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日(現地 時間) 늦은 저녁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大韓民國 大使館에는 一家族 5名을 태운 乘合車輛 한 臺가 들어섰다. 여느 團欒한 家族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들은 이날 午前에 悽絶한 生死의 門턱을 넘었고, 비로소 戰爭이 없는 땅에 到着했으며, 車輛으로 約 400km를 달리고 나서야 故國의 安全한 손길이 닿는 곳에 到着했다. 爆擊을 避해 避亂길에 나선 지 約 23日만, 國境을 넘어 移動한 지 約 9時間 만이다. 이들이 타고 온 車輛 뒷 칸엔 20餘日 間 生存을 위해 메고, 끌고 다녔던 무거운 트렁크와 쫓기듯 들고 나온 짐들이 한가득이다.지난달 7日 팔레스타인 武裝團體 하마스의 이스라엘의 攻擊으로 中東戰爭이 勃發하면서 封鎖된 가자地區에 26日假量 갇혀있던 唯一한 韓國 僑民 一家族 5名이 無事히 이집트 國境으로 빠져나와 救出됐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동아일보와 만난 이들은 大使館에 到着하고 나서야 힘겹게 微笑지으며 “國境에 마중 나온 韓國 大使館 분들을 봤을 땐 父母님을 본 것처럼 눈물 나게 반가웠다”며 “戰爭이라는 切迫한 狀況에서도 韓國 政府가 올 것이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所懷를 밝혔다. 同時에 “媤宅 食口들, 親戚, 知人들을 가자地區 爆擊 속에 남겨두고 저희 家族만 나온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며 罪責感과 未安함도 吐露했다.● 脫出 名單 包含됐어도 或如 틀어질까 조바심中東戰爭 勃發 後 戰爭 當事國을 비롯한 國際社會는 人道主義的 救護 方案으로 가자지구 內 外國人과 二重國籍者를 이집트와 맞닿은 라파 國境 檢問所를 통해 于先 脫出시키는 方案에 合意했다. 앞서 1日에 1次로 一部 外國人들이 脫出했으며 이날 2次로 韓國 國籍者들度 脫出 名單에 들었다는 消息이 傳해졌다.일가족 中 代表로 인터뷰에 應한 어머니인 崔某 氏(44)는 “消息을 들었을 때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쁘면서도 언제 狀況이 바뀔지 몰라 마음을 繼續 졸였다”며 “或是나 節次가 遲延되면 現地에서 來日(3日)부터 週末이라 業務가 終了될지 모른다는 不安感이 컸다”고 했다. 國境 檢問所에서 身元 確認 및 짐 搜索 節次를 기다리는 渦中에도 ‘戰爭 中이니 어떤 變數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 試圖 맘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대사관 關係者는 “全 世界 外交街가 奔走하게 自國民 脫出을 위해 努力하고 있는데 脫出 可能한 外國人 名單이 어떤 基準으로 發表되는지 어느 누구도 가늠하기 힘들었다”며 “當局이 隨時로 이집트, 이스라엘 側과 調律하며 泣訴했던 게 多幸히 통한 것 같다”고 傳했다.● 待避令으로 始作된 23日 間의 避難길지난달 7日 戰爭 勃發 以後 每日 天地가 振動하는 듯한 爆擊의 恐怖를 버티던 이들은 戰爭 3日 만인 10日 避難을 決心했다. 崔 氏는 “7年째 가자地區에 살았지만 直感的으로 느껴지는 爆擊의 强度가 戰爭 初期부터 달랐다”며 “게다가 이스라엘軍이 ‘待避하지 않으면 當身들 責任’이라는 式으로 待避令까지 내렸는데 都大體 언제 爆擊을 한다는 건지도 알 수 없어 不安感에 온 家族이 겨울用 옷가지만 急하게 챙겨 짐을 쌌다”고 했다.불과 2年 前에도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戰爭을 벌였고 ‘世界의 火藥庫’로 불릴 만큼 衝突이 잦은 곳이기에 일찍 戰爭이 끝나리란 期待感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둘씩 들려오는 知人, 親戚들의 死亡 消息과 무너지는 建物들을 보며 狀況이 深刻하다는 걸 느꼈다.“이전엔 住居地域 爆擊은 흔치 않았거든요. 게다가 學校, 病院, 敎會 等 저희 이웃들이 生活하던 모든 곳이 무너지니까 正말 慘酷했어요.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隱身處, 터널이 이런 建物들 아래 있다고 爆擊하는데 저희들이 地下에 뭐가 있는지 都大體 어떻게 알겠어요?”온 家族이 함께 살았던 집은 괜찮은지 묻자 崔 氏는 “저희 집도 爆擊으로 무너졌다”며 “저희 집이 眞짜 무너진 건지 直接 눈으로 確認도 할 수 없는 狀況이다. 그저 一帶를 지나던 知人들을 通해 ‘너네 집도 사라졌다’고 들었을 뿐”이라고 淡淡하게 털어놨다.가자시티에서 南쪽으로 옮겨 暫時 A 氏 男便 父母님의 집인 ‘텔 엘 하와’ 地域에 머물던 一家族은 그마저도 위태로울 수 있다는 생각에 南部 都市 ‘칸 유니스’로 떠났다. 칸 유니스 隣近에선 知人 집에 多幸히 머물며 國境이 열리기만을 기다릴 수 있었다.각오하고 떠난 避難길이지만 豫想보다 避難 生活은 더 慘酷했다. 崔 氏는 “가자지구 밖에서 寫眞, 映像을 통해 보는 것과 안에서 느끼는 慘酷함은 强度가 다르다”고 떠올렸다. 于先 物資 補給이 오랜 期間 遮斷됐던 탓에 이들은 콩 캔, 토마토 캔 桶조림 等을 먹으며 겨우 延命했다. 