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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微賤한 出身, 그러니 탓하지 마라” 李在明의 아버지 콤플렉스|東亞日報

“微賤한 出身, 그러니 탓하지 마라” 李在明의 아버지 콤플렉스

  • 週刊東亞
  • 入力 2021年 12月 12日 10時 22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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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志傳的 삶, 歡呼하는 이들만큼 不安 느끼는 이도 적잖아

12월 4일 전북 군산시 공설시장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가 연설하고 있다. 뉴시스
12月 4日 全北 군산시 公設市場에서 더불어民主黨 李在明 大選候補가 演說하고 있다. 뉴시스
?더불어民主黨(民主黨) 李在明 大選候補의 人生事가 사람들 關心을 끌고 있다. “無(無)수저 靑年의 自手成家”라는 賞讚이 있는가 하면, 그의 成長史 몇몇 대목에 疑問을 提起하기도 한다. 李 候補 個人事에서 가장 궁금한 部分은 왜 中高校를 다니지 못했느냐는 點이다. 1963年生(出生申告는 1964年)인 李 候補 또래가 中學校에 가지 않은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特히 그의 아버지는 當時 드문 ‘識者’인 것으로 알려졌다. 李 候補는 ‘웹 自敍傳’에서 “아버지는 中退이긴 하지만 大邱에서 苦學으로 大學 工夫도 한 사람이었다. 敎師나 巡警도 했었지만…”이라고 밝혔다. 그의 아버지는 1931年生으로 알려졌는데, 그 年輩에서는 大學은커녕 高校를 나온 이도 많지 않다. 1966年 歌手 이미자의 노래 ‘섬마을 先生님’이 大히트를 칠 만큼 그 時節 敎師는 羨望의 對象이었다. 日帝强占期 盞影島 남아 있어 “巡警이 온다”고 하면 울던 아이도 뚝 그칠 만큼 警察 힘도 대단했다. 敎師와 巡警을 지낸 이가 아들을 中學校에 보내지 않았다는 얘기다.

敎師와 巡警
李 候補는 故鄕(慶北 安東市 도촌리)을 “疊疊山中 山꼭대기 氣막힌 奧地, 火田民들의 터전. 只今도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50, 60代 男性의 로망을 그려내는 ‘나는 自然人이다’ 프로그램 背景으로 맞춤한 곳”으로 描寫했다. 敎師와 巡警을 한 아버지가 이런 奧地에 온 背景을 두고 “(아버지는) 외아들이라 父母님을 모시려고 돌아왔다” “孝子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 候補 아버지는 奧地에 定着하지 못했다. 그 理由에 對해 李 候補는 “(아버지는) 農事일을 하나도 할 줄 몰랐다” “지統마을 그 奧地에도 한때 도리짓고땡이 大大的으로 流行했다. 맞다. 20張의 東洋畫로 하는 그 놀이. 아버지도 마을住民과 어울리며 暫時 心醉했고, 그나마 있던 조그만 밭떼기마저 날려버렸다. 아버지의 上京에는 그런 背景이 있었다”고 밝혔다.

初等學生 時節 李 候補는 남보다 이르게 成長痛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母親의 땔감 日, 밭일을 돕느라 코스모스를 심는 學校 環境美化作業을 제대로 하지 못해 敎師에게 맞은 일을 다음과 같이 回顧했다.

“先生님에게 내 事情은 통하지 않았다. 손바닥이 내 머리통을 向해 날아왔다. (中略) 美化作業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만이 理由는 아니었을 것이다. 맞아야 하는 理由를 理解하지 못했던 나는 맞으면서도 先生님을 똑바로 바라봤다.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많이 맞았을 것이다. 그날 내가 맞은 따귀는 스물일곱 臺였다. 親舊가 세어줘 알았다. (中略) 내 初等學校 成績表 行動란에 이런 게 적혀 있다. 稱讚하는 말 뒤에 달라붙은 한마디. ‘동무들과 사귐이 좋고 每事 意欲이 있으나 덤비는 性質이 있음.’”

1976年 2月 慶北 安東市 三界國民學校(現 월곡초 三界分校)를 卒業한 그는 3年 前 故鄕을 떠난 아버지가 있는 競技 성남시로 家族과 함께 移住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찾아온 아들을 學校에 보내지 않았다. 工場에 다니게 된 이 候補는 高等公民學校 校服을 입고 工場에 出退勤하는 아이를 發見하고 “夜間學校에 들어가겠다”고 했으나 아버지는 承諾하지 않았다. 그는 웹 自敍傳에 “돈벌이로 工場이나 다니게 하려고 (아버지가) 工夫를 막는다고 나는 斷定했다. 아버지와의 길고 깊은 葛藤의 始作이었다. 이때부터 大學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오직 工夫하기 위해 아버지와 싸워야 했다”고 적었다. 李 候補 아버지의 意中은 무엇이었을까. 李 候補는 “아버지가 城南으로 上京한 뒤로는 完全히 바뀌어 守錢奴가 돼 있었다. 齷齪같이 일하고 至毒하게 모았다. 집에는 돈 버는 사람만 있고 쓰는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兄 이재영 氏의 다음과 같은 말도 웹 自敍傳에 옮겨놓았다.

