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南亞에서 方今 巡廻公演을 마치고 돌아온 ○○○입니다. 큰 拍手 付託드립니다.”
1960, 70年代 코미디언 兼 MC로 안房劇場을 누볐던 ‘후라이보이’ 곽규석(郭圭錫·1999年 作故) 氏가 出演歌手를 紹介할 때 썼던 단골 表現.
東南亞 巡廻公演이라고 해봐야 베트남戰爭에 參戰 中인 韓國 將兵 慰問 公演이 大部分이었지만 ‘먼 海外=東南亞’로 認識됐던 當時 演藝人으로서 東南亞 公演은 人氣의 象徵이었다.
이처럼 異域萬里의 땅으로만 여겨지던 東南亞의 政治的 經濟的 무게에 注目하게 된 날은 1967年 8月 8日.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泰國 필리핀 等 5個國이 동남아국가연합(ASEAN)을 발족시켰기 때문.
같은 달 10日子 동아일보 社說.
“이 5個國은 고무 主席 木材 쌀 같은 原始産品의 世界的 供給局이어서 輸出商品의 價格과 供給量 調節을 통해 先進國에 對한 壓力그룹의 구실을 하는 데 充分한 힘을 發揮할 것이다.”
ASEAN의 始作은 微弱한 것이었다. 國際機構 設立의 基礎인 正式 條約도 없었고 共産國家인 中國과 베트남은 “反動(反共)勢力의 結集에 不過하다”고 猛非難했다.
ASEAN 發足의 主役 中 한 名인 리콴유(李光耀) 前 싱가포르 總理조차 “經濟 成長이나 貿易 增大 같은 巨創한 目標보다 域內 權力 空白에 對備한 結束이 眞짜 目標였다”고 回顧할 程度. 當時 베트남戰이 한창이었고 東南亞 내 社會主義 氣勢가 騰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ASEAN은 끝이 昌大해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브루나이(1984年) 베트남(1995年) 라오스 미얀마(異常 1997年) 캄보디아(1999年)가 追加로 加入해 會員國이 10個國으로 늘었다. ‘ASEAN+3(韓中日)’처럼 周邊國과의 定例 會議도 活潑하고 先進國들의 ASEAN 市場을 向한 拘礙도 뜨겁다.
人種 및 宗敎 間 葛藤과 領土 紛爭이 끊이지 않았던 ASEAN 10個國을 結束시켜 온 힘은 무엇일까. 主權 尊重과 平等 意識을 바탕으로 全員 意見 一致가 될 때까지 對話를 繼續하는 獨特한 慣行의 威力이란 分析이 많다. 年例頂上會議 開催 場所 問題를 둘러싸고 一部 會員國 間에 葛藤이 일자 異見이 解消될 때까지 그 會議를 9年間 열지 않고 기다린 적이 있을 程度.
海外公演 地域의 代名詞로만 여겨지던 ASEAN이 이처럼 뭉치며 剛해지고 있다.
부형권 記者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