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國立現代舞踊團 初代 藝術監督 홍승엽|新東亞

國立現代舞踊團 初代 藝術監督 홍승엽

“藝術家의 個性 尊重하고 世界的인 按舞家 키우겠다”

  • 박은경│自由寄稿家 siren52@hanmail.net│

    入力 2010-09-30 11:03: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지난 8月, 우리 舞踊界의 오랜 所願이 解決됐다. 國立現代舞踊團이 設立된 것.
    • 初代 藝術監督으로 選任된 舞踊家 홍승엽氏는 춤만큼이나 破格的인 삶으로 有名하다.
    • 스물이 넘은 나이에 平凡한 工學徒에서 舞踊家로 變身했고, 入門 2年 만에 동아舞踊콩쿠르에서 對象을 받아 世上을 놀라게 했다.
    • 1993年 民間 最初의 專門 舞踊團인 ‘댄스 시어터 온’을 創團해 職業 舞踊家 團體의 새로운 길을 열었으며, 舞踊 公演 審査를 비디오로 하는 慣行을 非難하며 2004年 ‘올해의 藝術賞’ 受賞을 拒否하기도 했다.
    • 舞踊界의 期待를 한몸에 받고 있는 그를 만났다.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홍승엽

    2000年 프랑스 리옹 비엔날레에서 공연된 홍승엽 監督의 代表作 ‘달 보는 개’.



    8月17日 서울 大學路 아르코예술극장에서 財團法人 國立現代舞踊團(理事長 김화숙) 設立 記念式이 열렸다. 유인촌 文化體育觀光部 長官을 비롯해 육완순, 박명숙 敎授 等 元老 現代舞踊家와 新進 舞踊家들이 參席해 퍼포먼스 形式으로 進行된 記念式은 始終 떠들썩한 雰圍氣였다. 國立 舞踊團體 創團은 現代舞踊界의 宿願이었던 터라 參席者 中에는 感激의 눈물을 흘리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이날 舞踊團 設立 記念公演으로 自身의 新作 ‘壁오금학’ 하이라이트 部分을 선보인 홍승엽(48) 初代 藝術監督은 白紙에서 出發해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基礎를 튼튼히 세워 올려야 하는 莫重한 任務와 責任을 떠안았다. 하지만 그의 表情은 意外로 淡淡했다.

    “意味 있는 자리를 맡았다고 생각하지만 壓迫感은 크지 않다. 前부터 우리나라의 職業 舞踊團體가 活性化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나름대로 構想해왔다. 1993年 ‘댄스 시어터 온’을 創團한 뒤 이에 關한 實驗도 오랜 期間 繼續해왔다. 자리부터 덜컥 받아놓고 허둥대는 그런 狀況은 아니다.”

    國立現代舞踊團은 代表가 따로 없다. 洪 監督의 타이틀은 ‘藝術監督’이지만 그는 財團 代表이자 團長, 按舞者 役割까지 1人3役을 해내야 한다. 國立現代舞踊團이 우리나라 現代舞踊界의 中心이 돼 어떤 비전을 갖고 나아가야 할지를 提示하는 것이 團長의 役割이라면 按舞者는 말 그대로 作品 創作 活動에 專念해야 한다. 藝術監督은 自己 作品뿐 아니라 舞踊團 內의 여러 作品에 골고루 關與하며 全體的으로 調律하는 자리다.



    洪 監督은 國立現代舞踊團 運營의 3大 原則으로 按舞家 育成, 地方 公演, 海外市場 進出을 꼽았다. 이를 바탕에 두고 細部 運營은 旣存의 舞踊團體들과 다르게 할 생각이다. 한 番에 한 作品에만 매달리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別로 여러 팀을 運營하면서 여러 作品을 서울을 비롯한 全國 各地에서 同時에 公演하겠다는 計劃을 세웠다. 이를 위해 프로젝트別로 作品 性格에 맞는 按舞家를 選定하고 按舞家가 必要한 舞踊手를 直接 뽑도록 할 생각이다. 따라서 國立現代舞踊團에는 正式 團員이 없다. 이러한 運營方式은 文化體育觀光部에서 國立現代舞踊團을 만들면서 미리 定해놓은 方針이었고 洪 監督이 예전부터 생각해온 方向과 正確히 一致했다.

