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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招待席]“女子 壁 넘으니 나이 壁… 絶望의 瞬間 正面勝負로 두려움 克服”|東亞日報

[招待席]“女子 壁 넘으니 나이 壁… 絶望의 瞬間 正面勝負로 두려움 克服”

  • 東亞日報
  • 入力 2015年 11月 16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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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아 前 제일기획 副社長, ‘思春期 職場人’에게 주는 助言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 로비에서 만난 최인아 제일기획 전 부사장은 “직장에서 여성과 나이라는 벽에 부딪힐 때마다 외부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를 단단하게 지켜온 것이 버팀목이 됐다”라고 회고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서울 鍾路區 一民美術館 로비에서 만난 최인아 제일기획 前 副社長은 “職場에서 女性과 나이라는 壁에 부딪힐 때마다 外部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를 단단하게 지켜온 것이 버팀木이 됐다”라고 回顧했다. 장승윤 記者 tomato99@donga.com
《 “이듬해 2月 卒業을 앞두고 있었다. 女社員을 뽑는 會社가 드물었다. 어떤 곳은 願書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막상 面接을 가도 結局 苦杯를 마셨다. 그러다 ‘專攻不問, 性別不問’이라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한 廣告社가 新入 카피라이터를 募集했다. 어렸을 때 小說家가, 大學生 때 記者가 되고 싶었던 그는 글 쓰는 일이라기에 무턱대고 支援했고 運 좋게 合格했다. 하지만 끼와 感覺 있는 이들로 차고 넘치는 廣告界에서 말數 없고 목소리까지 작은 그는 外界人이었다. 入社 半年이 지났을까. 한 先輩가 ‘適性에 안 맞는 것 같으니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말했다.” 이 ‘숫氣 없는 女社員’은 後날 이름난 카피라이터가 됐다. 최인아 제일기획 前 副社長(54)이다. 삼성그룹에서 公採 出身으로 첫 女性 任員이 된 뒤 最初의 女性 常務, 最初의 女性 專務, 最初의 女性 副社長 等 ‘最初’라는 修飾語가 따라다녔다. 》

겉보기에 華麗한 길을 걸어왔지만 그는 스스로를 ‘失敗의 達人’이라 했다. 여느 職場人과 다름없이 週期的으로 슬럼프가 찾아왔고 그만둘까 생각했던 적이 한두 番이 아니었다. 그는 “內面은 늘 戰爭터였다. 다만 스스로를 단단하게 지켰고 外部에 쉽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나긋하고 느리게 말하는 그는 차분함과 無難함이란 修飾語가 어울려 보였다.

그는 自身의 經驗을 바탕으로 最近 英國 哲學者인 알랭 드 普通이 만든 ‘人生學校’ 서울 分校에서 敎師로 나서 흔들리는 職場人들에게 큰 呼應을 얻고 있다.

1984年 제일기획에 入社한 그는 少數民族과 다름없었다. 任員은커녕 나중에 次長이나 될 수 있을까 苦悶했다. 號俸은 男子 同期들보다 3年 뒤졌고 女子 同期들은 어느 瞬間 結婚하고 會社를 떠났다. ‘女社員을 뽑아도 금세 그만뒀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하지만 속으론 ‘그래?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별나지 않아도 ‘廣告쟁이’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로 했다. 流行을 따르기보다 事物의 本質을 곱씹어보면서 카피를 만들었다. 家族이 아파 속상한 일, 上司에게 혼났던 일, 親舊와 수다 떠는 일 等을 ‘나만의 言語’로 보여줬다. 內省的인 性格이 오히려 武器가 됐다.

“혼자 旅行하고 혼자 映畫 보고 스스로와 지내는 時間이 많아요. 저는 안테나를 바깥이 아닌 안에 세우고 제 안에서 答을 찾는 便이죠. 汨沒하다 보면 答이 나오는 瞬間이 있어요.”

勿論 이렇게 나온 카피를 顧客社가 늘 採擇하지는 않았다. 좋은 아이디어인데 採擇이 안 되는 일도 더러 있었지만 이럴 땐 마음에 두지 않았다.

