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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勝負師’ 최문순 江原知事|新東亞

‘勝負師’ 최문순 江原知事

내 人生에 ‘다음’은 없다

  • 組成式│東亞日報 新東亞 記者 mairso2@donga.com

    入力 2011-05-20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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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光宰는 나보다 엄기영과 가까운 사이
    • 地域主義로 해보려다 안 되니 막판에 나를 토끼몰이
    • MBC 社長 될 때 靑瓦臺 支援 안 받았다
    • 罷業 主導 後 解職됐을 때가 가장 幸福했다
    • 大企業 勞動組合, 利己的이고 自己 哲學 없는 게 問題
    • 김대중 政府 때 朴趾源이 MBC 社長 人事에 介入했다
    ‘승부사’ 최문순 강원지사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는 스산한 날씨였다. 강원도청 앞 四거리에 플래카드 두 個가 내걸려 있었다. 하나는 4月27日 치러진 道知事 選擧 때 한나라당 候補로 나섰던 엄기영氏의 落選人士였고, 다른 하나는 최문순 知事의 當選謝禮였다. 落選人士 文句가 悽然했다. ‘보내주신 사랑 感謝드립니다.’

    江原道知事 公館은 道廳에서 걸어서 5分 距離에 있었다. 雅淡한 單層 韓屋이다. 우리가 먼저 到着해 기다렸다. 新任 道知事는 이곳에 居住하지 않고 春川 市內 어머니 집에 있다고 했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먼 길 오셨습니다.”

    환한 表情의 최문순(55) 知事가 두 손으로 내 손을 꽉 잡고 흔들었다. 未安할 程度로 허리를 굽힌 채. 내가 記憶하는 그는 사람을 만나면 늘 이렇게 ‘熱情的으로’ 人事한다. 나는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될 줄은 正말 몰랐다”고 人事했다. 眞心이었다.

    그에게는 未安한 얘기지만, 나는 그가 當選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4·27 再·補選 前날 工巧롭게도 江陵에 出張 가 있었다. 그 地域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 했는데 그가 이길 거라고 豫想한 사람은 없었다. 性急하게 敗因을 分析하기도 했다. 그가 지긴 졌다, 江陵에서는.



    崔 知事는 洋服에 줄무늬가 있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잘생겼다고 하기엔 부담스러운 ‘土俗的’ 얼굴이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새우눈은 웃을 때는 完全히 감겨 痕跡을 찾아보기 힘들다. 언뜻 그의 短點으로 생각되지만 이番 選擧에서 드러났듯 實은 그의 競爭力일지 모른다.

    “여길 開放하려는데 選擧法 問題가 있어 쉽지 않다. 公館 開放이 一種의 寄附行爲가 되나보다. 有權解釋을 求하고 있다.”

    崔 知事는 當選 直後 官舍를 一般에 開放하겠다고 宣言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는 걸 보니 말이 앞선 것 같다. 그는 아직도 支社 就任한 게 實感나지 않는다고 했다. 志士와 國會議員은 많이 다른 것 같다면서.

    “國會議員은 政治人이지만, 知事는 地域의 最高 어른으로 덜 政治的인 자리 같다. 轉換하는 데 時間이 걸리는 것 같다.”

    “嚴 先輩와 아직 通貨 못해”

    엄기영氏의 플래카드를 言及하며 通話했는지 물었다. 아직 안 했다고 한다.

    “타이밍을 보고 있다. 저분도 準備가 덜 된 狀態에서 내가 電話를 하면 或是 拒否感이 있을까봐. 좀 安定을 찾으신 後에, 電話가 아니라 燒酒 한잔해야지.”

    두 사람은 춘천고 同門이자 MBC 先後輩 사이다. 다섯 살 많은 嚴氏가 高等學校로는 5年, MBC 入社로는 10年 先輩다. 그런데 MBC 社長으로는 嚴氏가 崔氏의 後任者였으니 얄궂은 因緣이다. 選擧 때 두 사람은 ‘뜻밖에도’ 亂打戰을 벌였다. 理由야 어쨌든 아직 서로 通話도 안 한 걸 보면 感情이 꽤 傷한 듯싶다.

