文學의 刺戟을 받아 새로운 長篇歌辭로 널리 創作되었다. 元來 歌詞는 4·4條의 韻文으로 그 表現이 자유롭고 또 娘娘(朗朗) 吟誦(吟誦)할 만하므로 婦女子들 사이에서도 널리 愛誦되었다. 家事는 雜歌와는 달리 兩班文學의 性格을 그대로 간직하며 肅宗 以後에는 長篇으로 變貌 創作되었다. 이 時代의 作品은 敍事詩的인 것이 大部分이며 그 內容은 歷史·說敎·敎訓·紀行 等을 表現했다. 描寫가 事實的이며 날카롭고 能爛한 것은 實學·小說 等의 影響과 이 時代의 趨勢였던 것 같다. 그러나 記錄에 이름이 보이는 歌詞는 許多하지만 實際로 作者를 알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宣祖 무렵에 이루어진 것은 松江·蘆溪 歌詞 外에도 이원익(李元翼)의 <雇工答主人歌(雇工答主人歌)>, 李睟光의 <朝天錄(朝天錄)>, 조위한(趙緯韓)의 <流民歎(流民嘆)>, 임유후(任有後)의 <牧童歌(牧童歌)> 等의 이름 또는 歌詞가 油田(流傳)한다. 영·正祖時代에 내려와서는 이진유(李眞儒)의 <續思美人曲>, 강응환(姜膺煥)의 <武豪歌(武豪歌)>, 김인겸(金仁謙)의 <日東壯遊歌(日東壯遊歌)> 等이 나왔다. 正祖 때의 안조환(安肇煥)의 <萬言詞(萬言詞)>, 純祖 때 조성신(趙星臣)의 <皆巖歌(皆岩歌)> <陶山別曲(陶山別曲)>, 그리고 정학유(丁學游)의 <農家月令歌(農家月令歌)>가 發表되었다. 顯宗 때의 寒山居士(漢山居士)의 <漢陽歌(漢陽歌)>, 哲宗 때에는 東學(東學)敎主 崔水雲(崔水雲)의 作이라는 <龍潭遺詞(龍潭遺詞)> <敎訓歌> 等이, 高宗 때에는 홍순학(洪淳學)의 <燕行歌(燕行歌)>가 創作되었다. 이 時代의 歌詞文學은 形式 面에서 變化가 이루어져 現實의 律調와 散文的인 內容이 分化됨을 볼 수 있다. 卽 完全히 散文에 가까워지고, 다른 一部는 傳統的인 民謠 等의 影響으로 窓(唱)의 附隨的인 創社(唱詞)로 變質된 것이다. 이 時代를 代表하고 있는 家事는 <日東壯遊歌> <燕行歌> <漢陽歌>라고 할 수 있는데 그 大部分은 歌詞의 散文的 性格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2]

이원익 [ 編輯 ]

朝鮮 明宗-仁祖 때의 學者·文人. 號는 오리(梧里). 宣祖·光海君·人造의 3代에 걸친 名臣으로 벼슬이 領議政에 올랐다. 歌詞에 <雇工答主人歌>價 있고, 著書에 <오리文集(梧里文集)>이 있다. <歌曲源流>에 다음 時調 1首가 傳한다. "록羊이 쳔만자인들 가난 春風 매여 두며 探花 봉뎝인들 디난 高즐 어이하리. 아모리 根源이 듕한들 가난 님을 어이里."

雇工答主人歌(雇工答主人歌) [ 編輯 ]

李元翼이 지은 歌詞. 內容은 <雇工歌>에 答하는 形式을 빌어 作家가 領議政을 어른 種에 빗대어서 王인 上典의 말을 듣지 않는 種·머슴들을 꾸짖는 한便, 어른 종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上典을 간한 것이다.