    團員 없는 舞踊團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홍승엽
    “프로젝트에 따라 내가 直接 按舞하는 作品도 있을 것이다. 또 各其 다른 個性을 가진 按舞家들에게 맡기는 作品도 있을 수 있다. 按舞家를 選定할 때는 얼마나 創意的인 思考를 할 수 있는지를 基準으로 삼을 것이다. 그 過程에서 여러 色깔의 作品이 나올 수 있을 게다. 現代舞踊의 生命力이라 할 수 있는 多樣性을 키우기 爲해서다. 一旦 作品을 맡기고 나면 按舞家가 自己 作品 色깔에 맞는 舞踊手를 選拔할 수 있도록 하려 한다. 干涉을 最大限 줄이고 作家主義를 保障하는 것이다.”

    正式 團員을 두지 않는 理由에 對해 洪 代表는 “舞臺에서 直接 춤을 춰야 하는 舞踊手에게서 新鮮한 創意性이 나와야 하는데 固定된 멤버로 舞踊團의 틀과 色깔이 잡혀 있으면 다양함과 新鮮함을 擔保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年輪 있고 實力이 좋다고 舞踊手들을 끌어안고 있을 수는 없다. 大臣 프로젝트別 按舞家와 疏通이 잘 되고 作品의 意味를 舞臺에서 잘 表現할 能力이 있는 舞踊手는 連續 契約에 들어가는 方式을 取할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홍승엽
    現代舞踊界는 그의 새로운 試圖를 반기면서도 한便으로는 두려워하는 雰圍氣다. ‘舞踊手 選拔에 客觀的인 裝置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도 國立 舞踊團體라면 正團員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洪 監督은 作品의 多樣性과 創意性, 豐富한 레퍼토리를 蓄積하기 위해 프로젝트別 運營에 더 重點을 둔다. 意見이 다른 部分은 相對를 이해시키고 說得하면 된다는 게 그의 持論이다.

    “事前에 充分히 意見을 나눠 調律할 생각이다. 내가 獨不將軍度 아니고 國立現代舞踊團은 나를 위한 舞踊團體가 아니지 않으냐. 最大限 相對方을 說得하는 過程에서 미처 놓친 部分을 볼 수도 있으니 여러 사람 얘기를 들어볼 생각이다. 事實 公演의 基本이 疏通이다. 내가 가진 생각, 내 마음을 다른 사람도 함께 느끼게 만드는 거다.”

    地方 公演 活性化에 對해서도 그는 信念을 갖고 있다. 地方 公演을 많이 다녀 서울과 地方 間 文化 隔差를 줄여나가고, 한발 나아가 各 地自體가 自體 舞踊團을 만들어 文化力量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게 洪 監督의 目標다. 그에 따르면 地自體가 自體的으로 規模가 큰 발레團 같은 舞踊團體를 만드는 건 人力 選拔이나 費用 面에서 쉽지 않다. 反面 現代舞踊團은 발레團 規模의 3分의 1 程度면 充分히 創造的인 團體를 만들 수 있다.

    “이미 地自體마다 좋은 文化公演施設은 充分히 마련되어 있다. 只今 當場은 아니지만 앞으로 地自體 舞踊團 運營에 必要한 人力과 레퍼토리 供給은 우리 舞踊團에서 얼마든지 支援해줄 수 있다. 萬若 只今 地自體가 現代舞踊團 設立을 先占한다면 弘報效果도 클 것이다.”

    地方 公演, 海外 進出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홍승엽

    8月17日 열린 國立現代舞踊團 設立 記念式. 現代舞踊界 人士들이 大擧 參席해 祝祭 形式으로 進行됐다.

    事實 文化를 즐기는 國內 觀客 사이에 現代舞踊은 낯설고 어렵다는 認識이 剛하게 퍼져 있다. 그런 까닭에 公演場을 찾는 사람도 많지 않다. 國立現代舞踊團의 세 番째 運營 原則, 海外市場 進出은 우리 現代舞踊을 世界에 알리면서 同時에 國內 觀客을 公演場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手段이다. 洪 監督은 “國立現代舞踊團의 作品이 海外에서 話題가 되면 國內 觀客의 視線이 自然스레 쏠릴 것 아닌가. 國內 觀客을 안심시키는 次元에서 海外市場 進出이 必要하다”고 說明했다.

