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冊은 찰(察)이다. 남을 觀察(觀察)하고, 나를 省察(省察)하며, 世上을 洞察(洞察)하는 道具女壻다. 刹科 札이 모여 知識과 敎養을 孕胎한다. 德分에 刹那의 ‘冊 수다’가 妙한 知的 快感을 提供한다. 정작 살다보면 이 快感을 充足하기가 碌碌지 않다. 이에 創刊 88周年을 맞는 國內 最高 權威의 時事 綜合誌 ‘신동아’가 ‘知識커뮤니티 Book치고’를 만들었다. 會員들은 한 시즌(4個月)間 月 1回 씩 冊 한 卷을 고재석 記者와 함께 읽는다. [編輯者 週]
‘그女는 自身들이 馬糞紙로 만든 배를 타고 江을 건너고 있다고 생각했다. 無事히 江기슭에 이를 可能性은 거의 없었다.’
장강명의 ‘산 者들’ 中 ‘현수동 빵집 三國志’에서 ‘힐스테이트 빵집’의 할머니가 생각한 自身의 處地다. 나는 이 冊에 나온 모든 主人公의 處地를 위의 文章으로 說明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月 165萬 원으로 存在價値가 매겨지는 아르바이트生, 利潤을 내지 못해 存在 自體가 사라진 社外報, 洞네에서 椅子 뺏기 싸움을 하는 빵집들, 한 番의 失手로 試驗에서 落榜한 아나운서 志望生 等. 이네들의 이야기는 只今 내 옆에서 벌어지는 現實 그 自體다.
小說에는 主人公이 있다. 그에 移入해 應援 或은 憤怒하거나 기쁨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 小說을 읽을 때는 그럴 수 없었다. 代替 主人公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에게 感情을 移入해야 하는가. 섣불리 判斷할 수 없었다.
‘알바生 자르기’에서 會社에 所屬感이 없으니 誠實한 勤態를 보이지 않는 아르바이트 生徒 理解가 됐고,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誇張(은영) 立場도 理解가 됐다. ‘현수동 빵집 三國志’에서 다른 가게를 헐뜯는 歲 빵집의 立場이 모두 理解됐다. 冊의 모든 登場人物은 個個人의 팍팍한 삶을 빚어낸 社會構造의 犧牲者이자 ‘資本主義, 新自由主義, 勝者獨食注意’를 前面에 내세운 시스템의 乙인 셈이다. 이들이 이를 認知하지 못하고 當場의 生存을 위해 내 앞의 다른 을(乙)을 攻擊하니 안타까웠다. 마치 映畫 ‘寄生蟲’에서 起宅(송강호 分)네 家族과 門框(이정은 分)네 家族이 地下室에서 벌인 개싸움을 볼 때처럼.
當場의 戰鬪에서 勝利한들 生存 戰爭이 끝난 것은 아니다. 馬糞紙 배를 鋼鐵 배로 바꾸지 않는 以上 고단한 現實 속으로 繼續 가라앉을 뿐이다. 올라탄 배를 鋼鐵로 바꾸기 위해서는 먹고살기 어렵게 만드는 構造를 되돌아보는 수밖에 없다.
‘내 삶이 벼랑 끝으로 내몰린 게 내 탓인가? 나의 競爭者 때문인가? 내가 살고 있는 판이 잘못 짜인 것은 아닐까? 같이 잘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試圖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質問을 繼續 던지고 答을 찾기 爲한 努力에 나서야 한다.
努力이 實踐으로 連結되려면 내 이웃과 周邊에 對한 理解와 共感이 先行돼야 할 것이다. 장강명의 말처럼 ‘共感 없는 理解는 자주 殘忍해지고, 理解가 缺如된 共感은 空虛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意味에서 ‘산 者들’은 눈뜨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내 周邊 삶에 視線을 건넬 수 있는 좋은 刺戟劑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