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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北韓, 그래도 그리워하는 理由는…” [月曜 招待席]|東亞日報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北韓, 그래도 그리워하는 理由는…” [月曜 招待席]

  • 東亞日報
  • 入力 2024年 4月 7日 23時 42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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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北 回顧錄 ‘이현서, 나의 일곱 番째 이름’ 이현서 氏
北韓 宣傳用 映像만 보던 사람들… 脫北 現場 담은 다큐 映畫 보고 衝擊
忠誠心 重要한 北 生活은 不安하나 느슨… 能力대로 사는 南은 자유로우나 고단해
일곱 個 이름으로 살아온 波瀾萬丈한 人生… 韓國이 자랑스러워하는 ‘이현서’로 살 것

경기 성남시 분당의 자택에서 만난 이현서 씨는 “잘난 것 없는 나의 회고록이 북한의 고통받는 주민들, 그리고 낯선 사회에 적응하려
 몸부림치는 탈북민들 모두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북한이 더 나은 나라가 됐으면 한다”고도 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京畿 성남시 분당의 自宅에서 만난 이현서 氏는 “잘난 것 없는 나의 回顧錄이 北韓의 苦痛받는 住民들, 그리고 낯선 社會에 適應하려 몸부림치는 脫北民들 모두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北韓이 더 나은 나라가 됐으면 한다”고도 했다. 변영욱 記者 cut@donga.com
탈북 회고록 ‘이현서, 나의 일곱 번째 이름’ 표지. 2013년 영어로 먼저 출간됐고 한국어 번역본은 지난해 나왔다.
脫北 回顧錄 ‘이현서, 나의 일곱 番째 이름’ 表紙. 2013年 英語로 먼저 出刊됐고 韓國語 飜譯本은 지난해 나왔다.
《1980年生인 그는 44年間 일곱 個 이름으로 불렸다. 北韓 양강도 惠山에서 ‘김지혜’로 태어나 어머니의 再婚으로 ‘박민영’이 됐다가, 17歲에 中國에 對한 好奇心에 鴨綠江으로 國境을 건넌 뒤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12年間 ‘채미란’ ‘장순향’ ‘채인희’ ‘박선자’로 이름을 네 番 바꿔가며 不法 滯留者로 살았다. 2008年 韓國 땅을 밟은 뒤로는 17年째 ‘이현서’다.

2013年 脫北者로는 처음으로 TED 講演을 한 後 도널드 트럼프 大統領을 만나고 유엔 北韓 人權 聽聞會場에서 證言하는 等 北韓 人權運動家로 世界를 누볐다. 한동안 講演 舞臺에서 사라졌던 그가 올해 初 開封된 美國 다큐멘터리 映畫 ‘비욘드 유토피아’로 돌아왔다. 實際 脫北 過程을 생생히 담은 이 映畫 製作은 35個國에서 飜譯 出刊된 밀리언셀러 回顧錄 ‘이현서, 나의 일곱 番째 이름’에서 始作됐다. 그는 英語 내레이션과 總括 프로듀서를 맡았다. 뜻밖에 2021年부터 오너 펀드매니저로 일한다고 했다.》






―올해 아카데미賞 다큐 部門 豫備候補로 選定됐는데 아쉽게도 最終 候補作은 되지 못했다.

“다큐 映畫 167便中 15篇을 뽑는 豫備候補로 選定된 것만 해도 큰 成果라 생각한다. 美國 600個 劇場에서 上映됐고 올해 初엔 美 國務部 廳舍에서 上映會가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軍事 퍼레이드 같은 北韓의 宣傳用 映像만 보다 實際 北韓 사람들의 悽慘한 實相을 보고 衝擊을 받았다고 한다.”

―賢壻 氏의 回顧錄이 映畫의 모티브가 됐다.


“2016年 美國에서 著者 사인會를 했는데 俳優 로버트 드 니로가 왔다. ‘賢壻 氏를 위해 뭔가 해주고 싶다’기에 이 回顧錄을 할리우드 映畫로 만들어 北韓 人權 實態를 널리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사람이 ‘비욘드 유토피아’ 製作者에게 이 冊을 건넸고 版權 契約을 했다.”

