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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題 무리뉴 레알 마드리드 監督|新東亞

主題 무리뉴 레알 마드리드 監督

‘스페셜 원’ 時代 연 그라운드의 美中年 毒舌家

  • 하정민│東亞日報 DBR 記者 dew@donga.com

    入力 2011-05-19 13: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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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萬年 候補 選手가 世界에서 가장 많은 年俸을 받는 蹴球 監督이 됐다.
    • ‘잉글랜드 蹴球의 傳說’ 고(故) 바비 롭슨 京義 通譯으로 出發한 그는 只今 유럽 3個國 리그 優勝을 達成한 名匠(名將)으로 脚光받고 있다.
    • 스페인 名門 클럽 레알 마드리드를 이끄는 主題 무리뉴 監督. 그를 世界的 監督으로 만든 건 ‘이기는 蹴球’에 對한 洞察과 選手들에 對한 뜨거운 愛情이었다.
    “다른 사람과 나를 比較하지 마라. 나는 單 하나의 특별한 存在(special one)다.” 할리우드 俳優의 映畫 臺詞가 아니다. 한 蹴球 監督이 스스로를 評價한 말이다.

    人和(人和)와 리더십을 同一視할 때가 많은 東洋圈에서는 傲慢할 程度로 自信感 넘치는 이런 類型의 리더를 別로 반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發言의 主人公은 스스로를 ‘스페셜 원’이라고 指稱할 만한 成果를 냈다. 그는 이탈리아, 英國, 포르투갈 等 유럽 3個 리그에서 모두 優勝을 차지했고, 모든 蹴球 監督의 念願인 트레블(Treble)도 達成했다. 바로 레알 마드리드의 監督 主題 무리뉴(Jose Mourinho)다.

    스타 選手 出身도 아니며 나이도 48歲에 不過한 그가 現在까지 쌓은 커리어는 그야말로 華麗하다. 3倍라는 辭典的 意味를 지닌 트레블은 어떤 스포츠에서 한 팀이 3個 大會를 優勝했다는 말이다. 프로 蹴球의 트레블은 한 클럽 팀이 同一 시즌에 自國 正規 리그, 自國 蹴球協會(FA·Football Associations) , 유럽 蹴球의 왕중왕戰이라 할 수 있는 유럽 蹴球協會(UEFA·Union of European Football Associations) 챔피언스리그 이 3個 大會에서 모두 優勝하는 일을 말한다.

    1955年 UEFA 챔피언스리그가 始作된 後 公式的으로 트레블을 達成한 클럽은 不過 6個. 셀틱, 아약스, 아인트호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以下 맨유), FC 바르셀로나, 인테르 밀란(英語式 表現 인터 밀란)뿐이다. 무리뉴 監督은 이 6個 팀 中 가장 近來에 트레블에 成功한 指導者다. 그는 2009~10 시즌 이탈리아의 인테르 밀란을 이끌고 이탈리아 클럽 팀으로는 史上 最初로 트레블을 達成했다.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監督이 英國 女王 엘리자베스 2世로부터 記事 爵位를 授與받은 것 또한 트레블을 達成했기 때문임을 勘案하면 트레블을 達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世界 蹴球界가 트레블의 權威를 얼마나 認定해주는지 잘 알 수 있다. 스타 選手가 워낙 많아 ‘地球 防衛隊’ ‘銀河水 軍團’ 等으로 불리는 레알 마드리드조차 아직 트레블을 達成하지 못했다. 레알 마드리드가 무리뉴를 監督으로 迎入한 理由도 여기에 있다. 그는 華麗한 言辯, 映畫俳優 뺨치는 外貌, 아르마니 슈트와 灰色 머플러를 着用하는 뛰어난 패션 感覺으로 有名하다. 世界 蹴球 監督 中 가장 많은 年俸을 받는 監督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話題를 몰고 다니는 뉴스 메이커인 셈이다.