박인로 [ 編輯 ]

朝鮮 明宗-仁祖 때의 武臣(武臣)·詩人. 字는 덕옹(德翁), 號는 蘆溪·무하옹(無何翁).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義兵將 정세아(鄭世雅)의 麾下에서 別侍衛(別侍衛)가 되어 倭軍을 무찔렀고, 水軍 節度使 성윤문(成允文)에게 拔擢되어 그 幕下로 從軍, 倭軍이 退却하자 士卒들을 慰勞하기 위해 <太平詞>를 지었으며, 뒤에 老人職(老人職)으로 벼슬이 龍驤衛 富豪軍이 되었고, 뒤에 故鄕인 露髻에 숨어서 讀書와 始作으로 一生을 마쳤다. 그의 作品은 祖國愛와 自然애를 바탕으로 市政(詩情)과 憂國애가 넘쳐 흐르며, 無人다운 氣魄으로 華麗하고 雄壯한 詩風을 이룩했다. 鄭澈(鄭澈)을 繼承하여 敍事的인 歌詞文學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作品에 歌辭로 <太平詞> <船上歎> <莎堤曲> <陋巷詞> <독락당> <嶺南歌> <蘆溪歌> 等이 있고 時調에는 <早紅柹歌>1修, <五倫歌>25修, <입암(立巖)> 29修 그 밖의 13修 等 모두 68首가 있는데 大部分이 그의 文集 <蘆溪集>에 收錄되어 傳해진다.

蘆溪集(盧溪集) [ 編輯 ]

蘆溪 朴仁老의 詩文集. 原名은 <露髻先生文集>. 卷3에 <太平詞> <毒郎幢> <嶺南歌> <蘆溪歌> <莎堤曲> <陋巷詞> <船上歎>의 家事 7篇과 <五倫歌>를 包含한 時調 60首가 실려 있다(책 끝에 붙은 <陶山歌(陶山歌)>는 그의 作品이 아닌 것으로 밝혀짐).

太平詞(太平詞) [ 編輯 ]

朝鮮 宣祖 31年(1598) 박인로 (朴仁老)가 지은 歌詞. 壬辰倭亂이 끝난 뒤에 倭軍이 退却하자 士卒들의 勞苦를 慰勞하기 위해 지었다 한다. 內容은 壬辰亂 싸움의 悽慘한 光景과 우리 軍士들의 出戰, 敵軍의 擊退 및 終戰 後 軍士들의 즐거워함을 그린 것으로 歌詞의 첫머리 部分은 다음과 같다. "나라히 偏小하야 海東애 바려셔도 箕子遺風이 古今 업시 淳厚하야 二百年來例 禮儀을 崇尙하니 衣冠文物이 漢唐宋이 되야떠니, 島夷百萬이 一朝애 衡突하야 億兆驚魂이 칼 빗츨 조차 나니 平原에 사힌 뼈는 뫼두곤 老婆잇고 雄都巨邑은 豺狐窟이 되얏거날, 凄凉玉輦이 蜀中으로 봐와드니 烟塵이 아득하야 日色이 열워떠니, 聖天子神武下샤 一怒를 크게 내야 平壤群兇을 一劒下의 다 버히고 風驅南下 下野 下海에 더져두고 窮寇을 勿迫하야 몃몃해를 디內緣고…"

船上歎(船上嘆) [ 編輯 ]

宣祖 때 朴仁老가 지은 歌詞. 그가 壬辰亂 때 통주사(統舟師)로 從軍해서 釜山에 있을 때 病中인데도 不拘하고 배 위에서 지은 것이다. 內容은 배의 由來와 나라에 對한 근심을 적은 것이다.

莎堤曲(莎堤曲) [ 編輯 ]

朝鮮 光海君 때(1613) 朴仁老가 지은 歌詞. 親舊 이덕형(李德馨)李 벼슬을 그만두고 勇進(龍津)의 司祭에 있을 때 그의 不遇함을 同情하여 親히 찾아가 보고 이 歌詞를 지었는데 司祭의 아름다운 景致와 그 가운데 逍遙하는 李德馨의 生活을 읊은 것이다. <露髻先生文集>에 收錄되어 있으며, 그 一部를 들면, " … 碧波 襄陽(碧波洋洋)하니 衛戍 利川(渭水伊川) 아닌게誤. 層만(層巒)이 兀兀하니 부춘 起算(富春箕山) 아닌게誤. 臨深 老黑(林深路黑)하니 회옹(晦翁) 耘谷(雲谷) 아닌게誤. 天監 토비(泉甘土肥)하니 二院(李愿) 反哭(盤谷) 아닌게誤. 俳詼 四億(徘徊思憶)戶大 아모 댄 줄 내 몰내라 … "

