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出品은 ‘作品의 끝’, 傳示作 위에 다시 그린 在日畫家[윤범모의 顯微鏡으로 본 名畫]|東亞日報

出品은 ‘作品의 끝’, 傳示作 위에 다시 그린 在日畫家[윤범모의 顯微鏡으로 본 名畫]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7月 12日 03時 00分


코멘트
제주 출신 재일화가 송영옥은 캔버스를 살 여유가 없어 전시했던 작품을 지우고 그 위에 새 그림을 그렸다. 출품을 곧 작품 생명의 
마감으로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상당수 재일교포들은 북송선에 올랐다. 송영옥은 이 시기 
동포들이 겪은 고통을 캔버스에 담았다. 1969년 그린 ‘작품 69’. 인물들의 처절한 손짓과 부서진 사다리에서 아무리 애써도 담장을 오를 수 없는 절박함이 느껴진다.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제공
濟州 出身 在日畫家 송영옥은 캔버스를 살 餘裕가 없어 展示했던 作品을 지우고 그 위에 새 그림을 그렸다. 出品을 곧 作品 生命의 마감으로 여겼기에 可能한 일이었다. 1960年代 末∼1970年代 初 相當數 在日僑胞들은 北送船에 올랐다. 송영옥은 이 時期 同胞들이 겪은 苦痛을 캔버스에 담았다. 1969年 그린 ‘作品 69’. 人物들의 悽絶한 손짓과 부서진 사다리에서 아무리 애써도 담牆을 오를 수 없는 切迫함이 느껴진다. 光州市立美術館 하정웅컬렉션 提供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윤범모 國立現代美術館長
그림 지우기. 作業室에서는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作品이 어찌 作家의 마음대로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畫家들은 그렸다 지웠다 反復하면서 作品을 完成한다. 하지만 展示場에 出品까지 했던 作品을 지운다는 行爲는 常識에서 벗어난다. 完成했기에 出品했던 것이고, 이는 社會的 公共財産으로 쌓이게 된다. 展示場에서 돌아온 캔버스의 그림을 지우는 火가. 누가 自身의 完成作을 廢棄할까.

在日 畫家 송영옥(1917∼1999)의 이야기다. 日本에서의 어려운 畫家 生活은 비싼 美術 材料를 제대로 使用할 수 없게 했다. 물감도 비쌌지만 캔버스 亦是 비쌌다. 그래서 苦肉之策으로 한番 出品했던 作品은 지우고 그 위에 새 그림을 그렸다. 出品作 지우기는 生活 習慣처럼 자연스러워졌고, 이는 마침내 藝術哲學으로 發展했다. 公共場所에서 發表했으면 그것으로 作品의 生命은 마감된 것으로 보았다. 더군다나 美術作品은 商品이 아니어서 販賣 目的으로 남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송영옥은 遺存 作品이 많지 않다. 貧困한 生活이 特異한 習慣을 불러왔고 藝術作品의 商品化는 體質的으로 拒否하게 되었다.

송영옥은 濟州 出身이다. 日帝强占期에는 濟州와 오사카 사이에 直航 航路가 있었다. 그래서 오사카에는 濟州 出身 同胞들이 많다. 父母를 따라 逃逸한 송영옥은 1940年代 初盤 오사카美術學校를 다녔다. 同期生으로 윤재우 等이 있고, 切親한 畫家로 뒤에 越北한 청계 정종여가 있다. 송영옥은 1982年 在日同胞 秋夕省墓段의 一員으로 55年 만에 故國의 땅을 밟았다. 나는 日本의 한 美術行事에서 宋 畫伯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이내 親해졌다. 우리는 各自의 집을 往來하면서 家族과도 가깝게 지냈다. 末年에 살았던 그의 도쿄 닛포리 집은 單칸房으로 둘이 마주 앉으면 무릎이 맞닿을 程度로 좁았다. 어쩌다 畫家의 집에 들러 쌀을 팔아주고 오기도 했다.

