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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名作 속의 名人을 찾아서] <中> 歷史上 最大의 文化 藝術 後援者 메디치 家門|東亞日報 </中>

[르네상스 名作 속의 名人을 찾아서] <中> 歷史上 最大의 文化 藝術 後援者 메디치 家門

  • 東亞日報
  • 入力 2011年 6月 1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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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門은 스러져도 그들이 남긴 文化 藝術은 永遠하다…”

우피치 미술관 기둥에는 메디치 가문이 후원한 20여 명의 쟁쟁한 문화예술인들의 실물조각이 봉안돼 있다. ①단테 ②미켈란젤로 ③다빈치 ④마키아벨리. 피렌체=오명철 문화전문기자 oscar@donga.com
右피치 美術館 기둥에는 메디치 家門이 後援한 20餘 名의 錚錚한 文化藝術人들의 實物조각이 奉安돼 있다. ①단테 ②미켈란젤로 ③다빈치 ④마키아벨리. 피렌체=오명철 文化專門記者 oscar@donga.com
《人類 歷史上 한 家門이 이렇게 엄청나게 文化藝術에 寄與한 적은 없었다. 15世紀부터 300餘 年間 르네상스 思想 藝術 科學 等을 폭넓게 後援했던 메디치 家門 말이다. 小規模 金融業으로 出發한 이 家門은 ‘한 番 因緣을 맺은 顧客은 決코 배반하지 않으며, 죽더라도 信義를 다한다’는 營業 傳統을 確立해 富와 榮譽를 同時에 거머쥐었다. 歷代 바티칸 敎皇들의 去來 銀行이었고 레오 10世와 클레멘트 7歲 等 네 名의 敎皇과 카테리나 데메디치, 마리아 데메디치 等 두 名의 프랑스 王妃를 輩出했다. 메디치 家門의 女性들이 프랑스로 시집가기 前만 해도 프랑스料理는 형편없었으나 그들이 이탈리아에서 가져간 세련된 飮食과 食卓 文化가 오늘의 프랑스料理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런 世俗的 榮光은 단테, 보카치오, 페트라르카, 조토, 알베르티, 브루넬레스코, 마사초, 도나텔로, 미켈蘆草, 우첼로, 베로키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보티첼리, 마키아벨리, 갈릴레이 等 無數한 藝術家와 思想家 學者 等을 發掘 및 後援해 ‘르네상스時代’라는 人類 文明의 黃金期를 이룬 不滅의 業績을 넘지 못한다.》

‘꽃의 都市’라는 意味의 피렌체는 봄이 가장 아름답다. 特히 4月과 5月이 壓卷이다. 이 季節에 이 都市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感動과 戰慄을 느낀다. 저 有名한 피렌체 大聖堂 꼭대기와 外郭 언덕에 있는 미켈란젤로 廣場에서 이 都市를 내려다보면 그 偉大한 藝術家들이 只今도 都市 어딘가를 奔走히 오가고 있는 것 같은 幻想에 빠지게 된다.

메디치 家門의 所藏 作品 收藏庫에서 出發해 ‘비너스의 誕生’ 等 수많은 르네상스 名畫를 所藏하고 있는 右피치 美術館. 400萬 張의 甓돌을 二重으로 쌓아올린 브루넬레스코의 돔으로 有名한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聖堂.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났던 都心의 작은 聖堂. ‘彫刻의 絶頂’으로 손꼽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와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未完成 彫刻作品이 展示되고 있는 아카데미아 博物館. 1439年 東方敎會와 西方敎會의 歷史的인 첫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데카메론’의 出發點이 된 산타마리아 노벨라 聖堂.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브루니 等 天才들이 잠들어 있는 산타크로체 聖堂.

한 點, 한 點이 硏究 對象인 彫刻品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널려 있는 베키오 政廳과 시뇨리아 廣場. 메디치 家門의 復興을 이끈 코시모 데메디치의 무덤을 비롯해 메디치 家族이 永眠하고 있는 산로렌초 聖堂과 르네상스 思想의 胎動地人 메디치 家門의 偉大한 圖書館 비블리오테카. 메디치 邸宅과 피티 宮殿.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살았던 집도 그대로 保存돼 있다. 그들이 偶然히 다시 만나 사랑의 人事를 건넸다는 산타트리니타 다리에 가면 이제 막 散策 나온 단테와 베아트리체를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들 程度다.