    “아직 現代舞踊에 對한 國內 觀客의 經驗이 많지 않으니까 어떤 作品이 좋은지 잘 모른다. 그런데 프랑스나 獨逸에서도 人氣가 있었던 作品이라면 궁금症을 가지고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作品에 對한 理解는 잘 안되지만 뭔가 있는 것 같다, 뭔가 다른 것 같다며 觀客이 現代舞踊에 對해 오픈마인드가 될 수 있다.”

    그 結果 國內에 現代舞踊 市場이 만들어지면 大韓民國 文化콘텐츠가 豐富해질 것이고, 나아가 生計를 걱정할 程度로 劣惡한 環境에 놓여 있는 現代舞踊手들이 좀 더 安定的으로 舞踊에 專念할 수 있는 土臺가 形成될 것이다. 現代舞踊의 底邊을 넓혀 우리나라 文化를 全體的으로 함께 끌어올리는 것이 洪 監督의 目標다. 한 걸음 나아가 國內 藝術市場 全般을 제대로 키워보고 싶은 欲心도 있다.

    洪 監督은 慶熙大 纖維工學科 81學番으로 大學校 2學年 때 처음 舞踊을 始作했다. 그 前까지는 舞踊에 對해 아예 몰랐다. 1學年이 끝나갈 무렵 ‘只今 하는 工夫로 平生을 살 순 없다’는 걸 깨달았다. 熱情을 쏟아 平生 매달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苦悶하기 始作했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건 音樂이나 美術이었지만 넉넉지 않은 집안形便 때문에 試圖를 못했다. 말을 꺼냈다가 父母에게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핀잔만 들었다. 舞踊을 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의 첫마디도 “그게 돈이 얼마나 드는데”였다. 大邱 出身으로 保守的인 어른 눈에 아들이 舞踊을 한다는 건 얼토당토않은 소리로 들렸을 게다.

    6個月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授業도 等閑視한 채 進路를 苦悶하느라 살이 쭉 빠진 그는 어쨌든 춤을 추기로 決心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춤꾼한테는 주체할 수 없는 몸 안의 振動이 있다. 언제든 身體를 통해 터져 나오려는 暴發的 에너지가 潛在해 있는 것이다. 그걸 풀고 싶은 요즘 아이들은 비보이(B-boy)가 되기도 한다. 洪 監督은 高校 때부터 音樂을 좋아했다. 單純히 귀로 듣는 音樂이 아니라 몸으로 音樂을 들었다.

    주체할 수 없는 振動

    “舞踊家는 自己가 좋아하는 音樂 性向에 따라 舞踊의 色깔이 確然히 달라진다. 特定 音樂이 모든 舞踊家에게 刺戟을 주는 건 아니다. 各自 性向에 따라 어떤 音樂은 듣는 瞬間 몸에 뭔가 꽉 차오르는 느낌을 받는다. 音樂이 몸에 가득 차서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랄까. 例를 들면 미니멀리즘 클래식을 追求하는 마이클 리만의 音樂을 좋아하는데 그의 音樂을 들으면 音樂과 내 몸이 하나가 되면서 하모니를 만든다. 그런 感應과 움직임이 자꾸 몸으로 터져 나오려 했다. 結局 平生 하고 싶은 일이 내 안에 있었던 셈이다. 어떤 選擇을 할 때 結果를 想定하고 後悔를 할까 안 할까를 基準으로 삼는 便이다. 舞踊은 後悔를 안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單純해서 舞踊을 해도 요즘은 라면이 잘 나오니까 굶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 길로 경희대 舞踊科 學科長을 찾아가 前과(轉科)를 付託했다. 하지만 當時는 卒業定員制가 있어 學科를 옮기는 게 不可能했다. 大學을 마칠 때까지 專攻 選擇科目 代身 舞踊理論 같은 科目들을 受講하며 舞踊을 익히고 卒業 뒤 경희대 大學院 舞踊學科에서 碩士를 마쳤다. 實技는 舞踊科 박명숙 敎授를 찾아가 배웠다. 當場 演習室에서 練習하라는 말에 가봤더니 男學生은 한 名도 없고 몸에 착 달라붙는 타이츠를 입은 女學生들만 다리를 죽죽 뻗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 끼어서 練習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男學生이 있는 곳을 搜所聞해 中央大 電話番號를 알았다. 그곳에서 겨우 練習을 始作할 수 있었다.”