    候補 選手에서 훌륭한 指導者로

    主題 무리뉴는 1963年 포르투갈 세투발의 富裕한 家庭에서 蹴球 選手인 아버지 펠릭스와 初等學校 敎師인 어머니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펠릭스는 세투발을 緣故로 하는 비토리아 데 세투발, 벨레넨세스 等의 클럽에서 活躍한 골키퍼였다. 그의 三寸 또한 세투발 스타디움 建立에 關與한 人物이었다. 蹴球人 집안에서 자란 德에 무리뉴는 어려서부터 蹴球 競技場을 제집 드나들 듯했고, 세투발 유스 클럽에서 蹴球 人生을 始作했다.

    하지만 選手 무리뉴는 그다지 頭角을 나타내지 못했다. 아버지가 코치로 일했던 히우 아베, 벨레넨세스, 細心브라 等의 클럽에서 센터白과 中央 미드필더를 맡았지만 競技에서 뛴 적은 거의 없는 萬年 候補 選手였다. 아버지와 같은 팀에서 뛸 때 當時 팀의 球團主가 그의 아버지 펠릭스에게 “實力 없는 選手를 아들이라고 起用해서는 안 된다”는 面駁을 주기도 했다. 무리뉴는 結局 20代 初盤에 隱退를 決定했다.

    하지만 現役 選手에서 물러나는 일이 蹴球와의 作別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무리뉴는 自身이 選手보다 指導者로 더 큰 潛在力을 지니고 있다는 事實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經營學을 專攻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바람을 뒤로하고 리스본의 體育學校 ISEF에 入學했다. 體育科學을 專攻하며 本格的으로 指導者 人生을 準備하기 始作했다.

    事實 指導者로서 그의 潛在力은 아주 오래前부터 發揮됐다. 세투발 유스 팀에서 뛰던 靑少年 時節, 그는 우연한 機會에 세투발이 相對할 클럽의 戰力 分析을 위해 派遣됐다. 戰力 分析을 위해 그가 가져온 記錄紙와 分析表는 當時 세투발 코칭스태프가 놀라움을 禁치 못할 程度로 水準이 높았다.

    10代 때부터 成人 指導者 못지않은 洞察力과 分析力을 지녔던 무리뉴는 大學 卒業 後 몇몇 學校에서 體育 敎師로 活動했다. 1989年 故鄕 親舊인 마틸드와 結婚한 그는 1990年 親庭인 세투발의 유스 팀 監督으로 赴任했다. 1992年 포르투갈의 名門 팀 스포르팅 리스본에 通譯으로 赴任한 그는 指導者 人生의 出發點을 맞이했다. 잉글랜드 蹴球의 傳說的인 監督인 고 바비 롭슨 卿을 만난 것이다.

    롭슨 監督은 무리뉴가 英語, 스페인語, 프랑스語, 이탈리아語, 카탈로니아語(스페인 바르셀로나 地方의 土着 言語) 等 다양한 言語를 驅使한다는 點에 魅了됐다. 이에 무리뉴를 個人 通譯으로 삼으며 恒常 곁에 뒀다. 以後 롭슨은 世界 最高 水準의 클럽 팀인 FC 바르셀로나의 監督으로 赴任했고, 當然히 무리뉴度 데려갔다. 무리뉴는 이곳에서 補助 코치로 일하며 相對 팀의 戰術을 分析하는 任務를 맡았다.

    롭슨이 떠난 以後 FC 바르셀로나 監督으로 赴任한 네덜란드의 名匠 루이스 半 할 亦是 무리뉴의 才能을 높이 샀다. 그 德分에 무리뉴는 30代의 젊은 나이에 名文 FC 바르셀로나의 正式 코치로 일할 機會를 얻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永遠한 라이벌이자, 現在 指導者 무리뉴의 가장 强力한 라이벌인 FC 바르셀로나의 主題 과르디올라 監督도 當時 이 팀에서 選手로 뛰고 있었으니 이래저래 질긴 因緣이다. 半 割은 무리뉴가 포르투갈의 벤피카 리스본에게서 選任 코치職을 提議받자 “監督이라면 모를까 選任 코치라면 나와 함께 있자”고 할 程度로 그에 對한 信賴가 깊었다.

    初짜 監督, 優勝 請負社가 되다

    무리뉴는 2000年 9月 비로소 꿈에 그리던 監督(head coach)李 됐다. 그가 맡은 팀은 포르투갈의 蹴球 英雄 에虞祭비오가 活躍했던 벤피카 리스본이었다. 하지만 會長 交替 等 클럽의 內紛이 생기고 成跡도 좋지 못하자 그는 單 여덟 競技만 치른 後 스스로 辭任한다.