陋巷詞(陋巷詞) [ 編輯 ]

朝鮮 光海君 때 朴仁老가 지은 歌詞. 언젠가 親舊인 李德馨이 露髻의 貧寒한 生活을 물었을 때 그것에 答하여 지은 노래로 安貧 落島(安貧樂道)한다는 뜻을 일러준 것으로 그의 文集인 <蘆溪集>에 收錄되어 있다. 그 一部를 紹介하면, "어리고 迂闊(迂闊)할山 이애 友愛 더니 업다. 길凶 禍福을 하날긔 부쳐 두고 陋巷(陋巷) 깁푼 곳의 草幕(草幕)을 지어 두고, 風潮(風朝) 隅石(雨夕)에 席은 딥히 셥히 되야 셔 홉 밥 닷 홉 粥에 演技도 하도 할샤…"

독락당(獨樂堂) [ 編輯 ]

光海君 때 朴仁老(朴仁老)가 지은 歌詞. 蘆溪歌 이언적(李彦迪)李 살고 있던 慶州 옥산(玉山) 書院의 독락당을 찾았을 때 李彦迪을 그리어 그 곳의 情景을 노래한 것으로 <노계문집>에 실려 傳한다. 그 一部를 紹介하면 다음과 같다. "峯巒(峯巒)은 秀麗하야 무이산이 되여 잇고 類受難 班會(般回)하야 後二千二 되엿나다. 이러한 명구(名區)에 臨齋 어이 업돗던고. 一千 年 新羅와 誤百濟 高麗에 賢人君子들이 만히도 지닌마낸 天干地飛下野 아선생(我先生)께 기치도다…"

嶺南歌(嶺南歌) [ 編輯 ]

宣祖 때 朴仁老가 지은 歌詞. 仁祖 13年(1635) 그의 75歲 때의 作品. 嶺南 안절사(按節使) 이근원(李謹元)李 이곳 사람들을 잘 다스림을 讚美하여 부른 것이라 하며, <蘆溪集>에 傳한다.

蘆溪歌(蘆溪歌) [ 編輯 ]

仁祖 때 朴仁老가 지은 歌詞. 內容은 그가 晩年에 살던 露髻의 景致를 읊은 것으로 文集 <蘆溪集>에 실려 傳한다. 그 一部를 紹介하면 다음과 같다. "…또 어린 이 몸은 因子도 아니오 지者도 아니露臺, 算數에 壁이 이러 늘글史錄 더욱 하니, 져 貴한 三公과 이 江山을 밧골소냐. 어리미친 이 말을 우으리도 하렷마난 아무리 우어도 나난 됴히 여기노라…"

기타 [ 編輯 ]

雇工歌(雇工歌) [ 編輯 ]

朝鮮 宣祖 때 作家 未詳의 家事. 虛傳(許▩) 또는 先祖가 지었다고 하는데 內容은 滿朝 百官을 머슴에 比喩하여 기울어지는 나라살림을 上典인 임금의 立場에서 歎息한 것이다.

朝天錄(朝天錄) [ 編輯 ]

宣祖-仁祖 때의 學者 李睟光이 지은 歌詞. 前後 2曲으로 되었다 하는데, 歌詞는 傳하지 않고 있다.

流民歎(流民嘆) [ 編輯 ]

朝鮮 宣祖-仁祖 때 사람 潮位彈이 지은 歌詞. 歌詞는 傳하지 않았다. <旬五志(旬五志)>에 依하면 光海君 때 百姓들이 塗炭에 빠진 慘狀을 보고 지었다 함.