    4個月 程度 지나 女子舞踊手들에게 웬만큼 適應할 무렵 다시 경희대 舞踊科 演習室로 돌아왔다. 아들이 舞踊手가 되는 걸 極口 反對했던 어머니가 그를 認定한 건 舞踊을 始作한 지 2年 만인 1984年, 第14回 동아舞踊콩쿠르에서 大賞을 受賞하고서였다. 그로부터 2年 뒤 大韓民國舞踊祭(現 서울舞踊祭)에서 演技賞을 받았고 한 달 程度 유럽을 見學할 수 있는 機會를 얻었다. 낯선 곳에 自身을 내던진다는 心情으로 旅行길에 올랐던 그는 그곳에서 酷毒한 經驗을 했다. 獨逸에 到着한 지 며칠 만에 至毒한 感氣몸살에 걸린 것. 그가 묵은 유스호스텔은 며칠을 머물든 每日 아침 짐을 챙겨 退室했다 저녁이 되면 다시 入室하는 시스템이었다.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 程度로 어지러운 狀態에서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자니 그대로 고꾸라져 죽어도 누구 하나 相關하지 않을 것 같았다.

    “萬若 내가 屍體로 누워 있다 해도 그 사람들한테 나는 그냥 東洋인 하나가 쓰러져 자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내가 누구든 무슨 일을 하고 살았든 그들 눈에는 아무런 存在도 아닌 것 같은 느낌, 내 存在 價値가 아주 하잘것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德分에 工夫를 많이 했다.”

    춤꾼, 按舞家, 行政家

    舞踊家이자 按舞家로 洪 監督의 삶은 熾烈했다. 1986年 아시안게임과 88年 서울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各種 公演으로 舞臺에 서느라 精神없이 바빴던 時間이 지나가자 어느 瞬間부터 繼續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고 느껴졌다. 舞踊手는 勿論이고 現代舞踊을 가르치는 先生들도 大部分 女子여서 딱히 보고 배울 사람도, 제대로 춤을 가르쳐줄 스승도 없는 狀況에서 繼續 舞臺에 오르다보니 더 以上 實力도 늘지 않고 發展이 없는 것 같았다.

    “女先生님은 男子의 움직임이나 感性을 모르니까 어떤 先生님은 새로 作品을 만들면 내 動作은 이렇게저렇게 알아서 進行해보라는 式이었다. 男子 群舞(群舞)가 있으면 그 部分은 按舞를 直接 짜서 先生님께 點檢을 받았다. 德分에 일찍부터 按舞家의 素質이 開發된 것 같다.”

    舞踊手로 自身의 몸을 더 精密하게 알려면 제대로 된 訓鍊을 받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유니버설발레단에 入團하기도 했다. 발레團에 들어간 데는 프로 舞踊團體들의 시스템을 배우기 위한 理由도 있었다. 將次 職業 舞踊團體를 만들어 國際的인 活動을 하려면 國際 舞踊界에서 통하는 룰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발레團에서의 生活은 受侮에 가까웠다. 現代舞踊界에서는 찾는 사람도 많고 主役을 도맡아 王子처럼 지냈지만 발레團에서 主役은 고사하고 群舞를 할 때조차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存在였다. 발레 專攻者가 아니면서 뮤지컬 出演을 위해 잠깐 발레團을 거쳐 가는 男子들이 種種 있었기 때문에 存在感이 실리기 어려운 狀況이었다. 그렇게 1年餘의 時間을 自身과의 싸움으로 보냈다.

    발레團을 나와 한 달 程度 스웨덴에 머물며 現地 舞臺에 서는 經驗을 했다. 只今은 作故한 有名 按舞家 비르기트 쿨베르의 招請으로 그의 作品에 客員舞踊手로 參加한 것이다. 公演이 끝나자 쿨베르는 平素 洪 監督이 들어가고 싶어 했던 海外 舞踊團體 세 곳에 그를 推薦해주었다.

