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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SD 쪽 時間差 攻擊 세 房에 나가떨어졌다”|신동아

“우리는 SD 쪽 時間差 攻擊 세 房에 나가떨어졌다”

‘SD 一線後退’ 企劃한 少壯派의 核, 박재성 前 特報 最初 인터뷰

  • 배수강│東亞日報 新東亞 記者 bsk@donga.com

    入力 2011-05-20 1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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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競選캠프 組織 名單 流出 때부터 異常했다”
    • 18代 總選 公薦 機密 새…“SD 쪽에 또 當했구나”
    • 引受위 時節 한상률 前 國稅廳長 直接 追窮
    • 한 前 廳長 “‘李明博 X파일’ 있다. 정두언 만나고 싶다”
    • MB “家族 뒷調査 하나” 버럭…정두언 公薦作業 排除
    • “정두언 그룹은 悽絶하게 웃기게 當했다”
    • 舊惡(舊惡)은 죽기 마련…淸明(淸明)이냐 韓食(寒食)이냐일 뿐
    “우리는 SD 쪽 시간차 공격 세 방에 나가떨어졌다”
    李明博(MB) 大統領 選擧對策委員會(以下 選對委) 常任特報를 지낸 박재성(48)氏가 처음 입을 열었다. 그는 이 大統領이 서울市長日 때 大選 캠프에 合流해 BBK 事件과 ‘도곡동 땅’ 問題 같은 굵직한 이슈부터 家庭事까지 이 大統領 周邊 일을 도왔던 人物. 敏感하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다보니 캠프 時節 ‘爆發物 處理班長’으로 불렸다. 自然히 인터뷰 要請도 많았지만 그는 一切 言論에 나타나지 않았다.

    靜中動(靜中動)하던 그가 言論에 登場한 것은 大選 막바지인 2007年 12月. “이명박 候補의 BBK 設立을 立證하는 動映像 CD를 갖고 있다”며 한나라당에 30億원을 要求한, 이른바 ‘광운대 BBK 動映像’ 脅迫犯들을 호텔로 誘引해 警察에 넘기면서 그의 存在가 알려졌다.

    大選 以後 引受위 政務分課 諮問委員으로 이름 올렸고, 言論은 그를 ‘大選 一等功臣’ ‘MB 新權力의 사람들’로 紹介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引受委 以後 只今까지 野人(野人)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해 知人의 紹介로 한 中堅企業 常任諮問役으로 들어간 게 全部다.

    그런 그가 4·27 再·補選 한나라黨 敗北 以後 한나라당 少壯派와 親李(親이명박界) 主流 間 黨權을 向한 힘겨루기가 始作되면서 다시 注目받고 있다. 정두언 議員을 中心으로 한 少壯派는 ‘새로운 한나라’ 모임을 만들어 刷新 話頭를 先占했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2008年 3月 18代 總選에 앞서 한나라당 出馬者 55名이 이상득(SD) 議員의 公薦 返納을 要求한, 이른바 ‘親伊 55人 親衛쿠데타’의 震源地도 朴 前 特報였다. 再·補選 敗北로 불붙은 黨內 權力鬪爭 2라운드에서 朴 前 特報의 움직임이 注目되는 理由도 여기에 있다. 引受위 時節 한상률 前 國稅廳長을 直接 만나 ‘X파일’을 追窮한 사람도 朴 前 特報였다.

    權力鬪爭에서 졌다



    4月 中旬 만난 그는 未安하다는 表情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여러 次例 인터뷰를 要請했지만 그는 “別로 드릴 말씀이 없다”며 鄭重히 拒絶한 터였다. 現 政權을 만든 사람으로서 ‘歷史의 記錄’에도 責任지라는 그럴듯한 名分과 2006年 어느 날 偶然히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만나 함께 野球競技를 觀覽했던 小小한 因緣까지 들먹이며 4月 初 그에게 다시 인터뷰를 要請했다. 結局 그는 ‘인터뷰를 繼續 拒絶하기도 未安했다’며 記者와 세 次例 마주 앉았다.

    ▼ 어떻게 지냈습니까?

    “잘 지냈습니다. 運動도 하고 일도 하고….”

    ▼ 運動?

    “스크린골프요. 홀인원度 두 番 했어요.”

    ▼ 일은 할 만한가요?

    “네. 여기서도 할 일이 많네요. 어쩌면 인터뷰 後에 짐 쌀指導 몰라 會社에 미리 얘기했습니다(웃음). (權力으로부터 連絡이 오면) 負擔 없이 얘기하라고.”

    ▼ 그렇게까지….

    “運命이죠. 權力鬪爭에서 진 사람의 運命. 그래서 그동안 조용히 지냈습니다.”

