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險難한 條約締結 過程 보여주는 ‘韓美同盟의 誕生 祕話’ [書評]|週刊東亞

週刊東亞 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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險難한 條約締結 過程 보여주는 ‘韓美同盟의 誕生 祕話’ [書評]

  • 김학준 檀國大 碩座敎授

    入力 2020-11-13 10: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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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시욱 저 한미동맹의 탄생 비화 (청미디어)

    남시욱 저 韓美同盟의 誕生 祕話 (請미디어)

    最近 몇 해 사이, 特히 文在寅政府의 出帆 以後, 國內에서 자주 膾炙되는 말들 가운데 하나가 韓美同盟이다. 文在寅政府가 ‘脫美親中(脫美親中)’의 길을 걸으면서 韓美同盟에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解釋되는 言行을 보이는 데 對해, ‘右翼保守 勢力’ 또는 ‘自由主義 勢力’은 韓美同盟을 굳게 維持해야 한다는 論理를 展開함에 따라, 이 네 글字는 主要한 話頭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러면 韓美同盟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勿論 1953年 8月 8日에 서울에서 假調印되고 이어 10月 1日에 워싱턴에서 調印됐으며 1954年 11月 17日에 서울과 워싱턴에서 同時에 發效된 韓美相互防衛條約을 意味한다. 이 條約에 對해 大韓民國 國民이 지닌 一般的 認識은 “이 條約은 李承晩 大統領의 끈질긴 要求를 아이젠하워 大統領이 받아들여 成立됐으며, 이 條約이 있었기에 北韓의 재침을 防止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要約된다. 그 認識은 大體로 正確하다. 그렇지만 이 條約이 成立되고 發效될 수 있었던 過程 그 自體에 對해서는 이 主題를 깊이 硏究했거나 그들의 著書를 읽은 사람이 아니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現實이기도 하다. 

    위에 摘示한 이 冊은 바로 이러한 現實認識에서 出發했다. 다시 말해, 著者는 이 冊을 통해 매우 險難했던 韓美同盟의 成立過程을 많은 逸話들을 包含시키면서 쉽고도 재미있게 說明하면서, 오늘날의 韓半島狀況에서 韓美同盟이 갖는 意味를 되새겨보고자 했다. 

    이 冊의 長點들 가운데 하나는 1次 資料의 發掘과 活用이다. 韓國 側이 所藏한 1次 資料는 勿論이고, 美國 側이 所藏한 資料 모두를 샅샅이 살핀 것이다. 美國 側의 資料 가운데 條約締結 過程에서 主要한 役割을 遂行한 월터 로버트슨 國務部 極東次官補의 回想錄을 콜럼비아大學校 口述史硏究室에서 찾아내 廣範圍하게 活用한 것이 돋보인다. 著者는 이어 이 主題에 關聯된 硏究著述들을 두루 涉獵했다. 그 바탕 위에서, 旣存硏究들이 提示한 解釋을 敷衍하기도 하고, 反駁하기도 했으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도 했다. 

    著者는 서울대학교 文理大 政治學科 卒業 以後의 60年을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 두 領域에서 活動하면서 많은 業績을 쌓았다. 東亞日報社 修習記者 1期로 言論界에 入門한 以後 駐日 特派員과 編輯局長을 거쳐 문화일보사 社長으로 奉職했으며, 高麗大學校와 世宗大學校에서 各各 夕座敎授로 奉職했다. 이 過程에서, 서울대학교 大學院에서 主로 國際政治學을 專攻해 碩士·博士學位를 받았다. 



    韓美關係에 對한 著者의 關心은 于先 그의 서울大學校 外交學博士學位論文 ‘딘 애치슨과 美國의 韓半島政策: 韓國戰爭時期를 中心으로‘ (2015)으로 나타났다. 6·25戰爭 勃發 前後 時期 트루먼 行政府에서 奉職한 國務長官 애치슨은 1950年 1月 美國 全國記者클럽에서 行한 演說을 통해 美國의 極東防衛線을 發表하는 가운데 韓國을 除外시켜 論難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硏究者들은 그의 이 演說이 蘇聯과 北韓으로 하여금 南侵을 決心하는 데 一助했다고 主張했다. 著者는 이 애치슨에 焦點을 맞춰 當時의 트루먼 大統領이 執行한 韓半島政策을 分析했던 것으로, 이 論文이 好評을 받자 그는 곧 이 論文을 바탕으로 ‘6·25戰爭과 美國: 트루먼·애치슨·맥아더의 役割’ (請미디어, 2015)을 펴냈다. 