    “選擧로 접어드니까 내가 내가 아니더라. 選擧對策本部에서 짠 戰略대로 움직이니까 뜻밖에도 TV討論에서 相當히 剛하게 부딪쳤다. 엄기영 先輩가 性格이 剛한 분이 아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宏壯히 세게 나와 내가 唐慌했다. 나중에 나도 맞받아치게 돼 衝突이 커졌다.”

    두 사람의 TV討論은 17.5%의 視聽率을 記錄했다. 人氣드라마 ‘짝牌’를 눌렀다니 有權者들 사이에서 꽤 話題가 된 模樣이다.

    崔 知事 얘기를 들어보면 江原道의 政治 情緖가 크게 變한 듯싶다. 傳統的으로 保守性向이 剛한 接境地域에서 野黨이 勝利한 것만 봐도 그렇다. 鐵圓, 華川, 인제, 楊口, 高聲 5個 郡 中에서 華川, 인제, 楊口 세 軍이 崔 知事를 選擇했다. 그는 이를 “平和의 메시지가 먹힌 것”이라고 解釋했다.

    ▼ 엄기영氏가 自尊心 때문에 祝賀電話도 못 하는 것 같다.

    “내가 電話를 해야지.”

    ▼ 勝者로서 통 큰 모습을 보여주지 그랬나.

    “나는 같이 일할 생각도 있다. 다만 저쪽도 組織이 있으니까. 엄기영 先輩 個人이면 내가 바로 電話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個人이 아니라 팀이니까. 이쪽도 마찬가지고. 勢力과 勢力의 衝突이었으니까.”

    두 사람은 元來 親한 便이 아니었다. 崔 知事는 “性向도 서로 달랐다”고 했다.

    “스타일도 다르다. 그분은 앵커를 오래 한 엘리트다. 같은 江原道 出身이지만 얼굴도 잘생기고.(웃음) 性品도 좋은 분이다. 파리特派員-政治部長-報道局長-報道本部長-副社長 等 차근차근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나는 거의 出入處를 갖지 못한 現場記者였다. ‘카메라 出動’‘2580’, 勞動組合… 이런 길로만 걸어왔으니까.”

    “저쪽이 스스로 무너진 것”

    選擧 막판 言論이 報道한 輿論調査 結果로 봐선 崔 知事가 이기는 건 奇跡에 가까웠다. 隔差가 10% 以內로 나온 調査結果가 單 하나도 없었다. 그도 마지막까지 이길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만 ‘反應이 좋다’는 느낌은 있었다고 한다. 그가 꼽은 勝利 原因은 이렇다.

    “큰 틀에서 보면 첫째, 李明博 政府의 一方主義, 힘에 依한 政治에 對한 審判이다. 둘째는 經濟政策 失敗다. 漁民이 많은 이 地域은 特히 庶民經濟 狀況이 안 좋다. 經濟規模에 비해 기름값이 미치는 影響이 큰 便이다. 漁民들이 全部 기름을 쓰지 않는가. 작은 原因으로는 TV討論을 꼽을 수 있다. 道民들이 예전엔 一方的인 投票를 했는데 只今은 내 손으로 뽑겠다는 意志가 剛하다. 그래서 TV討論을 보고 選擇한 분이 많은 것 같다. 그 다음에 李光宰 同情論, 江陵펜션(콜센터) 事件이 影響을 끼쳤다. 우리가 잘했다기보다는 저쪽이 쫓기다 보니까 平靜心을 잃고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現 政府의 經濟實情(失政)에 따른 反射利益이 勝利의 重要한 理由라면 이는 當選된 쪽에 부메랑이 될 수도 있을 게다. 이를 指摘하자 그도 “負擔이 되는 게 事實”이라고 同意했다. 于先 생각한 應急措置는 漁民들에게 6個月間 기름값을 補助해주는 것이다. 完全한 解決策은 아니지만 當場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가 내건 公約 中 가장 눈에 띄는 것은 東海岸 平和工團 設立이다. 江陵 옥계가 候補地다.