最近에는 特히 映畫나 小說로 ‘冷靜과 熱情 사이’를 본 사람들이 이 都市 곳곳을 돌아다니며 作品 속 한 場面을 追憶해 낸다. 特히 日本人들은 映畫 속 男女 主人公이 올랐던 大聖堂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두세 時間씩 줄을 서서 기다리곤 한다.

○ 14世紀 末 小規模 金融業으로 出發


메디치 家門의 出發은 微微했다. 創業主인 조반니 디 備置가 14世紀 末 門을 연 메디치 銀行은 別 볼일 없는 後發業體로 15世紀 初만 해도 오늘날의 地方 銀行이나 貯蓄銀行에 不過했다. 그러나 海賊 出身이며 돈으로 博士學位와 樞機卿 자리를 사들인 데 이어 피사에서 第3의 敎皇으로 選出된 요한 23歲의 主去來 銀行이 되면서 유럽 金融業의 中心 銀行으로 登場한다.

메디치家는 神聖로마帝國의 지기스문트 皇帝에 依해 3名의 敎皇이 强制 廢位 및 逮捕되면서 오갈 데 없게 된 요한 23歲의 保釋金을 全額 融資해주었을 뿐 아니라 居處와 生活費를 支援했다. 또 그가 죽자 새 敎皇의 威脅에도 不拘하고 一流 藝術家들을 動員해 鄭重한 禮遇를 갖춰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聖堂의 세례당 內部에 安葬했다. 敎皇은 勿論이고 유럽의 王家와 名門 貴族들은 메디치 銀行의 이 같은 信義에 感動해 앞다퉈 自身들의 預金과 祕資金을 맡겼다. 요한 23世가 顧客에 對한 信義를 저버리지 않은 메디치 銀行에 對한 感謝의 뜻으로 남긴 聖物(聖物·Holy relic)인 ‘性 洗禮 요한의 손가락’은 이 家門에 精神的 아우라를 附與했다.

○ “아무리 돈이 많아도 謙遜해야 한다”

고촐리가 메디치-르카르티 저택 2층 가족기도실에 남긴 프레스코 벽화 ‘동방박사의 행진’ 중 일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역사적 만남을 기록하고 있다. 백마를 타고 보무당당하게 나아가는 메디치 가문의 꿈나무 로렌초①의 뒤를 이어 당나귀를 타고 
있는 가문의 중흥조 코시모와 그 오른쪽에 백마를 탄 피에로 부자②, 그리고 붉은 모자를 쓰고 관람객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작가 고촐리③.
고촐리가 메디치-르카르티 邸宅 2層 家族企圖室에 남긴 프레스코 壁畫 ‘東方博士의 行進’ 中 一部. 東方敎會와 西方敎會의 歷史的 만남을 記錄하고 있다. 白馬를 타고 步武堂堂하게 나아가는 메디치 家門의 꿈나무 로렌초①의 뒤를 이어 唐나귀를 타고 있는 家門의 中興祖 코시모와 그 오른쪽에 白馬를 탄 피에로 富者②, 그리고 붉은 帽子를 쓰고 觀覽客을 正面으로 凝視하고 있는 作家 고촐리③.
市內 한복판에 있는 메디치-르카르티 邸宅은 意外로 조촐하다. 로마의 名門巨族처럼 언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市場바닥에 자리 잡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謙遜해야 한다는 이 집안의 精神에 따라 별다른 裝飾과 治粧도 없다.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언젠가 나도 이 집에서 살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마 重要한 人物은 아니었을 것이다. 집안의 ‘執事’ 程度가 아니었을까’ 하는 데까지 發展한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家門의 養子로 入籍돼 이 집에서 2年을 살면서 眼目을 키워 나갔다.

邸宅의 안쪽 2層에 있는 家族 企圖室로 들어섰다. 10餘 名이 들어설 수 있는 조촐한 規模다. 赦免을 가득 메우고 있는 낯익은 프레스코畫가 눈에 들어온다. 베盧初 고촐리가 그린 ‘東方博士의 行進’이다. 이 家門의 中興祖 코시모 데메디치의 아들이자 ‘偉大한 者’ 로렌초 데메디치의 아버지였던 피에로 데메디치가 고촐리에게 注文해 1459年에 始作해 1461年에 完成한 作品이다. 멀리 山 頂上에 있는 아기 예수에게 敬拜하기 위해 東方博士의 無理가 떼를 지어 가는 場面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얼마 前에 그린 것처럼 色相이 鮮明하다.

