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계량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변계량 (卞季良, 1369年 ~ 1430年 )은 高麗 朝鮮 初의 文身이다. 本貫은 密陽 (密陽)이며, 아버지는 判中樞院事(判中樞院事) 변옥란 (卞玉蘭)이고, 兄은 右副承旨를 지낸 변중량 (卞仲良)이다. 字는 거경(巨卿), 號는 春亭(春亭)이다. 禮曹 板書 를 지내고, 20年 동안 集賢殿 大提學 을 歷任하였다. 諡號는 문숙(文肅)이다.

實用主義的 經世史官으로 朝鮮朝의 기틀을 마련한 經世家 로 評價된다. 卞季良은 朝鮮 初期 世宗의 스승으로, 太祖, 太宗, 世宗 3代의 國家의 祭天 意識 等 國家 書類 90%를 作成했다는 文筆의 達人이었고, 世宗에게 集賢殿 設置와 對馬島 征伐을 建議하고, 公正한 科擧制를 運營하였다.

生涯 [ 編輯 ]

어려서부터 총명해 네 살에 考試의 大邱(對句)를 외우고 여섯 살에 글을 지었다. 異色 · 정몽주 밑에서 가르침을 받고, 1382年(高麗 禑王 8年) 進士試에 合格하고, 이듬해는 生員試에도 合格하였다. 1385年 文科에 及第하여 全校主婦(典校注簿)·備巡衛정용郎將(備巡衛精勇?將) 兼 進德博士(進德博士)를 지냈다.

1392年 朝鮮이 建國되자 千牛衛中領中郞將(千牛衛中領中?將) 兼 典醫監勝(典醫監丞)에 任命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以後 醫學敎授館(醫學敎授官)을 거쳐 1396年(太祖 4)에는 校書監勝(校書監丞)에 知製敎(知製敎)를 겸하였다. 太宗 初에는 成均館 虐政(成均館學正)·職藝文館(直藝文館)·私財所感(司宰少監)·藝文館 應敎(應敎)·直提學 等을 지냈다.

1407年(太宗 7) 文科 重視에 乙과 第1人으로 뽑혀 堂上官에 오르고 豫遭遇參議(禮曹右參議)가 되었다. 이듬해 世子左輔德(世子左輔德)李 되고, 그 뒤 藝文館提學·春秋館冬至使 兼 內贍寺判事·競演冬至使 等을 거쳐, 1415年 世子右副賓客(世子右副賓客)李 되었다. 이 때 가뭄이 甚해 上王이 크게 근심하자, 하늘에 祭祀하는 것이 例는 아니나 狀況이 切迫하니 元旦(圓壇)에 빌기를 請하였다. 이에 太宗이 卞季良에게 祭文을 짓게 하고 領議政 柳政鉉(柳廷顯)을 보내 祭祀드리게 하니 果然 큰비가 내렸다. 그 뒤 太宗 말까지 水門전제학·左副賓客·藝文館大提學 兼 成均館大司成·右賓客·禮曹判書·競演知事·春秋館知事·議政府參贊 等을 歷任하였다. 特히 1419年에는 大部分의 官僚들이 反對한 倭寇 討伐을 强力히 主張, 이종무(李從茂)를 앞세운 己亥東征(己亥東征)을 成功케 하는 데 貢獻하였다.

1420年(世宗 2) 集賢殿이 設置된 뒤 그 大提學이 되었고, 1426年 ( 世宗 8年) 友軍都總制副判事(右軍都摠制府判事)가 되었다. 特히 文章에 뛰어나 거의 20年 間 大提學을 맡아 外交 文書를 作成하였다. 過去 試官으로 至極히 公正을 期해 高麗 末의 弊端을 改革하였다. 뛰어난 文章으로 世宗의 命을 받아 興德寺 (興德寺)에서 《國朝寶鑑》(國朝寶鑑)을 엮는 任務를 맡아 머무르는 동안, 世宗이 宮中의 貴한 飮食을 하사하였고, 朝廷의 高官도 同僚들 또한 자주 卞季良에게 술과 飮食을 보내 慰勞하였다.

著書 [ 編輯 ]

高麗 末 朝鮮 初 정도전(鄭道傳)·權近으로 이어지는 官印文學家의 代表的 人物로서 「華山別曲(華山別曲)」·「태行態上王諡冊文(太行太上王諡冊文)」을 지어 朝鮮 建國을 讚揚하였다. 著書로 『춘정집(春亭集)』 3卷 5冊이 傳한다.

『太祖實錄(太祖實錄)』·『國朝寶鑑(國朝寶鑑)』의 編纂과 『高麗史(高麗史)』 改修(改修)에 參與했고, 箕子墓(箕子墓)의 碑文과 「落薦定期(樂天亭記)」·「獻陵指紋(獻陵誌文)」을 찬하였다.

그 外 歷代 臣下들의 말이나 行實로써 境界가 되고 본받을만한 것을 모아 쓴 『正부상규설(政府相規說)』이 있다. 『靑丘永言(靑丘永言)』에 時調 2首가 傳한다.

事後 [ 編輯 ]

巨創의 屛巖서원(屛巖書院)에 祭享되었다. 諡號는 문숙(文肅)이다.

評價 [ 編輯 ]

特히 卞季良은 朝鮮時代 大提學을 20年 지낸 當代 最高의 學問 權威者다. 權力이나 利權하고는 無關한 學問을 다루는 最高 職責 大提學은 名譽를 重要視하는 士大夫들의 羨望의 對象으로 “政丞 10名이 大提學 한 名만 못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大提學은 ‘學問을 저울질하여 올바르게 評價한다’고 했으며 學問과 關聯되는 모든 官職을 거친 大科 及第者만 오를 수 있었다. 品階는 情2품으로 判書와 同級이지만 正承이나 判書보다 높게 待遇 받았다. 大提學은 오늘날 官職上으로 敎育部 長官 에 該當되나, 公的으로 徹底히 檢證된 大科及第者에 한해서 政治的 經綸을 갖추고 學問的으로는 當代에 最高의 性理學者로 公認된 人物만이 任命될 수 있다는 點에서 最高의 名譽로운 官職이었다. 官職上으로는 일인지하萬人之上(一人之下萬人之上)의 領議政 , 左議政 , 右議政 을 지낸 人物 가운데에서도 大提學을 지낸 人物이 少數라는 것은 政治的 또는 官僚的 性格이 優先이 아니라 性理學 의 學問性을 優先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大提學과 右議政 , 左議政 , 領議政 을 지낸 人物의 家門은 名門 家門 中에 名門 家門으로 尊重했다.

卞季良의 學問은 明나라와 師大外交 하는데, 儒敎社會를 建設하고 朝鮮의 理念을 傳播하는 데 쓰였다. 世宗은 集賢殿 學士 中에서 “앞으로는 本錢(事務室)에 出勤하지 말고 오로지 집에서 글을 읽어라”고 命한다. 한 가지 條件은, 세 사람이 글을 읽는 規範은 卞季良의 指導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드라마 [ 編輯 ]

各州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內容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