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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極右 威脅에도 軍國主義 批判한 平和運動家|新東亞

日 極右 威脅에도 軍國主義 批判한 平和運動家

在日 韓人 權益 擁護 이케다 다이사쿠 SGI 會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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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記者

    jayko@donga.com

    入力 2023-07-0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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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 內 20番째 名譽學術 稱號

    • “오바마홀서 學位 授與, 運命”

    • 平和 哲學 核心 單語는 對話

    • 日 軍部에 맞선 反軍國主義

    • 唱歌學會 ‘窓가’, 價値 創造 意味

    • 中·日關係 正常化 主唱한 理由

    • 韓에 負債感·愛情 가진 日本人

    5월 20일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국어대 오바마홀에서 이케다 다이사쿠 국제창가학회(SGI) 회장에 대한 명예철학박사 학위수여식이 열렸다(왼쪽). 이케다 다이사쿠 국제창가학회(SGI) 회장. [박해윤 기자, SGI]

    5月 20日 서울 東大門區 한국외국어대 오바마홀에서 이케다 다이사쿠 國際唱歌學會(SGI) 會長에 對한 名譽哲學博士 學位授與式이 열렸다(왼쪽). 이케다 다이사쿠 國際唱歌學會(SGI) 會長. [박해윤 記者, SGI]

    5月 20日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한국외국어대. 土曜日이지만 많은 車輛이 正門을 오가면서 活氣가 감돌았다. 佛敎 哲學者이자 平和運動家인 이케다 다이사쿠 國際唱歌學會(SGI) 會長에 對한 名譽哲學博士 授與式이 열리는 날이었다.

    1928年生인 이케다 會長은 ‘生命 尊嚴’과 ‘한 사람의 內面 變化’라는 ‘人間主義’ 哲學을 바탕으로 平和運動을 해왔다. 1968年 소카中·高等學校 設立을 始作으로 幼稚園부터 大學校(日本·美國 소카대)까지 여러 敎育機關을 設立하는 等 敎育者로서도 活動했다. 東洋哲學硏究所, 民主音樂協會, 도쿄후지美術館, 도다記念國際平和硏究所 等을 創立했다. 作家이자 詩人이면서, 寫眞展도 開催한 바 있는 等 文化·藝術에 正統하기도 하다. 여러 方面에서 큰 好奇心을 불러일으키는 人物이다.

    이수성 전 국무총리가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의 명예철학박사 학위 수여에 대한 축사를 하고 있다(왼쪽).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의 명예철학박사 학위 수여식이 끝난 뒤 내빈과 청중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이수성 前 國務總理가 이케다 다이사쿠 會長의 名譽哲學博士 學位 授與에 對한 祝辭를 하고 있다(왼쪽). 이케다 다이사쿠 會長의 名譽哲學博士 學位 授與式이 끝난 뒤 來賓과 聽衆이 함께 記念撮影을 하고 있다. [박해윤 記者]

    이날 授與式에는 박정운 韓國外大 總長과 老擇善 韓國외대 大學院長, 95歲의 이케다 會長을 代身한 하라다 미노루 唱歌學會 會長, 김인수 韓國SGI 理事長 等이 參席했다. 1999年부터 이케다 會長과 交遊(交遊)해 온 이수성 前 國務總理는 祝辭를 했다.

    마침 授與式이 열린 場所의 名稱은 오바마홀이다. 2012年 버락 오바마 當時 美國 大統領이 ‘國際社會에서 韓國의 役割’이라는 主題로 特講을 한 곳이다. 朴 總長은 授與社에서 “오바마 大統領은 核武器 擴散 抑制에 對한 비전과 核武器 없는 世上을 통한 世界 平和의 길에 對해 講演했다”면서 “特別 講演을 記念해 오바마홀로 명명한 바로 이곳에서, 平生을 平和運動 그리고 反核運動에 投身한 이케다 先生님께 名譽博士學位를 授與하게 된 것도 運命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智慧와 慈悲, 勇氣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에 대한 학위 수여식이 끝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하라다 미노루 창가학회 회장, 박정운 한국외대 총장, 김인수 한국SGI 이사장.(왼쪽부터) [박해윤 기자]