―정작 映畫에는 賢壻 氏 얘기보다 다른 脫北 家族의 얘기가 比重 있게 나온다.


“北韓에 사는 姨母네 脫北 旅程을 찍으려다 計劃이 바뀌면서 全體 스토리가 달라졌다. 映畫 ‘엑스맨’의 監督이 내 이야기를 3時間짜리 새로운 商業 映畫로 찍고 싶다고 해서 만났다. 家族을 脫北시키는 過程에서 도움을 준 濠洲 旅行客 役엔 濠洲 俳優 휴 잭맨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내 配役을 맡을 韓國語 英語를 하는 20代 女俳優를 못 찾고 있다. 現在 投資者들과 協商 中이라고 한다.”

―映畫 속 北韓 家族은 中國-베트남-라오스-泰國-韓國 루트로 脫北하느라 브로커만 50名 넘게 거쳤다. 그런데 賢壻 氏는 中國 상하이-仁川國際空港 루트로 2時間 만에 脫出했다. 브로커 費用도 한 푼 쓰지 않았다.


“脫出 루트를 定하려고 地圖에서 베트남 라오스가 어딨는지 찾아보다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仁川空港까지만 가면 되는 거잖아! 그래서 상하이에서 仁川을 經由해 방콕으로 가는 往復 航空券을 샀다. 中國에서 마지막 身分證 이름은 ‘박선자’인데 精神病을 앓고 있는 韓國系 中國人 少女의 것을 비싸게 산 眞짜 身分證이었다. 少女의 父母가 身分證을 팔아 딸 治療費로 쓰려 한 것이다. 眞짜 身分證이 있으니 危險하게 假짜 旅券을 만들 必要도 없고 泰國 비자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그땐 中國人이 韓國 비자 받는게 엄청 어려웠다.”

―상하이에서 방콕으로 바로 가지 않고 仁川을 經由해 3200km를 迂廻하는 旅行 經路는 누가 봐도 異常하다.


“상하이 出入國 管理所에서는 서울에 사는 男子親舊가 仁川에서 방콕까지 같은 飛行機를 豫約해 함께 가려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10分 넘게 旅券 身分證 運轉免許證을 檢討하더니 通過시키더라. 정작 仁川空港에 到着해 내가 亡命을 願하는 北韓 사람임을 證明하는게 어려웠다. 不法 滯留下慮는 中國 朝鮮族이라 여긴 것이다.”

―中國에서 바로 韓國으로 오지 않고 12年間 살았다.


“17歲에 鴨綠江을 건널 땐 韓國에 온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몰래 中國 드라마를 본 뒤 中國이 궁금했다. 不法 滯留者로 不安에 떨며 살다 ‘박선자’의 眞짜 身分證을 산 뒤로는 韓國 尖端企業의 中國法人에 通譯 兼 祕書로 就職해 生活도 安定이 됐다. 그런데 2004年엔가 TV에서 베이징 韓國 大使館으로 어른과 아이들이 목숨 걸고 突進하는 場面을 봤다. 앵커가 政治的 亡命을 試圖한 北韓 사람들이라고 했다. 배고픔이나 나처럼 輕率한 好奇心이 아닌 政治的 理由로 脫北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韓國行이 목숨을 걸 만한 價値 있는 일임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상하이에서 사귄 韓國 男子와 結婚하고 싶었다.”

그는 2008年 韓國에 먼저 온 뒤 어머니와 男동생을 說得해 脫北시켰다. 中國-라오스 루트였는데 많은 檢問所와 移民國 事務所 等 곳곳에서 붙들려 브로커 쓰고 賂物 쥐어주며 解決하느라 1年이 걸렸다. 세 家族이 서울서 再會한 건 2010年 8月이다.

―세 家族이 모두 自由를 찾았으니 해피엔딩이다.


“幸福해지기란 南韓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北韓에선 忠誠心이 社會的 地位를 決定하니 아등바등할 必要가 없다. 그런데 韓國에선 個人 能力이 重要하니 熾烈하게 살아야 한다. 北韓에서 받은 敎育은 여기선 쓸모가 없다. 特히 韓國語가 英語보다 어렵다. 메뉴板의 글씨 ‘나초’ ‘팝콘’ ‘콜라’ 모두 아는 글字인데 뜻을 모르겠더라. ‘미팅이 있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를 나와 택시를 탔다’는 말을 못 알아들었다. 外來語를 一一이 외우느니 차라리 英語를 工夫하자 싶어 한국외국어대에서 中國語 英語를 複數 專攻했다. 自身이 選擇한 대로 사는 自由란 두려운 存在일 수 있다.”

