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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아 記者의 優雅한]“90도 경사진 山 넘고…탈북의 苦痛이 나를 工夫하게 만들었다”|동아일보

[강은아 記者의 優雅한]“90도 경사진 山 넘고…탈북의 苦痛이 나를 工夫하게 만들었다”

  • 東亞日報
  • 入力 2018年 12月 18日 13時 5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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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政治外交學科 2學年 장은숙 氏(21歲)는 白頭山 아랫자락에 있는 北韓 양강도 惠山이 故鄕이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張 氏는 金正恩 政權 初期를 겪었고 2013年 迂餘曲折 끝에 아버지와 함께 南韓 땅을 밟았다. 只今은 紹介팅도 나가고, 스마트폰을 갖고 노는 재미에 푹 빠진 女大生 張 氏. 自由를 찾는 過程은 그리 碌碌치 않았지만 그 過程에서 熱心히 工夫해 將次 法曹人이 되겠다는 꿈을 다지게 됐다.


모두가 監視하고 監視받는 體制

아버지가 脫北을 決心한 理由는 바로 ‘北韓 體制에 對한 幻滅’ 때문이었다. 北中 接境地域의 여느 아버지처럼 張氏의 아버지도 密輸를 해 家族을 먹여 살렸다. 德分에 北韓에서도 먹을 게 없어 苦生해본 적은 없었다. 혜산시에는 前에 비해 市場도 많이 들어섰다.

하지만 먼저 脫北해 南韓에 定着한 姑母 때문에 張氏 家族은 온 洞네 住民들의 監視를 받아야 했고 그런 삶에 漸漸 지쳐갔다.

“洞네에서 저 집 家族 누군가가 脫北을 했다는 걸 다 알아요. 그리고 그 脫北한 家族이 中國으로 건너갔는지, 南韓으로 건너갔는지도 重要하죠. 南韓으로 건너간 境遇 洞네에서 監視를 해요. 特히 人民班長이나 保衛部員 같은 境遇에는 뭐라도 저희한테서 얻어가려고 자꾸 드나들거든요. 脫北家庭이어도 生活 形便이 어려우면 關心 없어요. 그런데 저희처럼 뭔가 빨아먹을 게 있어 보인다 싶으면 더 세게 監視를 하는 便이에요,”

韓國의 姑母는 張 氏 마음에 工夫에 對한 熱情을 불지폈다. 釜山에 定着한 姑母가 電話通話에서 “韓國에선 마음껏 工夫를 할 수 있다”고 한 말에 솔깃했다.

“密輸 일을 하시는 父母님을 따라 자주 移徙를 다녔어요. 제대로 學校를 다니며 工夫를 할 수가 없었죠. 그런데 姑母랑 北韓에서 通話할 機會가 있었어요. 그 때 韓國에선 하고 싶은 만큼 工夫를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드라마를 통해 봤던 韓國의 모습도 張 氏의 脫北을 決定하는 契機가 됐다.

”드라마로 接한 韓國의 모습도 너무 좋았어요. 北韓에서 團束해도 볼 건 다 보거든요. USB로 中國에서 다 들여와요. 個人的으로 문근영 나오는 ‘어린신부’도 正말 재밌게 봤었고, ‘琉璃구두, 가을동화, 天國의 階段’ 等이 기억나요. 北韓에서 韓國 드라마 보고 패션에 正말 影響을 많아 받아요. 또 韓國 말套가 부드럽잖아요. 北韓 말套는 엄청 센데 말이죠. 그런 말套가 괜히 따라하고 싶고, 그랬어요.“

90度 경사진 山을 넘어 南韓으로

中國에서 라오스를 거쳐 泰國으로 들어가 難民 地位를 얻었다는 張 氏는 ”다시 하라면 絶對 못할 짓“이라며 脫北 過程을 떠올릴 땐 고개를 가로저었다.

”中國에서 라오스로 넘어갈 때 山을 하나 넘어야 해요. 그 山을 넘는 게 正말 脫北 過程 中 第一 힘든 코스에요. 山속 傾斜가 90도 가까이 되는데, 어둠 속에서 그런 山을 正말 몇 時間을 타요. 라오스도 北韓과 關係가 좋기 때문에 라오스 넘어가는 길에 걸리면 그대로 北送이에요. 正말 숨죽이는 緊張 속에 山을 넘어요. 사람들 避해서 숲 속에서 쪽잠 자고, 다시 또 배 타러 가고 하는 過程을 거쳐요. 難民 保護 따윈 없어요. 實際 제가 라오스 難民收容所 안에 있을 때, 10餘 名의 靑少年들이 라오스로 넘어오던 中 强制北送 됐다고 뉴스가 나왔다니까요.“

張 氏는 그 過程에서 國際關係와 外交力이 얼마나 重要한지 깨달았다. 韓國이 北韓에 비해 中國, 라오스 等 脫北 루트가 되고 있는 國家들과의 外交 關係가 잘 잡혀있지 않다보니 脫北 過程에서 늘 잡혀 北送될 威脅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難民으로 인정받는 것도 쉽지 않았다. 泰國에서는 無酌定 警察을 찾아가 ”저희 좀 잡아주세요. 難民 收容所로 좀 보내주세요“하고 事情하는 方式밖엔 없는 게 現實이었다.

