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運動 100年, 2020 東亞日報 100年]百年 만의 歸還: 3·1運動의 記錄
國史編纂위-本報 27日 3·1運動 100周年 學術會議
<4> 示威 퍼뜨린 ‘미디어’로서의 旗발
#1. 1919年 3月 2日 밤. 黃海道 谷山에서 天道敎를 이끌던 김희룡은 京城에서 傳達된 獨立宣言書를 傳達받는다. 天道敎 指揮部 10餘 名은 3月 4日을 巨事日로 定하고 萬歲示威를 計劃한다. 그러나 獨立宣言書만으로 隊列을 이끌 수 있을지 疑問이었다. 結局 이들이 考案해 낸 方法은 ‘旗발’이었다. 4日이 되자 ‘朝鮮獨立’이라고 적힌 큼지막한 旗발을 만들어 群衆 數百 名과 함께 黃海道 地域의 3·1萬歲示威를 이끈다.
#2. 慶南 咸安郡의 儒生들은 3月 5日 京城에서 열린 高宗의 局長에 參與한 後 故鄕에서 萬歲示威를 準備한다. 地域 내 書堂 敎師와 學生들에게 連絡해 大韓獨立哥라는 노래를 만들고, 太極旗도 製作했다. 2週間 準備한 끝에 3月 19日 함안邑 章에서 獨立宣言書를 配布하고 太極旗를 揭揚하며 群衆 3000餘 名과 함께 나선다.
1919年 3月 1日부터 全國을 萬歲의 喊聲으로 울리게 한 3·1運動의 中心에는 太極旗, 獨立기와 같은 旗발과 愛國歌, 독립가 等 노래가 있었다. 3·1運動에 參與한 大衆에게 ‘獨立’이라는 메시지를 刻印시켜 준 ‘미디어’인 셈이다.
最近 構築된 國史編纂委員會(國便)의 ‘三一運動 데이터베이스’(國便DB)를 통해 萬歲示威 現場의 미디어를 分析한 새로운 硏究 結果가 나왔다. 이기훈 연세대 史學科 敎授가 3·1運動 關聯 判決文을 分析해 宣言書와 旗발, 노래 等의 使用 現況을 分析한 論文 ‘3·1運動 미디어의 象徵體系’다. 이 硏究는 국便과 동아일보가 27日 서울 鍾路區 일민미술관에서 共同 主催하고, 일민미술관이 後援하는 3·1運動 100周年 記念 學術會議 ‘百 年 만의 歸還: 3·1運動 示威의 記錄’에서 發表한다.
3·1運動을 主導한 民族代表 33人은 獨立宣言書를 全國 各地로 뿌렸다. 目標는 宣言書를 朗讀하며 朝鮮人 모두가 參與하는 萬歲示威를 일으키는 것. 大韓帝國에서 使用된 太極旗나 學生들이 부르던 愛國歌는 考慮 對象이 아니었다. 實際 3月 1日과 5日 鏡城 市內에서 열린 萬歲示威에서는 太極旗를 비롯한 旗발과 독립가 같은 노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地域에서 3·1運動을 主導한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當時 朝鮮의 文字 讀解率은 20%에 不過했고, 地域에서는 識者層의 比率이 더 떨어졌다. 漢字로 된 獨立宣言書 內容을 大衆이 오롯이 理解할 것으로 期待하기 어려운 狀況이었다.
이들은 大衆이 直觀的으로 理解할 수 있는 旗발을 主要 方式으로 選擇한다. 代表的으로 1919年 4月 5日 忠南 靑陽郡 정산면 市場에서는 萬歲의 喊聲과 함께 太極旗 10張을 뿌리며 獨立示威가 始作됐다. 全南 康津郡에서도 4月 4日 靑年學生과 基督敎人들이 獨立宣言書와 독립가를 謄寫하고, 太極旗를 나눠 줬다.
李 敎授는 “3·1運動 흐름의 初盤이었던 3月 初旬(1∼10日) 發生한 事件을 다룬 55件의 判決文 가운데 25%에 이르는 14件이 宣言書 中心이었지만 3月 中旬(11∼20日)에는 11%, 3月 下旬(21∼31日)에는 7%로 줄었다”며 “3·1運動이 小都市로 퍼져나가면서 宣言書 代身 旗발이나 檄文 等이 主要 手段으로 登場했기 때문”이라고 說明했다.
興을 북돋는 노래도 大衆을 이끈 主要 미디어였다. 3月 1日 平壤 崇德學校에서는 樂隊의 演奏에 맞춰 讚美歌를 부르며 示威를 始作했고, 3月 19日 慶南 進駐軍 眞珠麵에서는 북과 喇叭을 앞세우고, 萬歲 行進을 했다. 3·1運動이 全國 各地로 퍼진 4月 初旬(1∼10日)에 發生한 事件을 다룬 判決文 94件에는 노래 等 音聲이 主導한 示威가 折半 以上인 49件에 이른다.
李 敎授는 “3·1運動을 契機로 太極旗가 民族의 抵抗과 獨立의 象徵이라는 性格이 確固해졌다”며 “當時 使用된 미디어인 旗발과 宣言文, 檄文, 懸垂幕, 노래가 자리 잡으면서 近代的인 政治 鬪爭으로서 ‘示威’라는 方法이 大衆에게 自然스레 刻印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유원모 記者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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