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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女性時代]6部 ‘나는 엄마다’ <上>家長이 된 엄마들|東亞日報 </上>

[新 女性時代]6部 ‘나는 엄마다’ <上>家長이 된 엄마들

  • 東亞日報
  • 入力 2013年 12月 24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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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年 現在 統計廳에 따른 우리나라 女性의 經濟活動 參加率을 보면 25∼29歲가 71.6%로 가장 높다가 30代는 56% 水準으로 떨어진다. 그러다 40代 初盤부터 다시 크게 늘어난다. 40∼44世는 64.3%, 45∼49世는 67.7%로 나이가 들수록 參加率이 높다. 50代 初盤 女性의 經濟活動 參加率도 62.5%나 된다. 이들의 雇傭率은 勞動市場 核心 年齡層인 20, 30代도 모두 제쳤다. 흔히 우리 女性들의 經濟活動 參加率을 M字形이라고 하지만 內容을 들여다보면 大部分이 都小賣業, 飮食宿泊業, 個人 서비스業을 中心으로 하는 生計型 自營業 等 不安定한 일자리에 集中돼 있다. 왜 韓國의 40代 以上 女性 10名 中 6名이 일터로 나가는 걸까. 늘어나는 私敎育費 때문이기도 하지만 經濟 不況에 따른 家長의 責任을 代身 떠맡게 되는 境遇도 많다. 男便의 失職과 破産으로 瞬息間에 家計가 흔들리는 狀況에서 아이를 위해 家庭을 위해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일터로 나가는 엄마들의 마음에는 强한 母性의 힘이 자리하고 있다. ‘新女性時代’ 企劃 마지막 6部 ‘나는 엄마다’ 便(上·下)의 키워드는 ‘母性’이다. 》     
     
     

고층 빌딩 청소를 할 때마다 콧노래를 부른다는 김영미 씨(왼쪽 큰 사진), 자신의 가게를 갖고 아이들과 함께 살려는 꿈도 이룬 조순덕 씨(오른쪽 위),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한 오랜 수고의 성과로 족발가게를 낸 오정남씨. ‘엄마’라는 이름이 이들을 절망에서 일어서고 살아낼 수 있게 만들었다. 김영미·조순덕·오정남 씨 제공
高層 빌딩 淸掃를 할 때마다 콧노래를 부른다는 김영미 氏(왼쪽 큰 寫眞), 自身의 가게를 갖고 아이들과 함께 살려는 꿈도 이룬 조순덕 氏(오른쪽 위),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한 오랜 수고의 成果로 足발가게를 낸 오정남氏. ‘엄마’라는 이름이 이들을 絶望에서 일어서고 살아낼 수 있게 만들었다. 김영미·조순덕·오정남 氏 提供
“엄마는 무너질 수 없다”

● 빌딩 淸掃員 김영미(44·제주시 외도동)

高層 빌딩 淸掃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淸掃業體로부터 “안 된다”는 答이 돌아왔다. 理由는 五萬 가지였다. 키가 작아서(150cm 未滿), 女子라서, 體力이 안 돼서, 애 엄마라서…. 그럴수록 꼭 해내겠다는 熱望이 생겼다. 나에게는 離婚 後 먹여 살려야 할 세 아이가 있었다. 처음엔 아빠가 키웠는데 數個月 만에 셋 모두 내 품으로 왔다.

食堂 일, 家事도우미, 代理運轉…. 닥치는 대로 일했다. 問題는 집貰였다. 濟州島는 집貰를 1年에 한 番 한꺼번에 내는데 목돈을 마련하려니 등골이 휘었다. 高層 빌딩 淸掃 一黨이 높다는 얘길 들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니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淸掃業體 社長님을 每日 졸랐다. 懇切하게.

每番 拒絶하던 社長님이 어느 날 “正말 로프 탈 수 있겠느냐”고 물어 왔다. 나는 “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내게 일을 가르쳐 주던 사람도 처음엔 “못 가르친다”고 했다. 結局 내가 體力도 되고 怯도 없이 해내는 걸 보더니 “더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일하고 싶다는 切實함, 해야 한다는 切迫함이 없었으면 빌딩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로서, 나는 挫折할 수 없었다.

