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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連續 洪川 달군 抗日喊聲… 8烈士의 忠魂 山川 흔들어|동아일보

사흘 連續 洪川 달군 抗日喊聲… 8烈士의 忠魂 山川 흔들어

  • 東亞日報
  • 入力 2019年 2月 13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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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運動 100年, 2020 東亞日報 100年]
3·1運動 100年 歷史의 現場 2部 <제35화>江原 洪川郡

강원 홍천군의 3·1 만세운동은 내륙에 위치해 4월에 시작됐지만 그 열기는 뜨거웠다. 4월 1일 홍천읍을 시작으로 여러 면에서 일제에 맞선 만세운동이 이어졌고 11일에는 봉화 시위가 있었다. 강원 홍천군 내촌면 동창로 기미만세공원 입구의 8열사 기념비. 홍천=김동주 기자 zoo@donga.com
江原 洪川郡의 3·1 萬歲運動은 內陸에 位置해 4月에 始作됐지만 그 熱氣는 뜨거웠다. 4月 1日 홍천읍을 始作으로 여러 面에서 日帝에 맞선 萬歲運動이 이어졌고 11日에는 奉化 示威가 있었다. 江原 洪川郡 내촌면 同窓로 幾微萬歲公園 入口의 8烈士 記念碑. 洪川=金東周 記者 zoo@donga.com
江原 洪川郡 내촌면 同窓로(東倉路)에 位置한 幾微萬歲公園은 100年 前 3·1運動의 뜨거운 現場이었다. 公園 入口에 들어서자 殉國 8烈士(八烈士) 記念碑가 눈에 들어왔다. 비에는 萬歲運動에 參加했다 日帝의 銃彈에 犧牲된 이순극 전영균 전기홍 이기선 이여선 年의진 김자희 양도준 等 8烈士의 이름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公園 한쪽에 서 있는 ‘同窓마을의 幾微 만世上’에 새겨진 記錄은 當時 狀況을 생생하게 傳해 주었다. ‘1919年 4月 3日 正午 이 고장이 輩出한 天道敎人 김덕원 醫師가 先鋒에 서서 大韓獨立萬歲를 絶叫하여 天地를 진동시켰으니 이날 이 巨事는 온 마을을 太極旗의 물결로 뒤덮이게 했다. 아아 어찌 잊으랴! 이날 同窓마을 김덕원 意思와 함께 외친 5個 面民 數千의 피 끓는 喊聲과 日帝 憲兵의 銃彈에 犧牲이 된 팔烈士의 忠魂의 넋을…! 여기 옷깃 여미며 追慕한다.’

文學評論家 윤병노 敎授의 글로, 當時 同窓마을을 뜨겁게 달구었던 抗日의 喊聲과 그 熱氣를 가늠케 했다. 特히 注目할 點은 面 所在地도 아닌 이곳에서 數千 名이 萬歲運動에 同參했고 8名이나 犧牲됐다는 事實이다.


기미만세공원에 모인 주민들이 작은 태극기를 흔들며 3·1만세운동을 재연했다. 홍천=김동주 기자 zoo@donga.com
幾微萬歲公園에 모인 住民들이 작은 太極旗를 흔들며 3·1萬歲運動을 再演했다. 洪川=金東周 記者 zoo@donga.com
○ 洪川의 8烈士

同窓로의 옛 住所는 물걸리(物傑里). 이 地域은 朝鮮時代 中宗 때 大同米 倉庫가 있었던 理由로 물걸리보다는 同窓마을로 불렸다. 물걸리라는 이름도 예사롭지 않아 마을 사람들에게 意味를 물었지만 正確하게 아는 이가 없었다. 東쪽 倉庫라는 뜻의 同窓이나 물걸리라는 地名은 物資가 豐富하고 뛰어난 人物이 많이 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可能性이 높지만 確認할 길은 없다.