    “더 많은 外國團體에서 活動하려고 接觸하던 中 문득 꽝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只今 빨리 韓國에 들어가 舞踊團體를 만들어야겠다는 確信이 들었다. 그 뒤로 海外 舞踊團體는 뒤도 안돌아보고 國內에 들어와 몇몇 사람을 糾合해서 1993年 댄스 시어터 온을 創團했다.”

    이듬해 創團公演 作品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舞臺에 올렸다. 公演期間은 이틀이었지만 舞臺 設置와 리허설을 위해 一週日間 劇場을 戴冠했다. 當時 現代舞踊 團體를 가진 個人이 兎月劇場 같은 큰 舞臺를 빌리기 쉽지 않았다. 大官이 어렵기도 했지만 形便에 비춰 대관料가 비쌌기 때문이다. 그 일을 두고 몇몇 舞踊人이 뒤에서 “돈 많네”라며 비아냥댔다. 하지만 洪 監督에게 6日은 꼭 必要한 期間이었다.

    “演習室에서 몇 個月씩 죽어라 땀 흘려 練習해놓고 정작 公演舞臺에서 엉성한 作品을 보여주긴 싫었다. 돈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라 公演舞臺에서 제대로 된 리허설을 하고 싶었다. 經歷欄을 한 칸 더 채우기 위해 公演作品을 舞臺에 올리는 그런 舞踊人은 되고 싶지 않았다.”

    댄스 시어터 온 創團公演 費用을 마련하기 위해 CF에도 出演했다. 有名 개그맨이 創業해 話題가 됐던 속옷 브랜드의 텔레비전 廣告였다. 론칭 廣告 때부터 出演提議가 들어왔지만 拒絶하던 터였다. 또다시 提議가 들어왔을 때는 ‘創團公演 費用을 마련하라는 啓示인가 보다’하고 應했다. 廣告모델料로 받은 돈은 1100餘萬원. 創團公演에 必要한 費用과 거짓말처럼 맞아떨어졌다.

    舞踊界에서 洪 監督을 따라다니는 修飾語는 ‘獨自行步’‘反骨氣質’이다. 文藝振興院이 主管하는 ‘2004 올해의 藝術賞’ 舞踊分野 受賞拒否는 舞踊界가 시끌시끌할 程度로 論難이 됐다. 그가 受賞을 拒否한 理由는 審査過程에서 節次와 原則이 無視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舞踊作品은 舞臺와 客席이 하나가 돼서 그 에너지를 共感하고 느끼는 現場藝術이다. 그런데 豫審도 아닌 最終審査까지 公演場에서 作品을 直接 보지 않고 비디오 審査로 代替했다. 그건 텔레비전을 통해 動物의 王國을 보는 것과 아프리카 사파리를 直接 經驗하는 것만큼이나 差異가 크다. 또 審査委員 中에는 審査 對象 作品을 이미 公演場에서 본 境遇도 있었을 거고 心思 때문에 비디오로만 본 사람도 있었을 거다. 그렇게 되면 同一한 條件下에서 審査해야 하는 基準이 깨진다. 全體 審査 過程에서 비디오로 最終 審査를 代身한다는 事實을 미리 알려주지도 않았다.”

    正當한 節次와 過程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홍승엽
    그럼에도 뭐가 問題냐는 態度에 洪 監督은 더욱 失望했다. 그의 受賞 拒否 波動으로 몇 年 뒤 그 賞이 廢止되자 “쟤 때문에 藝術界에 돌아올 많은 豫算이 없어져서 그 惠澤을 우리도 못 받는다”는 뒷말이 돌았다. 洪 監督은 藝術界에 많은 돈을 끌어오는 것보다 더욱 重要한 건 어떤 일을 順次的으로 해나가는 正當한 節次와 過程이라고 여긴다. 以後 舞踊界에서는 作品을 審査할 때 愼重하게 節次를 거치는 雰圍氣가 形成됐다. 洪 監督은 個人的인 不利益을 겪기도 했지만 잘못된 慣行이 바뀐 걸로 滿足한다.