    “接境地域뿐 아니라 束草에서도 이겼다. 束草는 失鄕民이 많은 代表的인 保守地域이다. 南北關係가 나빠지면서 打擊을 입은 곳이다. 金剛山 觀光이 잘될 때는 地域經濟에 活氣가 넘쳤다. 只今은 廢墟가 됐다. 그래서 어느 地域보다도 南北關係가 改善되기를 强力히 希望하는 地域이 돼버렸다. 結局 살 수 있는 方法은 南北平和工團 設立이다. 北쪽 個性에 있는 工團은 政治的으로 不安하다. 南쪽에 지으면 政治的 安定性을 確保할 수 있다. 내가 처음 아이디어를 낸 것도 아니고 예전부터 있었던 얘기다.”

    말하자면 開城工團 같은 것을 南쪽에 하나 더 만들자는 構想이다.

    ▼ 政府와 協議했나.

    “그런 건 아니다. 앞으로 積極 建議할 것이다. 金剛山觀光 再開 問題부터.”

    ▼ 北韓 態度와도 맞물려 있지 않나.

    “그렇다. 박왕자氏 事件에 對한 態度. 그것부터 풀어야겠지.”

    ▼ 北韓도 풀려야겠지만 우리 政府도 풀려야 하지 않나.

    “3年이라는 時間이 지났다. 高聲 쪽은 廢墟가 됐다. 이런저런 問題를 均衡 있게 생각해봐야 할 時點이 됐다. 膾집은 勿論 宿泊業所, 乾魚物商, 記念品가게, DMZ博物館이 텅 비었다.”

    ▼ 平和工團을 設立하려면 南北關係를 復元할 突破口가 必要할 듯싶다. 談判하러 北韓에 갔다 올 생각은 없나.

    “보내주기만 하면 갔다 올 생각이 있다. 그런데 只今 南北 間 接觸을 一切 許容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이 被害를 보고 있다. 金剛山에 골프場 지어놓은 분도 있지 않은가. 對北投資도 많이 하고. 그런 분들이 資産이 凍結돼 宏壯히 힘들어한다.”

    孫鶴圭의 多急한 電話

    選擧가 끝난 後 많이 나온 얘기 中 하나가 李光宰 前 知事의 役割論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適切한 자리를 맡기는 걸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儀禮的인 말이 아닌지 궁금했다.

    “이광재 (前) 知事가 오랫동안 準備해서 아는 게 많다. 좋은 政策도 많고. 只今 推進하는 政策들도 다 이 知事가 만든 거다. 中國 投資와 企業 誘致 等이 이 知事의 人脈으로 可能했다. 그런 事業들을 繼續 맡아달라고 要請했고 本人도 좋다고 했다. 道에 여러 委員會가 있는데 그中 하나를 맡길 생각이다. 條例에 있는 合法的인 根據를 찾아서.”

    ‘승부사’ 최문순 강원지사

    최문순 知事는 遊說期間에 投票를 督勵하는 뜻에서 講院 麟蹄郡에서 번지점프를 했다.

    이광재氏와의 親分을 묻자 고개를 내저었다. 自身보다는 엄기영氏와 ‘훨씬 더’ 가깝다고 했다.

    “故鄕(平昌)도 같고 地域構圖 겹친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두 사람이 그동안 자주 만났다고 한다. 元來 (民主黨에서) 엄기영氏를 迎入하려 하지 않았나. 李光宰가 道知事로 나오면 엄기영은 太白·寧越·平昌·旌善 地域에서 國會議員 出馬하는 걸로. 그런 얘기들이 繼續 있었던 模樣이다. 나는 거기에 낄 理由가 없었지만.”

    더운지 그가 洋服 윗도리를 벗었다. 소매를 걷어붙였다가 寫眞記者의 挽留로 다시 내렸다. 그의 道知事 出馬는 갑작스러운 決定이었다. 元來 民主黨에서 迎入하려 했던 1順位 候補는 권오규 前 副總理였고 그 다음이 김대유 靑瓦臺 前 經濟政策首席祕書官이었다. 둘 다 노무현 政府 末期에 在職했다.

    “事實 나올 생각이 全혀 없었다. 黨에서는 엄기영 候補가 워낙 莫强한데 嶺西 出身이니 嶺東 出身으로 맞對應해 地域主義로 가면 해볼 만하다고 判斷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除外됐던 거다. 그런데 이 사람 저 사람 다 안 되니 (候補 登錄 마감日) 하루 前에 손학규 代表가 多急하게 電話를 걸어왔다.”

