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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單獨]‘美 스파이’로 몰렸지만…조선 獨立 도와야 했던 日 辯護士의 事緣|東亞日報

[單獨]‘美 스파이’로 몰렸지만…조선 獨立 도와야 했던 日 辯護士의 事緣

  • 東亞日報
  • 入力 2019年 2月 7日 17時 51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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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직접 쓴 외할아버지 평전을 읽고 있는 오이시 스스무 씨. 뒤에 있는 액자 사진이 외할아버지인 고 후세 다쓰지 씨다(왼쪽 사진). 가마쿠라=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
自身이 直接 쓴 外할아버지 評傳을 읽고 있는 오이시 스스무 氏. 뒤에 있는 額子 寫眞이 外할아버지인 故 후세 다쓰지 氏다(왼쪽 寫眞). 가마쿠라=김범석 特派員 bsism@donga.com
“前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000萬 民族을 代表해 正義와 自由의 勝利를 得(得)韓 世界 萬國의 앞에 獨立을 旣成(期成)하기를 宣言하노라….”

한복을 입고 있는 후세 다쓰지. 오이시 스스무 제공
韓服을 입고 있는 후세 다쓰지. 오이시 스스무 提供
1919年 2月 8日 午後 2時. 日本 도쿄 한복판에 位置한 朝鮮기독교청년회관(現在 ‘在日本韓國YMCA’). 메이지(明治)大 留學生이었던 백관수가 朗讀한 것은 大韓의 完全한 自主 獨立을 主張하는 獨立宣言文이었다.

在日(在日)朝鮮留學生들에 依한 獨立宣言文은 韓國 獨立運動의 强勁한 ‘宣布’였다. 學生들의 외침은 3·1運動 等 以後 일어난 韓國 獨立運動의 導火線이 됐다. 韓國 獨立運動史 中 가장 첫머리를 차지하는 이 事件이 일어난 지 올해로 100年이 됐다.
변호사 시절 후세 다쓰지의 모습. 오이시 스스무 제공
辯護士 時節 후세 다쓰지의 모습. 오이시 스스무 提供
● 在日 留學生들의 宣言에 感動 받은 日 辯護士

2·8 獨立宣言을 主導한 代表는 모두 11人이었다. 하지만 최팔용, 송계백 等 조선청년독립단의 辯護를 맡으며 이들을 支援했던 숨은 助力者, ‘넘버 12’를 빼놓을 수 없다. 2004年 日本人 最初로 大韓民國 建國訓長을 받은 바 있는 人權 辯護士 고(故) 후세 다쓰지 氏(布施辰治·1880~1953)다.

2·8 獨立宣言 100周年을 맞아 家門에서 唯一하게 후세 氏의 資料를 모으며 발자취를 찾고 있는 外孫子 오이시 스스무 氏(大石 進·84)를 동아일보가 만났다. 出版社 ‘日本 評論社’ 會長을 지내기도 했던 오이시 氏는 2004年 勳章 授與式에서 후세 辯護士를 代身해 受賞한 바 있다. 인터뷰는 가나가와(神奈川) 現 가마쿠라(鎌倉) 自宅과 후세 辯護士의 墓碑가 있는 도쿄 都市魔(豊島)區 내 査察 죠子이지(常在寺)에서 5時間에 걸쳐 進行됐다.

후세 氏는 日本人 事件은 오랫동안 맡았지만 朝鮮人 辯護는 처음이었다. 오이시 氏는 “2·8 獨立宣言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必然的 事件”이라고 말했다. 그는 “2·8 獨立宣言이 大韓帝國의 復活이 아닌 大韓民國을 標榜한 것은 第1次 世界 大戰 直後 우드로 윌슨 美國 大統領이 主張한 ‘民族自決主義’에 影響을 받았기 때문”이라며 “後世 辯護士는 그 宣言 內容과 깊이에 感動을 받았고 朝鮮 留學生들은 韓民族의 尊嚴을 尊重해 준 後世의 辯護에 感激했다”고 말했다.
후세 다쓰지 씨(오른쪽)가 생전에 변호를 맡았던 독립운동가 박열(왼쪽)과 함께 있다. 오이시 스스무 제공
후세 다쓰지 氏(오른쪽)가 生前에 辯護를 맡았던 獨立運動家 朴烈(왼쪽)과 함께 있다. 오이시 스스무 提供