모아놓은 돈으로 그때그때 必要한 食糧, 물을 求하기도 했다.전쟁 進行 狀況이나 脫出 可能性을 끊임없이 把握해야 했기에 携帶폰을 充電하는 것도 重要한 일이었다. 戰力이 끊긴 狀況에서 崔 氏 家族을 비롯한 가자地區 住民들은 車輛用 배터리를 利用해 携帶폰을 充電하거나 太陽熱 發電機를 통해 電力을 겨우 需給했다. 崔 氏는 “太陽熱 發電機를 가진 사람에게 돈을 주고 補助배터리 充電을 付託한 뒤 그걸 받아와 家族이 携帶폰 前歷을 나눠 쓰는 式이었다”고 했다.● 國境 언제 열릴지 몰라 5, 6番 오가다 劇的 脫出이스라엘의 地上戰 擴大 過程에서 가자지구 內 通信施設 破壞로 모든 連絡이 杜絶 됐을 땐 그야말로 ‘暗黑 地獄’과도 같았다. 崔 氏는 “家族, 知人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고 戰爭, 爆擊 消息도 들을 수 없었다. 그나마 可能하던 라디오 電波도 遮斷되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고 했다. 當時 崔 氏를 비롯한 避難民들은 이스라엘軍이 라디오 電波까지 攪亂한 것으로 理解했다고 한다.탈출 直前까지도 通信이 不安定해 조바심이 났다. “우리가 脫出 名單에 들었는지도 알기도 어려웠고, 名單에 들어도 或是나 韓國 大使館 側과 連絡이 안 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어요. 電話도 20番 걸면 運 좋게 그中 한 番 連結될 程度로 不安定한 狀態였습니다.”가자지구 南部에 到着한 뒤에는 라파 國境 檢問所를 오가며 언제 나갈 수 있는지 確認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兩側의 交戰이 激化하는 渦中에도 避難處에서 國境까지 5~6番을 오갔다. 그렇다고 每日 같이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茶에 담겨 있던 기름마저 漸漸 枯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崔 氏는 “脫出 直前 檢問所로 向했을 때가 저희 車에 있던 마지막 기름이었다”며 “奇跡的으로 國境이 열려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가자지구 北部에서 南部까지 온 家族을 싣고 달렸던 車는 가자地區에 버리고 나와야 했다.차뿐만 아니라 이들의 家族, 親戚, 親舊들도 가자地區 國境 안쪽에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로 國境을 通過한 뒤 大韓民國 大使館까지 오는 約 8時間 동안의 旅程 中에도 崔 氏의 딸은 아끼던 親舊들의 死亡 消息을 接했다.● “政府가 救하러 올 것이란 믿음 確固해”최 氏는 “저희를 救해준 大韓民國 國力을 느꼈다”며 “戰爭이라는 切迫함 속에서도 韓國 政府가 저희를 救하러 올 것이라는 믿음은 버리지 않았다”고 했다. 이들 家族에게 韓國 國籍은 慘酷한 戰爭과 고된 避難을 버티게 한 힘이었다. 脫出 前부터 脫出 以後까지 直接 朴振 外交部 長官이 崔 氏 家族에게 電話를 걸어 安否를 물었고, 김용현 駐이집트大韓民國 大使도 이들의 狀況을 隨時로 報告받으면서 이들이 大使館 門턱에 이를 때까지 살뜰히 챙겼다. 現場을 바쁘게 오가며 一家族을 直接 데려오고, 數百km를 달리는 中에도 이들의 安全은 勿論 食事, 飮料를 챙기던 장준원 領事는 勿論 여러 狀況을 緻密하게 調律했던 최병선 公使의 공도 相當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崔 氏 家族은 “韓國 政府가 物心兩面 모든 걸 도왔다”며 연신 感謝함을 표했다.최 氏 家族에겐 10代 첫째 딸과 둘째 아들 그리고 7個月 된 막내딸도 있다. 避難 過程에서 嬰兒를 데리고 다니는 게 힘들지 않았냐는 質問에 崔 氏는 “오히려 우리에겐 希望이었다”며 웃었다.“전쟁 통에 웃을 일이 없는데 戰爭에 對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가 웃으면 저희도 그제야 ‘하하하’ 따라 웃을 수 있었어요. 막내 아이가 있었기에 우리 家族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여느 또래가 想像조차 하지 못할 戰爭 트라우마를 겪은 첫째 딸(18)과 둘째 아들(15)은 번갈아 막내동생을 안고 어르며 家族을 이끄는 父母님의 役割도 代身하고 있었다. 平素 유튜브 等에 映像을 올리며 韓國, 팔레스타인에서 日常을 傳하던 첫째 딸은 “앞으로는 戰爭의 아픔을 알리는 映像을 繼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모든 삶의 터전과 生計 手段을 잃은 崔 氏 家族은 一旦 韓國을 돌아갈 참이다. 이집트 政府가 外國人들을 自國 領土로 待避시켰지만 오랜 時間 머물게 하지는 않겠다는 方針을 세우기도 했고, 이들이 팔레스타인을 떠나 唯一하게 再始作할 수 있는 곳은 7年 前까지 살던 韓國뿐이다. “이집트도, 第3國도 저희 家族의 故鄕은 아니잖아요. 當場 먹고살 方法도 없어 漠漠하지만 韓國으로 돌아가야죠.”인터뷰를 마치고 宿所로 向하기 위해 이들이 몸을 실은 乘合車 한가운데에는 흔들면 딸랑딸랑 소리가 나는 嬰兒用 장난감이 놓여있었다. 戰爭 속에서 이들을 버티게 한 또 다른 希望이었다.카이로=김기윤 特派員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