    ▼ 權力鬪爭이라면 SD契를 念頭에 둔 말씀인가요?

    “그 얘기는…처음부터 많이 (앞서)나가시네요.”

    ▼ ‘나간 金’에 바로 묻죠. ‘55人의 叛亂’은 ‘박재성 企劃’ 아니었나요?

    “….”

    讀者의 理解를 돕기 위해 2008年 3月 政局(政局)으로 되돌아가보자. 18代 總選을 앞두고 南景弼, 정두언, 정태근 候補 等 首都圈 한나라黨 出馬者 55名은 이렇게 主張한다.

    “庶民을 外面한 政策 混線과 잘못된 人事, 잘못된 公薦에 對해 黨 指導部가 國民에게 謝過해야 한다. 人事를 잘못한 靑瓦臺 關係者에게도 責任을 물어야 한다.”

    “우리는 SD 쪽 시간차 공격 세 방에 나가떨어졌다”

    2008年 6月 國會에서 열린 한나라당 院內對策會議에서 홍준표 院內代表(왼쪽에서 네 番째)가 “權力私有化 論爭으로 불거진 黨內 紛亂을 坐視하지 않겠다”며 “이상득, 정두언 議員은 自重하라”고 말했다.

    同時에 이상득 議員의 總選 不出馬도 要求했다. 李明博 政府 1期 內閣이 이른바 ‘강부자 內閣’으로 批判받고, 黨內 公薦 雜音이 커지자 少壯派들이 ‘兄님 狙擊’을 통해 反轉을 圖謀한 것이다. 이 事件으로 南景弼·정두언·정태근 議員은 ‘飯(反)SD 라인’ 象徵으로 떠올랐고, 鄭 議員은 SD 補佐官 出身인 박영준 企劃調整祕書官(現 知識經濟部 次官)을 向해 ‘權力을 私有化한다’며 直擊彈을 날렸다. 以後 이들 議員과 家族 等이 國務總理室 公職倫理支援官室의 査察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兩側 對立은 最高潮에 達했다.

    記者는 當時 SD系와 少壯派 間 攻防을 取材하면서 SD系와 半SD界의 잠재된 葛藤은 ‘이상득 狙擊’으로 水面으로 떠올랐고, SD 攻擊의 最初 震源地는 朴 前 特報였다는 事實을 確認했다. 그는 對答 代身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아래턱을 몇 次例 위로 밀어 올리더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經驗則上 이런 境遇는 ‘나는 對答할지를 갈등하고 있다’는 信號다.

    “否認하지 않겠습니다. 李明博 政府 들어서고 初期 조각(組閣)으로 民心이 洶洶했어요. 여기에 박희태 選對委員長 等 元老 政治 先輩들은 公薦을 못 받는데 SD는 살아남았죠. 一貫性도 公正性도 없고, 道義的으로도, 그리고 韓國籍 政治 風土를 勘案해도 理解할 수 있는 ‘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當時 MBC 輿論調査에서도 ‘SD는 公薦을 返納해야 한다’는 意見이 76.6%였어요. ‘이래 가지고 나라가 되겠느냐’는 苦心이 깊어졌죠. 南(勁筆) 議員과 얘기하고, 地域 巡訪 中인 鄭 議員을 찾아갔어요. 南 議員은 ‘나가떨어지더라도 옳은 말을 해야겠다’고 하더군요. 鄭 議員도 欣快히 同意하면서 ‘나 혼자 해서 힘이 되겠느냐? 改革的 이미지(남경필, 元喜龍을 指稱)를 주든지(함께하든지)’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섰습니다. 少壯派 議員들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觸媒 役割을 한 겁니다.”

    SD 總選 不出馬 企劃

    ▼ 同參한 出馬者도 19名에서 55名으로 急激히 늘었는데요.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겠어요?”

    ▼ 원희룡 議員은 다른 길을 걸었는데요.

    “喜龍(그는 元 議員과 같은 82學番 親舊다)이와 호프집에서 만났어요. 한 時間 半 얘기했는데 ‘뉘앙스’가 안 맞더라고요. ‘親舊로서 付託인데, 同參하지 않아도 中立은 지켜달라’고 했어요.”

    ▼ 뭐라던가요?

    “‘알겠다’고 했죠.”

    ▼ 以後 元 議員은 黨 事務總長에 任命되는 等 SD 側과의 關係가 좋아졌는데요.

    “怨 議員도 少壯派 非主流로 크는 것보다 酒類 안에서 活動해보고 싶었겠죠. 그 親舊는 그 親舊 스타일이 있으니까….”

    ▼ ‘巨事’는 成功하지 못했습니다.