    이케다 다이사쿠 會長에 對한 學位 授與式이 끝난 뒤 記念撮影을 하고 있는 하라다 미노루 唱歌學會 會長, 박정운 韓國外大 總長, 김인수 韓國SGI 理事長.(왼쪽부터) [박해윤 記者]

    또한 이케다 會長은 2009年 大韓民國 花冠文化勳章을 비롯해 24個國에서 國家勳章을 授勳했다. 韓國外大 名譽哲學博士 學位로 國內 20番째, 世界 403番째 名譽學術 稱號를 받았다. 지난해 韓國의 충북대에서 받은 名譽敎育學博士 學位가 400番째 名譽學術 稱號다. 이를 包含해 그間 國內에서는 慶熙大, 濟州大, 東亞大, 창원대, 弘益大, 北韓大學院大, 부경대 等에서 그에게 名譽學術 稱號를 授與했다.



    海外에서는 러시아 모스크바大, 中國 베이징대와 푸단대, 臺灣 中國文化臺, 베트남 하노이國立大, 英國 글래스古代, 印度 델리代, 濠洲 시드니代, 美國 위스콘신대 밀워키캠퍼스 等의 이름이 눈에 띈다. 中國·러시아와 美國·濠洲 等 이른바 陣營을 달리하는 國家를 아우르는 點이 特徵이다. 그가 펴온 活動의 擴張性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케다 會長의 活動을 理解하려면 SGI의 歷史부터 먼저 살필 必要가 있다. SGI는 日本 가마쿠라 幕府 時代 니치렌(日蓮)이 主唱한 不法을 信仰의 根幹으로 하는 團體다. 니치렌은 法華經이 不法의 窮極的 가르침을 內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法華經에서 가장 重要하게 明示하는 槪念이 만인 平等 思想이다. 法華經의 觀點에서 보면, 不計는 마지막에 成就하게 되는 靜的인 狀態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自身의 生命에서 끌어낼 수 있는 可能性이다. 不計는 모든 사람의 現實에서 力動的으로 펼쳐지는 智慧와 慈悲, 勇氣를 말한다. 佛法의 目的은 生命 속에 內在된 可能性을 끄집어내는 데 있다. 이것이 SGI 思想의 支流에 흐르는 事故다.

    法華經의 題目이 妙法蓮華經(妙法蓮華經)이다. 日本語로는 ‘묘호렌게쿄’가 된다. 여기에 古代 印度語人 산스크리트語의 ‘나마스(namas), 또는 ‘나모(namo)’를 音譯한 ‘나무(南無=남)’가 붙었다. SGI에 따르면 ‘나의 몸과 마음을 法華經의 가르침에 歸依한다’는 것이 ‘남묘호렌게쿄’이고 이것이 부처가 깨달은 法의 이름이다. SGI 會員들이 ‘남묘호렌게쿄’를 봉창하는 背景이다. 卽 SGI에서는 一種의 固有名詞다.

    니치렌의 不法을 根本 삼아 窓가敎育學會가 結成된 時期가 1930年이다. ‘窓가(創價)’는 價値를 創造한다는 뜻이다. 初代 會長은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2代 會長은 度다 租稅이다. 以後 1960年 도다의 弟子인 이케다 다이사쿠가 唱歌學會 3代 會長에 就任했다. 이케다 會長의 나이 32歲 때다. 韓國에 唱歌學會가 傳播된 時期도 이케다 會長이 就任할 무렵인 1960年代 初다. 特別한 聖職者 없이 會員 사이에서 苦悶을 주고받는 形式의 座談會를 통해 規模가 차츰 擴張돼 왔다. 事實上 自然發生的으로 傳播된 것이다.

