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픈 사내가 그린 名作 歲寒圖, 詩 64篇 낳다|신동아

슬픈 사내가 그린 名作 歲寒圖, 詩 64篇 낳다

[名作의 祕密]

  • 이광표 西原大 휴머니티敎養學部 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24-01-16 09: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文化財 찾으러 日로 건너간 書藝家 스토리

    • 所長가 10名 손 거친 歲寒圖

    • 누구에게나 歲寒의 時節이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국립중앙박물관]

    秋史 金正喜의 歲寒圖. [국립중앙박물관]

    名作이란 무엇인가.

    種種 이런 質問을 한다. 우리는 어떤 作品을 名作으로 받아들이는 걸까. 名作과 名作이 아닌 것의 差異는 무엇일까. 어떤 基準이나 條件을 충족시켜야 名作으로 待接받는 것일까. 名作이라는 것이 至極히 主觀的인 것이라서 이런 質問에 正答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好奇心을 刺戟하는 質問이 아닐 수 없다. 名作의 情誼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우리 옛 그림이 있다. 秋史 金正喜(秋史 金正喜·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다.

    “세한도는 잘 그린 그림인가. 참, 썰렁한 그림 아닌가.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朝鮮時代 最高의 文人畫로 꼽는 데 躊躇하지 않는 까닭은 大體 무엇인가. 세한도는 왜 名作으로 待接받는 것일까.” 歲寒圖에도 이런 質問을 던져본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筆者가 보기에 分明 ‘세한도’는 그리 잘 그린 그림은 아니다. 그림은 휑하고 썰렁하다. 그림 속 허름한 집 지붕 選의 比例도 맞지 않고, 지붕과 窓을 바라보는 觀察者의 視線도 서로 어긋나 있다(이를 두고 劃一的인 西洋의 視線을 脫皮한 3次元的 東洋의 觀點이라고 말하는 이도 꽤 있다). 이것이 金正喜의 意圖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림 自體만 놓고 보면 그 아름다움을 쉽게 느낄 수 없다.

    누군가는 “文人畫란 事實的 表現이 重要한 것이 아니라 作家의 內面을 드러내는 것이 重要하다. 그런 疑問 自體가 잘못된 것”이라고 面駁을 줄지 모르겠다. 그렇다. 그 썰렁함에 秋史의 意圖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세한도가 名作이라고 말하기엔 무언가 많이 不足하지 않은가. 그림을 그린 金正喜의 觀點(視線)뿐만 아니라 다른 觀點(視線)李 必要한 대목이다.



    슬픈 사내의 그림이 大韓海峽 건넌 事緣

    1840年 抑鬱하게 流配를 가게 된 秋史는 1844年 여름 濟州 西歸浦 大靜邑 流配地에서 세한도를 그렸다. 弟子인 于先(藕船) 理想的(李尙迪)에게 感謝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였다. 譯官(譯官)이라서 中國을 자주 드나들던 理想的은 中國에 갈 때마다 冊을 求해 流配地로 보내주었다.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唯一한 道具가 書畫(書畵)였으니 理想的이 보내오는 冊은 金正喜에게 特히 더 값질 수밖에 없었다. 權力에서 밀려난 한낱 流配客을 잊지 않고 冊을 求해 傳해 주는 갸륵한 弟子. 秋史는 그 변함없는 마음에 感謝를 표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 그림을 完成하곤 그 옆에 事緣을 적고 ‘歲寒圖’라 이름 붙였다. 그러곤 自身을 婢夫(悲夫), 卽 슬픈 사내라 稱했다. 適當한 自虐과 適當한 쓸쓸함이 담겨 있는 名稱이다.

    秋史는 歲寒圖를 理想的에게 보냈고 이를 傳해 받은 理想的은 感激의 눈물을 흘렸다. 1844年 가을 그는 이 그림을 가슴에 품고 中國 燕京(燕京·只今의 베이징)에 갔다. 그리고 이듬해 1月 秋史의 知人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掌握眞(章岳鎭), 조진조(趙振祚) 等 16名의 글을 받아 그림 옆에 이어 붙였다.

    세한도는 10名의 所藏者를 거쳤다. 1865年 理想的이 世上을 떠난 뒤 세한도는 그의 弟子였던 김병선(金秉善)에게 넘어갔고, 그의 아들인 김준학(金俊學)李 물려받았다. 그 後 휘문學校를 設立한 민영휘(閔泳徽)의 집안으로 들어가 아들 민규식(閔奎植)을 거쳐 1930年代 서울(京城)에 와 있던 日本人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의 품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當時 후지쓰카는 경성제국대학 敎授로, 秋史에 關한 博士學位 論文을 쓰고 있었다. 1943年 봄, 후지쓰카는 歲寒圖를 包含해 自身이 蒐集한 秋史의 書畫 數千 點을 들고 日本으로 歸國했다. 秋史의 세한도가 異國 땅으로 流出된 것이다.

