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喊聲에 놀란 日警 “물러갈테니 萬歲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 哀願|東亞日報

喊聲에 놀란 日警 “물러갈테니 萬歲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 哀願

  • 東亞日報
  • 入力 2019年 3月 13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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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運動 100年, 2020 東亞日報 100年]
3·1運動 100年 歷史의 現場 2部 <제43화>講院 襄陽

지난해 강원 양양군에서 열린 3·1운동 재현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를 외치고 있다. 양양은 만세운동에 1만5000여 명이 참가하고 시위 과정에서 13명이 피살될 정도로 독립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다. 양양군 제공
지난해 講院 襄陽郡에서 열린 3·1運動 再現 行事에서 參加者들이 거리를 行進하며 萬歲를 외치고 있다. 襄陽은 萬歲運動에 1萬5000餘 名이 參加하고 示威 過程에서 13名이 被殺될 程度로 獨立에 對한 熱望이 뜨거웠다. 襄陽郡 提供
‘현북면事務所 一部 官吏들의 挽留로 옥신각신하다가 그 計劃을 變更하여 記事文理 駐在所를 攻擊하기로 하고 約 千 名의 群衆이 官고개(關峴) 길을 따라 넘어 先頭는 이미 記事文理 駐在所 앞에서 倭警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天地가 振動하는 萬歲를 連呼하고 있었다. 이때 언덕 밑 溪谷 숲속에서 미리 潛伏하고 있던 日帝 守備隊와 警察이 無差別 發砲하여 現場에서 9名이 被殺되고 20餘 名이 重輕傷을 當하였으니 그 慘狀은 天人이 共怒할 蠻行이었다.’

7日 찾은 講院 襄陽郡 ‘萬歲고개’ 한쪽에 서 있는 비에 적힌 글의 一部다. 襄陽郡은 1919年 獨立萬歲運動에 參與한 이들의 愛國愛族 精神을 기리기 위해 示威의 現場 萬歲고개에 遺跡費를 세웠다. 太極旗를 새긴 楕圓形의 주비(主碑)에는 萬歲를 부르는 住民들의 群像이 彫刻돼 있다. 왼쪽 비에는 萬歲고개의 由來, 오른쪽 비에는 當時 狀況과 犧牲된 愛國志士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 9名의 피로 만들어진 萬歲고개

강원 양양군 현북면 만세고개의 3·1운동 기념물. 일제의 총탄에 9명이 이곳에서 순국했다. 양양=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講院 襄陽郡 현북면 萬歲고개의 3·1運動 記念物. 日帝의 銃彈에 9名이 이곳에서 殉國했다. 襄陽=김갑식 文化專門記者 dunanworld@donga.com
이 示威는 襄陽郡에서 가장 많은 死傷者를 냈다. 襄陽의 幾微萬歲運動은 4月 4日 襄陽의 場날부터 決行돼 男女老少 宗派 身分의 區別 없이 一心同體가 되어 進行됐고, 要員의 불길처럼 各 面으로 擴散됐다. 4月 9日 현북면에서도 蹶起大會가 끝난 後 양양읍 場마당에서 群衆과 場꾼들이 合勢해 萬歲運動을 벌일 計劃이었다. 儒學者 박원병 兄弟와 監理敎會 靑年 오세옥 이응렬 等이 손을 잡고 面內의 維持 임병익 오정현과 合勢했고, 各 마을의 球場(里長)들이 큰 役割을 했다. 이날 各 마을 區長들의 引率下에 하광정리 面事務所에 모인 1000餘 名의 示威隊는 소리 높이 萬歲를 부르고 記事文理에 있는 駐在所로 向했다. 日帝는 현북면 一帶의 熾烈했던 當時의 示威를 이렇게 記錄했다. ‘4月 9日 襄陽郡 현북면 記事文駐在所를 襲擊한 暴民(暴民)은 面長을 脅迫하기를 甚히 하여 面長은 不得已 一時 事務를 中止하고 避難 中이다.’

미리 示威 情報를 入手한 日帝 警察은 언덕에서 群衆을 向해 銃을 겨누다 一齊히 發砲했다. 死亡者 9名, 負傷者가 20餘 名이 發生하고 示威 現場은 피바다가 됐다. 電源거 임병익 鴻筆三 고대線 黃凝想 김석희 문종상 震源팔 이학봉 等이 犧牲됐다. 現在 萬歲고개에는 道路가 생기는 等 變化가 커 옛 痕跡을 찾기 어렵다. 야트막한 오르막길의 느낌만 남아 있다.

