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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單獨]다리는 못 쓰게 됐지만 나는 쓰일 수 있습니다|동아일보

[單獨]다리는 못 쓰게 됐지만 나는 쓰일 수 있습니다

  • 東亞日報
  • 入力 2016年 4月 20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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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20日 障礙人의 날… 訴訟끝 5年만에 復職하는 최성찬 消防官
交通事故로 下半身 痲痹돼 職權免職 눈물… “內勤은 可能” 同僚歎願-大法判決로 ‘날개’

최근 소방관 복직이 확정된 최성찬 씨가 5년 만에 다시 입게 된 제복을 배경으로 휠체어 바퀴를 들고 웃고 있다. 고양=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最近 消防官 復職이 確定된 최성찬 氏가 5年 만에 다시 입게 된 制服을 背景으로 휠체어 바퀴를 들고 웃고 있다. 高陽=전영한 記者 scoopjyh@donga.com
事故는 도둑처럼 왔다. 忠北 丹陽으로 家族旅行을 다녀오던 길. 高速道路를 달리던 車가 뒤車에 받혀 밀리며 터널 入口를 들이받았다. 참기 힘든 苦痛을 견뎌내며 自身의 車 뒷座席에 누워 구급대員을 기다렸다. 車窓으로 들어오는 늦은 봄 햇볕이 따가웠다. ‘14年 經歷의 消防官인 내가 猝地에 制服 입은 이들의 救助를 기다리는 處地가 됐구나.’ 他人의 事故 現場을 數없이 누벼온 歲月. 그 渦中에 不吉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허리가 너무 아팠다. ‘나쁜 일 하며 살지는 않은 것 같은데….’

최성찬 氏(43)는 2011年 5月 뜻하지 않은 事故를 當했다. 大學에서 應急構造學을 專攻한 그는 1997年 仁川市의 119救急隊員 特別採用을 통해 地方公務員으로 任用됐다. 그 後 仁川에서 여러 消防署를 돌며 主로 救急出動 業務를 遂行하고 있었다. 3男妹의
아버지인 그의 삶은 事故 以後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함께 車에 탔던 家族들은 큰 後遺症 없이 退院했지만 그는 事故 一週日 뒤 脊髓神經이 完全히 損傷돼 下半身이 痲痹됐다는 診斷을 받았다. 世上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病院 마당에서 한바탕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하지만 사람을 求하러 다니던 消防官이 아니던가. 再活을 始作했다. 上體를 鍛鍊해 日常生活을 可能하게 하는 訓鍊부터 始作했다. 지켜보는 아내가 눈물짓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도 그가 1年이 넘게 이어지는 힘든 再活에 매달린 것은 復歸에 對한 希望 때문이었다.

사고를 당하기 전인 2009년 ‘자전거 안전봉사단’으로 활동하던 최성찬 씨. 최성찬 씨 제공
事故를 當하기 前인 2009年 ‘自轉車 安全봉사團’으로 活動하던 최성찬 氏. 최성찬 氏 提供
復職하는 최성찬 消防官

補償金을 더 받아내는 訴訟을 하라는 勸誘도 뿌리쳤다. 自身이 하고 싶고, 또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러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내가 救한 心臟痲痹 患者가 두 달 뒤 健康한 모습으로 치킨을 사들고 事務室로 찾아오는 것 같은 經驗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라고 했다. 現場을 뛰어다니지 못해도 狀況室 勤務와 行政 業務로 同僚들을 힘껏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再活을 마치고 휠체어 탄 몸으로 돌아가겠다는 얘기에 元 所屬 消防署는 곤란해했다. “一旦 休職을 延長한 뒤 判斷하자”며 決定을 미뤘다. 1年 뒤 다시 門을 두드렸지만 그가 2013年 8月 받아든 것은 ‘職權免職’ 處分이었다. 그는 “處分을 내리기 前에 열린 委員會에서 다시 消防官으로 일하고 싶고 行政業務 等을 充分히 해낼 수 있다고 얘기했다”며 “老母와 3男妹를 扶養하는 家長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것 같다”고 돌이켰다. 하지만 障礙 때문에 職務를 堪當할 수 없다는 理由로 그는 期於이 復職을 拒否當했다.

公務 中에 障礙를 갖게 되면 復職이 可能했지만 休務 中 事故로 障礙를 갖게 된 境遇는 繼續 일할 수 있는지에 對한 基準이 없었던 狀況이었다. 組織은 自身을 拒否했지만 逆說的으로 組織 안에 있던 同僚들은 그의 便이었다. 이들의 激勵 속에 그는 긴 싸움을 始作했다. 첫걸음은 仁川地方公務員 訴請審査委員會에 提起한 行政審判이었다. 辯護士를 選任하며 다퉈 봤지만 2013年 11月 棄却 決定이 내려졌다. 訴訟을 생각하던 그에게 한 同僚는 “大韓法律救助公團을 찾아가 보라”고 助言하며 힘을 줬다. 100名 넘는 同僚는 復職 促求 歎願書를 써줬다. 工團의 도움을 받으며 2014年 인천지법에서 訴訟이 始作됐다. 組織으로부터 거듭 拒否當하며 느낀 絶望感을 結局에 뒤집어 준 곳은 法院이었다.

仁川市는 “身體 狀況이 公務員 採用 要件에 未達하고 職務를 遂行할 수 없는 程度”라는 論理를 폈지만 法院은 “이미 採用된 公務員의 健康 狀態가 變한 것이고 內勤 業務 等을 擔當할 수 있는 能力이 있다”며 崔 氏의 손을 들어 줬다. 身體障礙를 입은 所屬 公務員이 남아 있는 能力으로 業務를 擔當할 수 있는지를 잘 考慮해야 한다는 判斷은 1, 2, 3審 내내 이어졌다. 大法院은 12日 崔 氏가 仁川市를 相對로 提起한 ‘職權免職 處分 取消’ 訴訟에서 仁川市의 上告를 棄却하고 處分 取消를 確定했다.

요즘 崔 氏는 ‘復歸 命令’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열 살 난 둘째는 내 處地를 아니까 ‘앞으론 어떤 일을 하게 되느냐’고 묻지만 두 살 어린 막내는 ‘불 끄러 뛰어다니는 것이냐’는 얘기를 한다”며 웃었다. 하지만 2年 前부터 일하고 있는 競技 高陽市 一山東區의 휠체어 輸入·販賣社 事務室에서 19日 만난 그는 “나를 거듭 拒否하던 곳으로 돌아가서 正말 잘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고 털어놓았다. 復職에 그렇게 긴 時間과 힘든 過程이 必要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消防署에서, 訴請審査委에서, 그리고 抗訴와 上告라는 方式으로 ‘拒否’당할 때마다 自信感은 옅어져만 갔다.

崔 氏는 “訴訟에서 이겼는데도 돌아갈 수 없는 狀況을 마주하면서 ‘나는 이 組織에서 正말 쓸모없는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大法院 判決 消息을 듣고 아내에게 電話했을 때 自身도 모르게 울음이 터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自身이 지쳐 있다는 걸 알았다. 事故가 난 2011年 5月 29日부터 19日까지 1788日이 흘렀다.

仁川市 關係者는 이날 “法院 判斷을 尊重하고, 最大限 빨리 復職할 수 있게 節次를 밟고 있다”며 “(抗訴 等의 措置는) 復歸를 沮止하겠다는 뜻보다 關聯 判例가 없었기 때문에 法院의 最終 判斷을 받아볼 必要가 있다는 意見이 反映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高陽=김도형 記者 dodo@donga.com
#최성찬 #消防官 #復職 #交通事故 #下半身痲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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