    “2008年 3月 中旬에 南 議員이 SD 地域區(慶北 浦項 南·鬱陵郡)로 찾아갔어요. 浦項으로 가는 車 안에서 南 議員이 電話했기에 ‘眞情性을 잘 말씀드리고, 後輩들이 元老 先輩를 잘 모시겠다’는 뜻을 傳達해달라고 付託했죠. 豫想은 했지만 안 받아들이시더라고요.”

    ▼ ‘兄님’과의 一戰은 쉽지 않은 決定이었겠네요.

    “아니요. 오히려 쉬웠습니다. 누가 봐도 아닌 길로 가는데, 政權을 만드는 데 一助했던 사람이 ‘아니다’고 해야죠.”

    같은 親李系로 大選 勝利를 일궈냈지만 서로 간 깊은 不信 속에 一戰을 벌였던 SD系와 少壯派. 그 理由에 對해 單刀直入的으로 묻고 싶었지만 記者는 話題를 돌렸다. 속 깊은 얘기를 하기에는 時間이 必要하다는 듯, 그의 答辯은 자주 끊겼다.

    ▼ 캠프 時節 組織과 政務팀을 두루 오간 걸로 압니다만.

    “처음엔 政務팀이 없었어요. 組織팀에서 일하다가 鄭 議員을 알게 됐고 함께 손발을 맞췄습니다. 組織팀 손놓고 政務 쪽 일을 했어요. 그땐 자다가 일어난 적이 한두 番이 아니었죠.”

    ▼ 자다가 일어난 일이라면….

    “親姻戚 問題부터 BBK 防禦까지 안 한 게 없었죠. 처음에는 캠프가 꾸려진 (서울 汝矣島洞) 龍山빌딩에서 함께 일하다가 나중에는 隣近 오피스텔을 救해 일했습니다. 相對方의 ‘네거티브 戰略’을 分析하거나 MB 親姻戚 問題를 다루는 일은 保安 維持가 必須였거든요.”

    “우리는 SD 쪽 시간차 공격 세 방에 나가떨어졌다”

    MB가 서울市長에서 물러나기 前부터 大選 前哨基地 役割을 했던 서울 견지동의 安國포럼.

    ▼ 親姻戚 問題로는 어떤 게 있었나요?

    “當場 사이가 나쁘다고 해서 只今 말하기에는…. 그 얘기는 안하는 것이 禮儀라고 봅니다. 사이가 좋을 때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것은 제 스타일과도 맞지 않아요.”

    ▼ 스타일도 좋지만, 저는 인터뷰 記事로 뭘 씁니까?

    “아이고…. 조금만 理解해주세요.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댄 뒤) 이것저것 많았습니다. 그(親姻戚)와 關聯된 問題가 터지면 찾아가 付託도 하고, 問題 提起를 한 사람을 만나 協助도 求했습니다. ‘한 番만 도와주면 고마움은 잊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러고 보니 그때 協助해주셨던 분들에게 뭔가 報答을 못하고 있네요. 그 얘긴 이 程度 하시죠.”

    朴 前 特報는 캠프 組織과 政務 일을 하면서 當時 정두언 議員과 손발을 맞췄다. 事實 그는 鄭 議員과 一面識도 없었다. 그와 鄭 議員을 連結해준 사람은 MB였다.

    朴 前 代表와 ‘맞짱’뜨지 말라

    “只今은 國會議員이 된 知人이 저를 MB(當時 서울市長)에게 紹介했어요. 2006年 2月頃이었는데, 當時는 輿論調査에서 朴 前 代表에게 더블스코어 程度로 지고 있던 時期였죠. 日曜日 午後 市長室에서 만났는데, 제 意見을 듣더니 ‘正말 좋은 얘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가 일한 ‘安國포럼’은 2006年 7月 MB가 서울市長에서 물러나기 前부터 大選 前哨基地 役割을 했던 곳이다. 鄭 議員 等 서울市廳 出身 멤버들이 中心이었다. 朴 前 特報는 MB가 스카우트한 1號 參謀가 돼 合流한다. 當時 그가 MB에게 提案한 競選 戰略은 ‘黨內 組織을 地區黨 組織 싸움으로 끌고 가지 말라’는 것. 朴 前 代表와 ‘맞짱’ 뜨면 질 수밖에 없으니 政治的 野望이 있는 地方 代議員(廣域·基礎議員)을 잡으라는 策略이었다.

