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低出産度 ‘前頭光’ 때 始作됐다[이미지의 포에버 育兒]|東亞日報

低出産度 ‘前頭光’ 때 始作됐다[이미지의 포에버 育兒]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12月 22日 14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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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砲(four)에버 育兒’는 네 名의 子女를 키우며 職場生活을 竝行하고 있는 記者가 日常을 통해 接하는 韓國의 保育 現實, 問題, 社會 이슈를 담습니다. 單純히 情報만 담는 것을 넘어 低出産 時代에 多子女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共有하고자 합니다.

映畫 ‘서울의 봄’의 累積 觀客은 930萬 名을 넘어서 現在 趨勢라면 크리스마스 連休에 올해 두 番째 千萬 映畫 記錄을 세울 것으로 보인다. 21日 서울 市內 한 映畫館에 映畫 ‘서울의 봄’ 포스터가 걸려있다. 뉴시스
映畫 ‘서울의 봄’李 1000萬 觀客 突破를 눈앞에 두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울의 봄은 1979年 12·12 事態를 그린 映畫다. 픽션을 標榜했지만, 登場人物의 이름만 조금 다르게 바꿔놨을 뿐 事實上 歷史에 忠實한 논픽션 作品이다.

映畫를 契機로 ‘前頭光’의 實際 人物인 전두환과 第5共和國도 다시 照明되고 있다. 전두환은 平生 論難을 몰고 다닌 大統領이었다. 5·18 光州民主化運動을 强勁 鎭壓해 數많은 死傷者를 냈지만, 그에 對해 一抹의 沙果나 反省도 없어 全 國民의 公憤을 샀다. 退任 後 裁判을 통해 在任 期間 벌인 各種 非理가 드러나 數千億 원을 追徵당했는데, ‘全 財産은 計座에 든 29萬 원뿐’이라는 稀代의 妄言을 남기며 納付를 拒否해 거센 非難을 받았다.

그런 그가 在任 期間 中 한 큰 失策이 하나 더 있었으니, 다름 아닌 人口 政策이다. 事實 韓國의 低出産은 그의 5共和國 때부터 始作됐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 1980年 前後로 鈍化한 出産率 減少, 躁急해진 政府


1·4 후퇴 당시 피난 가는 한 가족의 모습. 동아일보DB
1·4 後退 當時 避難 가는 한 家族의 모습. 東亞日報DB
지난番 1960~1990年 사이 韓國의 人口 抑制 政策에 對한 歷史를 簡略히 紹介했는데, 周邊에 情報가 됐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映畫를 契機로 2彈을 準備해 보았다. 이番에는 1980年代 전두환 政府 時節 人口 政策 이야기다.

只今은 世界 最低 合計出産率을 자랑하는 韓國이지만, 6·25 戰爭 直後만 해도 우리나라 女性이 平生 낳은 子女 數, 合計出産率은 예닐곱 名에 達했고 人口 增加率이 3%에 가깝게 높았다. 1961年 抑制 政策 一環으로 ‘家族計劃 事業’이 始作됐고 成果는 눈부셨다. 20餘 年間 合計出産率은 3分의 1 水準으로 뚝 떨어진다. 비슷한 時期 印度 等 몇몇 나라가 우리와 같은 人口 抑制 政策을 施行했는데 우리만큼 刮目할 만한 成果를 거둔 곳은 없었다.

人口 增加率을 0%로 만드는 合計出産率, 卽 人口가 다음 世代에도 現 世代와 똑같게끔 만드는 出産率을 ‘大體 水準 出産率’이라 부르는데, 一般的으로 嬰兒死亡率이 낮은 先進國에서 이 代替 水準 出産率은 2.1名 程度다. 1980年을 전후해 韓國의 出産率은 이 數値에 近接한다. 1981年 韓國의 合計出産率은 2.57名이었다.

