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중
(尹石重,
1911年
5月 25日
~
2003年
12月 9日
)은
日帝强占期
와
大韓民國
의
作家
, 兒童文學家로, 號는 석동(石童)이다.
槪要
[
編輯
]
그는
양정고보
를 거쳐
1942年
日本 도쿄
措置 大學
新聞學科에서 學士 學位 取得하였다.
1924年
《신소년》에
童謠
〈봄〉,
1925年
고 小波 方定煥 先生이 週間으로 活動을 넘어, 活躍을 하던 어린이
잡지
人 《어린이》에
童謠
〈오뚜기〉가 當選되어 兒童文學家로 登壇하였다. 小波 方定煥 先生은 才能이 있는 兒童文學家들을 찾아내는 분이었기 때문에, 後에 윤석중 先生이 쓴 童詩人 짝짝궁, 卒業式 노래, 새나라의 어린이 等에 曲을 붙여 童謠를 作曲한
정순철 先生
,
尹克榮
,
박목월
是認,
서덕출
,
마해송
,
李元壽
作家 等을 作文 敎室, 現象 글 뽑기 等으로써 發掘했다.
[1]
소파의 慧眼대로 윤석중 詩人은
이수인
이 作曲한
앞으로
, 어린이날 노래, 바람, 雨傘 셋이, 나란히 나란히를 作詞하는 等 많은
童謠
를 發表하였고, 《넉點 半》(
創批
), 《윤석중 視線》(
知識을 만드는 知識
)에 실린 넉點 半, 숨바꼭질 等으로써 어린이들의 好奇心이 많고 純粹한 마음, 윤석중 詩人 自身의 말처럼 動物과 木石과도 이야기하는 어린이들의 純粹한 마음을 노래하였다.
[2]
[3]
生涯
[
編輯
]
京城府
에서 태어났다.
文學界에 登壇하다.
[
編輯
]
文學硏究者人 노현주
慶熙大學校
후마니타스 칼리지 講師에 依하면,
1911年
當時에는 京城府였던 서울特別市 중구 수표동 13番地에서 윤덕병과 조덕희의 여덟番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두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兄弟들도 모두 어려서 죽었다. 外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고, 열 살에 校洞普通學校에서 工夫했는데, 擔任先生님이었던 맹건호
敎師
가
최남선
이 發行하던 《아이들 보이》를 빌려주어
韓國語
를 배워익혔다. 열 살 때인 1921年은 當時
朝鮮
이라고 불린
韓半島
가
日本
의
植民地
였으므로 日本語를 國語로, 朝鮮語를 外國語로 배우던 時代에 母語인 韓國語를 어린이 雜誌로써 배운 것이었다. 우리말을 배운 經驗은 나는 韓國語를 母語로 使用하는 韓國 사람이라는 民族正體性을 일깨워주어 1924年에 《신소년》에 첫 童詩人 《봄》을 發表하였다. 日本
童謠
人 《하루가기타》를 배우면서 '우리말에도 봄이라는 예쁜 말이 있는데, 뭐하러 日本말로 하루라고 할까?'라는 批判하는 생각이 들어 滿 13歲인 1924年에 童詩를 지은 것. 1925年에 小波 方定煥 先生이 發行하던 《어린이》에 옷두기(오뚝이)를 보내었는데, 그의 문재를 尊重한 小波 方定煥 先生에 依해 兒童文學家로 이름을 文學界에 알렸다.
[4]
兒童文學家로 살다
[
編輯
]
양정고등보통학교
를 在學하였으나
1929年
11月 3日
光州 學生 運動
이 勃發하고, 이에 同參하지 못하고
卒業狀
을 받는 것조차 良心의 呵責이 되어 <中外日報>에 '自退生의 手記'를 投稿한 後
卒業
을 며칠 앞두고,
自退
를 한다.
1930年
가을
에는
日本
으로
遊學
을 가지만 1年을 채우지 못하고, 歸國을 하게 된다. 以後
1942年
日本
措置 大學
新聞學科에서 學士 學位 取得하였다.
1925年
잡지
어린이
에 그의
童謠
〈오뚜기〉가 當選된 後에 雨傘 셋이, 바람, 짝作宮(정순철 作曲, 윤석중 作詞)等 많은 童謠 歌詞와 童話, 어린이 戱曲 等 兒童文學의 갈래에 걸쳐 兒童文學 作品들을 創作·發表하였다. 1931年, 그해 別世한
방정환
週間의 뒤를 이어
개벽사
의 어린이 雜誌인 《어린이》의 週間으로 韓國 兒童 文學의 先驅者로 活躍하였다. 그 後 《少年中央》·《소년》·《小學生》의 週間을 지냈으며,
1955年
조선일보 編輯 顧問을 지냈다.