    아무리 떠밀렸다고 해도 全혀 생각이 없었다면 나섰을까.

    “初期에 言論이 재미 삼아 두 사람을 붙이는 輿論調査 結果를 내놓았는데, 우리 黨이 永同出身 候補를 찾는다고 하자 쑥 들어갔다. 그런데 마지막에 候補가 없는 狀態가 됐다. 江原道에서 50年 만에 野黨知事(이광재)가 나왔는데 이걸 그냥 넘겨줄 순 없는 것 아니냐. 마지막 날 토끼몰이를 當했다. 그래서 降伏한 거다.”

    그의 勝負師 氣質이 世上에 널리 알려진 것은 MBC 社長이 될 때였다. 部長이 곧바로 社長에 오른 건 言論界에서 ‘獵奇的 事件’이었다. 엄기영氏와의 ‘惡緣’은 이때부터다.

    “노무현 政權이 出帆하자 김중배 社長이 任期가 남아 있는데도 辭退했다. 새 政權이 出帆했으니 새 사람을 뽑으라며. 社長 公募에 엄기영 先輩(當時 앵커, 理事)가 支援해 이긍희 當時 大邱MBC 社長과 徑先했다. 다들 完勝을 거둘 거라고 豫想했는데 졌다. 2年 뒤 이 社長이 殘餘 任期를 채운 뒤 다시 社長을 뽑게 됐다. 그때 또 嚴 先輩가 나왔다. 改革陣營에서는 嚴 先輩가 나설 境遇 또 진다고 봤다. 노무현 政權 初期 MBC가 政府를 엄청 깠다.(웃음) 그래서 우리(改革) 陣營에서 不便했던 點도 作用했다. 社長으로서 獨立性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내보내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嚴 先輩 代身 내가 나가게 된 거다.”

    ▼ 뒤에서 調律한 게 아닌가.

    “노무현 大統領이 一切 干涉하지 않았다. 밑에도 그렇게 指示했다. 干涉을 했다면 처음에 嚴 先輩가 됐을 거다.”

    ▼ 政權 初期 말인가.

    “그렇다. (嚴 先輩가) 自身의 力量만으로 充分히 이긴다고 보고 (靑瓦臺에서) 全혀 介入하지 않았다. 뭘 하려면 剛하게 突破해야 하는데 嚴 先輩가 그런 게 弱하다.”

    ▼ 지난해 김우룡 방송문화진흥회 理事長 인터뷰 波動도 있었지만, MBC 社長은 大體로 靑瓦臺나 보이지 않는 손에 依해 事前에 決定되지 않았나.

    “그런 적도 있었지만 盧武鉉 大統領 때는 안 그랬다. 김대중 大統領 때는 좀 그랬다. 朴趾源氏가….”

    그가 웃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 朴趾源氏는 그랬을 것 같다.

    “그랬다. 내가 言論勞組委員長 할 때 나하고 많이 싸웠다. 盧 大統領은 潔癖症 비슷한 게 있어서 아예 손을 못 대게 했다.”

    ‘승부사’ 최문순 강원지사
    ▼ 靑瓦臺 支援을 全혀 안 받았나.

    “全혀 안 받았다.”

    ▼ 그러지 않고야 어떻게 部長이 社長이 될 수 있나.

    “當時 MBC 狀況을 理解해야 한다. 改革陣營에선 候補가 없었다. 내 위로는 거의 없으니 候補를 낼 수 없었던 거다. 엄기영 候補가 그나마 政治的 中立을 지킬 사람인데 질 것 같으니까. (改革陣營에서) 나한테 要求한 게 나가서 죽어달라는 거였다. 그래서 辭表 내고 나갔던 거다. 그게 좀 點數를 땄다. TV討論 비슷한 것도 거쳤고.”

    “自己자랑 못해 參謀들한테 깨졌다”

    그는 記者 時節 强性 勞組委員長이었다. 罷業을 主導하고 해직당했다. 復職된 지 1年 만인 1998年 全國言論勞動組合聯盟 委員長을 맡았고 2000年엔 産別 言論勞組를 設立해 初代 委員長을 지냈다.