물걸리는 江原道 內陸 交通의 中心地로 洪川郡의 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그리고 麟蹄郡의 기린면과 내면 等 隣近 一帶를 連結해 주는 四通八達의 要旨였다. 그래서 馬房(馬房)과 常設市場, 酒幕이 들어섰고 周邊 地域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서 自然스럽게 3·1運動의 中心이 됐다.

이 地域의 獨立運動史를 다룬 記錄들에 따르면 萬歲運動은 1919年 3月 末頃 조금 늦게 始作됐다. 內陸 깊숙이 位置했기 때문에 當時 鏡城(京城·서울)의 3·1運動과 이틀 뒤 高宗의 因山(因山·葬禮)에 對한 消息이 傳達되기까지 時間이 多少 걸린 탓이다. 물걸리의 天道敎徒人 김덕원 전성렬은 같은 교도 전우균 이문순을 連絡責으로 삼아 隣近 5個 面에 連絡하며 擧事를 準備했다. 그러던 中 홍천읍에서 4月 1日 萬歲運動이 일어나자 이들은 4月 3日을 巨事日로 定했다.

마침내 約束한 3日이 되자 아침부터 四方에서 示威 群衆이 모여들었다. 只今의 八熱各科 그 옆 다리목을 中心으로 마을을 가득 채운 人員은 最小 1000餘 名에서 많게는 數千 名에 達하는 것으로 推定될 程度로 規模가 컸다. 藥房과 글房이 있던 전영균의 집에는 큰 太極旗가 높이 揭揚됐고, 群衆은 모두 손에 手旗를 쥐고 있었다. 이문순이 獨立萬歲를 先唱하자 뒤를 이어 萬歲 소리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以後 只今의 初等學校 뒷길을 따라 도관리 憲兵駐在所 憲兵 7名이 憲兵 補助員 홍재호 박연흥을 앞세우고 들이닥쳤다. 憲兵이 示威隊를 向해 一齊히 發砲하니 示威 群衆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群衆은 남의 집으로 或은 뒷山과 개울가로 몸을 避했지만 無慘한 銃擊에 여러 사람이 쓰러졌다. 그 渦中에 現場에서 8烈士가 死亡했고, 20餘 名이 다치는 等 死傷者가 發生했다.

물걸리 萬歲運動의 被害 規模가 컸던 것은 示威 群衆이 많았던 데다 4月 1, 2日 홍천읍과 동면 等에서 일어난 示威의 影響 때문으로 풀이된다. 동면 示威 現場에서는 日警에 依해 2名이 목숨을 잃는 流血事態가 벌어졌다. 同窓萬歲運動記念事業會 김시종 事務局長은 “同窓마을은 義兵 運動과 東學農民戰爭을 거치면서 抗日 意識이 剛했다”라고 말했다.

一連의 萬歲運動이 벌어진 뒤 洪川郡 全體에서 日帝는 大大的인 檢擧 活動에 나섰다. 이런 狀況에서도 11日 내촌면 所在地인 도관리에서는 밤中에 數十 名이 山 위에 올라가 烽火를 올리고 獨立萬歲를 부르는 等 抗日의 뜨거운 熱氣는 식을 줄 몰랐다.


동아일보가 홍천군 홍천읍 장전평로 무궁화공원에 건립한 3·1운동 기념비. 홍천=김동주 기자 zoo@donga.com
동아일보가 洪川郡 홍천읍 腸전평로 無窮花公園에 建立한 3·1運動 記念碑. 洪川=金東周 記者 zoo@donga.com
○ 天道敎와 基督敎(改新敎)의 聯合

물걸리에 앞서 홍천읍과 북방면, 冬眠에서 萬歲示威가 벌어졌는데 特히 홍천읍 萬歲示威는 天道敎와 基督敎가 共同으로 計劃하고 推進했다는 點에서 눈길을 끈다. 2017年 作故한 史學者 조동걸 敎授는 著書 ‘太白 항일사(太白 抗日史)’에서 “江原道에서 基督敎와 天道敎가 共同으로 計劃을 推進한 것은 橫城과 홍천읍의 境遇뿐이다”며 “高宗 因山에 參禮하러 갔다가 3·1運動을 目擊하고 돌아온 사람들에 依해 主導됐다”고 紹介했다.