    著者는 이 冊의 延長(延長)으로 바로 위에서 摘示한 冊을 펴낸 것이다. 따라서 이 두 冊은 하나의 짝을 이룬다. 서로 補完하는 이 두 冊을 통해 우리는 李承晩 大統領 時期 前半期 (美國의 立場에서는 트루먼 大統領~아이젠하워 大統領 時期)의 韓美關係 또는 6·25戰爭 戰後의 韓美關係를 더 正確하게 理解할 수 있게 됐다. 

    그러면 모두 8個 章 및 附錄 1·2로 構成된 이 冊이 말하고자 한 內容 또는 論之는 무엇이었나? 

    첫째, 李承晩 大統領은 就任 初期부터 新生 大韓民國의 國家安保를 위해 1次的으로 韓美軍事同盟이 切實하게 要請된다고 認識했다. 蘇聯이 自身의 ‘衛星國家’ 北韓을 앞세워 大韓民國에 對해 武力侵攻을 試圖할 것이라는 正確한 危機意識을 그는 지녔던 것이며, 그러한 危機意識으로부터 그는 1949年 5月 17日에 韓美相互防衛조약 締結을 包含한 세 가지 自救策을 트루먼에게 提示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이 提議에 否定的이었고 甚至於 1949年 6月 29日에 駐韓美軍 撤收를 完了했다. 

    둘째, 이 大統領이 憂慮했던 대로 1950年 6月 25日에 蘇聯의 支援과 中共의 同意 아래 北韓의 南侵이 始作되자 트루먼 大統領은 다행스럽게도 유엔 旗幟 아래 美軍을 派兵하는 決定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맥아더 司令官이 指揮하는 유엔軍이 北韓軍을 敗退시키자 38度線 以北으로의 進軍을 指示해 유엔과 大韓民國이 主導하는 南北統一을 追求했다. 

    不幸히도 中共軍이 介入해 유엔軍과 大韓民國軍은 後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狀況에서 트루먼은 休戰으로 돌아섰고 그의 後任인 아이젠하워도 休戰을 追求했다. 그렇지만 작은 나라의 大統領 李承晩은 世界 最强國의 大統領들에 맞서 猛烈히 反對했다. 

    셋째, 트루먼 行政府와 아이젠하워 行政府는 모두 이 大統領을 休戰反對로부터 休戰支持로 돌아서게 하기 위해 于先 이 大統領을 除去하는 計劃, 이른바 에버레디 計劃을 세웠다. 

    多幸히도 美國政府는 이 計劃을 抛棄했다. 그 代身에 다른 方法으로 이 大統領을 壓迫했다. 이 時點에 이 大統領은 休戰에 同意하는 條件으로 韓美相互防衛조약의 締結을 提示했지만, 아이젠하워 行政府는 이 提議를 拒否했다. 여기서 이 大統領은 大膽한 勝負手를 던졌다. 美國 政府와 아무런 協議도 없이 自身만의 判斷과 決定에 따라, 1953年 6月 18日에 유엔軍捕虜收容所에 收容된 2萬 7000餘 名의 反共捕虜를 釋放한 것이다. 

    世界를 놀라게 한 이 快擧는 아이젠하워 行政府로 하여금 이 大統領으로부터 休戰에 對한 同意를 받아내려면 그가 줄기차게 要求해온 韓美相互防衛조약 締結에 應할 수밖에 없다는 結論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이로써, 著者의 表現으로, 韓美同盟의 成事를 위한 두 나라 사이의 ‘外交戰爭’은 幕을 내렸다. 