襄陽郡은 江原道뿐만 아니라 全國으로 範圍를 넓혀도 規模나 內容에서 3·1運動이 展開된 地域 가운데 가장 熾烈했던 곳 中 하나로 꼽힌다. 襄陽郡에 따르면 4月 4日을 始作으로 9日까지 6日 동안 1萬5000名이 넘게 示威에 參與했다. 當時 軍 人口는 3萬6000名으로 推算된다. “示威 때 집집마다 한 사람은 나왔다”는 말이 있을 程度로 萬歲運動의 熱氣가 뜨거웠음을 斟酌할 수 있다. 이 過程에서 13名의 死亡者, 50餘 名의 負傷者가 發生했고 逮捕者는 不知其數였다.

特히 4月 5日 대포항 萬歲示威에는 1000餘 名이 모여 示威를 하자 警察이 完全히 屈服하고 謝罪했고, 群衆은 다음 날 襄陽邑에서 다시 모이기로 하고 解散했을 程度다. 또 4月 6日 示威隊가 制止하는 軍隊를 밀어내고 邑內 警察署로 몰려가자 警察署長이 “日本은 물러갈 테니 萬歲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哀願해 群衆이 萬歲示威만 벌이고 저녁때 돌아가기도 했다.

○ 儒林의 이석범과 基督敎(改新敎)의 조화벽

양양의 만세운동을 이끈 유림 이석범 선
생(왼쪽 사진)과 기독교의 조화벽 지사.
양양문화원 제공
襄陽의 萬歲運動을 이끈 儒林 이석범 선 生(왼쪽 寫眞)과 基督敎의 조화벽 知事. 襄陽文化院 提供
襄陽은 東學農民運動 때 半(反)東學軍이 結成될 程度로 儒林의 影響力이 剛하고 保守的인 곳이었다. 保守的인 이곳에 1906年 南宮檍이 郡守로 있으면서 현산학교를 設立했다. 이 學校는 學生 數가 200名에 이를 程度로 急速히 發展했다. 新文化 바람과 함께 양양읍 성내리와 강현면 물치리, 현북면 上鑛整理에 敎會가 들어왔다. 그中 襄陽 監理敎會는 3·1運動 當時 獨立宣言書를 傳達하는 等 큰 役割을 한 조화벽(1895∼1975)의 아버지 조영순 傳道師가 이끌던 敎會로 많은 靑年들이 모여들었다. 開化 바람이 커지자 半東學君을 主導했던 이석범(1859∼1932)은 쌍천學校를 세워 儒敎的 思想과 文化를 지키고자 했다. 이처럼 襄陽은 儒敎와 基督敎 勢力으로 나뉘었으나 나라를 되찾자는 大義에 하나로 뭉쳤다. 두 勢力 사이에서 架橋 役割을 했던 것이 현산학교와 쌍천學校, 襄陽普通學校의 初期 卒業生들이었다.

이석범은 高宗 皇帝의 因山(因山·葬禮)에 參禮하고 돌아올 때 獨立宣言書를 가져온 뒤 擧事를 推進했다. 그는 아들 이능렬과 김영경 장세환 等 쌍천學校의 卒業生들에게 主要 任務를 맡겼다. 이석범은 門衆의 큰 富者였던 이교완의 집을 本據地 삼아 최인식 等 30歲 前後의 靑壯年層을 모았다.

3月 末頃 조화벽은 開城에서 돌아올 때 獨立宣言書를 버선 속에 숨겨 왔다. 開城 호수돈女學校에 다니던 그는 寄宿舍生으로 構成된 祕密決死隊원으로 活動하다 日帝의 休校 措置로 故鄕으로 向했다. 이 宣言書는 面事務所에 勤務하던 敎會 靑年 김필선에게 傳해졌다. 김필선은 같은 襄陽普通學校 卒業生이자 交友(敎友)들인 김재구 김규용 김계호 等을 모았다. 이들은 面事務所 謄寫版을 利用해 獨立宣言書를 複寫하고 敎會 隣近 賞與 保管處에 숨어 太極旗를 만들었다. 그러던 中 최인식과 連絡이 닿아 合同으로 擧事를 推進하게 됐다.

