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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客中心과 만난 技術革新… 洗濯機-冷藏庫, 國民 삶을 바꾸다|동아일보

顧客中心과 만난 技術革新… 洗濯機-冷藏庫, 國民 삶을 바꾸다

  • 東亞日報
  • 入力 2019年 12月 26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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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00年 맞이 企劃/韓國企業 100年, 퀀텀점프의 瞬間들]
<8> 글로벌 LG 이끈 ‘人化經營’


1926年 19歲 少年 九人會는 서울 留學 後 故鄕인 慶南 진주시 지수면 勝算마을에 돌아왔다. 서울 중앙고 讀書클럽에 加入해 西洋 冊도 涉獵한 그는 새로운 世上에 눈을 뜬 後였다. 故鄕에서 日本 商人에 對抗해 마을 協同組合을 組織한 그는 값싸게 生必品을 팔아봤다. 東亞日報 眞珠支局長을 맡아 每日 新聞을 읽으며 더 큰 世上을 꿈꿨다.

“뭐라고? 儒敎 집안의 長孫이 장사를 한다고?”

市內로 나가 장사를 해보겠다고 하자 집안 어른들은 一齊히 反對했다. 하지만 祖父는 苦心 끝에 孫子를 믿어주기로 했다. 父親도 모아놓은 돈 2000원을 내놓고 “네 생각대로 잘 해 보거라. 南과 和睦하게 지내며 信用을 얻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當付했다.

1931年 父親이 준 2000원에 동생 撤回가 調達한 1800원을 얹어 진주시에 布木店人 ‘具仁會商店’을 열었다. 儒家의 靑年이 事業家로 變身하는 瞬間이었다. 布木店은 後날 LG그룹 創業의 基盤이 됐다.


○ “남이 손대지 않은 것을 해라”


LG그룹 創業主인 九人會 會長이 布木店에서 배운 것은 顧客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는 것, 하나를 팔아도 더 좋은 製品을 팔아야 한다는 點이었다. 그저 옷감을 떼다 팔던 그는 어느 날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손님이 좋아할 만한 繡를 놓고 染色을 해보면 어떨까?’ 布木店은 大舶이 났다. 技術을 革新하고 顧客 中心으로 생각하는 文化가 LG그룹에 뿌리박히게 된 것도 이때의 經驗 德分이다.

1947年 丘 會長은 釜山에 락희化學工業(LG化學)을 세우고 럭키크림을 만들었다. 丘 會長과 동생들은 日帝, 美製 化粧品을 넘겠다는 覺悟로 어렵사리 高級 香料를 求하고, 化粧品 技術者를 迎入했다.

럭키크림은 人氣 滿點이었지만 化粧品 통이 問題였다. 자꾸 깨져 不良이 났다. 搜所聞 끝에 플라스틱 關聯 書籍 6卷을 얻어 硏究한 丘 會長은 1952年 戰爭통에 플라스틱 事業 進出을 宣言했다.

“戰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國民의 生活用品을 蹉跌 없게 만들어 내는 일도 愛國하는 길이다. 企業하는 사람으로서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事業을 성공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가.” 락희化學工業이 만든 플라스틱 빗이 人氣를 얻자 主力 品目은 化粧品보다 플라스틱, 合成樹脂가 됐다.

다음은 電子製品이었다. “化學이나 잘하라”는 周邊 사람들의 助言에도 不拘하고 舊 會長은 다시 冒險을 敢行했다. 1958年 設立한 금성사(現 LG電子)는 1959年 韓國 最初의 라디오(錦城 A-501)를 만들었다. 部品 國産化率이 60%에 이르는 意味 있는 進展이었다. 이어 韓國 最初의 ‘눈標 冷藏庫’, ‘백조 洗濯機’, ‘錦城 TV’ 等을 줄줄이 내놓았다. 1967年 동아일보 報道에 따르면 19인치 金星 TV를 타깃으로 한 專門 털이범이 登場할 程度였다. 洗濯機, 冷藏庫, TV가 있는 ‘現代式 家庭’도 續續 늘어갔
다.

○ 人和와 만난 技術革新注意

“어깨가 무겁습니다. 집안 어른들의 期待에 副應해 熱心히 努力하겠습니다.”

1995年 2月 구본무 當時 LG그룹 會長이 동아일보 記者로부터 ‘그룹 總帥가 된 所感을 말해 달라’는 質問을 받고 한 對答이다. 當時 財界는 LG의 行步를 注視하고 있었다. 구자경 名譽會長이 訂正한데도 70歲가 되자 아들에게 會長職을 물려줬기 때문이다. 會社名도 ‘럭키금성’에서 ‘LG’로 바꾸며 글로벌 指向點을 더 分明히 했다.

구본무 會長은 當時 인터뷰에서 超優良企業으로 발돋움하겠다는 抱負를 밝히면서도 “어른들의 뜻에 따라”라는 表現을 자주 썼다. 執務室에는 ‘敬聽(傾聽)’이라고 쓰인 額子가 걸려 있었다. 攻擊的인 事業 擴張에 나서면서도 ‘人和’가 優先이라는 點을 늘 새기고 있었던 셈이다. ‘人和’는 創業 以後 꾸준히 내려온 모토다. 1945年부터 許氏 집안과 함께 經營을 하면서 더 必要한 德目이었을 것이다. 2005年 GS와 系列 分離를 할 때도, 2018年 4世代인 具光謨 ㈜LG 代表가 그룹의 새로운 總帥가 되었을 때에도 雜音 하나 없었다.

李健熙 이화여대 名譽敎授 等이 쓴 ‘燕巖 具仁會 硏究’에 따르면 LG는 創業 初期부터 丘氏와 許氏 집안이 함께 1人 3驛씩 해가며 事業에 뛰어들어 모두가 創業者라는 마인드가 强했다고 한다. 6·25戰爭 當時 흩어졌던 丘氏, 許氏 家族들까지 釜山으로 모여들면서 LG의 釜山 工場은 家族이 經營者이고 職員이었다.

LG의 前職 高位 任員은 “집안 어른의 集團意思決定 體系 속에 ‘리더’에게 힘을 실어주는 雰圍氣였다”며 “때로는 保守的으로 보이다가도 投資해야 할 곳이 있으면 果敢하게 硏究開發(R&D)에 投資해 成長 基盤을 닦아 왔다”고 말했다.

創業主의 技術革新主義는 只今도 이어지고 있다. LG化學의 自動車 배터리 事業은 1992年 구본무 會長이 R&D를 督勵하며 始作됐다. LG디스플레이가 내놓은 世界 最初 大型 有機發光다이오드(OLED), 지난해 世界 最大 家電展示會 ‘CES 2018’을 뒤흔든 돌돌 말리는 롤러블 TV도 革新의 結果物이었다. 具光謨 代表는 總帥가 된 直後 첫 公式 行先地로 서울 江西區 LG사이언스파크를 擇해 技術革新注意를 이어갈 것을 宣言했다.

김현수 記者 kimhs@donga.com
#具仁會 會長 #lg그룹 #人化經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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