    朴 前 特報는 MB 캠프에서 活躍하기 前부터 한나라당 核心 人士들 사이에 ‘組織 專門家’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2002年 大選을 앞두고 ‘이회창 大勢論’이 한창일 때 “釜山·慶南에서 노풍(盧風)이 불면 窓(昌)은 질 수 있다”는 報告書를 낸 사람도 그였다. 報告書를 눈여겨본 當時 尹汝雋 議員이 이회창 한나라당 候補와 獨對 자리를 마련해줬고, 釜山 金井區에서 區議員과 두 番의 市議員을 지냈던 그는 大選 釜山特別팀長으로 活動하게 된다. 以後 최병렬, 박근혜 議員의 黨 代表 競選을 돕고, 總選 戰略을 짰다. 어쨌든 MB의 紹介로 만나 콤비가 된 정두언-박재성 兆(組)는 熾烈한 競選을 치러내며 大選 勝利를 이끌었지만, 逆說的으로 大選 以後 MB의 눈 밖에 나는 運命에 處했다.

    “安國포럼 時節 鄭 議員은 企劃과 組織, 人材迎入 等 全方位的으로 活動했죠. 일도 잘했고, 파트너십度 괜찮았어요.”

    ▼ 그때 文件도 流出됐죠?

    “文件이라면?”

    ▼ 競選 캠프 組織 文件 말입니다. 정두언 狀況室長, 박재성 副室長이라는….

    “아, 네. 거 참…그때부터 (SD쪽과) 일이 꼬이기 始作하더라고요.”

    黨內 大統領候補 競選을 앞둔 2007年 5月 京畿道의 한 日刊紙에 MB 競選 캠프 組織構成 文件이 流出됐다. 이 文件은 MB가 鄭 議員에게 내린 ‘密命(密命)’으로, 組織 構成을 企劃한 鄭 議員과 朴 前 特報, 김해수 前 大選候補祕書室 副室長, 경윤호 前 京畿道公報官과 事前 報告를 받은 SD 程度만 아는 極祕事項이었다고 한다. 캠프 構成은 박희태 選對委員長, 정두언 狀況室長, 박재성 副室長 體制로 돼 있었다. 文件이 流出되자 李在五 議員은 勿論 黨 全體가 ‘亂離’가 났다.

    “選擧를 指揮했던 또 다른 軸인 李在五 議員도 무척 火를 냈죠. 그가 서운해한 것은 理解해요. (MB의) 最終 사인이 나면 (李 議員에게) 報告하려고 했었는데 그 사이에 새나간 거죠. 鬼神 哭할 노릇이었죠. 그런데 疑問은 왜 文件이 中央 日刊紙나 다른 地域 日刊紙도 아닌, 京畿地域 日刊紙로 새나갔을까 하는 겁니다. (京畿地域 日刊紙에 새나가면) 當然히 우리 팀에 있는 경윤호 前 公報官이 誤解를 받지 않겠어요? 結果的으로도 그 때문에 鄭 議員을 비롯한 우리 팀이 攻擊당했고요. 文件 流出은 意圖的이었습니다.”

    競選 캠프 名單 流出…SD 疑心 始作

    “우리는 SD 쪽 시간차 공격 세 방에 나가떨어졌다”

    한나라당 남경필 權泳臻 鄭泰根 구상찬 金聖泰 정두언 金成植 議員(왼쪽부터) 等 ‘새로운 한나라黨’ 所屬 少壯派 議員들이 5月8日 午後 國會 鄭泰根 議員室에 모여 向後 活動方向 等을 論議하고 있다.

    ▼ SD契를 겨냥한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이 議員은 競選캠프 名單 作成에 參與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먼저 알고 있었나요?

    “當時 MB는 ‘副議長님(SD)에게만 얘기하라’고 했으니까.”

    ▼ 名單 作成에 參與한 사람이 流出했을 可能性도….

    “鄭 議員과 저, 警 公報館은 直接 캠프 組織을 짠 사람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流出하겠어요? 流出되면 ‘保安 維持도 못한다’고 非難받을 사람들이 流出을 한다? 그 일로 鄭 議員은 李在五 議員과 틀어지고, 鄭 議員에 對한 MB의 믿음도 처음 금이 갔어요. 只今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요.”

    ▼ 왜 그랬다고 보나요?

    “캠프 내 ‘정두언 體制’의 獨走를 막으려는 거죠. 그때까지의 캠프 主導 勢力, 卽 狀況室長 정두언, 副室長 박재성 構圖가 流出 事件으로 처음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이없는 일’李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인터뷰는 自然스레 兩側 間의 오래된 不信으로 흘렀다. 같은 親李系이면서도 정두언系와 SD界 사이에 빚어진 不信의 原因이 무엇인지가 인터뷰 모두에 하고 싶었던 質問이었다.

    ▼ 그런 일이 또 있었나요?