    무리뉴를 世界的인 監督으로 만든 곳은 벤피카의 라이벌인 FC포르투였다. 무리뉴는 2002年 1月 成績 不振으로 監督이 更迭된 FC포르투의 指揮棒을 잡았다. 남은 競技에서 15競技 11勝2無2敗의 成跡을 記錄하며 팀의 順位를 리그 3位로 끌어올렸다. 比較的 좋은 成績으로 FC포르투의 첫해를 마감한 무리뉴는 이렇게 말했다. “來年에는 FC포르투를 優勝 팀으로 만들겠다.” 이때만 해도 무리뉴나 FC포르투를 注目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1960年代 에虞祭비오가 活躍할 當時 월드컵에서 3位에 오른 적도 있지만 포르투갈은 언제나 유럽 蹴球의 邊方에 不過했다. 포르투갈 리그 卽 數페르 리가의 市場 規模 自體가 빅 리그에 비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리그는 유럽 빅 3 리그로 불리는 英國 EPL,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는 勿論이고 獨逸 분데스리가, 프랑스 리그, 네덜란드 리그보다도 훨씬 작다. 이런 邊方國의 中小 클럽을 맡은 初짜 監督을 注目하는 사람이 있을 理 萬無했다.

    하지만 무리뉴는 1年 만에 自身의 말을 立證했다. 2002~03 시즌 FC포르투는 포르투갈 리그와 포르투갈 FA컵에서 優勝하며 突風을 일으켰다. 32個 팀이 겨루는 UEFA챔피언스리그에 進出하지 못한 나머지 팀들이 모여 優劣을 가리는 UEFA컵 決勝에서도 延長戰 끝에 스코틀랜드의 셀틱을 물리쳤다. 公式的인 트레블은 아니지만 一種의 미니 트레블을 達成한 셈이다. 챔피언스리그 優勝은 아니라지만 初짜 監督이 트레블을 達成하는 일은 相當한 成果임이 분명하다. 유럽 蹴球界 또한 무리뉴를 注目하기 始作했다.

    2003~04 시즌 무리뉴는 더 놀라운 成跡을 냈다. 壓倒的인 氣勢로 포르투갈 리그 2連霸를 達成한 그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 進出해 모나코를 3-0으로 꺾고 優勝했다. 포르투갈 클럽이 유럽 蹴球의 왕중왕戰인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優勝한 건 無慮 17年 만이어서 엄청난 話題를 모았다. 當時 FC 포르투의 主戰 選手들은 데코, 페레이라, 摩尼셰 等이었다. 勿論 이들은 훌륭하고 좋은 選手였지만 호나우두나 지단처럼 蹴球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이름을 알 程度의 슈퍼스타는 아니었다. 當時 포르투의 運營費 또한 맨유와 같은 빅 클럽의 10分의 1에도 못 미쳤다.

    이런 狀況에서 슈퍼스타가 櫛比한 빅 리그의 빅 클럽들을 꺾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當時 FC포르투는 緻密한 守備와 탄탄한 組織力을 바탕으로 優勝을 일궈냈다. 포르투의 優勝 祕訣은 相對팀 미드필더陣에 對한 剛한 壓迫, 빠르고 效率的인 攻擊 等이었다. 이는 現代 蹴球가 志向하는 바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무리뉴는 첼시 時節에도 이 基調를 繼續 維持했다.

    “나를 다른 監督과 比較하지 말라”

    UEFA 챔피언스리그 優勝으로 世界的 名匠 班列에 오른 무리뉴를 注目한 사람은 러시아 出身 石油 財閥 로만 아브라모비치였다. 2003年 英國 프리미어리그(EPL)의 첼시를 引受한 아브라모비치는 莫大한 돈을 投資해 世界 最高의 監督과 選手를 願하는 대로 끌어모았다. 當時 EPL 內의 競爭 팀인 맨유, 아스날, 리버풀 等에 비해 優勝 經歷이 뒤처졌던 첼시는 이런 攻擊的인 投資를 통해 短期間에 英國뿐 아니라 유럽을 代表하는 빅 클럽으로 成長했다.