”제가 政治外交學科를 選擇해 大學에 들어온 理由에요. 그리고 法曹人을 꿈꾸게 된 契機祈禱 하고요. 脫北 過程에서 國際關係와 國際法, 外交關係가 얼마나 重要한 지 스스로 뼈저리게 느꼈거든요.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어요.“

人生을 바꾼 契機, ‘장대현 學校’

장은숙 氏는 南韓으로 들어와 姑母가 터를 잡고 살고 있는 釜山으로 向했다. 南韓 나이로 中學校 3學年이었던 張 氏는 中學校 過程부터 다시 밟아야 했다. 偶然히 張 氏가 學校에 入學할 時期인 2014年 釜山에 처음 門을 연 代案學校인 ‘장대현 學校’를 알게 됐고, 一般學校로의 進學 代身, 이곳에 ‘1期’로 入學했다.

”장대현 學校는 敎會가 세워졌던 平壤 中心의 ‘장대현’ 地域 이름을 딴, 脫北民을 위한 代案學校에요. 嶺湖南 地域에는 脫北民 代案學校가 이 곳 하나뿐이더라고요. 運 좋게 1期로 入學할 수 있었죠. 特히 이 學校는 脫北學生만 있는 게 아니라, 統一을 準備하고 싶어하는 南韓 學生들도 같이 工夫할 수 있어요.“

張 氏는 이 곳에서 親舊들과 3年 間 寄宿舍 生活을 했다. 함께 먹고 자며 끈끈한 友情을 다졌다. 南韓 親舊 亦是 統一 分野에서 일하고 싶어 했기에, 서로를 더 잘 理解했고 今方 어울려 生活할 수 있었다. 特히 南韓 親舊는 脫北 親舊들에게 生疏한 用語와 文化를 傳播하는 데 큰 功을 세웠다.

”親舊들이랑 다같이 놀러 다니면서 처음 듣는 外來語, 처음 보는 브랜드들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어요. 어느 날 親舊가 西面에 가서 ‘書架*쿡 먹자’고 하는데, 그게 뭔지 그 親舊가 아니었다면 몰랐겠죠. 저 亦是 自然스럽게 ‘北韓에서는 이런 걸 먹었어’, ‘北韓에서는 이랬는데~’ 하면서 北韓에 對해 이야기하게 됐고요. 자연스럽게 前 南韓을, 南韓 親舊는 北韓을 알게 되는 契機가 繼續 생긴 거예요.“

다양한 自願奉仕者들과의 接觸도 이 學校에서 張 氏가 얻은 큰 所得이었다. 辯護士나 醫師 같은 다양한 職種의 自願奉仕 先生님들이 찾아와 南韓의 다양한 삶과 職業에 對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各種 統一 團體나 一般 學校 學生들과 共同 포럼을 進行하기도 했다. 앞으로 張 氏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定하는 滋養分이 되었고, 그런 對話를 통해 스스로 ‘롤 모델’을 만들어 나갔다.

”入試班에 있을 때, 大學校 聽講을 할 機會가 생겼었어요. 前 東亞大學校 政治外交學科 授業을 聽講했었는데 1年 間 大學生들과 똑같이 授業을 듣고 試驗도 봐요. 또 辯護士 事務室에서 인턴도 할 수 있었어요. 現實 世界 속 法曹人들의 삶을 體驗할 수 있었죠. 그렇게 南韓에서 法曹人으로 살아가겠다는 꿈을 키웠어요.“

張 氏는 南韓에서 처음으로 宗敎를 接했다. ‘장대현 學校’가 基督敎 代案學校여서 자연스럽게 敎會를 다니게 됐고, 삶의 態度 自體가 完全히 바뀌는 契機가 됐다.

”北韓에서는 宗敎라는 걸 몰랐어요. 아예 몰랐죠. 事實 北韓에서는 나 먹고 살기 바빠요. 北韓의 ‘護喪批判’ 制度라고 아세요? 北韓에서는 生活總和라는 걸 하는데, 各種 集團別로 定期的인 모임을 갖고 思想敎育을 받는 거예요. 거기서 남이 잘못한 걸 批判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게 ‘護喪批判’이에요. 늘 남을 批判하며 살다보면 남에게 뭔가 베풀면서 산다는 槪念을 갖기가 어려워요. 그렇게 個人的인 目標를 優先視하며 살다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도우며 사는 걸 알게 된 거죠. 敎會 先生님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디서든 누군가에게 좋은 影響力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요.“

”제 故鄕은 양강도 惠山입니다“


그렇게 高等學校까지 家族과 共同體 울타리 안에서 자란 장은숙 氏는 고려대 政治外交學課에 入學하면서 自炊房을 얻어 ‘나홀로 서울 生活’을 始作했다. 처음엔 힘들었다. 特히 學校 授業을 따라가며 壁에 자주 부딪혀야 했다.