● ‘美國 스파이’로 몰렸지만…조선 獨立을 도와야 했다

2·8 獨立宣言 後 署名 委員 等 27名의 留學生이 逮捕됐고 1審에서 有罪를 宣告 받는 等 裁判은 빠르게 進行됐다. 留學生들은 人權 辯護士 후세 씨를 찾았고 그가 2審 辯護를 맡으며 狀況은 달라졌다. 留學生들은 內亂罪를 면하고 出版法 違反 等 比較的 가벼운 禁錮刑(7~9個月)을 받게 됐다.

후세 氏가 2·8 獨立宣言 事件을 맡게 된 것에 對해 오이시 氏는 “外할아버지는 邊方 도호쿠(東北) 出身 農民으로 스스로 略字라고 생각했다”며 “그는 植民地 百姓을 救援 받아야 할 存在라고 여겼다”고 말했다. 또 “어릴 적 漢學과 留學을 익히며 朝鮮에 對한 敬畏心도 갖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후세 辯護士는 以後 獨立運動家 朴烈, 의혈단원 김시현 等 굵직한 事件을 맡으며 朝鮮의 獨立을 도왔다. 1923年에는 동아일보의 後援으로 韓國에 처음 訪問해 獨立 講演會를 여러 次例 이어갔다. 같은 해 關東大地震이 發生하자 日帝의 朝鮮人 虐殺에 對해 “朝鮮人들에게 鄭重히 謝過를 드리고 責任을 痛感한다”며 동아일보에 謝罪文을 寄稿했다. 1925年 여름 서울 水害 發生 當時 誠金을 모았다.
후세 다쓰지는 동아일보의 후원으로 1923년 처음 한국에 왔다. 당시 천도교회 강연회장에서 조선 독립에 관한 강연을 하는 모습. 주변에 일본 순사들이 서 있다. 오이시 스스무 제공
후세 다쓰지는 동아일보의 後援으로 1923年 처음 韓國에 왔다. 當時 天道敎會 講演會場에서 朝鮮 獨立에 關한 講演을 하는 모습. 周邊에 日本 巡査들이 서 있다. 오이시 스스무 提供

●只今 살아있다면 統一 위해 努力했을 것

日帝는 후세 氏를 ‘美國 스파이’로 몰며 壓迫했다. 出版物 發賣 禁止, 辯護士 資格 剝奪, 懲役 等을 當해야 했다. 오이시 氏도 ‘美國 스파이의 外孫子’라는 理由로 監視를 받았고 學友들로부터는 따돌림을 當했다. 오이시 氏는 “‘바르고 弱한 者를 위해 더 큰 힘을 다 해라’라는 處世訓으로 行動한 그의 信念은 決코 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2·8 獨立宣言 100周年. 후세 辯護士가 只今의 韓國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오이시 氏는 “于先은 눈부시게 成長한 韓國의 모습을 기쁨으로 祝福할 것이지만 한 便으로는 둘로 갈라진 韓半島의 狀況, 北韓 住民들의 人權 蹂躪 等에는 안타까워할 것”이라며 “外할아버지가 살아있다면 南北 統一을 위해 努力할 것”이라고 말했다.

强制徵用 大法院 判決 等으로 冷冷해진 現在의 韓日 關係에 對해서도 오이시 氏는 “韓國의 過度한 反日(反日) 注意를 利用하려는 日本人들이 적지 않다. 이는 結局 ‘아베 政權’에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다”며 “冷靜한 政治力이 어느 때보다 韓日 兩國에 必要할 때”라고 말했다.