1956年
새싹會 會長에 選出되고,
1961年
3·1 文化相 藝術 部門 本像과
1966年
文化勳章 國民葬을 받았다.
1970年
어린이 會館 拷問이 되는 等 兒童들을 위한 많은 貢獻을 하였다.
著書
[
編輯
]
著書로 《윤석중 童謠集》(1932年, 新舊書林, 첫 童謠集), 《初生달》, 《굴렁쇠》, 《어린이를 위한 윤석중 詩集》 等이 있다.
1956年
새싹會
童謠集 엄마손 等을 비롯하여 윤석중 童謠集(1932年), 잃어버린 댕기 童詩集(1933年, 첫 童詩集임.) 等 그의 作品은 童謠는 千三百便, 그의 動搖에 정순철 作曲家 等이 曲을 붙인 童詩가 800餘篇에 이른다. 어린이들이 雨傘 셋을 들고 나란히 가는 모습을 그린 同時이자 動搖人 《雨傘 셋이》, 바람이 불어 나무꾼을 시원하게 하는 《바람》, 어린이가 時間을 알아오라는 엄마 심부름을 하면서 粉꽃, 닭이 물을 마시는 모습, 개미를 보는 이야기인 《넉點 半》,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表現한 《숨바꼭질》처럼 아름답고 神奇한 自然을 보면 好奇心을 가지는 어린이들의 맑고 純粹한 童心,
바람
을 擬人化를 하는 童心, 나비들에게 말을 하는 童心을 描寫한 童詩를 지었고, 그가 지은 童詩는 同語 反復(어른들이 읽는 글에서는 "구름처럼 雲集하는, 體感溫度를 느끼다, 逆轉 앞, 足발, 一方的인 偏見, 信號待機를 가다리는"와 같은 同語 反復을 고치는 것이 좋지만, 어린이들이 읽는 글에서는 同語 反復이 內容을 어린 讀者들이 쉽게 理解할 수 있고, 童詩에서는 같은 單語가 되풀이 되면 마치 動搖이기도 한 짝짝궁처럼 興이 나는 拍子를 가지기 때문에 좋은 點이다.), 一定한 陰數로써 拍子를 가지기 때문에 정순철 作曲家 等이 作曲하여 童謠로 지음으로써 어린이들이 친숙하게 同時와 動搖를 배우면서 豐富한 感性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으니, 윤석중 先生의 兒童文學史에서의 業績은 매우 크다.(윤석중 지음, 노현주 엮음, 《윤석중 視線》, 知識을 만드는 知識 參照)
2003年
12月 9日
,
老患
으로
別世
했다. 享年 93歲.
飜譯本 問題
[
編輯
]
한便, 本人(윤석중)의 飜譯 作品이었던 <열한마리 고양이> 시리즈는 初版 當時 出版社였던 熊津미디어가
2001年
7月
웅진코웨이개발에 吸收合倂된 데다
[5]
原作者(바바 노보루)와 初版 飜譯者(本人)의 他界
[6]
(原作者-2001年 4月 7日 初版 飜譯者-2003年 12月 9日) 때문에 絶版됐는데 이 過程에서 <열한마리 고양이> 原作者(바바 노보루)의 執筆作 中 하나이자 本人(윤석중)의 飜譯 作品인 同時에 같은 出版社(熊津미디어)에서 發行된 <알리바바와 마흔 名의 도둑>도 絶版됐으며 熊津미디어는
1996年
9月
訪問販賣事業本部를 웅진시스템(舊 熊進通信販賣)에 讓渡했고 웅진시스템은
1998年
1月
訪問販賣事業本部를 웅진출판(現在 熊進씽크빅)에 넘겼으며 2000年 10月
웅진식품
에 吸收合倂됐고
[7]
웅진코웨이개발은
2003年
5月
미디어事業部門을 敎育出版-音盤事業 營爲 業體
[8]
熊津미디어로 分離시켰지만
[9]
2006年
2月
廢業했다.
以後, <열한마리 고양이> 시리즈는 그림 두루마리 冊인 '11마리 고양이 마라톤 大會'와 本篇(銃 6卷)李
2006年
2月
꿈소담이에서 裁判됐으며 이장선으로 飜譯者가 바뀌었는데
[10]
本篇 2番째(11마리 고양이와 바보새 -> 11마리 고양이와 바닷새) 4番째(자루에 든 11마리 고양이 -> 11마리 고양이와 주머니) 5番째(11마리 고양이와 異常한 고양이 -> 11마리 고양이와 별난 고양이) 題目이 變更됐고 本篇 完結인 '11마리 고양이와 아기恐龍'은 初版(熊津미디어) 當時 發賣되지 않았다.
學歷
[
編輯
]
賞勳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各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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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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