    “그 後로도 나는 繼續 舞踊界에 남아 舞踊을 할 거니까.”

    1990年代 中盤 서울舞踊祭에 參加하는 團體에는 700餘萬원의 支援金이 나왔다. 洪 監督은 自身의 레퍼토리를 確保하기 위해 舞踊祭에 參加했다. 繼續 自費(自費)를 들여 舞踊團을 이끌고 作品을 公演하기란 現實的으로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支援金을 받으면 第一 먼저 한 일은 舞踊手들에게 줄 最小限의 개런티를 따로 빼놓는 것이었다. 나머지 돈으로 音樂과 美術, 衣裳을 全部 解決하려면 最大限 節約하는 수밖에 없었다. 舞臺衣裳을 마련하기 위해 衣裳擔當者와 함께 청계천을 누비며 천을 사다 옷을 만들었고, 다른 사람들이 한 벌 만들 費用으로 11벌의 舞臺衣裳을 만들기도 했다. 周圍에서 “支援金을 줬더니 쟤는 그것만 다 썼대”라고 수군거렸다. 稱讚이 아니라 辱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支援金은 補助費用으로 쓰라고 준 건데 自己 돈 한 푼 안들이고 어떻게 作品을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按舞家가 作品 하나를 完成할 때 自己 돈도 들이지만 衣裳費와 티켓 販賣를 舞踊手에게 負擔시키는 일이 種種 있었다. 洪 監督은 그런 慣行을 따르지 않았다.

    “專業 舞踊人이 레퍼토리를 늘리고 蓄積해나가는 過程에서 집을 팔아야 한다면 그건 아니지 않나.”

    서울舞踊祭를 通해 ‘파란 옷을 입은 원숭이’(1996)와 ‘달 보는 개’(1999)가 誕生했고 洪 監督은 두 作品에 愛着을 갖고 있다.

    “定해진 돈으로 作品을 만들려면 주어진 與件에서 完成度를 높이기 위해 創作的인 苦惱를 많이 하게 된다. 그 過程에서 훨씬 좋은 作品을 만들 수 있고, 觀客도 沒入시킬 수 있게 된다. 앞으로 國立現代舞踊團에서 豫算이 더 必要하다면 그건 엄청난 세트와 華麗한 衣裳이 아닌, 可能한 여러 個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運用해나가는 데 쓰일 것이다. 作品의 多樣性을 追求하는 데 豫算을 集中할 생각이다.”

    ‘달 보는 개’는 2000年 9月 프랑스 리옹 비엔날레에에 招請받았다. 그前에 페스티벌 藝術監督이 댄스 시어터 온 舞踊團을 찾아와 團員들이 練習하는 모습을 보고 招請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리옹 비엔날레에서 超然할 作品의 按舞를 洪 監督에게 맡기고 費用까지 全額 負擔했다. 이때 誕生한 作品이 ‘데자뷔’로 이른바 ‘大舶’이 터졌다. 元來 3回 公演으로 豫定됐지만 每回 公演이 賣盡되면서 5回로 늘었다. 일찌감치 스케줄이 짜인 世界的인 페스티벌에서 公演을 延長하는 境遇는 매우 드물다.

    지난 18年間 이끌어온 댄스 시어터 온은 8月31日로 解團됐다. 그동안 演習室로 썼던 스튜디오와 事務室도 이날로 짐을 빼고 整理를 끝냈다. 그동안 劣惡한 現代舞踊界에서 團體로 살아남기 위해 洪 監督을 비롯한 團員들은 밤이면 生業(生業)에 從事하고 낮에 모여 作品練習을 했다. 땀과 熱情을 쏟으며 어렵게 꾸려온 團體를 접는 아쉬움이 남을 법했지만 洪 監督은 “뒤를 잘 돌아보지 않는 性格이다. 앞으로 나아가기도 바쁜데 자꾸 뒤돌아봐서 뭐 하냐”며 무덤덤한 表情이었다.

    舞踊團을 整理하자 그를 잘 아는 周邊 사람들이 대단하다며 讚辭를 보냈다.