牧童歌(牧童歌) [ 編輯 ]

朝鮮 光海君-玄宗 때의 學者 任有後가 지은 歌詞. 아우 祗候(之後)가 逆謀의 罪로 日文이 禍를 입게 되자, 숨어 살며 楚辭(楚辭)를 본받아 지었다 하나 歌詞는 傳하지 않는다.

武豪歌(武豪歌) [ 編輯 ]

朝鮮 英祖 때 無關 강응환(1735-1795)이 지은 歌詞. 모두 128句로 武人의 豪氣와 病者欄의 怨恨을 갚겠다는 武人의 決心을 읊은 것이다

農家月令歌(農家月令歌) [ 編輯 ]

朝鮮 哲宗 때 정학유(鄭學游)가 지은 歌詞(고상안이 지었다고 하나 잘못임). 內容은 1年 동안의 農家의 할 일을 歌詞形式으로 해서 勸農(勸農)의 內容을 읊은 것으로 '月令'은 그달 그달에 할 일을 적은 行事表를 말하는데 그中 5月齡을 들면 다음과 같다. "四月이라 孟夏되니, 立夏 小滿 節氣로다. 비 온 끝에 볕이 나니 일기도 淸和하다. 떡갈잎 퍼질 때에 뻐국새 字로 울고, 보리 이삭 패어 나니 꾀꼬리 소리 난다. 農事도 한창이요, 농잠도 方丈이라. 男女老少 汨沒하여 집에 있을 틈이 없어 寂寞한 대사립을 錄音에 닫았도다."

漢陽歌(漢陽歌) [ 編輯 ]

朝鮮 憲宗 10年 本名은 알 수 없는 寒山居士가 지은 長篇歌辭. 作品은 朝鮮朝의 文物을 讚揚한 노래로 모두 1622具의 長篇이다. 漢陽의 地勢의 뛰어남과 서울의 雄大한 宮殿, 燦爛한 官衙, 繁華한 거리의 높이, 임금의 擧動, 過去의 光景 等을 노래하고 끝으로 歷代 都邑 中에서 韓孃이 으뜸이라는 것을 讚揚하였다.

日東壯遊歌(日東壯遊歌) [ 編輯 ]

朝鮮 英祖 39年에 김인겸 이 지은 長篇歌辭. 一種의 紀行文學으로 內容은 그가 通信社로서 1763年 8月 日本에 가는 趙曮의 書記이자 總 500名에 達하는 通信使의 一員으로 따라가 그 이듬해 1764年 7月 8日 돌아올 때까지 그 곳의 文物·制度·認定·風俗 等을 듣고 본대로 적은 것으로 모두 8千 數百 求인데 그 歌詞의 一部를 紹介하면 다음과 같다. "닻 들고 櫓役(勞役)하여 半洋 (班孃)으로 나갈 적에 세 倍 탄 倭놈들이 點線車로 나오다가 三使臣 (三使臣) 만나보고 돛 지으고 닻을 준다. 뮌 대가리 벌건 다리 처음으로 만나보니 人形 (人形)이 바히 없어 놀랍고 더럽고나. 三絃 (三絃) 소래 듣노라고 般頭 (先頭)에 묶어서서, 가라치고 들레는 量 所見 (所見)李 驚駭(傾駭)하다…"

燕行歌(燕行歌) [ 編輯 ]

朝鮮 高宗 때 홍순학(洪淳學, 1842- ? )이 지은 長篇歌辭. 高宗 3年 中國 燕京(燕京)을 다녀와서 그 이듬해에 지은 것으로 一種의 紀行文學이라 할 수 있다. 그 一節을 보면 다음과 같다. "夏 五月 初 七日에 渡江 일자 正下였데. 方物을 點檢하고 行裝을 收拾하여, 鴨綠江邊 다다르니 送客亭이 예로구나, 義州 府尹 나와 앉고 茶啖床을 차려다가, 三 使臣을 轉變할 第 悽愴하기도 그지 없다 … "

北遷歌(北遷歌) [ 編輯 ]

朝鮮 哲宗 때 弘文館 敎理 김진형(金鎭衡, 1801- ? )이 지은 長篇歌辭. 모두 1040具의 長篇. 그가 吏曹 判書 홍기순의 黨派싸움을 論駁하다가 몰리어 明川으로 귀양갔는데, 이 歌詞는 그때 流配地의 生活과 見聞을 노래한 流配文學 作品으로 이 亦是 長篇 紀行文이라 할 수 있다.