”大學에 와서 課題를 받을 때마다 正말 당황스러웠어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 用語들이 많았거든요. 그래도 ‘장대현 學校’에서 新聞 要約을 꾸준히 하고 글쓰기도 많이 해봤던 게 큰 도움이 됐어요. 코스피, 코스닥 같은 經濟 用語들은 特히 저한텐 完全히 새롭고 혼란스러운 槪念이었거든요.“

하지만 워낙 밝고 肯定的인 性格에 今方 많은 親舊들을 사귀고, 學校生活에 適應해갔다. 本人이 먼저 北韓에서 왔다고 하지 않으면, 누구도 張 氏가 脫北民人 걸 알지 못했다. 種種 北韓에서 왔다는 데 對해 色眼鏡을 끼고 바라보는 親舊들도 있었다. 하지만 大部分의 親舊들은 張 氏의 故鄕을 크게 介意치 않았다. 그렇게 스스럼없이 親舊들과 어우러졌다.

”처음 만난 親舊한테 대뜸 ‘저 北韓에서 왔어요!’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잖아요. 그렇게 그냥 科 親舊들이랑 親해졌어요. 그러다 우리 科 團톡房(團體 채팅房)에서 自己紹介를 하게 됐어요. 釜山에서 왔다, 水原에서 왔다, 親舊들이 말하길래 저도 양강도 惠山에서 왔다고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양강도 惠山이 어디냐고 묻더라고요. 하하하. 그래서 제가 白頭山 近處에 있다고 했더니 ‘中國에서 오셨구나’ 하더라고요. 中國 아니고 北韓이라고 얘기했더니, 그 親舊가 個人 톡으로 未安하다고 謝過한 일이 記憶나네요. 하하하.“

”平壤은 다른 사람이 사는 世上“

南韓에 와서 가장 그리운 건 北韓에 남겨두고 온 사람들이었다. 北韓 體制가 싫어 故鄕을 떠났을 뿐, 남겨진 親舊와 家族은 늘 그리웠다. 어린 時節을 함께 보낸 앞집 親舊도 늘 생각났다. 統一이 되어 만나면 어떻게 變해있을지 期待가 되기도 했다.

”展 南北 關係를 얘기할 때, 왜 늘 核과 停戰協定만 얘기하는지 모르겠어요. 事實 第一 重要한 건 ‘사람’이잖아요. 國家도 사람이 있어야 運營되는 거고요. 그래서 전 사람의 基本權, 卽 人權이 第一 優先的으로 論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大體 南北 頂上會談 後 發表된 宣言文에 왜 人權은 한 글字도 없는 거죠? 大體 누굴 위한 宣言인건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속상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一旦은 南北關係가 잘 進行됐으면 좋겠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人權도 言及될 거라고 期待합니다.“

最近 南北 關係가 進展되며 張 氏는 平壤의 모습을 여러 媒體를 통해 자주 接한다. 北韓에서 온 張 氏에게도 平壤의 모습은 새롭고, 神奇했다.

”平壤은 事實 地方에 사는 우리에겐 늘 앞서가는 곳이었어요. 다른 사람이 사는 世上인거죠. 돈이 아무리 많아도 出身 成分이 좋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이니까요. 障壁으로 가로막힌 世上이에요. 그래서 事實 요즘 南韓에서 北韓을 떠올리면 平壤만 생각하는 게 맞지 않는 것 같아요. 特히 어르신들은 北韓의 70, 80年代를 記憶하시는데 젊은 世代들은 平壤만 떠올리는 데서 世代 間 異質感이 생기는 것 같아요. 實際 北韓의 모습을 골고루 알려주는 敎育課程이 必要하다고 생각합니다.“

脫北 靑年이 統一에 寄與해야

張 氏는 北韓의 여러 地方에서 와 있는 脫北民들이 經驗을 바탕으로 學校나 地自體에 찾아가서 講演하는 機會가 많았으면 좋겠다. 그런 過程이 結局 統一 後 南北이 하나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張 氏는 脫北民끼리의 年代가 잘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北韓에서 온 親舊들끼리 뭉치면 南韓에 適應을 잘 못한다는 認識이 剛한 것 같아 안타깝다.

”이미 南韓에 와 있는 脫北民 親舊들과 좀 뭉쳐서 統一을 위한 무언가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같은 생각을 가진 親舊들이 모이면 뭔가 큰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南韓 社會에서 脫北民은 少數인데 말이죠. 그래서 前 젊은 脫北民 親舊들과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자리가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강은아 채널A 國際部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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