    “引受위 時節에요. 事實 우리 쪽은 아무 생각 없었어요. 當選人께서 鄭 議員을 불러 이방호 當時 한나라당 事務總長이 (18代 總選) 公薦 作業을 할 건데 鄭 議員 팀이 志願하라고 했어요. 總選 밑그림을 그려보라는 건데, 딱 한 番 모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鄭 議員이 (當選人室에) 올라갔다 오더니 ‘왜 일을 그렇게 하느냐’며 버럭 高喊을 치더라고요. 김무성 議員이 임태희 當選人祕書室長에게 電話해 ‘박재성이 公薦 作業하는데 우린 承服할 수 없다’고 했다는 거예요.”

    2005年 9月 한나라당 黨 代表 競選에서 그는 최병렬 候補의 戰略을 짜는 核心 參謀였다. 反面 김무성 議員은 서청원 候補를 支援한 것으로 알려졌다. 以後 朴 前 特報는 17代 總選 公薦에서 최병렬 黨 代表의 改革 公薦을 企劃했고, 金 議員은 反對票를 던진 因緣이 있다.

    ▼ 이番엔 말이 새어나갔군요?

    “처음엔 저도 영문을 몰랐죠. 그래서 ‘우리가 언제 公薦 作業을 했느냐’며 저도 火를 냈어요. 公薦 그림을 構想하고 있었지, 公薦 作業을 始作한 것도 아니었어요. (公薦) 作業이라도 하고 욕먹으면 理解나 가지. 그런데 첫 모임에 參與한 사람을 따져보니 理解가 됐어요. 첫 모임에는 저와 李泰珪(前 大統領 演說記錄祕書官), 박영준 等이 參與했거든요.”

    ▼ 그래서 結局 公薦 作業에서 鄭 議員 側이 排除됐군요.

    “아시는 대로죠. 우리는 保安 維持도 안 된다고 또 찍혔죠. MB에게 정두언, 박재성은 또 눈 밖에 나고…. 悽絶하게 웃긴 얘긴데 正말 悽絶하게 웃기게 當했어요.”

    ▼ 一種의 謀陷인데….

    “引受위 內에서 정두언을 筆頭로 한 그룹이 모든 걸 다 한다는 危機感이 作動하는 時節이었으니… 움직인 거죠.”

    正말 悽絶하게 웃기게 當했다

    ▼ 證據가 있습니까?

    “錄取錄이라도 있어야 합니까? 다 아는 事實인데.”

    여기서 暫時 親李系 內部의 權力鬪爭 樣相을 짚어볼 必要가 있다. 李 大統領은 김영삼, 김대중 前 大統領처럼 政治人 出身이 아닌 만큼 ‘剛한 追從 勢力’이 없었다. 마땅한 힘의 均衡錘가 없는 狀況에서 勢力을 끌어 모아 競選과 大選을 치르다보니 系派別 權力暗鬪가 거세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大選 直後 4個月 만에 總選이 치러지고, 다시 3個月 後 黨 代表 選出이라는 빡빡한 日程도 親李系 內部 破裂音을 크게 했다는 分析이다. 只今도 如前하지만, 親李系 內에서 SD 그룹(朴榮濬, 최시중, 장다사로, 류우익, 이방호 等), 李在五 그룹(공성진, 진수희, 李君賢 等), MB 直系 정두언 그룹(이춘식, 鄭泰根, 曺海珍 等) 間 3代 門派는 때에 따라 喜悲가 엇갈렸다. 引受委 構成은 정두언 그룹이 主導했지만, 조각(組閣)과 靑瓦臺 人選은 이 大統領이 힘을 실어 준 SD 그룹의 勝利였다. 總選 公薦은 李在五-이상득-이방호-정종복 라인이 움직였다는 게 共通된 視角이다. 다시 인터뷰로 돌아가자.

    “우리는 SD 쪽 시간차 공격 세 방에 나가떨어졌다”
    ▼ 繼續 當했다는 건데, 가만히 있었나요?

    “鄭 議員과 한番 크게 싸웠습니다. ‘일을 못한 건 못했다고 해야지 왜 陰害를 當하느냐’고. 하는 일마다 陰害가 있고 異常하게 돌아가니까요. (鄭 議員은) 저보고 世上을 삐딱하게 본다더군요. 저는 왜 멍청하게 當하고만 있냐고 따졌습니다. 鄭 議員은 밖으로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純粹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當하고만….”

    ▼ 反擊은 없었나요?

    “反擊? 제가 20代 後半부터 이 (政治)版에 있었지만 그런 式의 攻擊에 對應할 재주가 없어요. 똑같이 구르라는 건데…. 그냥 가랑비에 옷 젖고 있었던 거죠.”

    ▼ 가랑비라면?

    “이런저런 일로 우리 팀에 對한 MB의 信賴는 繼續 줄어들고… 反對給付를 챙긴 그룹도 있고.”

