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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홍근 記者의 優雅한]탈북민 1號 統一學 博士 “南北統一 最大 受惠者는 大韓民國 靑年”|東亞日報

[송홍근 記者의 優雅한]탈북민 1號 統一學 博士 “南北統一 最大 受惠者는 大韓民國 靑年”

  • 東亞日報
  • 入力 2018年 11月 7日 11時 07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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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北民 1號 統一學 博士 주승현 氏



北韓軍에 服務하던 스물한 살 때 AK自動小銃을 들고 軍事分界線을 넘었다. 12年間 惡戰苦鬪 끝에 博士學位를 받고 大學敎授가 됐다. 敵對와 憎惡를 胚胎한 73年 分斷史(史)만큼이나 호락호락하지 않을 統一을 떠올리면 切迫하고 懇切하다.

주승현(37) 仁川大 招聘敎授는 ‘우리의 所願은 統一’이라는 노랫말을 가슴에 안고 사는 ‘大韓民國 靑年’이다. 그는 “靑年들이 흙수저·金수저論에 휘둘리지 말고 ‘統一이라는 希望의 未來’를 準備하면 좋겠다”고 했다.

脫北民 ‘靑年 敎授’

주승현 인천대 초빙교수는 비무장지대(DMZ)에서 남측의 심리전을 제압하는 방송요원으로 북한군에 복무하다 2002년 탈북했다.
주승현 仁川大 招聘敎授는 非武裝地帶(DMZ)에서 南側의 心理戰을 制壓하는 放送要員으로 北韓軍에 服務하다 2002年 脫北했다.
2002年 2月 19日, 찬바람이 鐵條網에 부딪혀 꺼이꺼이 울음을 吐해냈다. 越南(越南)과 國軍 浸透를 막고자 北韓軍이 非武裝地帶(DMZ)에 設置한 1萬 볼트 高壓 電氣鐵條網을 넘었다. 北韓軍 GP(Guard Post)에서 韓國軍 GP는 뛰어서 5分, 걸어서도 10分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그 길은 北韓에서의 스무 해 넘는 人生을 뒤로하고 내디딘 목숨 건 路程(路程)이었다.

“韓國 社會에 나온 지 두 달 만에 얼마 안 되는 定着金마저 詐欺를 當해 날렸다. 定着金을 빼앗아간 사람은 脫北民, 不良 携帶電話와 짝퉁 物件을 나에게 팔아 生計費를 빼앗은 이는 韓國人이다. 生活費라도 벌려고 注油所에 찾아가 面接을 봤지만 大學生과 休學生 求職者가 넘쳐나는 狀況에서 中國 同胞보다 더 어리숙한 나를 뽑아줄 理 萬無했다.”

‘서울살이’는 고단하기 그지없었다. 惡戰苦鬪였다. 正體性 混亂과 相對的 剝奪感 탓에 挫折感을 느꼈다. 그가 올해 出刊한 ‘遭難者들’은 北韓 出身 韓國人을 浮遊(浮游)하는 存在로 描寫한다. ‘遭難者들’에는 韓半島의 뒤틀린 現代史와 일그러진 맨 얼굴이 冊欌마다 ‘아프게’ 담겨 있다. 南과 北 어느 곳에도 屬하지 못한 채 彷徨하는 存在로 살아가는 ‘韓半島의 遭難者’를 一一이 呼名해낸다. 그는 ‘遭難者들’ 序文에 이렇게 썼다.

“나는 흔히 말하는 北韓 出身 脫北民이다. 南北韓 間 對立과 對峙는 이곳에서도 遭難者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處地임을 示唆한다. 韓半島는 分斷 體制 下에서 수많은 遭難者를 量産해냈다. 遭難者들은 如前히 歪曲되고 疲弊한 삶을 살아간다. 統一을 이루지 않고서는 우리 社會의 모든 構成員이 潛在的 遭難者의 運命을 背面(背面)에 깔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脫北民 定着支援 機關 하나圓을 나온 後 鍾路에 있는 일食堂에 就職했다. 韓國에서 태어난 靑年들이 8時間 일할 때 12時間을 일했는데도 받는 돈은 ‘韓國人’보다 적었다. 自由 社會에 온 것은 맞지만 이 社會를 배우지 않고선 平生을 劣等한 打者로 살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入試學院에 登錄한 後 하루 3時間만 자며 일하고 工夫해 연세대 政治外交學課에 入學했다.