    2004年 6月 무리뉴는 年俸 420萬파운드에 첼시와 契約했다. 그는 入團 記者會見에서 그 有名한 말을 남긴다. “나를 倨慢한 사람이라고 부르지도, 다른 監督과 比較하지도 마라. 나는 챔피언스리그에서 優勝한 監督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special one)이라고 생각한다.”

    무리뉴가 이 發言에 걸맞은 成跡을 내지 못했다면 單純한 입방정에 不過했을 것이다. 하지만 스페셜 원이 그의 이름과 同義語가 된 것은 그가 그만큼 뛰어난 成果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무리뉴는 赴任하자마자 첼시를 2年 連續 EPL 리그 優勝 팀으로 만들었다. 무리뉴가 오기 前 첼시는 알렉스 퍼거슨 監督의 맨유나 아르센 벵거 監督의 아스널보다 한 段階 낮은 팀으로 取扱받고 있었다.

    첼시로 온 무리뉴는 自身의 口味에 맞는 팀을 만들기 위해 大大的인 變化를 主導했다. 一旦 過去 主戰이었던 베론, 크레스포, 下셀바잉크 等을 다른 팀으로 賃貸 또는 移籍시켰다. 當時 有望株였던 드錄바, 로벤, 케즈만 等 눈여겨봤던 젊은 選手들을 大擧 첼시로 데려왔다.

    무리뉴는 特히 첼시의 守備陣에 强力한 메스를 加했다. 존 테리와 갈라스라는 傑出한 守備手들이 있었지만 自身이 데리고 있던 페레이라, 카르발뇨를 첼시 守備의 새로운 主戰으로 加擔시켰다. 守備의 核인 골키퍼도 체코의 神聖 페트르 체흐를 데려왔다. 빠르고 攻擊的인 蹴球를 驅使하지만 守備는 조금 貧弱하다는 評價를 받았던 첼시는 무리뉴의 守備 補强 以後 탄탄한 全力을 構築할 수 있었다.

    그의 戰略은 맞아떨어졌다. 2004~05 시즌 첼시는 리그 最小 失點을 記錄하며 優勝했다. 첼시의 리그 優勝은 無慮 50年 만이었다. 같은 해 리그 FA컵에서도 優勝했다. 2005~06 시즌에도 다른 클럽과 懸隔한 差異를 보이며 내내 獨走한 끝에 리그 2連霸를 達成했다. ‘스페셜 원’李 自身의 能力을 다시 證明한 셈이다.

    하지만 무리뉴는 2007年 9月 電擊的으로 첼시를 떠났다. 表面的으로는 相互 合意下에 監督을 辭退했다고 밝혔지만 球團主로부터 解任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當時 첼시는 守備手들의 잇따른 負傷으로 苦心하고 있었다. 守備를 重視하는 무리뉴는 겨울 移籍 市場에서 守備手 補强을 要求했지만 아브라모비치는 이를 拒絶했다.

    첼시 監督으로 在職하는 3年 동안 6個의 優勝컵을 들어올린 그였지만 類달리 甚한 球團主의 干涉과 戰力 補强 要請에 對한 無視를 참을 수는 없었다. 그가 첼시를 떠날 때 첼시의 스타였던 드錄바, 램파드 等은 “무리뉴는 아버지와도 같은 사람”이라며 相當히 動搖했다. 世間에 이들의 移籍說까지 나돌 程度였다.

    레알 마드리드에 거는 期待

    무리뉴는 2008年 6月 이탈리아의 名門 클럽 인테르 밀란의 指導者로 赴任했다. 유벤투스, AC 밀란과 함께 이탈리아 蹴球를 주름잡고 있는 인테르 밀란은 오랜 歷史와 스타 選手를 여럿 保有하고 있었지만 챔피언스리그 優勝은커녕 1989年 以後 2000年代 中盤까지 自國 리그 頂上에도 오르지 못했다.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1965年 以後 40年이 넘도록 頂上을 차지하지 못했다.