    ▼ 어쨌든 캠프와 引受위 時節 權力暗鬪에 밀린 게 ‘SD 攻擊’으로 이어졌군요.

    “그건 조금 다릅니다. 캠프 時節부터, 大統領 當選 以後에 SD 隱退宣言을 企劃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언제 했는지 明示的이진 않지만 ‘(大統領에) 當選되면 나(SD)는 뒤로 간다’는 말이 캠프 內에서 돌았어요. 그런데 引受委 지나고 첫 內閣의 名單을 發表한 뒤 民心이 나빠졌고, 公薦 잘못해 黨이 쪼개질 危機에 處하게 됐잖아요? 結局 自招한 거라고 봐요.”

    ▼ 引受委 構成은 鄭 議員이 主導하지 않았나요?

    “行政考試 出身인 鄭 議員이 自身의 期數 아래위, 各 部處 에이스를 大擧 布陣시킨 건 맞아요. 그것도 實力과 年功序列을 꼼꼼히 따진 겁니다. 정두언이 제 食口 챙겼다? 그건 鄭 議員 스타일이 아닙니다. 일 잘하니까 뽑힌 거죠. 그러면 뭐 합니까? 정작 重要한 人事는 萬事型(兄)通이었는데.”

    MB 當選되면 나(SD)는 뒤로 간다

    ▼ 鄭 議員의 SD 攻擊을 ‘몸값 올리기’로 보는 視角도 있습니다.

    “글쎄요. 가랑비 뿌린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겠죠.”

    李明博 政府 첫 彫刻과 靑瓦臺 人選 過程은 그의 말대로 SD界의 完勝이었다. 當時 要職 拔擢 對象者는 박영준 次官의 손을 거쳐 SD에게 報告해 裁可를 받았다. 朴 次官은 ‘신동아’ 2010年 8月號 인터뷰에서 “人事 權力을 놓친 것이 以後 鄭 議員의 ‘權力 私有化’ ‘人事 專橫’ 發言의 基底에 깔렸을 것이라고 보느냐”는 記者의 質問에 “그것이, 그때가 (發言 原因으로는) 第一 컸을 것이다. 그래서 鄭 先輩 立場은 理解가 된다”고 했다. 鄭 議員과 朴 次官은 서울市 副市長과 局長으로 함께 勤務했다.

    ▼ 鄭 議員 그룹에 對한 MB의 信賴는 금이 갔는데, 다시 公薦 作業을 맡겼다?

    “只今 생각해보면 우리 팀이 일은 잘 處理하니까, 일은 시키고 한便으론 牽制하고…. 그랬던 거 같아요.”

    이와 關聯, 鄭 議員은 最近 言論 인터뷰에서 SD系와 틀어진 原因의 하나로 한상률 前 國稅廳長의 ‘李明博 X파일’을 꼽았다. 먼저 鄭 議員 말부터 들어보자.

    “引受위 때 있었던 일 中에 國稅廳 事件이 宏壯히 안 좋았어요. 當時 한상률 國稅廳長이 ‘李明博 파일’을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當身이 한 짓을 내놓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끝내 안 내놓고 오히려 저를 謀陷했어요. 마치 제가 大統領 家族의 資料를 뒤진 것처럼. 그런 거 저런 거가 섞여서 (SD와) 不便한 關係가 됐어요.”

    ▼ 鄭 議員의 인터뷰 記事를 보셨나요?

    “네, 봤습니다. 한 前 廳長을 直接 만난 사람이 접니다. 그 일로 우리는 完全 게릴라性 集中豪雨에 번개까지 맞았습니다. 우리로선 決定打였죠.”

    ▼ 決定打였다면….

    “選擧 當時 ‘도곡동 땅’ 問題가 터져 나왔잖아요? 當時 與黨(大統合民主新黨)은 이 問題를 들고 나와 MB를 攻擊했습니다. 제가 가만히 分析해보니 도곡동 땅 問題는 國稅廳 等 權力機關이 뒷調査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引受위 時節에 國稅廳을 치고 들어갔어요.”

    “우리는 SD 쪽 시간차 공격 세 방에 나가떨어졌다”

    이상득 議員에게 總選 不出馬 要請을 하러 浦項으로 내려간 남경필 議員.

    ▼ 치고 들어갔다?

    “國稅廳 職員을 통해 미리 調査하고, MB 一家를 뒷調査한 部署를 콕 짚어 말하니까 國稅廳에서 內紛이 일어났어요. 한 職員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 前 廳長에게 ‘不法 文件 所持한 거 내놓아라’고 했죠. 選擧 때마다 國家機關이 候補 뒷調査하는 不法行爲는 根絶해야 할 거 아닙니까. 저는 이番 機會에 이런 惡循環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繼續 主張했어요.”