10層 넘는 建物 琉璃窓과 外壁 淸掃 일을 始作한 게 벌써 4年째다. 이 일을 始作할 때만 해도 基礎生活受給者였는데 이제는 需給 狀態를 벗어났다. 누구나 못 할 것이라고 했던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끈 힘은 내 子息들이었다.

밖에서 일하느라 時間이 없다 보니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 한番 제대로 해 주지 못해서 너무 未安하다. 그런 내가 쉬는 날이면 “엄마 疲困하니 주무셔야 한다”고, 房 한 칸에 나를 눕게 하고 애들은 밖에 나간다. 그 마음이 고마울 뿐이다.

사람에게 重要한 건 人性 아닌가. 學校에선 幸福이 成績順 같지만, 밖에선 그게 다가 아니지 않나. 나는 아이들에게 남에게 나쁜 일 하지 말고 아프지 않고 자라 달라는 말만 反復한다.

나 혼자 산다고 생각하면 어려운 狀況이 닥쳤을 때 이겨 낼 힘이 없다. 하지만 내 子息, 내가 책임지겠다고 낳은 子息을 생각하면 뭐든 해야겠다는 힘이 솟는다. 子息들 德分에 淸掃 줄을 타게 됐고, 일어서게 됐다.

나는 建物을 淸掃할 때마다 콧노래를 부른다. 무슨 일이든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고 즐겁게 하려고 한다. 힘들고 어려운 處地에 있는 사람들에게 힘들다고 人相 쓰지 말라고, 울지 말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웃으면 幸福이 오는 게 아니라 幸福하기 위해서 웃는 거다. 世上의 모든 힘겨운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幸福을 찾으라고 努力해 보라고 傳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살 수만 있다면…”

● 김밥집 社長님 조순덕(47·京畿 水原市)


建物 屋上에 올라간 적이 있다. 再婚을 했지만 男便의 疑妻症은 漸漸 심해졌다. 親庭엄마에게 맡긴 두 딸(첫 男便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들)李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목숨을 끊으려는 瞬間 親庭엄마 말씀이 떠올랐다. “父母 그늘이 千里 밖까지 간다. 絶對 딴마음 먹지 마라.” 그날로 나는 일곱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아들은 注意力缺乏過剩行動障礙(ADHD) 診斷을 받았다. 先生님들 손을 할퀴는 等 異常한 行動을 反復했다. 前 男便처럼 社會에서 落伍者가 되면 어쩌나 걱정이 泰山 같았다. 工夫 잘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고 그저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기만 바랐다. 사람만 되면 어떻게든 밥 먹고 살아갈 수 있으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고쳐주고 싶다는 切迫함이 생겼다. 病院, 音樂治療, 美術治療, 놀이治療…. 돈이 必要했다. 김밥 가게에서 일했다. 그리고 얼마 後 내 가게를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발품을 팔면서 목 좋은 곳이 어딘지 꼼꼼하게 알아봤다. 눈여겨본 가게 앞에 하루 終日 서서 어떤 사람들이 오가는지, 年齡帶別로, 性別로 觀察하고 統計를 내보기도 했다. 아들이 正常的인 삶만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切迫感에 힘든 줄도 몰랐다. 떨어져 지내는 두 딸과 함께 살겠다는 꿈도 품게 됐다.

正말 熱心히 일했다. 그리고 이제는 작은 가게지만 김밥 가게 社長이 됐다. 正말 뿌듯하고 感謝하다. 딸들과도 합치면서 꿈을 이뤘다. 둘째 딸은 엄마와 떨어져 있으면서 彷徨을 많이 해 成績이 좋지 않아 專門系高에 보냈는데 全校 1等을 했다. 그 아이가 來年에 大學에 進學한다. 아들도 많이 좋아졌다. 醫師 先生님이 靑少年機만 잘 견디면 別 頉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엄마는 아이들의 그림자 같은 存在라고 생각한다. 언제 어디나 따라다니면서 큰 힘이 되어 주는 存在 말이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려고 했는데 아이들이 내게 큰 힘이 되었다. 家族이란 그 自體로 힘이자 幸福이었다.