    ▼ 勞組委員長 出身이 社長이 될 줄 豫想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거다. 變身에 葛藤이 없었나.

    “우리는 처음 겪은 일이지만 日本이나 獨逸 等 先進國에서는 普遍的인 일이다. 日本에 가서 많이 놀랐는데 勞組委員長 出身 社長이 많았다. 매우 保守的인 言論社인 후지TV(후지산케이그룹) 會長도 勞組委員長 出身이더라.”

    ▼ 더 놀라운 건 放送社 社長에서 곧바로 政治人으로 變身했다는 點이다. MBC 內部에서도 批判이 거셌던 걸로 아는데….

    “批判 많이 받았다. 몇 次例나 謝過했다.”

    ▼ 그건 또 어떻게 決定한 건가.

    “(2008年) 2月28日인가 社長 任期가 끝난 後 놀았다. 놀면서 南北經濟交流協會라는 조그만 團體를 만들어 對北事業에 投資했다. 平壤에 會社를 設立하려 했는데, 南北交流가 中斷되는 바람에 建物이 지어지다 말았다. MBC 退職金 2億원을 投資하고 다른 사람들 돈도 모았다. 그런 狀況에서 後輩들 勸誘로 比例代表로 나가게 됐다.”

    ▼ 나가란다고 나가나.

    “當時 放送通信위원을 새로 임명했다. 우리 陣營에서 보기엔 잘못된 人事였다. 누군가 나서서 지키고 싸울 사람이 必要했다. 내가 놀고 있으니 後輩들이 찾아와 나가라고 했다. 후다닥 決定된 일이라 申請 마감時限을 두 時間 넘겨 書類를 提出했다. 박재승 公薦審査委員長이 改革的인 公薦을 한다며 10番을 준 거다.”

    ▼ 黨에서 要請한 건 아닌가.

    “아니다. 그때까지 손학규 代表와는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 내가 系譜가 없는 政治人이다. 누가 봐준 사람이 없으니까.”

    ▼ 그前에 政治 꿈이 있었던 게 아닌가.

    “그前에는 政治를 생각해본 적도 없다. 政治部 記者를 한 것도 아니고. 政治權에 아는 사람도 없었다. 國會議員 하면서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只今도 그렇지만.”

    ▼ 어떤 點이 안 맞나.

    “選擧運動하면서 부대낀 게 自己자랑이었다. 그게 아주 죽겠더라. 參謀들한테 엄청 깨졌다. 자랑 좀 많이 하라고. 그게 싫고 잘 안 되더라.”

    特異한 事例다. 比例代表와 道知事 出馬라는 重大한 選擇을 떠밀려서, 그것도 두 番 다 쫓기듯 決定했다니. 어쨌든 그는 勝負를 걸 때마다 이겼다. 그에게 얻는 敎訓은 卽興的으로 決定해도, 或은 緻密한 計劃 없이 살아도 뭔가를 成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건 새로운 類型의 敎訓이다.

    “뭘 굳이 成就하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비울 때 딱딱 비우니까. 이番에도 이길 거라는 생각은 別로 안했다. 지더라도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어느 자리든 오래 머물 생각이 없다.”

    ‘승부사’ 최문순 강원지사
    그는 就任 後 “連任하지 않겠다”고 宣言했다. 政治權과 官家의 非理는 大部分 자리 欲心에서 빚어진다. 그런 點에서 그의 發言은 一旦 新鮮하다.

    “參謀들에게 5分 以內로 떠날 準備를 하라고 말한다. 내가 官舍에 안 들어오려는 것도 언제든지 떠날 準備를 하기 위해서다. 連任 안 한다고 이미 公表했다. 連任으로 道廳 職員들을 壓迫하는 건 下級行政이다.”

    ▼ 3年間 너무 잘해서 道民들이 한 番 더 하길 願해도 안 할 건가.(웃음)

    “나는 이제까지 맡았던 모든 자리를 連任한 적이 없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도 任期 內에 모든 힘을 다하라, 連任 생각은 하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 팀은 그런 姿勢가 돼 있다. 내가 나서서 뭘 하는 것보다 職員들이 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게 重要하다.”

