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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몸體에 金으로 새긴 글字… 百濟-倭 同盟 象徵|東亞日報

칼 몸體에 金으로 새긴 글字… 百濟-倭 同盟 象徵

  • 東亞日報
  • 入力 2015年 6月 30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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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交 50年, 交流 2000年 韓日, 새로운 이웃을 向해] <10>칠지도에 담긴 韓日交流史

지은 지 900년이 넘어 국보로 지정된 이소노카미 신궁의 배전. 지붕 끄트머리에도 잔뜩 이끼가 끼었다. 기자가 신궁을 찾았던 6월
 초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한 참배객(가운데)이 가족의 건강과 행운을 빌기 위해 무릎을 꿇고 참배하고 있다. 
덴리=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
지은 지 900年이 넘어 國寶로 指定된 이消奴카미 神宮의 配電. 지붕 끄트머리에도 잔뜩 이끼가 끼었다. 記者가 神宮을 찾았던 6月 初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한 參拜客(가운데)李 家族의 健康과 幸運을 빌기 위해 무릎을 꿇고 參拜하고 있다. 덴리=전주영 記者 aimhigh@donga.com

高句麗 백제 新羅 3國이 自國 主導로 統一을 이루기 위해 泥田鬪狗를 되풀이하던 4世紀, 세 나라 모두 왜(倭)를 끌어들여 軍事 援助를 받거나 적어도 相對國에 軍事 援助를 못하도록 막으려 努力했다. 김현구 先生 말에 따르면 ‘어떤 意味에서 當時 왜는 캐스팅보트 役割을 하고 있었다’.(‘백제는 日本의 起源인가’)

왜로서도 韓半島와의 交流가 切實했다. 古代 國家로 나아가기 위해 必須的인 先進 文物을 導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는 어찌하여 唯獨 백제와 가까웠을까. 當時 中國은 南北朝 時代였는데 文化의 中心을 이루고 있던 南朝(南朝)와 地理的으로 가장 頻繁하게 交流하던 나라가 백제였다. 百濟는 王仁 博士를 통해 그리고 南朝에서 輸入한 最新 文物을 왜에 提供해 日本을 同盟國으로 만들었다. 이를 象徵하는 遺物이 바로 칠지도(七支刀)이다.

○ 複製品도 보기 어려운 칠지도

칠지도는 백제 近肖古王(近肖古王·在位 346∼375年)李 倭王에게 주었다는 칼이다. 쇠로 된 긴 몸體에 左右 여섯 가지가 엇갈려 配列돼 몸體와 함께 모두 7個의 가지를 가진 칼(刀)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몸體에는 백제王이 倭王에게 傳한 外交 文書가 담겨 있다.

백제 근초고왕이 369년 왜왕에게 전했다고 추정되는 칠지도 모습. 양면에 새겨진 61글자를 둘러싸고 한국, 일본 역사학자들의 논쟁이 100여 년간 이어져 왔다. 이소노카미 신궁 제공
백제 近肖古王이 369年 倭王에게 傳했다고 推定되는 칠지도 모습. 兩面에 새겨진 61글字를 둘러싸고 韓國, 日本 歷史學者들의 論爭이 100餘 年間 이어져 왔다. 이消奴카미 神宮 提供
日本은 칠지도를 國寶로 定하고(1953년) 여간해선 公開하지 않는다. 그러다 올 2月 규슈國立博物館에서 연 ‘古代日本과 백제와의 交流’展에 單 10日間 公開된 적이 있다. 말로만 듣던 眞品이 나온다는 消息에 觀覽客들이 大擧 몰렸었다.

도쿄 한국문화원을 通해 이消奴카미(石上) 神宮에 保管된 칠지도를 보고 싶다고 했으나 神宮의 對外 弘報를 맡고 있는 이치무라 겐타(市村建太) 氏는 칠지도 歷史에 對한 說明은 해줄 수 있으나 보여주기는 어렵다고 했다. “複製品이라도 좋다”고 持續的으로 請했지만 答이 없었다. 無酌定 찾아가기로 하고 飛行機 티켓을 끊었다. 떠나기 이틀 前에야 “神宮에서 參拜를 하면 複製品만큼은 보여줄 수 있다”는 答이 왔다.