―男동생은 美國 컬럼비아대 學事 碩士學位를 받은 뒤 美國에서 結婚해 아이 낳고 잘 살고 있다.


“나도 도왔지만 學資金 貸出 받아가며 악바리처럼 工夫했다. 젊은 사람들은 새로운 環境에 適應하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힘들다. 어머니는 只今도 北에 있는 兄弟姊妹들을 몹시 그리워한다. 왜 脫北者들은 自由와 家族을 모두 가질 수 없고 하나를 選擇해야 하나.”

―北韓을 地獄 같은 곳이라 하면서도 北韓을 그리워하는 脫北民들을 보면 理解가 안 된다.


“北韓이 아니라 家族과 故鄕이 그리운 것이다. 脫北民들은 두 部類가 있다. 政治的 迫害를 받고 굶주리며 살았던 사람들은 빠르게 適應한다. 反面 出身成分이 좋아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이들은 서울 生活이 벅차다. 國家가 다 定해주기 때문에 競爭할 必要가 없는 單純하고 秩序整然한 삶을 그리워할 수 있다. 이곳에선 이등 市民으로 사는 脫北民들이 적지 않다. 사람은 自由만으로 살 수 없다. 家族도 있어야 하고 自尊感度 있어야 한다.”

―韓國行을 決行하게 한 그 男子는 어떻게 됐나.


“서울에 와서도 한동안 사귀면서 프러포즈를 期待했다. 江南 富者집 아들이었는데 어느 날 내게 大學 進學을 勸하며 ‘醫師나 藥師 試驗에 合格하면 우리 父母님이 좋아할거야’라고 말했다. 바로 알아보니 醫大는 學費도 비싸고 1等을 해도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結局 내가 ‘우리에겐 未來가 없다’고 끝냈다. 親舊로 헤어졌다.”

―賢壻 氏는 講演料가 1萬 달러, 줌으로 하면 5000달러를 받는다고 들었다. 講演은 왜 그만둔 건가.


“每番 같은 이야기를 反復하는 게 힘들었다. 사람들은 내가 일곱 살 때 公開 處刑을 目擊하고, 家族과 목숨 걸고 脫出했던 얘기를 듣길 願한다. 只今 나는 잘 살고 있는데 不幸했던 얘기만 되풀이하다 보니 過去에 갇혀 지내는 듯한 느낌이 들어 憂鬱症이 왔다.”

―새로 始作한 일이 왜 펀드매니저인가.


“資本主義의 끝판王이 金融이니까. 數字에 밝은 便이다. 講演料와 印稅 收入을 펀드에 投資했는데 收益率이 좋아 直接 해보고 싶었다. 2021年 投資資産運用社 資格試驗에 合格해 작은 投資一任會社를 運營하고 있다. 돈이 모이면 財團을 設立할 計劃이다. 젊은 脫北民을 돕는 프로그램은 많은데 高齡者를 돕는 곳은 많지 않다.”

―일곱 個의 이름으로 살았다. 어느 이름으로 불릴 때 가장 幸福했나.


“박민영. 겨울철 눈 덮인 山과 石炭 타는 냄새, 오래 前 돌아가신 아버지의 아늑한 品, 多情한 姨母 三寸들과 함께 살았던 時節이 그립다. 그땐 바깥世上을 全혀 몰랐다. 하지만 ‘이현서’ 빼고는 모두 北韓에서 내 正體를 알아낼까 봐 지어낸 假짜 이름들이다. 내가 묻힐 곳은 이곳 서울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私心 없는 親切을 베풀어줬다. 이제 나도 남을 돕는 人生, 이 나라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人生을 살고 싶다. 내 唯一한 眞짜 이름, ‘이현서’의 이름으로.”

이진영 論說委員 ecolee@donga.com
#脫北 #回顧錄 #이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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