    그동안 가장 보람을 느낀 자리가 뭐냐고 묻자 뜻밖의 對答이 나왔다.

    “國會議員과 勞組委員長이 비슷하고 MBC 社長과 道知事가 비슷한 것 같다. 가장 보람을 느낀 건 MBC 社長 할 때였다. ‘朱蒙’이나 ‘무한도전’ 같은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視聽率이 높게 나오고 돈 많이 벌 때 보람을 느꼈다. 勞組委員長이나 國會議員은 만날 싸움만 하고…(웃음). 그런데 스트레스는 社長과 道知事가 훨씬 크다.”

    ▼ 經營者라 그런가.

    “勞組委員長과 國會議員은 無責任하다. 지르기만 하면 되니까.(웃음)”

    勞組委員長 出身에 對한 先入觀도 作用했겠지만 그는 國會議員으로 活動할 때 過激하다는 이미지를 풍겼다. 2009年 미디어法이 强行 處理되자 천정배 議員과 더불어 議員職 辭退를 宣言하고 한동안 活動을 中斷했다. 지난해 天安艦 事件 때는 眞相調査團 發表內容에 剛한 疑惑을 提起하며 ‘陰謀論’에 불을 지피祈禱 했다.

    春川에서 태어난 그는 춘천고와 江原大 英語敎育科를 卒業했다. 1984年 서울대 大學院(英語英文學科)에서 碩士를 取得하고 MBC에 入社했다. 大學 卒業한 지 6年 만이었다.

    ▼ 學生 때도 鬪爭的이었나.

    “그때는 別로…. 學生運動을 하기는 했다. 太白文化村이라는 地下運動이었다. 어쩌면 그때 남을 뒷바라지하는 訓鍊이 된 것 같다. 地下運動은 드러내선 안 된다. 386世代와 다른 點 中 하나가 그거다. 우리는 自身을 드러내는 게 語塞하고 잘 안 된다. 드러나지 않게 남을 뒷바라지하면서 조용히 組織을 키우는 訓鍊을 한 게 平生 가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華麗하지 않다. 386世代의 運動은 宏壯히 華麗하고 많은 사람을 몰고 다닌다.”

    ▼ 地方大 出身으로서 學歷 콤플렉스를 느낀 적은 없나.

    “當時 서울MBC 全體에서 江原大 出身은 나 혼자였을 거다. 그 後 또 入社者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社長 할 때 地方大 出身들이 書類審査에서 損害 보지 않도록 했다. 出身地나 學校를 가린 채 뽑게 했는데도 잘 못 들어오더라. 어쨌든 나는 그것 때문에 損害를 본 적은 없다.”

    ▼ 記者生活 할 때도?

    “本質에 集中하면 다른 게 別로 障礙가 되지 않는다.”

    記者 時節 그는 韓國放送大賞 優秀作品賞과 報道記者賞을 받았다. 特히 社會告發뉴스인 ‘카메라 出動’ 專門記者로 이름을 날렸다. 썩은 물이 고인 아파트 물탱크 實態를 告發해 물탱크 淸掃를 義務的으로 하게 만들었다. 그가 地下鐵 盆唐線 不實工事를 指摘하자 當場 施工이 中斷됐다. 高速電鐵 不實工事 告發도 큰 反響을 일으켰다.

    ▼ MBC에 들어가 勞組活動을 熱心히 한 건 正義感 때문인가.

    “내가 入社한 1984年은 全斗煥 政權 時節이었다. 當時 MBC에 就職하면 背信者 소리를 들었다. 入社 前에 강원대에서 1年間 助敎 노릇을 했다. 先生님이 꿈이었다. 그런데 敎授 자리라는 게 위에 누가 하나 죽어야 생기지 않나.(웃음) 안 되겠더라. 그래서 學校 밖으로 나갔다. 軍隊 갔다 오고 大學院 마쳤으니 나이가 스물아홉이었다. 마땅히 就職할 데가 없었다. 그래서 試驗 봐서 MBC에 就職했다. 中部警察署를 出入할 때 권인숙孃 性拷問 事件을 가장 먼저 알았는데 위에서 막는 바람에 報道를 못했다. 나중에 동아일보가 짧게 報道하더라. 이런 壓力에 맞서 製作拒否를 몇 番 했다. 그 後 自然스럽게 勞組運動을 하게 됐다.”