광주시립미술관의 分館 하정웅美術館의 하정웅 컬렉션 特別展 ‘씨앗, 싹트다’에서 오래간만에 송영옥 作品을 보았다. 恒常 조용한 性品으로 仁慈했던 畫家가 살아온 듯 반가웠다. 珠玉과 같은 名品들은 戰慄처럼 다가왔다. 差別받는 在日作家로서 苦痛 어린 모습의 ‘슬픈 自畫像’이라든가, 南과 北 그리고 日本이라는 三角關係에서 자리매김해야 하는 畫家의 自畫像인 ‘三面鏡’ 等, 그리고 末年의 個 所在 聯作들을 拜觀했다.

1969년 같은 해 작품인 ‘갈림(귀국선)’에도 부서진 사다리가 등장한다.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제공
1969年 같은 해 作品인 ‘갈림(歸國船)’에도 부서진 사다리가 登場한다. 光州市立美術館 하정웅컬렉션 提供
송영옥 作品 가운데 나는 1960年代 末 1970年代 初에 그린 ‘切迫한 狀況’의 그림을 좋아한다. 그 무렵 相當數의 在日僑胞는 北送船을 타고 平壤으로 移住하는 事業에 同參했다. 油畫 ‘갈림(歸國船)’(1969年)은 ‘69’라는 數字가 表記된 船舶의 안에서 동그란 窓에 비치고 있는 憂鬱한 表情의 人物을 그린 것이다. 外壁에 매달려 있는 사다리는 낡고 부서져 있어 正常이 아님을 暗示하고 있다. ‘壁’(1973年)은 옆으로 기다랗게 뚫린 틈새에 비치고 있는 얼굴들, 悽絶함의 極致이다. 極限 狀況 속에 내몰린 群像의 모습이다. ‘검은 비’(1971年)는 아예 둥그런 原形 窓이 있는 外壁 위에 骸骨이 눕혀 있기도 하다.

1973년 작품 ‘벽’. 어딘가에 갇힌 사람들의 울부짖는 표정이 참혹하다.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제공
1973年 作品 ‘壁’. 어딘가에 갇힌 사람들의 울부짖는 表情이 慘酷하다. 光州市立美術館 하정웅컬렉션 提供
송영옥 作品은 象徵性이 强하다. 그래서 울림이 크다. 그의 ‘作品 69’(1969年)도 그렇다. 畵面의 4分의 3 程度는 새까맣게 漆해진 壁面이고 그 한便에 기다란 사다리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사다리는 부서진 廢物, 이를 타고 上層部로 올라갈 수 없다. 끊어진 사다리 아래의 肉重한 담牆 뒤로 사람들이 갇혀 있다. 密閉된 空間에 갇힌 사람들, 悽絶한 極限 狀況이다. 暗黑, 壓迫, 桎梏… 이런 單語가 떠오르게 하는 現實이다. 그래서 이런 暗黑으로부터 脫出을 祈禱하는 사람들의 悽絶함이 畵面에 담겨 있다. 人間 實存의 問題이기도 하다. 담牆 위 두 사람의 손, 오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밖을 내다볼 수도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觀戰 포인트 하나를 發見할 수 있다. 두 사람이 各各 떨어져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重疊되어 얽혀 있다는 點이다. 첫 番째와 세 番째의 손이 한 사람이다. 서로 交叉되어 있는 손. 합쳐야 살 수 있다는 意味인가. 꼭 分斷 祖國의 現實을 象徵하는 것 같다.

나는 作家 末年에 서울에서 回顧展 開催를 推進했다. 살아生前 祖國에서 自身의 作品을 發表하고 싶었던 畫家의 念願을 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作品을 모을 수 없어 展示는 不發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慶南 晉州 出身으로 1950年代 日本 花壇에서 重要한 作家로 活動했던 조양규, 그는 北送船을 타고 平壤으로 떠났지만 이내 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조양규와 가깝게 지냈던 송영옥, 그들의 人生 航路는 사뭇 달랐다. 송영옥은 外地에서 외롭게 눈을 감았지만 그의 作品은 오늘도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美術作品이란 무엇인가. 作品은 꼭 永遠히(?) 살아남아 있어야 하는 것일까.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했거늘, 이 땅에 永遠한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出品作을 지우는 畫家의 行爲, 거기서 나는 많은 示唆點을 챙기게 된다.


윤범모 國立現代美術館長


#在日 畫家 #송영옥 #回顧展
  • 좋아요
    0
  • 슬퍼요
    0
  • 火나요
    0
  • 推薦해요

댓글 0

只今 뜨는 뉴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