    이 宿怨을 풀기 위해 마시모 某라티 인테르 밀란 球團主가 데려온 人物이 바로 무리뉴였다. 約 1年間의 野人 生活을 淸算하고 이탈리아에 到着한 무리뉴는 이탈리아語로 入團 記者會見을 進行했다. 그는 會見場에서 “亂 스페셜 圓이 아니다. 내가 世界 最高의 監督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意外로 謙遜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바로 “나보다 뛰어난 監督을 아직까지 본 적은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選手들도 그를 좋아했다. 한때 ‘호나우두의 後繼者’로 期待를 모았지만 彷徨했던 아드리아누, 利己的인 플레이로 指摘받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모두 順한 羊이 됐다. 무리뉴는 2008~09 시즌에 바로 이탈리아 세리에A 리그와 이탈리아 FA컵인 수페르 코파에서 優勝을 차지했다. 그러나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16强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칼을 갈고 기다린 무리뉴는 2009~10 시즌 이탈리아 리그와 이탈리아 FA컵에서 또 優勝한 後, 2010年 5月 마침내 UEFA 챔피언스리그 優勝컵을 차지했다. 챔피언스리그의 決勝戰 相對 팀인 바이에른 뮌헨의 監督은 한때 그의 멘토였던 루이스 半 割이었다. 半 割은 “무리뉴가 이처럼 偉大한 監督이 될 줄은 몰랐다”며 敗北를 認定했다. 이탈리아 클럽이 트레블을 達成한 건 史上 最初여서 그의 指導力에 對한 稱頌은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무리뉴는 優勝 直後 電擊的으로 인테르 밀란의 監督職을 辭任한다고 밝혔다. 또 1000萬유로(藥 150億원)의 破格的 年俸을 條件으로 레알 마드리드行(行)을 發表했다. 그는 챔피언스리그 決勝이 끝나자마자 홀로 스페인에 남아 레알 마드리드와 契約 協商을 進行했다는 點 때문에 批判받기도 했다. 레알 마드리드 監督이 된 後에는 現在 스페인 리그를 支配하고 있는 FC 바르셀로나와의 競技에서 밀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不安感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世界 蹴球界는 올스타級 라인업에도 不拘하고 ‘모래알’ 組織力 問題로 리그 優勝이나 챔피언스리그 優勝에 番番이 失敗해온 레알을 바꿔놓을 수 있는 唯一한 사람이 무리뉴라는 데 同意하고 있다. 그가 레알 마드리드를 스페인 리그의 優勝 팀으로 만들면, 유럽의 3代 빅 리그 卽 英國, 이탈리아, 스페인 3代 클럽을 모두 優勝으로 이끈 最初의 指導者가 된다.

    무리뉴 리더십의 要諦

    ① 人氣와 재미보다 勝利가 먼저다

    守備를 重視하는 무리뉴 式 蹴球 스타일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안티 풋볼(Anti Football)의 先鋒將이라고 批判한다. 蹴球의 재미를 半減시킨다는 理由에서다. 實際 무리뉴의 팀은 相對方보다 훨씬 낮은 볼 占有率, 京畿 全體를 통틀어 1~2個에 不過한 有效 슈팅을 선보이고도 이길 때가 많다. ‘先(先) 守備, 後(後) 逆襲’의 勝利 公式을 잘 移行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기에 아름다운 蹴球라고 하기 어렵고, 觀衆에게 큰 재미를 膳賜하기도 힘들다. 레알 마드리드의 永遠한 라이벌인 FC 바르셀로나(바르샤)의 蹴球와 比較하면 더욱 그렇다.

    주제 무리뉴 레알 마드리드 감독
    FC 바르셀로나는 리오넬 메시라는 傑出한 스타가 登場하고, 者팀 選手들이 主軸을 이룬 스페인 國家代表팀이 2010年 남아공 월드컵에서 優勝한 後 21世紀 蹴球의 敎本으로 評價받고 있다. 빠르고 效率的인 패스와 攻擊으로 보기에도 즐겁고 京畿道 이기는 蹴球를 驅使한다. 게다가 幼少年 팀에서 直接 키운 選手들로 核心 멤버를 삼아 팀워크까지 뛰어나다.