젊은 시절 이재명 대선후보(왼쪽)와 모친. 이재명 후보 인스타그램
젊은 時節 李在明 大選候補(왼쪽)와 母親. 李在明 候補 인스타그램


“齷齪같이 돈 모아야 한다”
“아버지는 安東 兩班 出身이에요. 젊은 時節엔 自己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道理를 다한다는 式의 先公後私 같은 道德意識이 있었어요. 洞네 일은 空짜로 다 해주면서 곧이곧대로 살던 사람이었죠. 自己가 가진 知識과 돈, 時間을 다 남을 위해 썼던 거예요. 그런데 그 結果가 뭐였냐? 城南에 와서 아버지는 體面과 名分, 工夫, 이딴 거 아무 所用없다, 거지를 면하려면 齷齪같이 돈을 모아야 한다, 그렇게 決心한 것 같아요.”

왜 城南에 온 아버지는 달라졌을까. 李 候補는 그 理由는 밝히지 않고 아버지를 理解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에게도 아버지의 事緣이 있었을 것이다. 自身의 맘 같지 않은 世上에 傷處받은 後로 元來의 自身을 否定하며 살았는지도…. 어쩌면 아버지는 平生 火가 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네 살 아들이 工場에 다니며 夜間學校에 가겠다는 걸 막는 아버지를 理解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들의 中學校 進學을 막을 程度로 아버지를 憤怒하게 한 일은 都大體 무엇일까.

청계천 평화시장 勞動者 전태일 氏가 焚身自殺해 社會에 衝擊을 준 때가 1970年 11月 13日이다. 이 일로 ‘勤勞基準法’에 對한 關心이 높아졌다. 現在 勤勞基準法 第64條 1項은 ‘15歲 未滿인 사람은 勤勞者로 使用하지 못한다. 다만, 大統領令으로 定하는 基準에 따라 雇傭勞動部 長官이 發給한 就職人虛症(就職認許證)을 지닌 사람은 勤勞者로 使用할 수 있다’고 規定한다. 初等學生에 該當하는 13歲 未滿은 無條件 勤勞者로 삼을 수 없고, 中學生에 該當하는 13~15世는 就職認許症이 있어야 勤勞者가 될 수 있다는 것이 規制 核心이다. 이런 兒童 勞動 規制는 世界的 常識이었고 이는 當時 韓國도 큰 틀에서 마찬가지였다.

中學生이어야 할 時節 李 候補는 會社 ‘동마고무’ ‘아주冷凍’ ‘大洋失業’ ‘오리엔트’ 等을 옮겨 다니며 ‘少年工’으로 일했다고 밝혔다. 當時 編物點 같은 家內手工業體나 飮食店 等 法人이 아닌 業所는 10代 初盤 少年을 使喚처럼 雇用했다. 그러나 當局 許可를 받고 運營하는 法人이 中學生 나이인 少年을 雇用하는 데는 相當한 制約이 있었다. 勤勞基準法과 施行令 等은 高等學生인 16~18歲 젊은이의 雇用도 制限하고, 이들을 投入할 수 있는 分野도 制限한다. 10代 時節 勞動에 對한 李 候補의 回顧와 겹쳐보면 그가 다녔다는 企業의 雇用 形態는 不法이다. 李 候補는 自身보다 나이 많은 다른 이의 이름으로 僞裝 就業한 것일까. 또한 그 時節 李 候補 집안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程度로 가난했던 것일까. 그는 “初等學校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시골에서 올라와 産業役軍이라는 巨創한 이름의 공돌이가 된 아이들. 언젠가부터 나는 엄마에게 도시락 하나를 더 싸달라고 했다. 自炊를 하며 點心을 굶는 아이들과 나눠 먹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欣快히 내 付託을 들어줬다”고 밝혔다.

