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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核實驗 날, 學校 窓門이 몽땅 깨져…어디든 北서 벗어나고 싶었어요”[강은아 記者의 優雅한]|동아일보

“核實驗 날, 學校 窓門이 몽땅 깨져…어디든 北서 벗어나고 싶었어요”[강은아 記者의 優雅한]

  • 東亞日報
  • 入力 2019年 2月 3日 14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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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番째 核實驗을 한 날 저는 學校에 있었어요.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요. 學校 琉璃窓이 다 깨졌거든요. 核實驗을 하면 正말 엄청나게 땅이 흔들려요. 住民들도 核實驗으로 인한 地震이라는 걸 다 알아요. 當局이 善戰하니까요. 待避 같은 건 全혀 없어요. 오히려 자랑스러워하죠.”

세 番째 ‘優雅한 脫北 靑年’인 김인수 氏(假名)는 2009年 5月 25日의 狀況을 이렇게 證言했다. 그는 北韓의 核實驗場이 位置했던 咸鏡北道 吉州郡에서 태어났다. 지난해 北韓이 外國 記者들을 불러놓고 爆破 이벤트를 한 곳이다. 올해 들어서도 規模 2.8의 地震이 일어나는 等 아직까지 餘震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른 住民들과 달리 金 氏는 核實驗을 하는 게 싫었다. 가뜩이나 먹고 살기 힘든 狀況에서 當局이 깨진 琉璃窓부터 被害를 본 모든 걸 學生과 學父母 等 住民들에게 負擔시켰기 때문이었다. 金 氏가 結局 北韓을 벗어나기로 決心하는데 決定的인 事件이었다.

지난달 2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탈북자 김인수 씨(가명·왼쪽)가 강은아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지난달 23日 서울 鍾路區 동아미디어센터에서 脫北者 김인수 氏(假名·왼쪽)가 강은아 記者와 인터뷰하고 있다. 金東周 記者 zoo@donga.com

●‘中國行’과 ‘韓國行’은 天地差異

金 氏는 14살 때부터 場마당에서 中間商人으로 일을 始作했다. 家族 모두 生業에 나서야만 굶어죽지 않을 程度로 經濟事情이 劣惡했기 때문이었다.

“어디든 北韓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中國이든 韓國이든 잘 사는 건 똑같다고 생각했어요. 學校 親舊들의 3分의 1은 다 저처럼 돈벌러 나갔어요. 學校 授業을 들으러 가는 건 奢侈였죠. 七寶山 쪽에서 고기를 떼다 場마당에 내다 팔기도 하고, 짐을 옮겨주고 日當을 받기도 했어요. 제가 한 番 日當을 받아오면 그 돈으로 그래도 2~3日은 먹고 살 수 있었어요. 南韓 親舊들이 工夫하고, PC房 갈 때 北韓 親舊들은 다 그렇게 生業에 從事해요.”

結局 金 氏는 2011年 김정일 國防委員長이 死亡하기 半 年 前쯤 엄마와 函게 北韓을 脫出해 中國, 泰國을 거쳐 南韓으로 왔다. 처음에는 南韓으로 가는지 몰랐다. 이미 外家 親戚들이 脫北해서 中國에 살고 있었기에, 金 氏도 中國으로 간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앞서 脫北한 家族들 亦是 南韓에 定着해 있었다. 北韓에 남은 家族들이 ‘南韓 行 脫北家庭’으로 찍히며 特別한 監視를 當하기 때문에 흔히 있는 거짓말이었다.

“우리 마을에도 꽤 많은 脫北 家庭이 있었어요. 外家 親戚들이 脫北했고 마을 住民들도 다 알았지만 뭐 크게 差別을 받거나 괴롭힘을 當하진 않았어요. 理由는 ‘中國으로 갔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에요. 南韓으로 脫北한 건 完全 다른 問題였어요. 南韓으로 간 脫北家庭들은 더 큰 監視를 받았죠.”

상인과 손님들로 붐비는 북한 시골의 한 장마당 모습. 사진 출처 미국의소리
商人과 손님들로 붐비는 北韓 시골의 한 場마당 모습. 寫眞 出處 미국의소리

●“빨갱이 새끼”… 놀림거리가 되다

2019年 現在 平凡한 大學生으로 살아가고 있는 金 氏는 韓國에서 태어난 여느 大學生들처럼 入試 스트레스, 就業 스트레스 속에서 未來를 위한 準備를 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只今까지 學窓時節은 北韓에서와 마찬가지度 順坦치 않았다.

北韓에서 제대로 된 敎育을 받지 못했던 金 氏가 南韓에 온 건 16살, 中學校 3學年 때였다. 하지만 곧장 中學校 卒業班으로 가기엔 벅차다는 判斷에 中學校 2學年에 入學했다. 그때부터 힘겨운 學窓時節이 始作됐다.

“北韓 말套를 썼기 때문에 北韓에서 온 걸 숨길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다 이야기 했죠. 처음에는 關心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어느 瞬間부터인가 제가 親舊들 사이에서 놀림거리가 되어 있더라고요. 아직 어려서, 成熟하기 前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저한테 빨갱이 새끼라며 막말을 던지는 親舊들도 있었죠. 스트레스 엄청 받았고, 너무 힘들었어요.”

하지만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學校에도, 家族에게도 꼭꼭 숨겨야했다. 얘기한다고 누가 뭔가를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判斷에서였다. 다시 그 때 그 時節로 돌아간다 해도 어떻게 해야 할 지 아직도 모른다.