    ▼ 한 前 廳長의 反應은 어땠나요?

    “正確한 ‘워딩’은 이렇습디다. ‘나는 잘 모르는 일이지만 文件이 있는 거 같다. 只今 찾고 있다.’ 그러면서 鄭 議員을 直接 만나게 해달라더군요. 또 (鄭 議員이) 陰害를 當할까봐 만남을 周旋하지 않았어요. 이 活動은 모두 鄭 議員을 통해 當選人(MB)에게 報告했어요. 그런데 며칠 뒤 當選人이 ‘왜 뒷調査하느냐’며 야단쳤어요. 分明히 報告하고 한 일이고, 不法行爲를 根絶하려고 한 正當한 調査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當選人과 家族 뒷調査를 한다고 疑心하더라고요. 얼마나 어처구니없던지. 結局 또 當한 거 아닙니까.”

    한상률 前 國稅廳長 “도곡동 땅 X파일 있다. 찾고 있다.”

    ▼ 한 番 더 묻겠습니다. 國稅廳 職員과 한 前 廳長은 도곡동 땅을 調査한 文件이 있다고 했습니까?

    “네. 생생하게 기억나죠. 引受위에 派遣된 國稅廳 職員들도 調査했습니다. 한 前 廳長은 分明 ‘(文件을 回收하는 데) 時間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 한 前 廳長이 SD에게 謀陷을 했고, MB도 이를 事實로 믿은 거 같다는 건가요?

    “나중에 感은 잡았죠. 안원구 前 國稅廳 稅源管理局長이 SD를 만나 한 前 廳長 留任을 付託했고, 한 前 廳長 亦是 SD와 골프를 치면서 直接 連任 로비를 했다는 疑惑이 있었잖아요? SD 아들 稅務調査 撫摩 後 한 前 廳長이 連任에 成功했다는 記事도 났지 않습니까.”

    ▼ 國稅廳 文件과 한 前 廳長 留任을 ‘맞交換’했다?

    “그건 제가 알 수 있나요. 그 文件 問題로 우리는 完全히 눈 밖에 났죠. 眞實이 밝혀질 날이 곧 올 겁니다.”

    ▼ 文件은 못 보셨죠?

    “當然하죠.”

    ▼ 當選人께 報告도 했는데 호통을 들었다는 건 이해가지 않네요.

    “저도 처음에 어리둥절했어요. 갑자기 왜 저러시나 싶었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당선시킨 사람을 우리가 왜 뒷調査합니까?”

    ‘도곡동 땅 疑惑’은 이 大統領이 서울 강남구 도곡동 4個 筆地를 親兄 李尙恩氏와 妻男 김재정氏 名義로 買入 管理해오다가 1995年 포스코건설에 팔았다는 疑惑이다. 大選 過程에서 實所有主 論難이 불거졌고, 안원구 前 稅源管理局長은 ‘李 大統領이 實所有主로 나와 있는 傳票를 봤다’고 主張했다.

    그러나 한 前 廳長 後任인 백용호 前 國稅廳長(現 大統領室 政策室長)은 2009年 11月 國會 企劃財政위 全體會議에서 “그런 文件은 없는 것으로 報告받았다”며 存在事實을 否認했다. 檢察과 特別檢事도 도곡동 땅은 李 大統領의 所有가 아니라고 結論 내렸다.

    反面 도곡동 땅 疑惑의 全貌를 알고 있다는 疑惑을 받은 한 前 廳長은 朴 前 特報에게 ‘도곡동 땅 뒷調査 文件이 있다’고 했다. 當時 國稅廳의 X파일 內容은 무엇이고, 한 前 廳長은 그걸 어떻게 活用했는지 알 수 없지만, 노무현 政府에서 國稅廳長이 된 한 前 廳長이 留任된 데 對한 疑惑은 如前하다. 두 廳長 中 누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거짓말쟁이’가 百 前 廳長이라면, 檢察 亦是 ‘免罪符 搜査’를 한 꼴이 된다. 萬若 앞서 어떤 去來가 있었다면, 百 前 廳長은 正말 報告를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 個人的인 質問 하나 하겠습니다. 2010年 11月 國會 豫算決算特別委員會에서 민주당 이석현 議員이 總理室 傘下 公職倫理支援官室의 全方位 査察에 對해 質疑하면서 朴 前 特報의 이름을 擧論했는데요. 알고 계시나요?

    “네. 그런데 이 議員이 잘못 알고 있어요. 저는 國精院長 特報로 特採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金聖灝 前 國精院長이 저를 챙겼다는 대목에선 失笑가 납니다. 金 前 院長이 저를 챙겼다니…. (李 議員이) 國家機關의 情報報告를 入手해 읽은 거 같아요.”