“그래도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
李 候補는 檢定考試로 中卒·高卒 資格을 取得했다. 高卒 檢定考試 準備를 위해 學院에 다닐 때 아버지는 反對했으나, 어머니가 “學院費도 지가 벌어 댕기는 아한테 그게 할 소리니껴? 남들은 다 學校 보내는데, 父母가 돼서 우리가 해준 게 뭐가 있니껴?”라고 맞섰다고 한다. 그를 向해선 “工夫해라! 내가 속곳을 팔아서라도 돈 대주꾸마”라고 했다. 그래도 돈이 달려 다니던 성일학원을 그만두려 했다. 그러자 김창구 當時 성일學院 院長이 學院費를 免除해준 德에 工夫를 繼續할 수 있었다. 只今도 이 候補는 그를 恩人이라고 말한다. 李 候補가 高卒 檢定考試 合格 後 就業을 하지 않고 大入學院에 다니자 아버지가 못마땅해 했다. 그는 當時 日記에 “學院 갔다 와서 工夫 좀 하려 했더니 아버지가 쓰레기 치우러 나오라고 한다. 神經質이 났다. 신발을 확 집어던졌다. 아버지가 그 模樣을 보더니 한참 나를 노려봤다(1980. 5. 29)”고 적어놓았다. 그는 아버지에 對한 兩家(兩價·ambivalence) 感情을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다.

“비 오는 어느 새벽, 아버지와 쓰레기를 치우는데 及其也 일을 못 할 程度로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리는 市場通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꼬박꼬박 조는데,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더니 가게 坐板에 누워 눈 좀 붙이라고 했다. 새벽에 누가 깨웠다. 엄마였다. 흠뻑 젖은 作業服을 입고 오들오들 떨며 자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말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때 아버지는 희뿌연 黎明 속에서 비를 맞으며 혼자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재명이 댈꼬 드감더.” 엄마가 소리쳤다. 아버지가 천천히 돌아보더니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아버지의 그 모습이 문득 아렸다. 생각하면 아픈 것들 투성이. 그래도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였다.”

여기서 다시 한 番 注目할 것은 3年間 家族과 떨어져 있었을 때 이 候補 아버지의 行跡이다. 敎師 經驗이 있던 家長은 都大體 무슨 일을 겪었기에 3年 만에 만난 아들의 進學을 막을 만큼 變했는가. 英特했던 李 候補의 工夫 熱情을 풀어준 것은 어머니와 김창구 院長, 그를 奬學生으로 받아준 중앙대와 當時 敎育 시스템이었다. 중앙대 法大를 卒業한 1986年 가을, 그는 제28회 司法試驗에 合格했다. 그 直後 李 候補 아버지는 55歲 나이로 別世했다.

“正말 熱心히 살았다”
2021年 與黨 大選候補로 우뚝 선 李在明. 그는 12月 4日 全北 군산시 遊說 現場에서 “내 出身이 卑賤하다. 卑賤한 집안이라서 周邊을 뒤지면 더러운 게 많이 나온다” “내 出身의 微賤함은 내 잘못이 아니니까 나를 탓하지 말아달라” “나는 그 속에서도 最善을 다했다. 앞으로도 그럴 거다. 주어지는 權限이 있다면 最大値로 行使할 것이고, 우리 國民이 나라의 主人이니 나는 머슴이라는 생각으로 主人 뜻 徹底히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自身의 家政事와 個人事를 더는 追跡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힌다. 같은 날 이 候補는 “내 어머니, 아버지는 火田民 出身으로 城南에 와서 아버지는 市場 化粧室 淸掃夫로 일하고, 어머니는 化粧室을 지키며 代辯 20원, 小便 10원에 休紙를 팔았다. 그 젊은 나이에 男丁네들이 化粧室 들락거리는 앞에서 쭈그려 앉아 먹고살겠다고, 그래 살았다” “넷째 女同生은 요구르트를 配達하고 미싱師를 하다 化粧室에서 죽었는데, 産災(産業災害) 處理도 못 했다. 男동생은 只今 環境美化員일을 하고 있다” “내 집안이 이렇다. 그런데 누가 집안이 엉망이라고 흉을 보더라” “나는 正말 熱心히 살았다.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最善을 다했고 주어진 일은 公職者로서 할 수 있는 最大値를 했다”고도 强調했다.

李 候補는 이른바 ‘微賤한 過去’를 내세워 自身을 防禦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도 先親처럼 憤怒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열네 살의 그가 아버지를 理解할 수 없었듯, 이 時代 젊은이도 그를 理解하기 어렵지는 않을까. 自己 삶을 통해 立志傳을 쓴 이 候補의 에너지에 歡呼하는 사람만큼, 그의 實體를 몰라 不安해하는 사람도 적잖아 보인다.

이재명 대선후보 측은 ‘초등학교 퇴학’ ‘소년원 입소’ 루머를 가짜뉴스라며 일축했다. 이재명 후보 공식 블로그 캡처
李在明 大選候補 側은 ‘初等學校 退學’ ‘少年院 入所’ 루머를 假짜뉴스라며 一蹴했다. 李在明 候補 公式 블로그 캡처


[이 記事는 週刊東亞 1318號 에 실렸습니다]



이정훈 記者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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