高宗 皇帝 因山에 參禮하러 갔다가 3·1運動을 目擊하고 돌아온 監理敎人 차봉철 서상우와 天道敎人 오창섭 等 11人이 차봉철의 집에 모여 獨立萬歲 示威를 決行하기로 計劃을 세웠다. 이들은 2次例 모임을 더 갖고 役割을 分擔했다. 監理敎會는 홍천읍, 天道敎會는 북방면을 各各 맡아 홍천읍 場날인 4月 1日에 萬歲示威를 벌이기로 했다.

基督敎徒들은 太極旗 手記를 만들고 天道敎人들은 큰 太極旗를 만들었다. 4月 1日이 되자 홍천읍과 북방면에서 住民들이 홍천읍 伸張代理 場터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때마침 隣近 農民들이 道路公社 賦役으로 홍천읍에서 麟蹄로 가는 方向으로 10里 程度 되는 곳에 動員돼 있어 賦役 人夫를 假裝했다. 午後 1時頃 基督敎人이 準備한 작은 太極旗들이 場꾼들에게 나뉘어졌다. 마침내 天道敎人이 만든 커다란 太極旗가 높이 솟아오르자 主導 人物들은 獨立萬歲를 先唱했고, 뒤를 이어 터질 듯한 萬歲 소리가 山川을 뒤흔들었다.

示威隊는 場터에서 郡廳으로 나아갔다. 郡廳 앞에는 500名이 넘는 示威隊가 모여들었다. 郡廳에 들어가 郡守 김동훈을 찾으니 郡守는 行方을 감추고 없었다. 이때 北方面에서 道路 附逆을 하고 있던 農民들이 新作路를 따라 邑內로 들어왔다. 이들은 萬歲示威에 對한 情報를 받고 있었는데, 邑內에서 獨立萬歲 示威가 터졌다는 消息을 듣자마자 삽과 괭이를 든 채 邑內로 달려왔다. 4個 마을에서 附逆 나온 約 200名의 示威隊는 邑內에 들어선 뒤 逃亡 中이던 郡守 김동훈을 찾아내고는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부러뜨리고, 示威隊에 抵抗하던 郡守의 손을 꺾었다.

‘抗日 太白社’는 住民들의 證言을 통해 當時 곳곳에서 萬歲를 불러 홍천읍내가 마치 獨立祝祭의 한마당 같았다고 記錄했다. 또 郡廳에 모인 群衆, 面事務所에 모인 群衆, 郡守와 맞서 다투던 農民, 市場에서 獨立萬歲의 흥겨움에 醉해 여기저기 모였던 群衆 等이 한마음으로 時局을 論했다고 傳했다.

그날 午後 春川에서 守備隊가 到着하자 숨죽이고 있던 現地 日帝 憲兵들은 示威隊 逮捕에 나서기 始作했다. 示威隊는 洪川 憲兵分遣소로 밀고 나아갔지만 日帝의 銃칼 앞에 더 以上 前進하지 못했고, 示威隊 一部(33名)가 逮捕되면서 解散했다.

冬眠의 萬歲運動은 閔氏 門中이 計劃했지만 面民이 大擧 參加했다. 4月 2日 萬歲示威로 氣勢가 오른 萬歲群衆은 3日 홍천읍으로 進行하려고 했으나 日帝 憲兵과 守備隊가 나타나 對峙하게 됐다. 이 過程에서 민병숙 민병태가 日帝 憲兵의 銃을 빼앗으려다 銃彈에 犧牲됐다. 이에 激忿한 群衆은 面事務所를 부수며 맞섰지만 日帝의 銃彈에 밀려 물러나고 말았다.