    當時 李 議員은 南景弼, 鄭泰根 議員 夫人 査察 等 全方位 査察에 對해 言及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金聖灝 前 國精院長 査察事例입니다…부산 金井區 出身 市議員을 지낸 亦是 브니엘高 出身(同門)인 박재성氏를 國精院長 特報로 特採했습니다. 이에 이창화 行政官은 金聖灝 院長이 親盧 性向 PK 出身만 챙긴다면서 이종찬 民政首席에게 金聖灝 院長 體制의 問題點을 報告하면서 金聖灝 院長이 追後에 除去되는 契機가 始作되었습니다.”

    ▼ 南景弼, 鄭泰根 議員 夫人 査察에 이어 朴 前 特報가 함께 擧論되는 게 공교롭네요.

    “그래서 그런지 公職登錄 檢證 同意書는 提出했는데 어떤 자리에도 任用되지 못했어요. 權力鬪爭에서 졌으니, 뭐 할 말은 없습니다만.”

    ▼ 家族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이거(選擧) 한다고 몇 年間 釜山에 있는 家族과 떨어져 살았는데 볼 낯이 없더라고요. 關係 說明을 할 수도 없고 辱도 못하고… 答을 못하는 게 苦痛이었습니다. 世上살이 많이 배웠죠. 아까 말씀드렸죠? 家族보다 더 볼 낯이 없는 사람들이 大選 때 저를 믿고 도움을 줬던 사람들입니다.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그분들에게는 平生 갚고 살아야죠.”

    피는 콜라보다 津하다

    ▼ 政治權에선 朴 前 特報가 選擧 때 ‘組織’에 强하다고 하던데요.

    “組織은 돈을 많이 쓰는 게 重要한 게 아닙니다. 目標를 單一化하면 됩니다. 남이 쓴 費用 折半도 안 써도 이깁니다. 事業은 利益이 目的이지만, 政治는 無言의 信賴와 비전을 共有하면 (組織은) 그냥 됩니다.”

    ▼ 지난 大選에서는 비전 共有가 잘 안된 거 같네요.

    “그런가요(웃음)? 後輩들은 저보고 ‘DNA가 非主流’라고 합니다. 黨 主流와 衝突한다고.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몸담은 糖이 健康하고 世上 變化에 主動的인 役割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只今까지 非主流였던 거였죠. 언젠가는 變하겠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主流가 되는 世上이 오면 저의 葛藤도 끝날 겁니다. 國政 壟斷 勢力은 언젠가 죽기 마련입니다. 淸明(淸明)에 죽느냐, 韓食(寒食)에 죽느냐일 뿐이죠. 저를 包含한 한나라당 內 改革派들도 갈고 닦아야 합니다. 只今까지 經驗했잖아요? 이 狀態로 權力鬪爭하면 完全 ‘獨박’쓸 수 있겠구나, 大統領 兄님하고 싸우면 안 되겠구나, 피는 콜라보다 津하구나… 다 배웠잖아요?”

    ▼ 抑鬱하지 않다는 뜻인가요?

    “내가 (權力鬪爭에서) 밀렸다고 나쁘게 말하고 다니면 저만 불쌍해집니다. 뭐가 不足했을까, 또 내가 저 位置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反省하는 게 重要하죠.”

    ▼ 4·27 再·補選 以後 黨內에서 ‘젊은 代表論’李 뜨고 있습니다. 反擊의 機會가 마련되는 건가요?

    “하나의 代案이 될 수 있습니다. 最小限 努力이라도 해야죠. 이제는 黨 看板 交替보다는 黨을 交替해야 합니다.”

    ▼ 黨 看板도 바꿀 듯한데요.

    “改革的인 젊은 이미지는 元喜龍 羅卿瑗 정두언 南景弼, 그 程度밖에 없지 않습니까?”

    ▼ ‘젊은 代表論’을 豫想하는 건가요?

    “現在 境遇의 數는 ‘實勢 代表論’과 ‘젊은 代表論’ 2가지입니다. 實勢 代表論은 各 系派가 모두 同意를 해야 해 複雜합니다. 젊은 代表論은 現實的입니다. 젊은 代表를 만들려고 하더라도 實際로 黨을 刷新하자는 勢力과 雰圍氣에 便乘해 자리를 노리는 似而非 勢力을 골라내는 努力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舊惡(舊惡)에 抵抗하면서 헤쳐나갈 수 있는 方法을 硏究해야죠. 勿論 健全한 牽制勢力으로 (少壯派는) 黨權에서 한걸음 물러날 수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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