이消奴카미 神宮은 나라(奈良) 現 덴리(天理) 詩에 있었다. 덴리驛에서 택시를 타고 5分假量 山속으로 들어가니 鬱蒼한 숲 속에 神宮이 있었다. 6月 初 이곳을 찾았을 때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인지 閑寂한 시골마을에 풀과 나무 香氣가 가득했다.

이 一帶는 元來 늪地帶였으나 隆起된 後 只今의 地形이 돼 아예 神宮 이름을 石像(石上·이消奴카미)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곳은 日本에서 가장 오래된 神宮이다. 3世紀 末 日本 最初의 統一 政權인 야마토 政權 때에는 武器庫로도 利用됐다.

이곳에서 칠지도가 發見된 이야기도 興味津津하다. 이消奴카미 神宮은 近代 天皇家의 寶物倉庫라는 認識 때문에 숨겨진 寶物들에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禁忌가 있었다고 한다. 神宮 안에는 누구도 발을 디뎌서는 안 된다는 ‘禁足地(禁足地)’라는 곳이 있었고 여기에는 여섯 個의 가지를 지닌 神奇한 窓(槍)李 寶物箱子 안에 모셔져 있는데 이 箱子를 여는 사람에게는 詛呪가 내린다는 傳說이 傳해오고 있었다.

只今으로부터 142年 前인 1873年 어느 날, 神宮의 대궁社(大宮司·神宮을 지키는 우두머리)로 赴任한 간 마사토모(菅政友)가 구석진 倉庫에서 1500餘 年間 봉인돼 있었던 寶物箱子를 연다. ‘칠지도’가 世上의 빛을 보는 瞬間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箱子를 연 그는 깜짝 놀랐다. 綠이 甚하게 슬었지만 綠 사이로 金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칠지도를 發見할 當時에 對해 “녹슨 칼에 金빛이 보여 綠을 除去하니 칼 몸體에 金으로 象嵌된 글字가 보였다”(大和國石上神宮寶庫所藏七支刀·1874년)고 記錄했다. 金 上監이란 글字를 銳利하게 파낸 뒤 金을 밀어 넣어 새기는 技法이다. 간 마사토모가 繼續 칠지도를 닦아내자 글字들이 보이기 始作했는데 앞面에 34字, 뒷面에 27字 總 61字가 새겨져 있었다.

○ 厄運을 막아주는 神聖한 物件

記者가 神宮으로 들어서니 韓國에서 連絡을 주고받았던 이치무라 氏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案內를 받아 配電(拜殿·參拜하는 場所)으로 갔다. 가마쿠라 時代의 建築物인 配電은 900年이 넘은 古建築物로 現在 國寶로 指定되어 있었다.

배전에 들어가 무릎을 꿇자 북소리가 크게 울렸다. 머리를 두 番 조아리니 職員 한 사람이 記者의 머리 위로 하라이우시(발串)라고 불리는 흰 종이를 붙인 나뭇가지를 세 番 흔들었다. 다마區市(玉串)라고 불리는 나뭇가지를 건네받고 祭壇 위에 뿌리를 앞쪽으로 두고 무릎을 다시 꿇은 뒤 머리를 다시 두 番 조아리고 拍手를 쳤더니 參拜가 끝났다.

記者가 事務室로 들어서니 暫時 後 職員 2名이 琉璃 額子에 눕혀 놓은 칠지도 複製品을 내왔다. 神主단지라도 모시듯 종종걸음으로 들어오더니 複製品을 받치고 있는 나무 받침臺를 바닥에 내려놓으면서도 무릎을 꿇고선 일어나지도 않았다. 寫眞도 찍을 수 없었다.