    1995年 勞組委員長을 맡은 그는 이듬해 非常對策委員長으로 강성구 社長 退陣을 要求하는 罷業을 主導했다. 結局 江 社長은 退陣했지만 그도 해직당했다. 業務妨害罪로 懲役 8個月에 執行猶豫 2年을 宣告받았다. 내가 최문순이라는 存在를 처음 안 것도 그 무렵 MBC 罷業現場을 取材하면서다. 當時 그는 鬪爭의 化身처럼 비쳤다. 1年 뒤 그는 報道局 機動取材部 記者로 復職했다.

    ▼ 罷業을 이끌면서 適性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나.

    “아휴, 안 맞지. 22日인가 罷業했는데, 只今 생각해도 죽을 맛이었다.”

    ▼ 解職期間에 뭐 했나.

    “놀았다.(웃음) 그때가 人生에서 가장 幸福했던 것 같다. 아무런 짐도 없었고….”

    그의 촌스러운 웃음에서 싸움을 해본 者의 餘裕 같은 게 느껴진다. 싸움하기 前엔 두렵지만 막상 싸움에 들어가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턱없는 勇氣와 餘裕마저 생긴다.

    反維新派 選擧運動員

    ▼ 勞組가 예전 같지 않다. 時代變化에 맞춰 勞組도 變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特히 大企業 勞組에 對한 批判이 많다.

    “勞動組合이 망가진 理由는 두 가지다. 첫째는 利己的으로 變해서고, 둘째는 自己哲學이 분명하지 않아서다. 利己的이라는 건 非正規職 問題 같은 걸 放置하는 걸 말한다. MBC 社長 할 때 非正規職을 많이 없앴다. 非正規職 없애는 건 會社에 全혀 負擔이 안 된다. 中間에서 利權을 챙기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돈을 생각하면 費用은 똑같다. 낮은 賃金을 주더라도 平生 雇傭을 保障하면 된다. 勞動運動은 分配다. 내가 分配받았다면 남에게도 分配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게 成長에도 도움이 된다는 哲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言論勞組를 包含해 勞組에 그런 哲學이 없다.”

    答辯할 때 그의 눈길은 줄곧 아래로 向했다. 속이야 어쨌든 겉으로는 自身을 낮추는 態度로 비친다. 그를 가까이서 接해본 사람들은 過激한 透寫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은 疏脫한 性格과 수줍은 웃음에 疑訝해한다. 이 疑訝함은 大體로 親近感으로 바뀐다.

    “어린 時節 수줍음을 너무 많이 탔다. 初等學校 때는 部分團長 한 게 最高였다.(웃음) 남 앞에 서는 것 自體를 싫어했다. 아직도 그런 게 남아 있지만. 조금 變한 게 高等學校 때였다. 2學年 때 10月維新 投票가 있었다. 當時 投票率이 90 몇 %였고 贊成率度 그 程度였다. 官에서 住民들을 엄청 쪼아댔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한테도 와서 脅迫에 가까운 말을 했다. 先生님까지 왔었으니까. 그런 걸 보면서 抵抗意識이 생겼던 것 같다. 그해 學生會長 選擧가 있었는데 유신波와 反維新波로 갈라졌다. 나는 反維新派 選擧運動員으로 活躍했다. 그때 술도 배우고 異常하게 바뀌었다.(웃음)”

    그를 運動圈으로 이끈 直接的인 契機는 高校 先輩인 정재돈氏가 拷問을 當한 일이었다. 鄭氏는 高3 때 情報機關에 끌려갔다가 온 後 한동안 누워서 生活했다. 匠이 내려앉은 탓이었다.

    “그 兄이 여태 拷問 後遺症에 시달린다. 그런 걸 보면서 變化된 거다.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때 衝擊을 받았다. 이 地域에서 學生運動한 사람들은 大部分 그때 變化됐다.”

    鄭氏는 現在 가톨릭農民會 會長이다.