    하지만 FC 바르셀로나의 스타일이 많이 反映된 스페인 蹴球 또한 2008年 월드컵 優勝 前에는 많은 批判을 받았다. 보기에는 아름다울지 모르나 가장 重要한 命題인 勝利를 하지 못한다는 理由에서였다. 世界 各國 리그에서 뛰는 豪華 멤버들로 國家代表팀을 꾸렸지만 월드컵 8强에도 오르지 못할 때가 많으니 批判이 없을 理 萬無했다.

    卽 아름답고 보기 좋은 蹴球도 結局 勝利가 先行될 때만 意味를 지닌다. 아무리 멤버들이 그림같이 아기자기한 패스를 競技 내내 주고받고, 수많은 有效 슈팅이나 得點을 記錄한들 이기지 못하면 무슨 意味가 있겠는가. 어떤 팬이나 球團主가 이를 반기겠는가. 싫든 좋든 프로 스포츠 世界에서 가장 重要한 건 勝利다. 勝利라는 結果物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監督은 指導者의 資格이 없다. 勝利와 人氣를 同時에 거머쥐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兩者擇一을 해야 한다면 結局 優先順位는 勝利에 있다. 다른 사람의 批判이나 人氣에 戀戀하지 않고 리더로서 本然의 任務에만 忠實했던 그 徹底함이 그를 훌륭한 指導者로 만들었다.

    프랑스 蹴球 英雄 미셸 플라티니는 “蹴球는 失手의 스포츠다. 모든 選手가 完璧한 플레이를 하면 스코어는 永遠히 0代0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失手를 줄이면 이기지는 못해도 지지도 않는다는 點을 强調한 發言이다. 조그만 失手가 勝敗를 결정짓는 스포츠의 特性을 勘案할 때, 强力한 守備를 통해 相對方의 失手를 誘導하고 그 失手가 나오는 瞬間 逆襲으로 勝利를 爭取하는 무리뉴의 戰術 自體를 안티 풋볼로 罵倒하기에는 트레블 達成, 2番의 챔피언스리그 優勝, 3個國 리그 優勝 等 그가 보여준 成果가 많다.

    무리뉴는 不正行爲로 이기지 않았다. 守備 蹴球가 싫으면 더 强力한 攻擊 蹴球로 그 守備 蹴球를 이겨야 한다. 守備 蹴球를 이기지도 못하면서 안티 풋볼만 言及하는 건 空虛하다. 그는 트레블을 達成하던 時節 인테르 밀란을 이탈리아 리그 歷史上 한 시즌에 가장 많은 골을 넣은 팀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를 勘案할 때 그의 蹴球는 實利를 極大化하면서 勝利를 追求하는 蹴球라고 보는 게 妥當하다.

    무리뉴와 안티 풋볼에 對한 論難은 現在 韓國 프로野球를 支配하는 김성근 SK와이번스 監督에 對한 論難과도 恰似하다. 金 監督은 수많은 불펜 投手를 投入해 齷齪같이 勝利를 따낸다는 뜻으로 所謂 ‘벌떼 野球’라는 新造語를 만들어냈다. 그러자 ‘SK 野球는 재미가 없고, 非人間的이며, 投手 酷使도 甚하다’는 批判이 뒤따랐다.

    하지만 불펜 中心 野球는 이제 다른 팀도 施行하는 戰術이 됐다. SK의 核心 불펜 投手인 정대현, 정우람, 이승호 等은 몇 年째 이어진 酷使 論難에도 如前히 威力的인 공을 던지고 있다. SK와 다른 팀의 差異는 똑같이 벌떼를 投入해도 한쪽은 危險을 잘 막고, 나머지는 못 막는다는 點뿐이다. SK와이번스는 2007年부터 2010年까지 3番의 優勝과 1番의 準優勝이라는 獨步的인 成跡을 냈다. 그 期間 仁川 緣故 球團으로는 史上 最初로 8個 球團 中 홈競技 平均 觀衆 1位를 차지했다. 最新式 球場, 다양한 마케팅 活動도 있었지만 亦是 成績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可能한 일이었다. 이기지 못하는 팀을 보러 오는 팬은 없다.

    ② 리더는 心理戰의 代價여야 한다

    人間의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스포츠의 勝敗도 種種 實力보다 멘탈이 左右한다. 於此彼 프로 스포츠에 從事하는 選手들의 技倆은 비슷하다. 技倆이 뛰어나지 않다면 애初에 프로 選手가 될 수 없다. 於此彼 技倆은 白紙張 한 張 差異일 때가 많다. 結局 어떤 勝負 根性을 가지고 어떻게 相對方의 心理를 逆利用하느냐가 重要하다. 世界的인 名將들이 心理戰의 代價인 理由다.