內房歌詞 [ 編輯 ]

閨中의 女性들에 依하여 女性 文學으로서의 歌詞가 創作되었다. 內房歌詞는 朝鮮 末 家庭에 숨은 父女의 손으로 지어지고 또 傳해진 노래들의 總稱으로 그 數爻가 몇十에 이른다. 現在 알려진 것의 大部分은 無名氏의 作이 많고, 宣祖 때 誣獄(巫玉)의 作이라는 <閨怨歌(閨怨歌)>는 代表的인 歌詞의 하나라 하겠다. 封建時代의 사슬에 얽매여 閨中에 숨어 살던 女性들의 하소연, 슬픔, 그리고 男女間의 愛情, 媤집살이의 괴로움, 禮儀凡節, 賢母良妻의 道理 等 婦女子의 生活을 노래한 것이 大部分이다. 兩班階級의 婦女子들에 依해 지어진 것이 많고, 이들은 大槪 宮體의 國文으로 두루마리에 적혀 傳한다. 大槪 朝鮮 末期에 이르러 이 歌詞의 胎內에서 內房歌詞로서 女性 文學으로, 雜歌(雜歌)로서 庶民文學으로 各其 分化하여 차츰 民謠로 吸收되었다.

許蘭雪軒 [ 編輯 ]

朝鮮 宣祖 때의 詩人. 本名은 景樊(景樊), 난설헌은 그의 號. 許筠 의 누이로 特히 漢詩에 뛰어났으며, 올케인 誣獄과 함께 歌詞 <閨怨歌>를 지었고, 詩集으로 <난설헌詩集>이 傳한다.

閨怨歌(閨怨歌) [ 編輯 ]

許筠(許均)의 첩 誣獄(巫玉)李 媤누이 許蘭雪軒(許蘭雪軒)과 함께 지었다는 內房歌詞. 內容은 집안에 들어박혀 사는 아낙네의 心境을 하소연한 것으로 歌詞의 처음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엊그제 점었더니 하마 어이 다 늙거니. 少年 行樂(行樂) 생각하니 일러도 속절없다. 늙거야 설운 말삼 하자니 목이 멘다."

閨秀相思曲(閨秀相思曲) [ 編輯 ]

지은이와 年代 未詳의 內房歌詞. 內容은 男女間의 聯政을 그린 것으로 그 歌詞의 一部를 紹介하면 다음과 같다. "…晝夜 喪事 내 마음을 헤아리고 못 보기는 뉘 탓이며, 못 잊기는 무삼 일고 불쌍하고 可憐하다. 이내 靑春 어여쁘다…"

閨中行實歌(閨中行實歌) [ 編輯 ]

지은이와 年代 未詳의 內房歌詞. 內容은 女子가 시집가서 行할 道理와 凡節을 訓戒한 노래. 그 一部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남의 興亡 盛衰는 父女 얻기 달렷니라. 媤父母를 호양하여 이웃 사람 稱讚하니, 飮食 是非 問安하고 飮食 燈節 맞기 하소. 衣服을 定하기 하고 낯빛을 化하기 하며 한 걸음도 操心하소 … "

老處女가(老處女歌) [ 編輯 ]

지은이와 年代 未詳의 內房歌詞. 內容은 老處女의 身世타령으로 歌詞의 一部를 들면 다음과 같다. " … 어디서 손님오면 幸여나 仲媒辛哥, 兒戱 불러 詰問한 卽, 風턴 約定 患者 재촉. 어디서 便紙 왔네, 幸여나 請婚인가 兒戱다려 물어보니, 外三寸의 訃音이라, 애닮고 설은지고 이내 간醬을 어이 割股 … "