    “國立現代舞踊團 初代 藝術監督으로 選任된 게 대단한 게 아니라 劣惡한 環境에서 350萬원이 넘는 月貰를 支給하며 個人 舞踊團을 이끌어온 게 奇跡이라는 소리다. 18年 동안 舞踊團을 깨지 않고 維持시켰다는 것, 그게 只今 내가 가진 原動力이다.”

    國立現代舞踊團 創團公演은 來年 1月로 잡혔다. 作品은 그동안 洪 監督이 發表한 레퍼토리 中 ‘壁오금학’(2010年 作), ‘아Q’(2006년 作), ‘뿔’(2008年 作), ‘빨간 部處’(2001年 作), ‘두 個보다 많은 그림자’(2003年 作), ‘말들의 눈에는 피가’(1999년 作)를 비롯한 10個 作品 가운데 하이라이트를 뽑아 새롭게 再構成해 선보일 豫定이다. 이에 앞서 9月 中으로 舞踊手를 選拔할 計劃이다.

    “그동안 여러 團體의 正官을 살펴봤는데 舞踊手 오디션을 마치 入試처럼 생각하는 傾向이 있다. 客觀的인 實力 評價 與否에 따라 當落이 決定되는 方式인데, 우리는 客觀的 實力보다 作品 特性과 色깔에 따라 그때그때 必要한 舞踊手를 選拔하려고 한다. 춤 잘 추는 舞踊手라고 해서 모든 作品에 어울리는 건 아니다.”

    世界的인 按舞家

    舞踊手가 좋은 춤을 추려면 于先 몸이 機能的으로 많이 열려 있어야 한다. 舞踊手에게 身體를 利用한 動作은 語彙力이다. 自身이 意圖하는 대로 몸을 써서 自己 얘기를 表現할 줄 알아야 한다. 語彙力을 늘리기 위해 恒常 訓鍊해야 하는 게 舞踊手의 基本이다. 語彙力과 더불어 洪 監督이 作品에 必要한 舞踊手를 選拔할 때 基準으로 삼는 건 舞踊機能人인지, 舞踊藝術街인지다. 舞踊藝術가는 苦惱하면서 自身의 哲學 속으로 들어갈 줄 아는 舞踊手다. 苦惱와 哲學을 통해 나오지 않은 動作에는 마음이 실리지 않는다.

    “생각도 없는 動作에 무슨 마음이 실리겠나. 그런 狀態에서 춤을 추면 動作만 떠다닌다.”

    우리나라는 能力을 갖춘 舞踊手의 底邊이 넓은 反面 按舞家 層은 얇은 便이다. 資質이 엿보이는 潛在力 있는 按舞家는 많지만 그들이 한 段階 더 成熟할 수 있게 하는 環境이 마련돼 있지 않다. 제대로 된 過程을 밟아 壁을 깨고 나가려면 相當한 時間과 經驗이 蓄積돼야 하는데, 劣惡한 現代舞踊界 狀況에서 이를 위해 버티기란 쉽지 않다. 그동안 潛在力 있는 按舞家들이 現實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舞踊界를 떠나는 모습을 누구보다 안타깝게 지켜봐온 洪 監督은 新進 按舞家를 育成하면서 充分한 支援을 할 생각이다.

    “9月이나 10月 中으로 申請을 받아 按舞家를 選定할 豫定이다. 그렇게 뽑힌 按舞家는 作品이 完成될 때까지 일에 沒入할 수 있도록 演習室을 마련해주고 最低 費用도 우리가 負擔하려 한다. 勿論 試演을 通한 中間點檢度 必要하다.”

    洪 監督은 國立現代舞踊團 創團公演을 準備하면서 同時에 早晩間 自身의 솔로 公演 프로젝트인 ‘風流例가(風流藝歌)’를 선보일 豫定이다. 正式 公演場이 아닌 査察이나 韓屋 앞마당, 美術館 같은 野外에서 거문고와 水墨畫, 춤이 함께하는 퍼포먼스를 公演하는 方式이 될 것이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觀客을 先着順으로 募集할 생각이다. 空間이 狹小한 만큼 只今 申請하지 않으면 公演을 놓칠 수도 있다. 國立現代舞踊團을 위해서라면 내 몸을 팔아서 弘報할 것”이라며 웃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