홍천읍 腸전평로 無窮花公園에는 또 다른 ‘3·1運動 記念碑’가 우뚝 서 있다. 동아일보가 一齊 銃칼의 威脅에도 뜨겁게 맞섰던 洪川郡의 萬歲運動을 기리기 위해 1979年 세운 것이다. 彫刻家 김영중의 作品으로 곧고 꿋꿋한 대나무의 이미지를 살려 우리 民族의 氣槪를 表現했다. 洪川鄕土史料館 鄕土解說師 허병직 氏는 “洪川은 義兵運動과 東學農民戰爭은 勿論이고 6·25戰爭의 激戰地로 나라를 지키려는 護國(護國) 意識이 熾烈했던 곳”이라며 “地理的 位置 때문에 3·1運動이 뒤늦게 始作됐지만 그 熱氣는 다른 어느 곳 못지않게 뜨거웠다”고 말했다.


▼ “祖上들의 3·1運動精神 잘 記憶해야 未來가 있다” ▼

김창묵 同窓萬歲記念事業會長

김덕원 의사(작은 사진)를 추모하는 김창묵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장. 홍천=김동주 기자zoo@donga.com
김덕원 醫師(작은 寫眞)를 追慕하는 김창묵 同窓萬歲運動記念事業會長. 洪川=金東周 記者zoo@donga.com
同窓마을을 中心으로 한 3·1運動을 이끈 人物은 天道敎徒였던 김덕원 醫師(1879∼1943?)였다. 金 醫師는 1000섬 以上의 土地를 갖고 있었던 符號로 平生 便安한 生活을 할 수 있었지만 民族을 위한 獨立運動에 獻身했다. 東學(天道敎)에 入敎한 後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人乃天(人乃天) 思想에 立脚해 平等思想을 몸소 實踐한 人物이라는 評價를 받고 있다. 金 醫師와 ‘同窓 萬歲運動’은 1970年代 以後에야 證言을 통해 世上에 알려졌다. 그 過程을 主導한 李가 金 醫師 後孫으로 同窓萬歲運動記念事業會를 이끌고 있는 김창묵 會長(97)이다. 白手(白壽·99歲)를 앞둔 그는 抗日 醫師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造成된 拓野山文化樹木園을 지키며 생생한 記憶과 분명한 語調로 3·1運動의 意味를 되새겼다.

―김덕원 意思에 對한 記憶은….

“金 醫師 直系는 아니지만 孫子뻘이 된다. 6歲 때 뵌 記憶이 있다. 山골 오두幕에 살고 있었는데 拷問 後遺症으로 몸이 不便한 狀態였다.”

―어떤 말씀을 들었나.

“어릴 때라 많은 것을 記憶할 수는 없다. ‘이 나라 同胞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나라 잃은 民族이 죽어야지 살아야겠냐’라며 民族의 將來를 걱정하던 말씀은 생생하다.”

―100周年을 맞는 3·1運動의 意味는 무엇인가.

“이 나라의 豐饒가 저절로 이뤄진 게 아니다. 祖上들이 흘린 피와 땀이 바탕이 됐다. 이 精神을 잘 記憶해야 未來가 있다.”

―樹木園에는 金 醫師뿐 아니라 女性 義兵將 윤희순 비 等 다른 記念物도 많다.

“高句麗 광개토大王, 安重根 義士, 李舜臣 將軍 等과 關聯한 造形物들度 있다. 訪問客들이 힐링은 勿論이고 나라를 지킨 祖上의 民族精氣를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公園을 造成했다.”

―3·1運動 記念事業뿐 아니라 많은 寄附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時節이 어려워 나는 初等學校밖에 다니지 못했다. 代身 여러 大學의 最高위 過程 資格은 많다(웃음). 배움이 없어 먹고살기 위해 精神없이 일했다. 그러던 中 後孫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하는 苦悶이 들더라. 우리 歷史의 精神을 제대로 傳하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겠다는 게 結論이었다. 밥만 먹고 똥만 싸다 갈 수는 없지 않나.”

洪川=김갑식 文化專門記者 dunanworld@donga.com
#3·1運動 #抗日喊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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