    이케다 會長은 1975年 唱歌學會 世界化를 旗幟로 國際唱歌學會(SGI)를 設立하고, 以後 世界的 規模의 宗敎團體로 發展시켰다. 오늘날 世界 192個 地域·國家에 約 1200萬 名의 SGI 會員이 있다. 國內에는 約 150萬 名의 會員이 있다고 한다. 歷史나 規模에 비하면 외려 國內에서 大衆的 知名度가 낮다고 보일 程度다.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을 대신한 하라다 미노루 창가학회 회장이 학위 수여에 따른 답사를 대독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이케다 다이사쿠 會長을 代身한 하라다 미노루 唱歌學會 會長이 學位 授與에 따른 踏査를 代讀하고 있다. [박해윤 記者]

    “苦痛과 슬픔 不幸의 소용돌이”

    이케다 會長은 第2次 世界大戰 中 軍國主義 日本에서 少年期를 보냈다. 그는 著書 等을 통해 “攻襲과 燒夷彈으로 因해 이웃들이 죽어가는 모습, 入隊한 兄에게 傳해 들은 中國人에 對한 日本軍의 蠻行, 兄의 죽음과 그로 인한 어머니의 깊은 슬픔, 그리고 이러한 苦痛을 惹起한 冷靜하고 倨慢한 政治指導者들에게는 剛한 憤怒” 等 當時의 經驗을 詳細하게 描寫해 왔다. 그가 過去를 回顧하며 남긴 말이다.

    “나와 같은 世代의 많은 젊은이가 軍國主義 政府의 宣傳煽動에 依해 자랑스럽게 最前線으로 向해 목숨을 바쳤다. 犧牲하며 남겨진 家族들은 當時 높은 尊敬을 받던 ‘軍人의 어머니’로 불리며 稱讚을 받곤 했다. 그러나 實際로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苦痛과 슬픔, 不幸의 소용돌이가 요동치고 있었다. 偉大한 어머니의 사랑, 偉大한 어머니의 智慧는 ‘國家를 위해’라는 空虛한 文句에 속지 않는다.”

    唱歌學會 初代 및 2代 會長이 ‘飯(反)軍國主義’ 價値를 强調한 點도 念頭에 둬야 한다. 軍國主義와 이를 支持하는 宗敎觀에 反對한 初代 會長 마키구치는 1943年 思想犯으로 收監됐다가 이듬해 獄死했다. 當時 日本 軍部는 ‘모든 사람은 天皇의 황민’이라고 宣布했고, 國家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敎育 指針을 만들었다. 日本 軍部가 宗敎 團體에서도 軍國主義의 象徵을 모시라고 强要했을 때다. 2代 會長 度다 亦是 1943年부터 1945年까지 2年間 投獄됐다. 스승과 弟子가 共히 서슬 퍼런 時節임에도 軍國主義와 妥協하기를 拒否한 셈이다. 平和, 만인 尊嚴 等 唱歌學會가 追求하는 價値에 違背됐기 때문이다.

    이케다 會長이 軍國主義 反對 信念을 維持한 건 唱歌學會의 初期 歷史와도 無關치 않다. 1998年 SGI는 ‘核 廢棄 2000’이라는 世界的 署名運動을 이끌어 1300萬 名의 署名이 담긴 歎願書를 유엔에 提出했다. 또 反核과 關聯한 大規模 展示會를 開催했다. SGI의 活動이 人權, 核 廢棄, 武裝解除, 持續的 發展과 文化 交流 等으로 뻗어나간 것도 偶然이 아니다.

