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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八史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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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八史略 》(十八史略)은 (元)의 한족 學者 증선지 가 지은 中國 古代史를 담은 歷史書이다. 原名은 《 古今歷代 十八史略 》(古今歷代十八史略)으로, 太古(太古) 때부터 宋나라 末까지의 事實을 뽑아 初學者를 위한 一種의 初級 歷史敎科書로써 編纂하였다.

內容 [ 編輯 ]

現傳 刊行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元) 지치 (至治) 年間(1321年 ~ 1323年)의 것이다. 元來 만들어진 것은 2卷이었으나, 그 뒤 (明) 初期의 學者 晉은 (陳殷)李 帝王의 世紀(世紀)나 朱子學 (朱子?) 書籍을 土臺로 音과 解釋을 달아 現在 傳하는 것과 같은 7卷이 되었고, 여기에 命 中期의 유염 (劉剡)李 朱熹 (朱熹)의 《資治通鑑綱目》(資治通鑑綱目)을 따라 三國 時代 (三?時代)의 正統王朝를 위(魏)에서 燭(蜀)으로 바꾸어서 보주(補注)를 더해 刊行한 것을 現在 傳하고 있다.

眞隱隱 中國의 歷史를 簡單히 理解하기 위해서 司馬遷 이 지은 詐欺 (史記)와 班固 가 지은 漢書 (漢書)에서 始作하여 歐陽脩 가 지은 新五代史 (新五代史)에 이르는 17種의 正史 (正史)의 技術에서 拔萃하여 冊을 엮었다고 여겨져 왔지만, 現在의 硏究에서는 《資治通鑑》(資治通鑑) 等에서 拔萃한 것이 더 많은 것으로 判明되어 있다. 野史(野史) 卽 皇帝의 命令이나 國家 機關에서 主導하여 發行한 것이 아니라 民間人에 依해서 著述된 歷史冊도 相當數 引用하였다. 特히 北送(北宋)?南宋(南宋)에 關해서는 증선지 生存 當時에는 아직 宋 王朝의 情死라고 할 《 訟事 》(宋史)가 完成되지 않은 狀態였고, 따라서 野史類나 個人 咀嚼, 關聯者가 갖고 있던 記錄物을 土臺로 한 것이 많은 것으로 여겨진다.

韓國에는 朝鮮 太宗 3年( 1403年 )에 明의 使臣으로 朝鮮을 訪問했던 太監 黃嚴(黃嚴)李 《 元士 》(元史) 等과 함께 《十八史略》을 보내왔다고 한 것이 最初이다. 朝鮮 初期의 成俔 (成俔)이 이 冊을 愛讀하였다고 하며, 宣祖 또한 王으로 卽位하기 前에 良人數(楊仁壽)라는 議員으로부터 《十八史略》을 工夫하였고(《성호사설》) 卽位한 뒤에는 金睟(金?)가 王命으로 校正하였다고 한다(《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 星湖 李瀷도 《星湖僿說》에서 《十八史略》을 읽은 內容을 言及하고 있다. 그 內容과 性格은 主로 歷史속의 有名한 이야기를 뽑아 모은 것으로 마치 어린아이를 위한 ‘歷史 이야기’ 水準의 敎育書로써의 性格이 剛한데, 홍대용 (洪大容)李 (淸)에 갔을 때, 朝鮮의 어린아이들은 무슨 冊을 읽느냐는 學事 엄성(嚴誠)의 물음에 “처음에는 《千字文》, 다음에 《史略》을 읽고 다음에 《小學》(小學)과 다른 經書를 읽는다.”고 對答하였고, 이덕무 (李德懋)도 《 靑莊館全書 》(靑莊館全書)에서 “우리 나라에서는 蒙學에게 반드시 《通鑑》과 《史略》을 가르친다.”라고 하여, 朝鮮 後期 《十八史略》은 初學醫 學習書로 많이 읽혀졌음을 알 수 있다.

批判 [ 編輯 ]

單純한 교보재와 같은 冊이었을 뿐 아니라, 司馬遷이 《詐欺》를 지으면서 허황된 이야기라며 빼버린 三皇 에서 始作하는 等 初盤 導入部부터 허황된 內容이 많고 文章도 지나치게 縮約된 것이 많아 뜻이 통하지 않는 部分도 많았다. 宣祖 때의 文人 유몽인 (柳夢寅)은 《 於于野談 》에서 “《 痛感 》이나 《史略》은 우리 나라에서나 崇尙하지 中國에서는 崇尙하는 일이 없다.”고 指摘했고, 조위한(趙緯韓)은 “中國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글이 自身들처럼 높아지지 못하게 하려고 보낸 冊이 《史略》과 《 古文眞寶 》(古文眞寶)다.”고 指摘하였다. 許筠 (許筠)은 조위한의 말을 課長이라고 하면서도 自身은 《史略》을 읽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通鑑》과 《論語》를 읽어서 文理를 攄得했다고 밝혔다.

中國에서는 이른 時期에 失傳된 듯, 이긍익 (李肯翊)의 《 燃藜室記述 》(燃藜室記述)에는 肅宗 (肅宗) 4年( 1678年 )에 淸의 附則示威(副勅侍衛)가 朝鮮에 와서 朝鮮 文人들의 文集을 비롯해 여러 가지 冊을 求해 갔는데 그 中에 《十八史略》과 《古文眞寶》가 들어 있었다고 하며, 朝鮮 末期의 文臣 홍한주(洪翰周)는 《指數染筆》(智?拈筆)에서 《四庫全書》(四庫全書)를 編纂할 當時 廳에서는 《十八史略》의 存在를 알지도 못했다고 적고 있다. 現在 中國에서는 증선지라는 이름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다.

日本의 境遇 무로마치 時代 (室町時代) 初期에 《十八史略》李 傳來되었다고 하며, 朝鮮과 마찬가지로 에도 時代 (江?時代)에 初心者의 入門用 書籍으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메이지 (明治) 以後로도 漢文 敎科書에 많이 採用되었고, 《 左前 》(左傳)이나 《詐欺》 같은 1級 苦戰 書籍과의 區別이 어렵게 되었다. 한때 日本에서 《十八史略》은 暴發的인 流行을 끌었지만, 東洋史의 새로운 桶讀書가 登場한 뒤로는 차츰 比重이 줄어, 歷史冊이라기보다는 經營者와 비즈니스맨을 위한 自己啓發書나 哲學 書籍으로 더 많이 읽히게 되었다. 中國文學을 硏究한 다카시마 도시오(高島俊男)는 中國에서도 예로부터 어린애들이나 읽게 했던 冊인데 日本人들은 이걸 典據로 삼을 만한 歷史冊으로 過大評價, 錯覺해왔다고 批判하였다.

構成 [ 編輯 ]

  1. 詐欺 』( 司馬遷
  2. 漢書 』( 班固
  3. 後漢書 』( 범엽
  4. 三國志 』( 진수
  5. 陳書 』( 房玄齡 外)
  6. 宋書 』( 沈約
  7. 南齊書 』( 소자현
  8. 良書 』( 姚思廉
  9. 陳書 』(姚思廉)
  10. 魏書 』( 衛戍
  11. 北齊書 』( 李百藥
  12. 후주서 』( 최인사
  13. 水西 』( 魏徵 ? 長孫無忌
  14. 남사 』( 이연수
  15. 北史 』(이연수)
  16. 新唐書 』( 歐陽脩 ? 松肌
  17. 新五代史 』(歐陽脩)
  18. ”송감”:『續資治通鑑長編』(이도)와『속송(중흥)편년자치통감』(유시거)의 두 冊을 하나로 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