하지만 4月 3日 日本 官憲들이 急襲해 太極旗를 만들던 사람들과 總指揮者 이석범을 비롯한 22名을 逮捕했다. 逮捕를 避한 최인식 김필선 等은 居處를 옮겨 밤새 準備했고, 4月 4日 計劃대로 큰 示威가 벌어졌다.

조화벽은 後날 柳寬順 烈士의 오빠인 劉禹錫과 夫婦의 緣을 맺었고, 抗日 獨立運動으로 拘禁과 釋放을 되풀이한 男便의 獄바라지를 한다. 1932年 襄陽으로 돌아온 조화벽은 정명학원을 設立해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獻身한다. 이 學校는 日帝 彈壓으로 1944年 廢校되기 前까지 600餘 名의 卒業生을 輩出했다.

이철수 襄陽文化院 附設 鄕土史硏究所 所長은 “襄陽 萬歲運動을 主導한 유림과 基督敎 勢力은 情緖的으로 물과 기름의 關係일 수도 있었지만, 國權 回復을 위해 그 差異를 뛰어넘어 하나로 뭉쳤다”며 “靑年 그룹이 두 勢力을 連結하며 核心 役割을 했다”고 밝혔다.

指導者 그룹이 大擧 檢擧되면 運動이 支離滅裂해지기 쉽지만 襄陽의 萬歲運動은 큰 打擊을 받지 않았다. 李 所長은 이에 對해 “襄陽은 只今의 서울보다 큰 面積이기 때문에 連絡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全軍에 걸쳐 萬歲運動이 激烈하게 벌어진 것은 儒林을 앞세워 球場까지 加擔시킨 緻密한 組織力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可能했다”고 말했다.

○ 함홍기 烈士, 署長에게 火爐를 던지려다 殉國

동아일보와 양양군협찬회가 1974년 건립한 양양읍 현산공원의 3·1운동 기념비.
東亞日報와 襄陽郡協贊膾가 1974年 建立한 양양읍 現産公園의 3·1運動 記念碑.
4月 4日은 襄陽 場날이었다. 襄陽邑에 들어오는 通路 5個를 따라 隣近 各地에서 萬歲 群衆과 場꾼들이 모여들었다. 邑內에서 萬歲運動이 일어났다는 消息을 듣고 들에 나가 있던 農夫들도 모여들었다. 點心때에 이르러 萬歲 群衆은 더욱 불어났고, 特히 警察署와 郡廳 周邊은 勿論이고 뒷山에도 群衆이 모여 獨立萬歲를 외쳤다.

群衆은 警察署와 郡廳을 에워싸고 임천리에서 逮捕한 22名을 비롯한 감금자를 釋放하고 日本 官憲은 自己 나라로 물러가라고 要求했다. 몇 사람은 警察署에 들어가 警察署長에게 抗議하기도 했다. 이 過程에서 손양면 가평리 球場 함홍기는 日本 警察署長에게 火爐를 들어 던지려다 日本 警察 두 名에게 兩팔이 잘린 後 목을 찔려 죽었다. 그의 屍身은 警察署 내 複道에 가마니에 덮여 있다가 10餘 日 뒤 家族에게 引繼됐다. 마을 住民이 모인 뒤 葬禮를 치렀으나 日本 警察은 洞네 住民이 모여 울었다는 理由로 下棺 直後 파헤치고 棺을 깨버리는 蠻行을 저질렀다.

當時 襄陽의 萬歲運動에는 유림과 基督敎 勢力뿐 아니라 天道敎와 佛敎도 萬歲運動에 加勢했다. 日帝의 記錄과 當時 證言 等에 따르면 4月 7日 午後 2時 半 天道敎徒를 中心으로 約 300名의 群衆이 運動을 開始하여 襄陽邑內에 들어오자 日帝 警察은 主謀者 4名을 逮捕했고, 示威隊는 解散됐다. 洛山寺 僧侶들도 이날 午後 7時 哱囉 소리와 더불어 前 僧侶들이 燈불을 들고 萬歲運動을 펼쳤다.

襄陽=김갑식 文化專門記者 dunanworld@donga.com
#3·1運動 #襄陽 #萬歲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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