    넷째, 韓美相互防衛조약 締結을 위한 美國과의 外交에서 主導的인 役割을 遂行한 사람은 다름 아닌 李承晩 大統領 한 사람이었다. 변영태 外務長官, 손원일 國防長官, 그리고 때때로 會談에 參與했던 양유찬 駐美大使, 임병직 유엔大使, 김용식 駐日工事 等은 補助役에 지나지 않았다. 著者의 表現으로, 이 大統領은 홀로 ‘눈물겨운 鬪爭’을 벌여 마침내 大韓民國의 安全瓣을 마련한 것이다. 

    이 冊에서 特히 注目을 받아야 할 部分은 于先 ‘第3張 에버레디 計劃’이다. 著者는 세 次例에 걸쳤던 이 計劃을 1次 資料에 바탕을 두고 매우 緻密하게 分析했는데, 이 部分이 이 冊의 學問的 깊이를 높이 評價하도록 만들어준다. 에버레디 計劃에 關해서는 國內의 硏究者들 사이에서 硏究가 있었음은 事實이나 著者의 이 硏究만큼 多角的이면서 深層的인 硏究는 없었다. 

    또 다른 部分은 ‘第7張 條約發效에까지의 險難한 旅程’과 ‘第8張 아이젠하워-덜레스-로버트슨 라인’이다. 우리는 韓美相互防衛條約이 締結되는 過程이 險難했음은 알고 있었지만 醱酵까지의 過程이 그것에 못지않게 어려웠음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著者는 一般的 通念을 깨고 後者 亦是 매우 險難했음을 成功的으로 論證했다. 

    第8章은 이 冊의 品格을 한 層 더 높여주었다. 外交政策分析(FPA)에 關한 最近의 理論인 ‘國際關係의 人類學(an anthropology of International Relations)’을 援用하면서, 美國 政策結晶子들의 性格的 特性과 이념적 性向을 比較分析하고 그 結論을 이 冊 全體의 結論으로 삼음으로써, 이 冊이 傳統的 外交史의 範圍를 뛰어넘게 만들었다. 

    著者는 이 冊을 통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提議 또는 逸話를 紹介했다. 

    첫째, 場面 駐美大使가 1951年 1月 17日에 러스크 國務部 極東擔當次官補를 相對로 ‘韓國의 亡命政府를 하와이에 設立할 것’을 提議하자, 러스크는 必要하면 南部韓國의 섬들이 檢討對象이 될 수 있다“고 對答했다. 

    둘째, 1951年 5月 8日에 조지 마셜 國防長官은 韓國을 訪問해 8軍司令官과 業務協議를 마치자 李 大統領을 豫防하지 않은 채 歸國했다. 李 大統領은 이렇게 無禮할 수 있겠느냐면서 激怒했다. 이 無禮에 對해 ‘報復’이라도 하듯, 李 大統領은 워싱턴을 訪問했을 때 1954年에 아이젠하워의 面談時間에 늦게 갔다.
    셋째, 아이젠하워 行政府의 國務部 極東次官補 로버트슨은 이 大統領과의 面談에 對備해 ‘豫行演習’을 했다. 

    넷째, 美國政府의 國家安保會議 기획처는 1953年 6月 25日에 韓半島中立化案을 마련했다. 이 事實이 이 冊에서 처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著者는 이 事實에 對해 仔細히 說明함으로써 우리의 理解의 幅을 넓혔다. 

    이 冊을 通讀한 뒤 서평자는 이 冊이 이 大統領을 愛國的이면서도 國際的인 큰 政治家로 評價하기에 充分한 資料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새삼 아쉽게 느껴지는 事實은 그를 下野와 亡命의 길을 걷게 만든 1960年 3·15 不正選擧다. 그가 在任 때 非難받을 만한 일들을 저질렀던 것은 事實이지만, 그 어느 것보다도 이 過誤가 그의 專攻(前功)을 哀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러한 과(過)가 있었음은 事實이라 해도 獨立運動과 建國 그리고 韓美同盟 聖事의 공(功)과 함께 記憶되고 評價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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