    그림 한 點 돌아온 것이 光復의 前兆

    일본에서 세한도를 되찾아온 소전 손재형. [동아DB]

    日本에서 歲寒圖를 되찾아온 素筌 손재형. [東亞DB]

    그때 全南 珍島 出身의 書藝家이자 컬렉터人 素筌(素筌) 손재형(孫在馨)李 事實을 알게 됐다. 孫在馨은 當時 國內에서 손꼽히는 컬렉터였다. 1944年 여름, 42歲의 孫在馨은 巨金을 들고 도쿄로 건너갔다. 太平洋戰爭이 한창이던 도쿄는 밤낮없이 繼續되는 聯合軍의 攻襲으로 不安하고 혼란스러웠다. 孫在馨은 도쿄 우에노(上野)에 있는 후지쓰카의 집을 찾아내 近處 旅館에 짐을 풀었다. 그는 每日같이 후지쓰카의 집을 찾아가 “세한도는 朝鮮 땅에 있어야 하니 作品을 넘겨달라”고 付託했다. 그렇게 두 달餘. 드디어 후지쓰카의 마음이 움직였고 結局 歲寒圖를 내주었다. 孫在馨은 巨額을 支拂하고 歲寒圖 等 秋史 作品 7點을 찾아왔다. 1944年 말 또는 1945年 初의 일로, 秋史의 ‘불이선란(不二禪蘭)’이란 作品도 이때 돌아왔다.

    歲寒圖를 되찾아온 孫在馨은 1949年 民族 代表 33人의 한 사람인 오세창(吳世昌), 獨立運動家이자 大韓民國 初代 副統領인 이시영(李始榮), 獨立運動家이자 國學者人 정인보(鄭寅普)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撰文을 받아 歲寒圖 두루마리 뒤에 이어 붙였다.

    鄭寅普는 歲寒圖를 보고 이 같은 跋文을 남겼다. “國寶 그림 東쪽으로 건너가니 뜻있는 선비들 悽慘한 생각 품고 있었네. 健康한 손 軍이 한 손으로 交龍과 싸웠네. 反轉되어 이미 삼켰던 것 빼앗으니 옛 物件 이로부터 穩全하게 됐네. 그림 한 點 돌아온 것이 강산 돌아올 兆朕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데 그 後 孫在馨이 國會議員 選擧資金을 마련하기 위해 歲寒圖를 私債業者에게 抵當 잡히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눈 밝고 熱情的인 個性 出身의 蒐集家 손世紀(孫世基)의 손에 들어갔고, 以後 아들 손창근(孫昌根)李 넘겨받았다. 그러곤 2020年 손창근은 代를 이어 간직해 온 歲寒圖를 아무 條件 없이 국립중앙박물관에 寄贈했다.

    170餘 年 동안 10名의 主人을 거친 歲寒圖. 海外로 流出되는 危機도 있었지만 熱血 컬렉터 손재형의 鬪志 德分에 國內로 돌아왔고 私債業者에게 抵當 잡히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眼目 있는 컬렉터 손세기 富者(父子) 德分에 穩全하게 保存될 수 있었다. 그 170餘 年의 스토리는 이제 세한도의 重要한 一部가 됐다. 秋史가 그린 집 한 채와 나무 네 그루, 차가운 바람만이 세한도가 아니라 170餘 年의 感動的인 이야기가 세한도의 美學으로 녹아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過程에서 神祕感이 덧붙여졌다. 正確히 말하면, 不正確하고 歪曲된 情報가 傳播되면서 이것이 歲寒圖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되고 나아가 세한도의 神祕的 要素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 核心은 孫在馨이 歲寒圖를 찾아오는 過程에 關한 것이다. 흔히 “孫在馨이 100日 동안 후지쓰카의 집을 찾아가 付託했고, 그에 感動한 후지쓰카가 돈을 받지 않고 歲寒圖를 내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事實과 달리 誇張된 것이다. 손재형의 3男인 손홍 珍島高等學校 李社長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 歲寒圖를 그냥 받아올 수는 없는 法이지요. 正確한 額數는 알 수 없지만 巨金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님은 歲寒圖만 찾아온 것이 아니에요. 그 有名한 불이선란 等 7點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글씨를 除外하고 秋史의 最高 名品들은 그때 다 돌아왔다고 봐야겠지요.” 세한도에 붙어 있는 吳世昌의 跋文에도 ‘돈을 주고 찾아왔다’는 內容이 나온다. “世界에 戰雲이 가장 높을 때에 손 軍 소전이 훌쩍 玄海灘을 건너가 巨額을 들여 우리나라의 珍貴한 物件 몇 種을 사들였으니 이 그림 또한 그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도 후지쓰카가 그냥 내주었다는 얘기가 繼續 傳해온다. 왜 그런 것일까. 孫在馨이 후지쓰카를 100日 동안 찾아갔다는 具體的 根據가 없는데 사람들은 “100日 동안 찾아갔다”고 얘기한다. 왜 그런 것일까.