高等學校에 올라갈 때쯤 金 氏는 다른 地域으로 轉學을 갔다. 말套도 많이 고쳐진 뒤였다. 高等學校에서는 脫北者임을 밝히지 않았다. 多幸히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高等學校 時節은 재미있고 平坦했다.

●‘入試 스트레스’라는 苦難의 行軍

南韓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斷然 高3 時節 ‘入試 스트레스’를 받던 때였다. 살면서 그런 스트레스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

“北韓에서는 工夫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고, 먹고 사는데 汲汲했죠. 하지만 南韓에 온 以上 번듯하게 살고 싶다는 欲心이 强했어요. 언젠가 統一이 되어 北에 남아있는 家族을 만나게 됐을 때, 成功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거든요. 그래서 熱心히 工夫했어요. 하나圓에서 처음으로 알파벳이라는 걸 接한 저에게 英語는 正말 넘기 어려운 壁이었어요. 마음먹고 眞짜 單語를 죽어라 외웠어요.”

自己紹介書를 쓴다는 것도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나 自身을 어필해야 한다는 그 狀況 自體가 처음이었다. ‘入試’라는 單語만 들어도 괴로운 時節이었다.

“北韓에서는 돈만 있으면 좋은 大學에 가요. 實力 없어도 돈만 있으면 되죠. 不法도 돈으로 다 막을 수 있어요. 不法 行爲를 들키면, 돈 주면 되거든요. 하지만 전 돈이 없었어요. 北韓에 있었다면 전 大學도 못 갔을 거고, 이 자리에도 없었을 겁니다.”

金 氏는 南韓에서 가장 幸福했던 瞬間을 “大學 合格 消息을 들었을 때”라고 答했다. 하지만 入學과 同時에 아르바이트에 뛰어 들었다. 學費는 支援을 받을 수 있었지만, 當場 生活費가 急했기 때문이었다.

“호텔, 食堂, 便宜店, 工事판, 안 가본 곳이 없을 程度로 닥치는 대로 일했어요. 父母님께 用돈 안 받고 제가 벌어서 제 生活은 이어나가야 했어요. 放學마다 이렇게 일해서 번 돈으로 工夫도 하고, 旅行도 갔어요.”

金 氏는 北韓이나 南韓이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고 말한다. 어디서든 일해야 먹고 살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差異點이 하나 있다.

“北韓에서는 正말 衣食住를 위해 일을 해요. 나 스스로의 發展을 위한 일이 아닌 거죠. 하지만 南韓에서는 熱心히 일한 만큼 自己啓發을 할 수 있어요.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죠. 여기서 엄청난 差異가 存在해요. 제가 번 돈으로 어디로든 旅行을 갈 수 있다는 게 正말 幸福했어요. 北韓에서는 어딜 가든 通行證을 받아야 하는데, 南韓에서는 마음대로 어디든 다닐 수 있잖아요.”

김인수 씨(가명)는 ‘여행’을 남한에서 할 수 있는 행복한 일로 꼽았다. 김 씨는 “제가 번 돈으로 어디로든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DB
김인수 氏(假名)는 ‘旅行’을 南韓에서 할 수 있는 幸福한 일로 꼽았다. 金 氏는 “제가 번 돈으로 어디로든 旅行을 갈 수 있다는 게 正말 幸福했다”고 말했다. 東亞日報DB

●‘脫北者 出身’ 숨길 수 있다면 숨겨라

하지만 脫北者에 對한 눈에 보이지 않는 差別은 그를 슬프게 했다. 아르바이트를 求하던 中 人力事務所에서 電話가 왔다. 金 氏에게 “軍畢者세요?”라고 묻는 電話였다. 免除라고 對答하자 “或是 北韓에서 왔어요?”라는 質問이 돌아왔다. 金 氏는 率直하네 “네”라고 答했고, 以後 人力事務所에서는 아무런 連絡이 오지 않았다.

“이 일을 겪은 以後로는 늘 그냥 個人的인 事情으로 軍 免除라고 對答해요. 그런 다음부터는 크게 아르바이트를 求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어요. 脫北者에 對한 先入見이 있는거죠. 왜 그런지 모르지만, 脫北者들을 꺼리는 社會的 雰圍氣를 前 實際로 많이 겪었고, 느꼈습니다.”
金 氏는 最近 하나圓에서 敎育받는 靑年들에게 南韓 定着期를 들려주고 學習을 도와주는 멘토로 活動하고 있다. 金 氏는 이 곳에서 만나는 學生들에게 本人이 脫北者라는 걸 밝히고 싶지 않다면, 밝히지 말라고 말한다.

“아직 南韓 社會에서는 脫北者라는 걸 밝히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안 밝히는 게 덜 損害라고 생각해요. 제가 脫北者라고 밝히지 않으면, 아무도 제가 脫北者라는 걸 알지 못해요. 그러면서 막상 脫北者라고 말하고 나면 그 自體로 생겨나는 先入見들로 얼룩지죠.”

金 氏는 統一敎育을 얘기한다. 脫北者들이 直接 靑少年들과 對話하는 時間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先入見 없이 脫北者들을 接하고, 그들의 定着期를 듣는 것이 이런 葛藤과 異質感을 줄이는 데 큰 役割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就業을 하고, 本人의 生活이 安定되고 나면 그런 奉仕活動을 더 熱心히 해보고 싶다는 金 氏. 하지만 아직 金 氏에겐 드높은 ‘就業 門턱’이 놓여있다.

“南韓 親舊들이랑 똑같아요. 就業해야죠. 海外 企業에 들어가고 싶어요. 熱心히 해야죠.”

강은아 채널A 記者 e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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