후세 다쓰지가 변호를 맡은 의열단원 김지섭이 옥중에서도 단식 투쟁을 이어가며 일제에 저항하자 후세 다쓰지가 이를 걱정하는 김지섭의 동생 김희섭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냈다. 오이시 스스무 제공
후세 다쓰지가 辯護를 맡은 義烈團院 金祉燮이 獄中에서도 斷食 鬪爭을 이어가며 日帝에 抵抗하자 후세 다쓰지가 이를 걱정하는 金祉燮의 동생 김희섭에게 激勵의 便紙를 보냈다. 오이시 스스무 提供

●가장 貴한 資料는 1925年 김지섭 安否 傳하는 親筆 便紙

오이시 氏는 外할아버지와 關聯된 가장 重要한 資料로 便紙 한 桶을 꺼냈다. 1925年 1月 18日 날짜가 찍힌 總 3張의 便紙는 후세 氏가 當時 義烈團員이었던 秋江(秋岡) 金祉燮의 동생 김희섭에게 보낸 親筆 便紙다. 오이시 氏는 “김지섭은 후세 辯護士가 가장 鮮明하게 記憶하는 韓人 辯護人”이라고 말했다.

김지섭은 1924年 1月 5日 日本 도쿄 日王 宮城의 니주바시(二重橋)를 向해 爆彈 3個를 던졌다. 1923年 간토(關東)大地震 當時 日帝의 朝鮮人 虐殺에 對한 復讐였다. 그는 自身의 ‘擧事’가 日本을 覺醒시키기 爲한 것이라며 “死刑이 아니면 나를 無罪로 釋放하라”고 밝히는 等 鬪爭을 이어 나갔다. 及其也 抵抗의 뜻으로 獄中 斷食 鬪爭도 불살랐다.

그의 斷食 鬪爭은 當時 동아일보 等을 통해 報道됐다. 이를 본 金祉燮의 동생인 김희섭은 兄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金祉燮의 辯護를 맡은 후세 辯護士에게 問議를 했고 후세 辯護士는 3張의 종이에 答辯을 했다.

조선 풍수해 당시 기금 마련을 위해 후세 다쓰지가 만든 전단. 사진제공 오이시 스스무
朝鮮 風水害 當時 基金 마련을 위해 후세 다쓰지가 만든 傳單. 寫眞提供 오이시 스스무

“金 君의 投獄은 오늘도 鬪爭의 精神으로 不斷히 戰爭을 繼續 이어나가는 理由 中 하나입니다. (不當함에) 끝까지 積極的으로 싸우고, 또 싸워야 하는 것이 올바른 길임에도 ‘단식’이라는 消極的인 手段밖에 取하지 못함을 呼訴하는 것은 참 悲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後世 氏는 金祉燮의 鬪爭 意志를 높이 評價했다. 그는 “許諾된 手段을 모두 動員해 싸우고 있는 것은 그의 剛한 信念 때문”이라며 “이렇게까지 할 수 밖에 없는 金 君의 마음을 理解한다”이라고 評價했다. 이어 “이제 平素처럼 食事를 하고 健康도 回復했다”며 김희섭을 안심시켰다. 김지섭은 3年 後인 1928年 2月 20日 腦溢血로 지바(千葉) 刑務所 獨房에서 殉國했다.

오이시 氏는 “金祉燮의 屋內 鬪爭 德分에 以後 많은 拘留自家 人權 等의 側面에서 侵害받지 않게 됐다”며 “外할아버지는 그의 대단한 鬪爭과 信念을 極讚했다”고 말했다.

후세 다쓰지가 2004년에 받은 대한민국 건국 훈장. 가마쿠라=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
후세 다쓰지가 2004年에 받은 大韓民國 建國 勳章. 가마쿠라=김범석 特派員 bsism@donga.com

이 資料를 함께 갖고 있는 韓國 獨立記念館의 윤소영 學術硏究部長은 “日帝 强占期 被告와 辯護人의 關係를 뛰어 넘는 信賴와 人間味가 묻어나는 內容”이라며 “邊方에서 韓國의 獨立 運動을 도운 日本人이 있었음에 注目하지 않을 수 없다”고 評價했다.

가마쿠라 도쿄=김범석 特派員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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