하지만 出産率이 떨어지니 自然히 減少 幅이 鈍化하고 家族計劃 事業 雰圍氣도 多少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當然한 일이었지만, 大體 水準 出産率 達成을 눈앞에 두고 마음이 躁急해진 公務員과 專門家들에겐 當然해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時代가 變함에 따라 家族計劃 事業 方式 限界를 드러내고 있음에 注目했다. 그동안의 家族計劃 事業이 높은 成果를 보일 수 있었던 건 人口 政策에 無知했던 國民을 對象으로 한 啓蒙 敎育과 避妊 支援, 地域別 專擔 要員들이 家家戶戶 訪問해 集中管理하는 ‘도어 투 도어’ 事業 方式 德이었다. 하지만 1980年代에 이르면 이미 많은 國民들이 家族計劃의 必要性을 깨달아 더 以上 ‘덮어놓고 낳아봐야 거지꼴을 못 면한다’고 啓蒙할 사람도 없었고, 都市化가 急激히 進行되면서 過去처럼 도어 투 도어 方式 管理도 어려워졌다.

● 2050年 人口 6000萬 展望…全斗煥 “人口問題, 5共 力點事業”


여기에 잘못된 展望까지 기름을 부었다. 1981年 政府가 낸 ‘長期 人口 展望’은 當時 速度대로 出産率이 떨어질 때 2000年에야 겨우 出産率이 2.1名에 이르고 以後 出産率이 繼續 停滯해 2050年 人口가 6000萬 名을 넘는다고 豫測했다.

旣存 人口 政策에 따른 豫期치 않은 副作用까지 感知됐는데, 바로 男女 性比 不均衡이었다. 政府의 支援 或은 默認下에 避妊과 妊娠中絶이 늘면서 子女 數는 2~3名으로 줄었지만, 그 안에서 男兒選好思想에 따른 性比 不均衡이 極甚해졌다. 태어나는 女兒 100名에 對한 男兒 數를 일컫는 出生性比는 自然 狀態에서 105名 前後다. 하지만 統計廳에 따르면 1975年 出生性比는 112.4名, 1978年 111.3名으로 男兒가 非正常的으로 많았다. 이런 기울어진 性比는 長期的으로 社會를 不安하게 만드는 要因이었다.

結局 當時 政府는 抑制 政策을 더욱 補完·强化하고 그 方式을 改善하는 大大的인 轉換에 들어간다. 事實 執權 初만 해도 人口 政策에 큰 關心이 없었던 前 大統領은 뒤늦게 狀況에 對한 說明을 듣고 “問題가 深刻하다”며 그 자리에서 冊床을 탁 치더니 “人口 問題를 第5共和國의 力點事業으로 瑕疵”고 말했다고 한다. 以後 그는 地方에 初度巡視를 다닐 때도 人口 抑制를 强調하며 本人이 軍隊에 있을 때 精管手術을 했다는 事實을 이야기하고(1960, 1970年代 家族計劃 事業의 一環으로 軍部隊 義務施設에서 希望者에 한해 精管手術을 支援했다), 相對方에게 ‘當身도 했느냐’고 묻곤 했다는데, 이 때문에 눈치를 보던 靑瓦臺 祕書官이 마지못해 精管手術을 했다는 逸話도 傳해온다.

● “셋 以上 낳으면 補助金, 手當 안줘” 人口抑制 强化


재임 당시 경제 동향 보고를 받고 있는 전두환 대통령. 동아일보DB
在任 當時 經濟 動向 報告를 받고 있는 전두환 大統領. 東亞日報DB
大統領이(그것도 전두환 大統領이) 이처럼 關心을 갖는데 政策이 迅速히 準備되지 않을 理 없었다. 第5次 經濟社會發展5個年計劃(1982~1986) 發表와 함께 大擧 補强된 ‘人口增加抑制政策’이 公開됐다. 目標는 政策의 對國民 接近性을 높이고 人口 增加率을 1%臺로 떨어뜨린다는 것. 總 49個 施策으로 이뤄졌는데, 避妊 施術 支援 擴大, 産兒制限 家口에 對한 인센티브 强化, 多子女 家口에 對한 不利益 擴大, 男女差別 改善 等 全方位的이고 過去보다 한層 高度化된 政策들이었다. 代表的인 몇 가지만 羅列해 본다.