誡女歌(誡女歌) [ 編輯 ]

지은이와 年代 未詳의 內房歌詞. 內容은 시집가는 외딸에게 어머니가 媤집살이를 訓戒한 것으로 歌詞의 一節을 보면 다음과 같다. "人文이 생긴 後에 五倫이 쫓아나니, 閨中의 女子로서 다알수야 있나마는 七去之惡 옛 法이라 三從之道 모를소냐. 그中에 事親之道 百行 中에 으뜸이라."

思親歌(思親歌) [ 編輯 ]

지은이와 年代 未詳의 內房歌詞. 內容은 시집간 딸이 그 親庭 어버이를 그리워하여 읊은 것인데 그 歌詞의 一節을 보면 다음과 같다. " … 못 할레라 못 할레라 父母 생각 못할레라. 前生에 무삼 罪로 女子몸 되어 나서 父母 兄弟 멀리 두고 二十 前에 出嫁하야 父母 動機 그리는고 … "

時節歌(時節歌) [ 編輯 ]

內房歌詞의 하나. 지은이와 年代 未詳의 內房歌詞. 內容은 婦女들의 봄놀이 하는 春興을 그린 것이다.

花煎歌(花煎歌) [ 編輯 ]

지은이와 年代 未詳의 內房歌詞. 內容은 봄철의 女子들이 暫時 媤집살이의 굴레를 벗어나서 즐겁게 花煎놀이하던 일을 노래 부른 것으로, '火田'은 진달래 꽃잎을 쌀가루에 섞거나 無恥어 父親 부꾸미를 말한다.

春眠曲(春眠曲) [ 編輯 ]

作者 未詳이다. 主題는 임에 對한 上司(相思)의 情(情)이다. 男女 間에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 平民 歌辭이다. 한 書生(書生)李 봄날 揶揄원(野遊園)에서 한 女人을 만나 春興(春興)을 나눈 後 집에 돌아왔으나,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겨우 잠이 들어 꿈에나마 임과 再會했지만, 꿈에서 깨자 다시 離別의 苦痛을 이기지 못한다는 內容을 담고 있다. [3]

開化歌詞 [ 編輯 ]

開化歌詞(開化歌辭)란 開化期 에 製作, 發表된 歌詞를 일컫는 말이다. 歌詞의 形式을 그대로 이으면서 開港 以後의 文明開花, 富國强兵 의 意志를 內容에 反映하고 있는 것이 特徵이다. 開化期 媤家의 한 類型으로, 窓가 新體詩 보다 앞서 製作되어 朝鮮에서 볼 수 있는 思想 最初의 近代的 樣式의 時價라고 할 수 있으나 過渡期的인 面도 剛하게 지닌다.

主題 [ 編輯 ]

時調나 歌詞에는, 임과 헤어져 있는 話者가 어떤 특정한 自然物로 다시 태어나서 任意 곁에 머물고 싶다는 陳述이 흔히 나타난다. 이러한 陳述은 話者의 所望을 强調하기 위한 慣習的 表現인데, 그 속에는 當代人들의 世界觀이 投影되어 있다. 人間과 自然이 깊은 關聯을 맺으며 調和를 이룬다는 認識, 現世의 因緣이 後世로 이어질 수 있다는 循環的 認識 等이 그것이다. 媤家에 담긴 이러한 認識은 話者가 現實의 苦難이나 缺乏을 克服하는 데 도움을 준다. [4]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이능우; 金泰煥. “家事 (歌辭)”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2024年 2月 13日에 確認함 .  
  2.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 〈 歌詞의 盛行
  3. 강승원, 編輯. (2009年 1月 5日). 《EBS 修能特講 言語領域》 初版. 韓國敎育放送公社. 9쪽.  
  4. 2009學年度 大學修學能力試驗 言語領域 홀數型 33番.

參考 文獻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兩班文化의 隆盛〉"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