이 作品은 1439年 그리스 비잔틴제국의 東方敎會와 西方 가톨릭교회의 첫 歷史的 만남을 記錄하고 있다. 두 敎會는 漸增하는 이슬람勢力을 ‘共同의 敵’으로 認識하기 始作했다. 當時 메디치 家門을 이끌던 코시모는 이를 看破하고 公議會에 드는 莫大한 費用을 自身의 私財로 負擔해 새로운 國際秩序를 摸索했다. 東方敎會에서 使節團 700餘 名이 찾아와 盛大한 待接을 받았다. 特히 밤마다 會談 場所인 산타마리아 노벨라 聖堂에서 플라톤 講義가 벌어졌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合理的 傳統에 土臺를 둔 西方社會가 플라톤의 超越的 思考와 感性的 直觀으로 轉換하게 되는 決定的 契機가 된다. 그들이 膳物로 주고 간 플라톤 全集은 西洋 近代의 出發點이 된다. 鷄卵을 삶아 먹거나 프라이팬에 깨뜨려 먹던 피렌체 사람들은 東方으로부터 스크램블 에그 料理法을 배웠고 이때부터 이탈리아料理에 오믈렛이 登場했다.

作品의 主人公인 東方博士들의 面面도 흥미롭다. 세 東方博士는 各各 비잔틴 皇帝 조반니 8歲, 그리스正敎의 總主敎 주세페, 그리고 메디치 家門의 希望이었던 어린 로렌초 데메디치가 의젓하게 白馬를 타고 行進하고 있다. 그의 뒤에 唐나귀를 타고 가는 老人이 피렌체 市民들로부터 ‘이 나라의 아버지(Pater Patriae)’로 尊敬 받은 코시모 데메디치이고 한 사람 건너 白馬를 탄 피에로가 가고 있다.

○ 政治 激變期에도 洞察力으로 危機 克服

코시모는 피렌체 市內에서 移動할 때는 늘 걸어 다녔고 長距離 旅行을 할 때는 얼마든지 좋은 말을 타고 다닐 수 있었으나 늘 唐나귀를 타고 다니며 自身을 낮췄다. 政治的 激變期에 權力 다툼에서 밀려나 投獄과 追放의 危機를 겪기도 했으나 남다른 洞察力과 힘의 均衡政策으로 每番 이를 克服했다. 末年에는 피렌체 隣近 카레地 別莊에 隱居하면서 긴 沈默과 思索으로 보냈다. 아들 피에로는 이 집안의 遺傳的 病患인 重症 通風으로 人生의 大部分을 苦痛 속에서 지냈고 라이벌 貴族 家門으로부터 暗殺을 當할 뻔했으나 寬容과 未來를 準備하는 洞察力으로 家門을 盤石 위에 올려놓았다. 아버지 코시모가 彫刻家 도나텔로, 畫家 프라 안젤리코, 建築家 미켈蘆草를 後援했다면 그는 火가 고촐리와 보티첼리를 後援했다. 特히 家門의 將來를 위해 로마의 貴族 家門에서 며느리를 데려왔다. 메디치 家門의 全盛期를 謳歌했던 로렌초는 學者들의 熱烈한 後援者였으며 미켈란젤로를 發掘해 養子를 삼은 反面 다빈치는 내쳤다. 이처럼 르네상스時代 名作들에는 저마다의 獨特한 내러티브가 있고 歷史的 脈絡에서 그를 읽어내야 眞正한 觀覽이 된다.

고촐리度 自身의 肖像을 그림 속에 남겼다. 세 番째 줄 人物 中 붉은色 帽子를 쓰고 觀覽客을 正面으로 凝視하고 있는 사람이다. 自己 얼굴만으로는 不足하다는 듯 쓰고 있는 帽子에 ‘베盧初의 作品’이란 글씨를 써 넣었다. 르네상스時代 畫家와 彫刻家들은 이런 式으로 自身을 後代에 記憶하게 했다.

한便 곰브리치는 메디치 家門의 文化藝術 後援에 對해 “銀行業에 對한 宗敎界와 社會的 敵愾心을 充分히 認識하고 高利貸金業의 汚名을 씻기 위해 하느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社會에 後援한 것”이라는 分析을 내놓기도 했다.

르네상스의 天才 藝術家들과 비슷한 時期에 살았던 安堅 申師任堂은 勿論이고 그 後에 朝鮮 땅에서 태어난 金弘道 신윤복 旌善 張承業 等은 왜 그림 속에 自身의 얼굴을 남기지 않았던 걸까. 아니, 그랬으나 우리들이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朝鮮에는 왜 메디치 家門과 같은 名門家(名門家)가 없었으며, 只今 우리 곁에는 왜 이런 家門이 없는 걸까.

피렌체=오명철 文化專門記者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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