아무런 希望을 찾을 수 없어 앞이 보이지 않던 때,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꿈이 있어서 오늘의 내 삶을 이룰 수 있었다. 이제 더 큰 꿈을 갖는다. 나 같은 사람들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다. 요즘은 장사가 잘되지 않는 분들이 우리 가게를 찾아와 相談도 하고 간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분들을 熱心히 도와주고 必要한 것을 알려 주는 일이다. 내가 배운 건 없지만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더불어서 나누면서.

“엄마는 아이들의 未來다”

● 足발가게 社長님 오정남(44·仁川 부평구)


結婚 10年 만에 出産했다. 試驗管 施術에 4番째 挑戰해서였다. 아들딸 雙둥이를 품에 안았을 때 世上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幸福은 오래가지 않았다. 男便의 事業 不渡로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는 身世가 됐다. 雙둥이들 껴안고 죽으려다가, ‘只今 내가 精神 못 차리면 아이들의 未來는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結局 男便과는 離婚했다.

지난 6年間 하루 4時間 自己도 힘든 날이 大部分이었다. 처음에는 工場 化粧室 淸掃 일부터 始作했다. 새벽 3時에 일어나 버스를 두 番 갈아타고 出勤했다. 淸掃 일을 끝내고 낮에는 初等學校 給食室에서 飯饌과 食板 나르는 일을 했다. 집에서 家族을 위해 食事를 準備하기만 했던 내가 400∼500名分의 食板을 옮기려니 힘들었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아침마다 아이들을 떼어놓는 일이었다. 아침에 어린이집에 맡길 때면 헤어지기 싫다고 울어 댔다. 그때마다 살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 제대로 된 엄마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나섰다.

저녁에는 食堂 일을 도왔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끝이 없는 터널을 걷는 것처럼 어둡고 무서웠다. 그래도 잠든 아이들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버티자고, 이 아이들을 웃게 해 주자고 마음먹었다.

6年 만에 모은 돈이 2020萬 원이었다. 男便의 不渡 以後 想像조차 할 수 없었던 큰돈이었다. 化粧室 淸掃를 하러 새벽길을 나설 때마다 數없이 絶望했는데, 처음으로 목돈을 만지니 絶望의 콘크리트를 뚫고 希望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돈을 갖고 知人이 하던 足발 가게를 引受했다. 食堂 일을 하면서 쌓은 料理 技術을 總動員해서 가게를 運營하고 있다. 여기까지 온 것이 나 혼자 힘만으로 된 게 아니라는 생각에, 더 좋은 材料를 쓰고 사람들에게 더 맛있는 밥 한 끼를 提供하고자 努力한다. 사람은 苦痛이 생기면 自己만 힘들다고 느끼지만 周邊을 둘러보면 나보다 힘든 사람이 더 많다.

무엇보다 내가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熱心히 살게 만든 源泉은 아이들이었다. 얼마 前 生日에 딸이 작은 封套를 주면서 “이 돈은 貯蓄하지 말고 엄마 갖고 싶은 것 사야 돼”라고 했다. 3萬 원이 들어 있는데 돈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女子라서, 엄마라서 剛할 수 있었다. 갖고 있는 건 몸뚱이뿐인데, 이 몸뚱이로 熱心히 사는 모습을 子息들에게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처럼 熱心히 살면, 아이들도 어떤 逆境을 맞든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다. 엄마는 아이들의 未來 아닌가.

김지영 記者 kimjy@donga.com     
목지선 인턴記者 誠信女大 英文科 卒     
李秉喆 인턴記者 西江大 新放科 4年
#女性의 經濟活動 #엄마 #女子 #體力 #김영미 #조순덕 #오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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