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진 (196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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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진
身上情報
出生 1965年 2月 20日 ( 1965-02-20 )
大韓民國 忠淸北道 忠州市
死亡 1986年 5月 3日 ( 1986-05-03 ) (21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死因 自殺(火氣에 依한 死亡)
居住地 大韓民國
性別 男性
職業 學生運動家, 反美運動가, 反戰運動家
學歷 청운국민학교
靑雲中學校
경복고등학교
서울大學校
父母 김세훈(簿), 김순정(某)
活動 情報
關聯 活動 學生運動, 反戰平和運動
所屬 서울대학교 學生會

김세진 (金世鎭, 1965年 2月 20日 ~ 1986年 5月 3日 )은 焚身 自殺한 大韓民國 의 學生運動家, 反戰平和運動家이며 서울大學校 에서 學生會 幹部로 活動하였다. 前方入所 拒否 鬪爭의 先鋒에 서서 活動하였으며, 86年 5月 (軍) 前方入所 拒否와 駐韓美軍 撤收 , 美軍 軍事基地化에 反對하여 抗議하다가 이재호와 함께 焚身自殺하였다. 忠淸北道 出身.

生涯 [ 編輯 ]

學生 運動과 反戰 運動 [ 編輯 ]

김세진은 忠淸北道 忠州 에서 태어났으며, 1983年 경복고등학교 를 卒業하고 서울大學校 自然大學 微生物學科에 入學했다. 1986年 에 自然大 學生會長이 되었으며, 그해 4月 28日 에 同僚 學生 運動家인 이재호 와 신림동 네거리에서 “前方入所 全面 拒否 및 韓半島 未濟 核基地化 決死 沮止”를 외치며 焚身했다. [1] 그는 軍隊 前方入所 拒否 運動과 反戰 平和運動을 해 왔다.

前方入所 拒否 運動과 反美 運動 [ 編輯 ]

1986年 4月 27日 밤 9時30分 頃 모임에 參席한 學生運動家들은 그해 봄 벌인 ‘ 前方入所 拒否鬪爭’에 對해 冷靜한 評價를 내렸다. 잇따른 籠城 企圖가 失敗로 끝나 雰圍氣는 沈鬱했고, 이튿날로 豫定된 前方入所에 맞춰 거리示威를 벌이는 것으로 鬪爭을 마무리짓기로 했다. 前方入所 拒否運動의 마지막 示威 場所는 宸臨四거리 附近 伽倻쇼핑 앞 거리로 定해졌다. 現場 責任은 自然大 學生會長 김세진에게 委任되었다. [2]

總學生會長 김지용의 手配로 김세진이 맡아온 對外連絡 總括業務는 李政丞에게 넘겨졌다. 얘기를 끝낸 이들은 黑石洞 市場通의 허름한 布帳馬車에서 ‘離別’의 燒酒盞을 기울였다. 拘束을 覺悟하고 示威를 主導하였다. [2]

1986年 4月28日 午前 9時께. 서울 宸臨四거리에서 보라매公園 쪽으로 100餘m 떨어진 버스 停留場 附近에서 400餘 名의 大學生들이 거리示威를 벌이기 始作했다. 서로의 팔짱을 낀 채 霎時間에 印度와 車道를 占據한 젊은이들은 “反戰反核 양키고홈” “미제의 傭兵敎育 前方入所 反對”를 외쳤다. 示威隊의 눈길은 길가 3層 建物 屋上에서 핸드 마이크를 들고 쩌렁쩌렁 口號를 先唱하고 있는 두 젊은이에게 固定되었다. [2] 이때 김세진과 함께 演壇에 선 이는 當時 서울대 ‘前方入所 訓鍊 全面 拒否 및 韓半島 未濟 軍事基地化 決死沮止를 위한 特別委員會’ 共同副委員長을 맡았던 이재호(23)였다. [2]

거리示威를 始作한 지 5分 後 달려온 戰警과 白骨團이 示威隊를 에워싸고 끌어내기 始作했다. 一部 警察兵力은 示威를 主導하고 있던 두 學生을 붙잡기 위해 建物 屋上을 뛰어올랐다. 暫時 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두 學生이 視野에서 사라지더니, 그中 한 學生이 비틀거리며 다시 나타나 팔뚝을 흔들며 口號를 외치기 始作했다. 불길에 휩싸인 그의 몸에선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2]

“시너를 사가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瞬間的으로 ‘아, 저게 分身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진이는 등 쪽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狀況에서 주먹을 쥐고 口號를 외쳤다. 異常하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죽음 [ 編輯 ]

이미 그는 焚身 이틀 前인 1986年 4月26日 父母님께 보낸 便紙. 그는 前方入所 反對示威로 拘束될 覺悟를 하고, 拘置所로 移送되면 다시 편지하겠다고 썼다.

深刻한 火傷을 입은 김세진은 바로 病院으로 옮겨졌으나 5月 3日 死亡하였다. 死亡 當時 그의 나이 22歲였다. 1990年 8月 15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서 祖國統一床이 追敍되었다. [3]

事後 [ 編輯 ]

김세진·이재호의 葬禮式은 森嚴한 警備 아래 치러졌다.

平壤醫科大學 基礎 醫學部 基礎醫學과 4學年에 編入되었고 [4] , 2006年 北韓의 民族民主愛國烈士에 追敍되었다. [4]

家族 關係 [ 編輯 ]

  • 아버지 : 김재훈 [5] (1936年 ~ 2020年 12月 1日)
  • 어머니 : 김순정

文學 속의 김세진 [ 編輯 ]

계명산 에서 내려온 푸른 구렁이
밤마다 品案으로 기어드는
꿈을 꾸고서 김세진君을 낳았대서일까

노루목이며 彈琴대며 湖巖地에서
내가 본 것은 푸른 구렁이들뿐이다
온몸이 시커먼 櫝으로 덮여
새파란 불을 뿜는 푸른 구렁이들뿐이다
 
신경림 .〈푸른 구렁이〉,《길》(창작과비평사, 1990)

各州 [ 編輯 ]

  1. “김세진 이재호 烈士 22周年 追慕式” . 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 . 2008年 5月 2日 . 2008年 8月 24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김세진·이재호는 아직도 묻고 있다:한겨레 21 2006年 4月 第606號
  3. 北韓,祖國統一上에 林孃ㆍ運動圈 學生도, 韓國日報 1990-08-17字, 02面
  4. 南 民族民主愛國烈士 31名, 北 '名譽學生,人事'에 登錄-民衆의 소리
  5. 무서웠어요, 未安했어요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