    對談集 70餘 卷

    ‘이케다 平和 哲學’의 特徵 中 하나는 對話에 對한 信念이다. 그가 世界 各國의 知性과 만나 對話한 回數만 해도 7000回에 이른다. 比較的 最近인 2000年 以後에는 平和學者 앨리스 볼딩, 未來學者 헤이즐 핸더슨, 하버드대에서 講義하는 世界的 神學者 하비 콕스, 노벨平和賞 受賞者 조지프 로트블랫, 亦是 노벨平和賞 受賞者인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재즈의 傳說로 꼽히는 허비 행콕과 웨인 쇼터 等과 大膽한 內容이 冊으로 엮였다. 이렇게 出刊된 對談集이 70餘 卷에 이른다. 이와 關聯해 이케다 會長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人類史가 멈추지 않는 限 ‘對話야말로 平和의 王都’라는 것은 우리가 永遠히 짊어져야만 하는 宿題다. 이는 對話를 통해 平和를 實現하고, 維持하고, 强化하기 위한 끝없는 挑戰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反論이나 冷笑를 當하더라도 이 信念을 最後까지 부르짖는 氣力을 잃어서는 안 된다.”

    “人間이 일으킨 問題인 以上, 人間의 손으로 解決하지 못할 것은 없고 아무리 時間이 걸려도 얽힌 실타래를 풀기 위한 努力을 中途에 抛棄하지 않는 限, 打開할 길은 반드시 보인다. 그 最大의 열쇠는 바로 對話의 無限한 可能性을 얼마만큼 끌어내는지에 달려 있다.”

    “對話 없이 人間은 自己 獨斷主義에 빠져 어둠 속을 헤매게 된다. 對話는 그 어둠을 밝혀줄 燈불이 되어 서로의 길을 밝혀줄 것이다.”

    1973년 5월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오른쪽)과 아널드 토인비 박사가 영국 런던에 있는 토인비 박사의 자택에서 만나고 있다. [SGI]

    1973年 5月 이케다 다이사쿠 會長(오른쪽)과 아널드 토인비 博士가 英國 런던에 있는 토인비 博士의 自宅에서 만나고 있다. [SGI]

    그의 對話는 問題를 解決하기 위해 人間의 普遍的 價値를 探究하는 데 焦點을 맞추고 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英國 歷史學者 아널드 토인비의 影響이 있었다. 世界 文明의 興亡盛衰와 獨自的 文明 史觀을 담은 力作 ‘歷史의 硏究’를 쓴 바로 그 토인비다. 이케다 會長과 토인비 博士는 1972年과 1973年 英國 런던에서 만났다. 토인비 博士는 文明의 發達 過程에서 宗敎의 役割을 매우 重要하게 여겼다. 또 佛敎가 現代文明의 여러 問題를 解決할 哲學이라고 判斷했다. 이에 이케다 會長을 런던 自宅으로 招待했고, 10日間의 對話와 以後 이어진 書信 往來에서 오간 이야기를 엮어 1976年 ‘21世紀를 여는 對話’가 出刊됐다. 現在까지 世界 31個 言語로 飜譯됐다.

    이케다 會長이 宗敎와 知識社會를 넘어 國際 舞臺에서 注目받기 始作한 時點은 1970年代다. 그는 이때부터 各國의 指導者들과 交流했다. 그는 東西 冷戰이 한창이던 이 時期 蘇聯, 中國, 美國을 訪問해 알렉세이 코시긴 蘇聯 總理, 저우언라이 中國 總理, 헨리 키신저 美國 國務長官 等과 만나 世界平和를 主題로 對談을 나눴다. 核武器 威脅으로 超强大國 사이에 緊張感이 팽팽하게 흐르고 있을 때다.

    1970年代의 記憶

    가장 좋은 例가 中國이다. 1970年代가 오기 直前, 그러니까 1968年의 일이다. 이케다 會長은 日本 大學生 2萬 名이 모인 자리에서 中·日關係 正常化를 主唱했다. 두 나라는 嚴密히 따지면 아직 戰爭 狀態였다. 只今도 中·日 사이에 일정한 緊張感이 남아 있지만, 當時 日本에는 反中(反中) 및 反(反)共産主義 情緖가 澎湃한 때였다. 그해 9月 8日 ‘中·日關係 正常化에 對한 提言’에서 이케다 會長은 이렇게 말했다.