    ▼ 平凡하지 않은 人生逆轉을 몇 番이나 했다. 家族이 좋아하나.

    “엄청 싫어하지. 아내는 가늘고 길게 살기를 願한다. 58歲 정년퇴직할 때까지.”

    ▼ 安定된 職場에서.

    “MBC에선 滿 58歲까지 갈 수 있다. 部長級 以上이면 億臺 年俸이다.”

    ▼ 社長 됐을 때는 좋아했겠다?

    “別로 안 좋아하더라. 言論에 露出되는 걸 싫어하니까. 아내는 조용히 살기를 願한다.”

    ▼ 딸들은 어떤가.

    “딸들도 家族이 오붓하게 살기를 願한다. 그런데 이番에 혼났지. 다 選擧運動에 投入됐으니..”

    그는 夫人 이순우氏 사이에서 딸 둘을 뒀다. 큰딸 해린氏는 弘益大(鳥致院分校) 4學年이고 둘째딸 예린氏는 梨花女大 1學年이다. 둘 다 專攻이 美術이다.

    一山 집값 德分에…

    그가 道知事 選擧에 出馬하며 申告한 財産은 14億4900萬원이다. 2008年 國會議員이 됐을 때는 16億2700萬원을 申告했다.

    ▼ 생각보다는 財産이 많다. 勞組 하면서 언제 그렇게 돈을 모았나.

    “세 가지다. 우리 집과 어머니 집, 그리고 現金이다. 一山 킨텍스 앞에 있는 집값이 많이 오른 德分이다. 다른 財産은 얼마 안 되고.”

    ▼ 언제 가장 큰 挫折感을 겪었나.

    “別로 없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運命이나 八字로 여겨진다. 내가 뭘 한다는 생각보다는 뭔가 맞닥뜨려지면 避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늘 勝敗가 걸려 있었지만, 뭐 질 때는 지는 것 아닌가. 解雇됐을 때는 事實 다른 職場도 알아봤다. 便하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解雇됐다 復職된 境遇가 거의 없었으니까. 어쨌든 그때의 經驗이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됐다.”

    ▼ 人生에서 가장 所重하게 여기는 價値가 뭔가.

    “人間의 尊嚴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貴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 비록 나의 敵이라도. 나를 호되게 批判하는 사람이라도. 그것이 곧 政治의 存在理由, 國家의 存立目的이라고 생각한다. 政治口號가 아니라 現實生活에서 實踐하려 努力한다. 每日 每瞬間. 쉽지는 않지만.”

    ▼ 같은 자리를 두 番 以上 안 앉는다는데 다음 目標는 뭔가. 長官?

    “(웃음) 그건 아니다. 知事 끝날 때면 나도 58歲다.”

    ▼ 政務職이나 政治人은 停年이 없지 않은가.

    “이게 宏壯히 힘든 일이다. 2月28日 出馬宣言 以後 土曜日 日曜日을 한 番도 못 쉬었다.”

    ▼ 釋迦誕辰日에 인터뷰를 해서 未安하다.

    “아니다. 차라리 이런 時間이 便하다. 안 그러면 어디 돌아다녀야 한다.(웃음)”

    向後 人生計劃에 對해 그는 “그때 가봐서”라고 答했다. 내가 그동안 인터뷰한 社會著名人士 中에 이런 式으로 自身의 未來를 不透明하게 提示한 사람은 없었다. 記者 그만두고 뭘 할지 뚜렷한 計劃이 안 서 있는 내게는 慰勞를 주는 얘기지만.

    ‘승부사’ 최문순 강원지사
    “다음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러면 現在의 일을 제대로 못한다. 내가 國會議員 될 때 先輩들이 말했다. 再選 생각 말라고. 그러면 잘할 수 있다고. 그런데 그걸 지키는 사람이 別로 없다. 내가 다음을 생각하는 政治人이었다면 言論法 問題를 두고 그렇게 싸울 수 없었을 거다. 只今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다음을 準備한다고 해도 事實 뜻대로 되지도 않는다.(웃음)”

    그는 至毒히 運이 좋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 運을 만든 것은, 내던져야 할 때 내던질 줄 아는 勝負師 氣質이었다. 이런 건 이데올로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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