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李明博(MB) 前 大統領의 回顧錄 ‘大統領의 時間’을 꺼내 읽었다. 이른바 進步에서 保守로의 政權 交替이고, 特히 尹錫悅 大統領 當選人의 政府引受팀 外交安保 分科에 MB맨들이 大擧 登場하니 그 時節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얘기들이 나오는 狀況이기에. 歷代 어느 大統領이나 功過(功過)에 對한 評價가 엇갈리지만 MB의 對外政策은 特히나 그렇다. 對外的 成果는 華麗했다. 美國 大統領과의 緊密한 關係, 主要 20個國(G20)과 核安保 頂上會議 같은 大型 이벤트, 韓美 自由貿易協定(FTA) 完成 等等. 하지만 MB 時節은 北韓의 天安艦 爆沈과 延坪島 砲擊으로 대표되는 南北 衝突의 時代로 記憶되는 게 事實이다. 그래서인지 MB 回顧錄의 折半이 外交安保와 對北關係에 割愛됐다. 그만큼 자랑하고 싶은 것도, 說明할 것도 많다는 뜻일 듯싶다. 北韓의 頂上會談 提案과 中國 總理의 勸誘에 따른 여러 次例의 對北 接觸 祕史(秘史)를 公開한 것도 그런 脈絡으로 읽힌다. MB 政府는 以前 10年의 햇볕政策을 ‘퍼주기’라고 批判하며 ‘原則 있는 對北政策’을 내걸고 出帆했다. 韓美同盟 等 4强 外交를 앞세웠고, 對北政策은 뒤로 밀렸다. 北韓은 對南 非難과 軍事 挑發에 나섰고, 南北關係는 葛藤과 緊張의 連續이었다. 그런 渦中에도 祕密接觸은 이어졌다. 이런 모든 接觸이 無爲로 끝난 뒤 MB 政府는 ‘方法論的 柔軟性’을 내세우는가 하면, 김정일이 死亡한 뒤엔 ‘統一은 도둑같이 온다’며 北韓 崩壞論에 기대기도 했다. 다만 MB는 回顧錄에서 이렇게 强辯했다. “頂上會談을 하는 것보다 原則을 지키는 것이 내게는 더 어려운 일이었고, 더 값진 일이기도 했다.” MB는 回顧錄을 두고 “내 個人의 記錄이자 參謀들의 集團 記憶”이라고 했다. 回顧錄 作成에 外交安保 分野 멤버로 參與해 甘受까지 맡았던 사람이 김태효 前 對外戰略企劃官이다. 北核 ‘그랜드바겐’의 設計者이자 어그러진 對北 接觸에도 나섰던 MB 外交의 核心이었다. 마흔을 갓 넘어 靑瓦臺에 들어간 그는 ‘소년 策士’로 불렸다. 記者들이 電話를 하면 늘 “質問은 30秒 以內로, 工夫해서 물어보세요”로 始作하는 까칠한 人物이었다. 그가 尹 當選人의 引受委員이 됐다. 尹 當選人과는 한 아파트에 사는 洞네 住民이다. 大選 때 尹 當選人의 ‘포린어페어스’ 寄稿文도 事實上 그의 作品이라고 한다. 寄稿文은 文在寅 政府가 北韓에 屈從的이었고 中國에 지나치게 고분고분했다고 批判했다. 그러면서 明瞭性과 大膽함, 原則을 强調했다. 사드 追加 配置, 쿼드 加入論도 담겼다. 이를 두고 MB式 外交로의 復歸 或은 한발 더 나간 것이라고 본다면 飛躍일까. 尹 當選人에 對한 美國 側 反應은 肯定的이다. 美 議會調査局(CRS)도 “美國 政策에 더 符合할 것”이라고 評價했다. 다만 그의 先制打擊 發言과 關聯해 “美國은 南北 軍事 衝突이 나면 種種 韓國에 ‘軍事 對應을 自制하라’고 壓迫했는데, 이는 尹의 公約과 相衝될 수 있다”고 했다. 爆沈과 砲擊 以後 挑發 原點과 指揮部 打擊을 公言했던 MB 時節을 떠올리게 만든 것이다. 政權이 바뀌는 만큼 對外的 變針(變針)은 不可避하겠지만 이番엔 引受引繼 段階부터 搖亂하다. 加熱된 ‘安保 空白’ 論難이 자칫 차분한 實態 把握도 건너뛴 急激한 變針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憂慮도 나온다. 外交는 窮極的인 解決을 追究하지만, 現實的 優先順位는 葛藤을 管理하는 데 있다. 連續性 속에서 變化를 꾀하는 智慧가 必要하다. 李哲熙 論說委員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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