    前無後無한 韓國시리즈 10回 優勝을 達成한 김응룡 前 三星라이온즈 社長 또한 現役 監督 時節 審判 判定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덕아웃에서 椅子를 부수고 審判과 肉彈戰까지 벌이는 일로 有名했다. 判定 그 自體에 不滿이 있어서라기보다는 選手들의 動搖를 잠재우고, 鬪爭 審理를 極大化하기 위해서였다.

    무리뉴度 마찬가지다. 그는 어떤 與件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相對方을 刺戟할 만큼 怜悧하게 競技를 運營할 줄 아는 指導者다. 特히 라이벌 前이 있을 때 相對 팀 監督과 舌戰을 벌여 最大限 狀況을 自身에게 유리하게 이끈다. 相對方을 있는 대로 約 올려 그들의 心理를 動搖하게 만들고, 自身의 팀에는 無限한 自負心과 動機를 附與해 選手들의 승부욕을 불태우게 만드는 式이다.

    첼시 監督 時節 아름다운 蹴球를 重視하는 걸로 有名한 아스널의 아르센 벵거 監督과 論爭이 붙자 무리뉴는 이렇게 말했다. “아스널은 훌륭한 監督과 選手를 保有했지만 蹴球가 勝利해야 하는 스포츠라는 點을 忘却하고 있다. 첼시는 멋진 競技를 보여주진 못해도 勝利한다.”

    주제 무리뉴 레알 마드리드 감독
    리버풀과의 比較에는 이렇게 對應했다. “리버풀의 歷史는 偉大하고 나는 그 歷史를 尊重한다. 그러나 첼시가 지난 3年間 2番의 리그 優勝을 할 동안 리버풀은 約 20年間 優勝을 하지 못했다.”

    現存하는 最高의 蹴球 監督으로 評價받고 自身의 아버지뻘인 알렉스 퍼거슨 맨유 監督에게도 지지 않았다. 퍼거슨 監督은 移籍市場에서 巨額을 쏟아 붓는 첼시에 “돈으로 優勝을 購入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무리뉴는 “全的으로 同意한다. 하지만 나는 맨유 豫算의 10%도 안 쓰는 FC포르투를 이끌고 맨유를 制壓한 後 챔피언스리그에서 優勝했다”고 되받았다. 監督의 이런 말을 듣고 鬪志를 불태우지 않을 選手는 없다.

    勝利를 위해서라면 言論과의 一戰도 不辭한다. 몇 年 前 FC 바르셀로나와 챔피언스리그 32强 組別 豫選競技를 할 때의 일이다. 스페인의 한 記者가 “當身은 FC 바르셀로나에서 通譯으로 일하던 주제에 왜 이렇게 바르샤에 無禮한가”라고 비아냥거렸다. 이에 對한 무리뉴의 答이 傑作이다. “그때 나는 通譯官이지만 只今 첼시의 監督이다. 내가 通譯官에서 名門 팀 監督이 될 동안 當身은 如前히 三流 記者 나부랭이 아닌가. 只今까지 大體 뭐했나?”

    ③ 내 部下는 내가 지키고 保護한다

    特有의 카리스마와 毒舌, 倨慢하고 차가운 이미지로 刻印돼 있지만 그는 自身의 選手를 끔찍하게 아끼는 리더로도 有名하다. 첼시 監督 赴任 첫 시즌이던 2004~05 시즌 途中 그는 잉글랜드 蹴球協會(FA) 側에 候補 엔트리를 7名으로 늘려달라고 要請했다. 첼시의 벤치 멤버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첼시가 豪華 멤버를 갖춘 팀이라고 해도 候補 選手의 奮發 없이는 장기전에서 좋은 成跡을 내기가 힘들다. 種目을 莫論하고 모든 스포츠의 강팀들은 所謂 選手團의 뎁스(depth)가 두껍다. 核心 멤버가 負傷이나 不意의 事故를 當해도 그 자리를 바로 메울 수 있는 錚錚한 候補 選手가 많다는 意味다. 이런 候補 選手가 많아야 팀 內 健全한 競爭도 더욱 觸發된다. 그는 이름값이 떨어지는 아이두르 구드욘센이 마테아 케즈만과 디디에 드록바의 迎入으로 放出 危機에 놓이자 오히려 꾸준한 出張 機會를 保障下祈禱 했다.