    歲寒의 時節에서 느끼는 共感

    돈을 주고 찾아왔다는 것보다 無償으로 받아왔다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 刺戟한다. 100日도 그렇다. 두 달보다는 100日이라는 數字가 우리네 情緖에 잘 어울린다. 檀君神話에서 곰이 熊女가 된 것도 100日의 奇跡 아니었던가. ‘無償’과 ‘100日’은 이렇게 歲寒圖 歸還의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더욱 極大化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렇기에 이런 誇張된 情報가 持續的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이런 誇張된 스토리를 굳이 바로잡을 必要가 없었다는 말이다.

    돈을 주고 찾아왔다고 해서, 또 100日 동안이 아니라 두 달 동안 찾아갔다고 해서 그 感動이 줄어드는 것은 全혀 아니다. 日帝强占期이던 1944年, 巨金을 들고 日本으로 건너가 두 달 넘게 후지쓰카를 찾아가 歲寒圖를 찾아왔다는 것은 그 自體로 엄청난 事件이었다. 鄭寅普가 跋文에 “光復의 前兆”라고 쓴 것도 이 때문이다.

    후지쓰카가 巨金을 받고 歲寒圖를 넘겨주었다고 해서 후지쓰카의 眞心이 貶下되는 것도 아니다. 후지쓰카는 경성제대 敎授로 있으면서 ‘李朝에 있어서 淸朝 文化의 移入과 金阮堂(秋史 金正喜)’이라는 博士 論文(동경제대)을 썼고 平生 秋事를 硏究한 사람이다. 그에게 세한도는 分身과도 같은 存在였을 것이다. 그런 歲寒圖를 손재형에게 내놓았다는 것은 돈을 받았는지 與否를 떠나 그 自體만으로도 대단한 決定이었다.

    충남 예산군 추사 고택 앞 김정희 동상. [이광표]

    忠南 禮山郡 秋史 古宅 앞 김정희 銅像. [이광표]

    어쨌든 孫在馨이 歲寒圖를 찾아오는 過程과 關聯해 誇張 또는 歪曲된 情報가 流通된 것은 事實이다. 事實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歲寒圖에는 感動을 더하는 要素가 됐다. 세한도의 神祕感도 限껏 높여주었다. 이러한 神祕感은 大衆이 歲寒圖를 名作으로 받아들이는 데 重要한 役割을 했다.

    感動的인 祕話는 且置하고 歲寒圖를 들여다보면 알 듯 모를 듯하다. 소나무 두 그루와 側柏나무 두 그루, 허름한 집 한 채. 매우 簡略하며 메마르고 휑하다. 차갑고 스산하다. 流配客의 內面이 저러했던 것일까. 秋史는 여기에 ‘세한도’라고 이름 붙였다. 추운 季節, 歲寒. 이 象徵的 題目은 그림 雰圍氣와 잘 어울린다.

    세한도는 實際로 보는 이에게 多義的, 多層的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의 好奇心을 刺戟하고 다양한 想像力을 끌어낸다. 그림 속의 집의 正體는 무엇인지, 휘어진 古木 소나무와 곧게 뻗은 소나무는 무엇을 象徵하는지 等等, 또한 鑑賞者들은 歲寒圖를 통해 自身의 狀況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歲寒의 時節이 있기 때문이다.

    詩人들이 사랑한 그림 歲寒圖

    그래서일까. 세한도는 우리 時代 文人, 藝術家들의 想像力을 刺戟해 왔다. 同時에 깊은 省察의 機會를 提供한다. 세한도에 刺戟받은 文人, 藝術家들은 歲寒圖를 素材 삼아, 歲寒을 主題 삼아 다양한 作品을 創作해 왔다. 詩, 小說, 隨筆, 戱曲, 美術, 寫眞, 演劇, 歌曲, 舞踊, 춤 等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우리 古美術이나 文化遺産 가운데 이렇게 廣範圍하고 持續的으로 變奏의 對象이 되는 作品은 찾아볼 수 없다. 세한도가 斷然 壓倒的이다.

    特히 많은 詩人이 歲寒圖를 詩로 變奏해 왔다. 外換危機가 막 始作된 1998年, 季刊 ‘창작과비평’ 1998年 봄號엔 歲寒圖 關聯 詩 3篇이 한꺼번에 실렸다. 고재종의 ‘세한도’, 도종환의 ‘세한도’, 유안진의 ‘세한도 가는 길’이다. 어렵고 차가운 時期일수록 ‘세한도’의 象徵性에 關心을 둔다는 것을 잘 보여준 事例다.