“一旦 제가 좋다고 생각하면 ‘子息들, 좋은 걸 못 알아보네’라고 넘길 줄 아는 배짱이 있어야 하죠. 스스로 中心을 잡고 단단한 사람이고 싶었어요. 南(廣告主)李 選擇했다고 좋아하고 아니라고 해서 가라앉으면 結局 내 삶은 남에게 휘둘리게 되죠.”

이렇게 ‘그女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當身의 能力을 보여주세요’, ‘顧客이 OK할 때까지 OK! SK’, ‘자꾸자꾸 當身의 香氣가 좋아집니다’ 等 히트作을 연이어 내놓았다. 當時 韓國은 國際 廣告界에서 邊方에 가까웠지만 그는 칸 國際廣告祭 審査委員으로 活躍하기도 했다.

나이라는 壁

2000年 그는 三星에서 女性 公採 出身의 첫 任員으로 拔擢됐다. 제일기획이 廣告 代價에게 주는 ‘마스터’ 呼稱도 처음 받았다. 하지만 또 다른 危機가 찾아왔다. 마흔 中盤에 다가가면서 漸漸 中心에서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다. 女性이라는 壁을 넘었다고 여기는 瞬間 나이라는 障壁을 만났다. ‘看板級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이제 좀 있으면 바빠지겠거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瞬間 後輩가 그 일감을 맡아 이미 進行하고 있는 걸 알게 됐다.

“일에 興味도 自信感도 없었고 意味도 찾지 못했어요. 제 成果가 예전 같지 않음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죠. ‘앞으로 나이 들 일만 남았는데 어떻게 하지’라는 苦悶이 밀려왔고 뿌리부터 흔들렸어요. 職場人의 本格的인 思春期가 찾아왔다고 할까요.”

結局 2006年 休職했다. 任員인 데다 進級을 앞둬 周邊에선 어떻게 하든 자리를 지키라고 말렸다. 學位 따는 工夫를 하라고도 했다. 하지만 自身의 苦悶에 率直하게 맞서고 싶었다. 스페인 산티아고로 一旦 떠났다.

“人生에서 不確實性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는 일이 많죠. 하지만 時間을 X軸, 成果를 Y軸으로 하면 階段式 그래프가 나와요. 한 달 功들여 運動했는데도 살이 안 빠질 수 있지만 어느 瞬間 살이 빠져 있는 式이죠. 뭔가 成就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不確實한 區間을 어떻게 이겨내는지에 따라 갈리는 것 같아요. 切實하고 단단한 사람을 가리는 ‘宇宙의 테스트’인 셈이죠.”

산티아고에서 하루에 18km에서 34km까지, 總 36日間 800km를 걸었다. 無數히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들락날락했다. 머리는 생각에 빌려주는 空間일 뿐, 그야말로 ‘온몸’으로 생각했다. 3週쯤 지났을까. ‘아, 내가 나이에 무릎 꿇고 싶지 않은 거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不可能해진다는 게 아니라 다만 어떤 일을 할 때 時間이 더 걸릴 뿐이란 걸 알게 됐죠. 20, 30代에 열흘 걸리던 일이 40代에는 3週가 걸리는 式으로요. 나이에 對한 두려움이 줄었어요.”

뾰족한 答을 찾지는 못해도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이젠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氣分이 들었고 會社에서 ‘後進’ 일을 하라고 해도 쓰일 곳이 있다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職員의 先輩로

復歸한 그는 스스로의 役割을 다시 規定했다. 그間 會社에서 받은 걸 돌려주기. 前과 달리 이젠 모든 職員들의 先輩가 되고 싶었다.

“自己 이름 걸고 뭔가를 하기보다는 다른 職員을 끌어주고 저처럼 헤맸던 職員이 있다면 손을 잡아주고…. 그게 ‘밥값’을 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질 게 뻔한 프레젠테이션(PT)에서는 스스로 銃대를 멨다. 大槪 10∼12年 差가 팀長으로 나서지만 지는 게임엔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專務였던 그가 팀長을 自請했다. 廣告主 앞에서 ‘저는 여기 이기러 오지 않았지만 꼭 必要한 솔루션日 거 같아서 傳해주러 왔다’고 말했다. 勿論 ‘패(敗)’했다. 하지만 떳떳했다.