    2006年 10月 레딩 戰에서는 골키퍼 페트르 체흐와 카를로 쿠디치니가 競技 途中 甚한 負傷을 當했다. 그는 다음 競技 展望을 묻는 記者들에게 “只今 蹴球가 問題가 아니다. 나는 다른 것에 神經 쓸 餘力이 없다. 오직 두 名의 내 親舊를 걱정할 뿐이다. 다음 競技도 重要하지만 우리 選手들이 더 所重하다”고 말했다.

    2006~07 시즌의 優勝을 놓친 아스널과의 마지막 競技에서 競技 終了와 同時에 서포터 席으로 달려와 選手들을 여러 番 가리키며 拍手를 쳐달라고 要請했다. 눈앞에서 優勝을 놓친 狀況에서 서포터들의 氣分이 좋을 理 萬無하다. 하지만 監督이 直接 나서 “저기 숨이 턱까지 차 있는 選手들에게 拍手를 보내달라. 그것이 當身들의 任務다”라고 말하는데 拍手를 치지 않을 팬이 있을까. 그런 監督을 어떤 選手와 팬이 미워하겠는가.

    지난해 5月 인테르 밀란의 챔피언스리그 優勝 直後 競技場을 나가던 그는 競技場 壁에 기대선 마테라値를 發見했다. 急히 車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마테라치에게 다가간 그는 選手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全世界로 中繼된 이 場面은 그가 選手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보여줬다. 아무리 쇼맨십이 强하다고 해도 選手에게 이 程度의 愛情을 보여주는 監督은 많지 않다.

    選手들과 感情的으로 매우 緊密한 紐帶 關係를 맺는 그의 리더십 스타일은 많은 스타 選手가 그 앞에서 順한 羊이 되는 理由이기도 하다. 6個 國語를 驅使하기에 어떤 나라에서 온 選手라도 意思疏通에 別 問題가 없다는 點도 한몫했다. 첼시와 訣別할 때 드錄바, 램파드 等이 그를 따라 移籍하려 했다는 건 有名한 逸話다. 그 外에도 인테르 밀란 時節 미드필더로 活動했던 웨슬리 슈나이더는 “그와의 1年은 다른 監督과의 10年보다 더한 價値가 있다”고, 레알 마드리드의 골키퍼 카시야스는 “무리뉴는 내가 아는 最高의 監督이자 最高의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고 選手들을 無作定 예뻐하기만 하는 건 아니다. 態度가 不誠實하거나 팀워크에 危害를 加하면 世界 頂上級 選手라도 바로 鐵槌를 加한다. 첼시 監督 時節 그는 ‘無缺點 스트라이커’로 名聲이 높았던 안드레 셰브첸코가 不振하자 그를 種種 出戰 名單에서 빼버렸다. 技倆이 내림勢 兆朕을 보였던 에르亂 크레스包는 果敢하게 다른 팀에 賃貸했다. 인테르 밀란에서도 새벽 飮酒 行脚을 벌인 아드리아누와 競技에서 自身의 指示를 따르지 않았던 훌리오 크루스를 名單에서 除外한 적도 있다. 인테르 밀란 司令塔 赴任 初期 그가 가장 强調한 말은 “訓鍊과 競技 時間에 늦는 選手는 바로 집으로 돌려보낼 것”이었다.

    레알 마드리드로 옮긴 다음에도 마찬가지다. 守備의 核인 히카르두 카르발류가 自身을 주전에서 뺀 것에 對해 不滿을 表示하자 “머리가 어떻게 된 거냐. IQ 테스트나 다시 받으라”는 一鍼까지 날렸다. 守備 蹴球를 重視하는 監督이 核心 守備手를 일부러 내보내지 않으면서 이 程度 毒舌을 날린다는 건 그가 徹底히 팀 運營 原則을 지키는 리더임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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