    “署理 덮인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彷徨도/ 五十令 고개부터는/ 秋史體로 뻗친 길이다/ 千名이 알려주는 歲寒行(歲寒行)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張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香氣 자오록한 꽃陣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 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유안진의 ‘세한도 가는 길’)

    2008年엔 歲寒圖 關聯 詩를 한데 모은 詩集 ‘詩로 그린 歲寒圖’(과천문화원)가 出刊됐다. 여기엔 53人의 詩 64篇이 收錄됐다. 歲寒圖를 詩로 變奏한 詩人이 참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詩人은 집 떠난 아버지를 떠올렸고(정호승 ‘세한도’) 어느 詩人은 포스트모던을 되뇌었다(이근배 ‘秋史 古宅에 가면’).

    時人들은 왜 이렇게 歲寒과 歲寒圖를 變奏하는 것일까. 文學評論家 윤호병은 이렇게 分析한 바 있다. “歷史的이고 文化的이며 精神史的인 價値가 그만큼 重要하다는 點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이 그림에 暗示되어 있는 金正喜의 剛直한 性品과 志操 및 어떠한 逆境에서도 自身의 精神姿勢를 굽히지 않겠다는 不變의 德目을 自身들의 詩 世界로 전환시켜 오늘을 사는 하나의 智慧로 提示하고 있기 때문이다.”(윤호병, ‘韓國 現代 詩로 轉移된 김정희 그림 <歲寒圖>의 世界’)

    最近 미디어아트가 人氣가 높다. 作家 이이남은 미디어아트의 代表 走者다. 이이남이 미디어아트를 始作할 때 내놓은 作品은 ‘세한도’(2007), ‘新 歲寒圖’(2008)였다. 最高 人氣를 謳歌하는 이이남의 미디어아트는 이렇게 歲寒圖와 함께 始作됐다. 秋史의 세한도가 이이남의 想像力과 創意性을 刺戟한 것이다.

    秋史 古宅에 깃든 특별함

    충남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된 추사 고택. [동아DB]

    忠南有形文化財 第43號로 指定된 秋史 古宅. [東亞DB]

    170餘 年 동안 10名의 所長價가 바뀌면서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持續해서 蓄積됐다. 그러는 사이 세한도의 歸還에 關한 誇張된 情報 德分에 神祕感이 덧붙여졌다. 이 雰圍氣를 共有하고 敬畏하는 움직임이 끝없이 이어졌다. 다채로운 藝術的 變奏가 代表的이다. 이런 過程이 서로 어울리면서 세한도는 더욱 感動的이고 豐饒로운 存在가 됐다. 어찌 보면 세한도는 여러 古美術品 文化遺産 가운데 名作의 條件을 가장 많이 충족시키는 作品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異例的이고 매우 興味로운 境遇다.

    얼마 前 忠南 豫算의 秋史 古宅을 다녀왔다. 이番 旅行에서는 前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感動을 經驗했다. 于先 故宅의 리듬감이다. 그리 넓지 않은 空間이지만 古宅 入口부터 맨 안쪽 祠堂에 이르는 動線이 돋보였다. 오르막 내리막 리듬감이 輕快하게 다가왔다. 秋史의 무덤도 印象 깊었다. 古宅 마당의 쪽門을 나서면 바로 秋史의 무덤이 나온다. 數年 前 丹粧된 秋史 무덤 앞에는 테이블 몇 個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추사가 심은 백송. [이광표]

    秋史가 심은 白松. [이광표]

    秋史가 잠든 저 封墳 앞 테이블에 앉아 사람들은 茶를 마시고 김밥을 먹는다. 더러는 豫算市場에서 사 온 名物 광시카스테라나 沙果파이를 먹기도 한다. 興味로운 風景이 아닐 수 없다. 古宅 隣近엔 秋史가 심은 白松(白松)이 있다. 몇 年 前보다 좀 야윈 듯한데 의젓함은 如前하다. 이番 旅行에서 秋史 故宅의 새로운 魅力을 다시금 發見했다. 歲寒圖度 그런 것 같다. 자꾸만 이야깃 거리를 만들어내는 歲寒圖, 세한도는 그 스스로 하나의 生命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한도는 그렇게 名作이 됐다.

    이광표
    ● 1965年 忠南 豫算 出生
    ● 서울대 考古美術史學科 卒業
    ● 高麗大 大學院 文化遺産學協同過程 卒業(博士)
    ●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 著書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博物館’ ‘韓國의 國寶’ 外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