―醫療保險 給與 對象에 避妊 施術 包含, 施術 支援費 引上

―醫療保險 分娩給與 支給 對象을 둘째까지로 制限

―셋째부터 子女 敎育費 補助金 非課稅(免稅) 惠澤 剝奪

―셋 以上 多子女 公務員 家口에 子女 學費 補助手當, 家族手當 未支給

―零細民 生計費, 子女 數따라 差等 支給(韓 子女 30萬 원, 세 子女 3萬 원)

―生業資金, 福祉住宅資金 融資 詩 두 子女 不妊受容 家口 于先

―두 子女 不妊受容 家口에 公共住宅 入住 優先權, 0~5歲 子女 1次 無料 診療

―戶主制, 相續制에 女性 差別 條項 改善

―女性 就業 禁止 職種 30→6種

―育兒休職制 制度化

―學校 人口 敎育 補完, 强化

대한가족계획협회가 광고했던 표어. 동아일보DB
大韓家族計劃協會가 廣告했던 標語. 東亞日報DB
政策이 주는 메시지는 明確했다. 都市에 살든 農村에 살든, 財産이 많든 적든 아이를 많이 낳으면 不利益을 주고 적게 낳으면 惠澤을 주겠다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 必要한 社會的 시스템을 모두 整備하겠다는 것이었다. 캠페인도 더 强化된다. 1960年代까지는 ‘3·3·35 運動(’3‘名醫 子女를 ’3‘年 터울로 낳아 ’35‘세 以前에 斷産하자는 캠페인)’에서 보듯 勸奬 子女 數가 3名까지였고, 1970年代에는 ‘딸 아들 區別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둘 낳기 運動이 登場한다. 1980年代 들어서면 이마저도 한 子女를 勸하는 標語들로 바뀐다. ‘둘도 많다,’ ‘하나씩만 낳아도 三千里는 超滿員,’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 ‘勝者의 詛呪’…歷史의 敎訓


保健福祉部가 專門家들과 함께 低出産 關聯 懇談會를 열고 있는 모습. 뉴시스
이런 政策의 結果 우리나라의 出産率과 出生兒 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는 바다. 前 大統領 在任期間은 우리나라 人口政策史를 통틀어 避妊 普及 實績이 가장 높았던 時期다. 避妊受容 女性의 年齡과 現存 子女 數도 크게 減少했다. 不妊施術度 直前 같은 期間 對比 거의 2倍假量 늘었다. 2000年이나 돼야 達成한다던 代替 水準 出産率 2.1名은 그 展望이 나온 지 單 2年 만인 1983年 達成되었다. 人口 減少 速度는 다시 빨라져 1984年 合計出産率 2名 線이 崩壞했고, 2018年에는 1名 線마저 무너진다. 1980年代 人口는 멈추는 自動車가 아니라 막 비탈길에 들어선 自動車였던 셈이다. 5共 政府는 於此彼 굴러갈 自動車에서 加速器를 밟고 말았다.

80年代 中盤, 展望이 懸隔히 어긋난 걸 알았을 때 슬슬 브레이크를 밟았어야 했다. 事實 이미 우리보다 앞선 길을 갔던 先進國은 低出産 危機를 이야기하고 있었고, 國內서도 向後 高齡人口 增加, 勞動力 不足을 指摘하는 學者들이 있었다. 그러나 人口 政策 目標 達成에 醉한 政府는 狀況을 제대로 判斷하지 못했다. ‘勝者의 詛呪’였다. 當時 브레이크를 밟았더라면 只今의 低出産 狀況이 좀 달라졌을까? 歷史에 假定法이 意味 없다는 걸 알지만, 當時 ‘골든타임’을 虛費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世界 最低 出産率이란 不名譽 타이틀은 달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抑制 政策을 中斷해야 한다’는 意見과 ‘狀況을 더 지켜봐야 한다’는 意見 사이에서 10年이 더 虛費되었고, 最終的으로 政府가 人口 抑制 政策을 廢棄한 것은 1995年에 이르러서였다.

歷史를 되돌릴 순 없어도 歷史에서 敎訓을 얻을 순 있다. 狀況에 對한 正確한 調査와 判斷, 必要할 때 果敢한 政策 轉換. 서울의 봄에서 田頭狂은 쿠데타가 “失敗하면 反逆, 成功하면 革命”이라고 말한다. 12·12는 暫時 革命이었는지 몰라도 結局엔 叛亂으로 記錄됐다. 當時 成功이라 自祝했던 5共의 人口 政策도 이제 보니 災殃의 씨앗이었다.


이미지 記者 ima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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