遭難者가 된 ‘먼저 온 統一’

“설움 가득한 삶을 强要케 한 韓半島 分斷 構造를 政治學을 통해 들여다보고 싶었다. ‘미친 登錄金’과 生活費 마련이 버거웠다. 北韓에 있을 때 ‘南朝鮮’ 大學生들이 學費 낼 돈이 없어 피를 뽑아 팔아 登錄金을 낸다는 敎育을 받았는데, 韓國에서 實際로 겪어보니 登錄金을 낼 수만 있다면 피를 뽑는 것도 마다할 理由가 없겠다고 數百 番 생각했다. 問題는 내 몸 안의 피를 다 뽑아도 果然 登錄金을 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脫北民 韓國 入國이 本格化한 後 大學과 大學院을 거쳐 博士 學位를 받은 첫 事例이자 最年少 博士學位 取得者다. 연세대 大學院에서 韓半島 分斷 및 統一 硏究로 碩·博士 學位를 받았다. ‘脫北民 1號’ 統一學 博士다. 國會, 동양그룹, 錦湖石油化學, 롯데그룹에서 일했으며 全週期全代에서 敎授로 學生을 가르쳤다.

“博士 論文을 準備하면서 두 番 病院에 실려 갔다. 殘忍한 分斷史를 들여다보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統一 後 統合에 對한 어두운 그림자가 心身을 해쳤다.”

脫北民을 두고 ‘먼저 온 統一’이라고 일컫지만 脫北民 3萬 名도 올바르게 품에 안지 못하는 게 現實이다. ‘分斷의 私生兒’로 스스로를 規定하는 그에게 統一은 切迫함, 懇切함의 對象이다.

“韓國 靑年 世代는 어린 時節부터 熾烈하게 競爭하면서 살아와선지 開拓者가 되기보단 安定的 삶을 바란다. 變化와 挑戰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大學에서 講義할 때 ‘統一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質問에 10名 中 2名밖에 손을 안 들더라. 나라뿐 아니라 個人의 밝은 未來도 統一에서 열린다는 共感帶가 靑年層에서 널리 擴散되면 좋겠다. 統一을 어떤 方式으로 이뤄내느냐에 따라 靑年과 大韓民國의 未來가 갈린다고 생각한다. 南北韓 住民 모두에게 幸福한 삶을 約束하는 方式으로 統一이 이뤄지길 懇切히 所望한다.”

“統一보다 繁榮이 먼저”

그는 “1國家 2體制를 相當 期間 運用해 隔差를 줄인 後 하나 되는 統一 方式이 옳다”고 본다. “統一보다 繁榮이 먼저”라는 것이다.

“統一大박은 輕薄한 表現이되 事實에 根據한 것이다. 韓國에서 政權이 바뀌면 對北政策이 송두리째 바뀌었으나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保守 政權이 들어서도 앞선 合意를 認定한 狀態에서 對北政策을 樹立할 것이라고 본다. 保守 政權이 내놓는 統一政策에서도 北韓 崩壞를 前提로 한 急進的 內容이 相當 部分 사라질 것이다. 統一은 時期的으로 더욱 멀어졌으나 統一에 對한 關心은 擴大될 것으로 보인다. 平和→繁榮→統一 順序로 나아가야 한다. 平和와 統一 사이에 ‘繁榮’이 必要하다. 統一은 南北이 共同 繁榮한 以後의 일이다. 統一은 ‘國家的’ ‘民族的’이라는 낱말이 붙는 當爲의 領域이었으나 앞으로는 個人이 重要해진다. 籌板알을 튕겨 統一費用을 計算하며 損害를 따지기보다 個人이 繁榮하려면 統一을 志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南北統一과 統一로 가는 길의 最大 受惠者는 大韓民國 靑年일 것이다.”

송홍근 新東亞 記者(北韓學 碩士)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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