複製品은 眞品과 같이 손잡이를 包含한 全體 길이 74.9cm, 칼 길이는 65cm였다. 얇은 鐵心에 겉은 플라스틱 收支로 模樣을 만든 後 色을 입혔다고 했다. 앞뒤에 새겨진 글字에는 金빛이 돌았다. 이치무라 氏는 “現在 眞品은 두 동강 나 있는 狀態지만 複製品은 完全體로 復元했다”며 “眞品은 複製品과 함께 收藏庫에 保管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칠지도는 厄運을 막아주는 神의 힘이 깃들어 있어 神聖한 物件으로 모시고 있다. 요즘도 每年 1月이 되면 첫 3日인 1∼3日에 所願을 빌기 위해 10萬 名이 찾을 程度”라며 “이렇게 훌륭한 物件을 百濟가 日本에 보냈다는 것 自體가 韓半島와 日本의 오래된 友好關係를 보여줘 韓日 交流 歷史에 큰 意味가 있는 遺物”이라고 했다. 實際로 이곳 神宮에서는 칠지도를 神이 내려준 寶物이라며 ‘신보(神寶)’라 부르고 있었다.

이렇게 단단했던 백제와 왜의 關係는 時間을 훌쩍 뛰어넘어 663年 ‘白江 戰鬪’에서 決定版을 이룬다.  




▼ 韓 “下士” vs 日 “獻上” ▼

61글字 解釋따라 上下關係 달라져


칠지도가 論爭的인 遺物인 理由는 칼 앞뒷面에 새겨진 總 61個 글字 中 지워진 앞面 8個 글字, 뒷面 5個 글字를 어떻게 類推하느냐에 따라 다른 解釋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글字도 어떻게 解釋하느냐에 따라 當時 백제와 日本의 上下 關係가 뒤바뀐다. 韓國 學者들은 백제王이 倭王에게 하사했다고 主張하고 日本 學者들은 백제王이 倭王에게 獻上했다고 主張한다.

韓國 學界의 解釋에 따르면 칠지도에 새겨진 글句는 近肖古王의 아들 귀數世子(近仇首王 375∼384年 在位)가 369年 倭王에게 敵軍을 물리치라며 하사했다는 뜻이다. 書法도 주는 쪽(百濟)李 받는 쪽(倭王)에 내려주는 命令的 下行 文書 形式으로 되어 있다고 본다.

백제와 倭가 同盟關係를 맺은 時期도 近肖古王 在位 때이다. 當時 왜는 오진(應神) 또는 닌토쿠(仁德) 王의 在位期間이었으며 이때 백제의 王仁과 阿直岐가 건너가 留學과 여러 文物을 傳했다. 이영식 仁濟大 歷史考古學과 敎授는 “주는 사람은 王世子(귀數世子)인 反面 받는 사람은 倭王이므로 百濟가 優位인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日本 學者들 中에는 칼을 製作한 貴愁世子가 왜와의 同盟關係를 强化하기 위해 百濟가 獻上한 것이라고 解釋하는 사람들이 있다. 當時 백제가 高句麗의 侵略 威脅을 받고 있어 왜의 軍事的 支援이 切實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現在 大部分 韓日 學界에서는 貴愁世子가 왜에 하사했거나 最小限 同等한 關係에서 膳物했다고 解釋하는 쪽으로 기우는 趨勢이다. 칠지도가 製作됐을 것이라 推定되는 369年은 백제의 勢力이 剛했던 時期이기 때문이다.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토大 史學科 名譽敎授는 論文 ‘이消奴카미(石上) 神宮과 칠지도’에서 “칠지도 글句는 韓日 關係가 좋으냐 나쁘냐에 따라 學界에서 다르게 解釋돼 왔다. 名文 解釋이 政治的 狀況과 이어지는 것은 칠지도의 宿命”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와 關聯해 이消奴카미 神宮 側은 “韓半島와 日本의 上下 關係를 가리기보다는 古代의 훌륭한 寶物을 어떻게 保全할까가 더 重要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글句의 實體에 다가가려는 學界의 努力도 繼續되어야 하지만 칠지도에 담긴 백제와 왜의 友情에 對한 韓日 國民들의 關心도 있어야 할 것이다.

:: 神宮 ::

寶物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日王이나 王室의 祖上神 等 格이 높은 神을 모신 神社를 말한다. 이消奴카미 神宮은 진무(神武·紀元前 711∼585年) 王이 어려움에 處했을 때 하늘에서 도운 영(靈)을 모셨다고 한다.

덴리=전주영 記者 aimhigh@donga.com

※11回 ‘白江 戰鬪’로 이어집니다.
#칠지도 #韓日交流史 #百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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