“當場 不利해 보여도 ‘나다움’을 지키고 싶었고 그게 品位를 지키는 길이죠. 어릴 땐 스마트한 게 重要했다면 年次가 들어선 한 人間으로서 信賴할 만한지와 剛한 心臟을 지녔는지가 重要한 德目이라 생각했어요.”

製作本部長을 지낼 때 제일기획이 大韓民國 廣告大賞을 3年 連續 席卷하는 等 그는 頭角을 나타냈다. 하지만 2012年 副社長을 끝으로 突然 辭表를 냈다. 이건희 三星電子 會長이 ‘女性 中에서도 最高經營者(CEO)가 나와야 한다’고 말하는 等 女性 人力의 重要性을 强調할 때여서 意外였다. 三星 最初의 公採 出身 첫 女性 任員으로 끝까지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을까.

“저는 ‘깜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組織의 悲劇은 자리에 許容된 파워와 該當 人物이 갖춘 力量이 一致하지 않아 비롯될 때가 많아요. 不足한 재주지만 다 쏟아부어 未練이 없었어요. 프로젝트 몇 個가 잘되면 그 分野의 大家가 된 듯 쉽게 取하지만 저는 스스로 冷靜하게 돌아보는 ‘防腐劑’를 지니고 싶었어요.”

現在 그의 公式 職銜은 ‘연세대 大學院 史學科 碩士課程 休學生’. 平素 못 해본 工夫를 願 없이 하고 싶어 지난해 入學했다. 하지만 한 드라마에서 登場人物이 열띤 PT를 벌이는 場面을 보다 갑자기 脈搏이 빨라졌다. 前에 밤새워 作業한 뒤 廣告主 앞에서 PT를 했던 記憶이 떠올랐고 苦悶 끝에 創業을 위해 休學했다. 마케팅·커뮤니케이션 會社를 세워 빠르게 變하는 媒體 環境에서 또 다른 役割의 ‘廣告쟁이’를 해보고 싶어서다. 그는 “世上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不足한 재주지만 주저앉지 않기 위해 如前히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했다.



▼ “똑똑한 女性보다… 便하고 함께 일하고 싶은 同僚가 되세요”



成功한 것처럼 비치는 任員들조차도 돌이켜보면 스스로에게 아쉬운 部分이 적지 않다. 최인아 前 副社長에게 물었더니 대뜸 “만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專務 時節 會食 때였다. 술이 한 巡杯 돌자 先輩 任員이 그에게 와서 “얘는 쪼끄만 게 어려워”라고 말했다. 윗사람조차 어렵게 생각할 程度니까 아랫사람은 더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두 職員의 逸話를 꺼냈다. 빈 구석이 있어 보이는 A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B. 같은 일을 맡겼더니 A의 成果가 意外로 더 좋았다. A에게는 周邊에서 이런저런 意見을 줬고 A는 그걸 받아들여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反面 B는 純全히 혼자 일했고 그 탓에 補完할 게 있어도 할 수 없었다.

“어릴 때는 만만하지 않게 보이는 게 重要할 수도 있겠지만, 커서는 다르죠. 제가 先後輩에게 더 便한 사람일 수 있었다면 그래서 더 疏通이 잘되는 사람이었다면 더 成長할 수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들죠.”

女性 後輩들에게는 “일하고 싶은 相對가 돼야 한다. 組織에서 때로는 犧牲할 줄 알고 싫은 걸 참을 수도 있어야 한다”고 强調했다.

“똑똑한 女子들이 大槪 일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듣습니다. 實際로 男子보다 더 똑똑할 때가 있고요. 하지만 ‘괜찮은 同僚’가 되는 게 훨씬 重要합니다. 組織에서 혼자 하는 일은 絶對로 없으니까요. 乘勝長驅할 때는 놓치기 쉬운 德目이지만 末年으로 갈수록 態度가 곧 競爭力이 됩니다.”

김유영 記者 abc@donga.com
#최인아 #제일기획 #職場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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