    “中·日戰爭의 傷處는 如前히 남아 있다. 하지만 戰爭이 끝난 後, 23年이란 歲月이 흘렀고, 오늘 모인 여러분 大部分은 그 紛爭과 直接的 聯關이 없는 世代다. 中國의 靑年들도 마찬가지다. 未來를 살아갈 兩國의 靑年에게 過去의 戰爭으로 發生한 傷處를 무거운 짐으로 남겨서는 決코 안 된다.”

    實際로 이케다 會長은 演說 以後 日本 右翼들로부터 목숨까지 威脅받는 地境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그는 아시아의 安定을 위해 中國의 役割이 重要하다고 생각했다. 이러다 보니 中國 政治權에서도 이케다 會長과 唱歌學會를 注目하는 視線이 늘었다. 實際로 이로부터 4年 後 中·日 國交 正常化가 이뤄졌다.

    1974년 12월 중국 베이징에서 만난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오른쪽)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SGI]

    1974年 12月 中國 베이징에서 만난 이케다 다이사쿠 會長(오른쪽)과 저우언라이 中國 總理. [SGI]

    그리하여 1974年 12月, 이케다 會長과 저우언라이 中國 總理가 만났다. 저우언라이는 1949年 10月 中華人民共和國 政權 樹立 以後 1976年 1月 死亡 때까지 總理를 지낸 中國共産黨의 核心 中 核心이다. 卽 저우언라이 總理가 이케다 會長을 만난 時期는 그가 死亡하기 不過 1年 1個月 前이다. 저우언라이 總理가 末期癌으로 入院 中일 때다. 이케다 會長의 全集 123卷에는 當時 만남이 이렇게 記錄돼 있다.

    “總理는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무엇을 論하더라고 가장 힘주어 强調한 部分은 바로 未來 卽 다가올 世紀에 關한 일이었다. 自身의 죽음 뒤에 펼쳐질 狀況을 깊이 注視하고 있었던 것이다. ‘20世紀 마지막 25年間은 世界에 가장 重要한 時期다. 全 世界 사람들이 서로 平等한 處地에서 도우며 努力해야 한다.’ 그 25年 동안 아시아와 世界를 위해 보다 堅固한 平和의 길을 닦겠다는 總理의 決意가 느껴졌다. 그리고 다가올 世紀에 中·日 平和友好條約이 締結되기를 渴望했다. 나는 遺言을 듣는 心情으로 總理의 말을 傾聽했다.”

    1975年 1月에 美國으로 간 이케다 會長은 首都 워싱턴에서 헨리 키신저 當時 國務長官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케다 會長이 “저우언라이 總理가 中·日 平和友好條約 締結을 바라고 있다”고 傳하자 키신저 長官이 贊成 意思를 밝혔고, 實際로 그로부터 3年 後인 1978年 8月 中·日 平和友好條約이 締結됐다.

    卽 1974~75年은 이케다 會長 個人에게나, 國際社會에나 轉換點이 된 時期였다. 이에 對해 이케다 會長이 남긴 말은 이렇다.

    “1974年부터 1975年까지는 中國, 蘇聯, 美國을 연이어 訪問해 各國 頂上과 直接 對話를 나누며 民間人 處地에서 緊張 緩和를 向한 길을 摸索했다. 微笑 對立에 더해 國境을 接하고 있는 中·蘇가 對立하는, 이른바 世界를 3分할 수밖에 없는 危機가 深刻해졌기 때문이다.”

    冷戰이 終結된 只今 와서 돌아보면 當時 이케다 會長의 活動은 歷史的으로 적잖은 意味가 있다. 只今도 中國에서 이케다 會長에 對한 評價가 높은 背景이기도 하다.

    “韓國은 스승의 나라”

    그는 代表的인 知韓派로도 꼽힌다. 5月 20日 韓國외대 名譽哲學博士 授與式에서 發表된 이케다 會長의 踏査에는 “제 아버님은 젊은 時節에 徵兵으로 서울에 滯在하신 적이 있다. 그때 目擊한 日本人들의 橫暴나 倨慢한 態度에 憤怒하며 어린 少年이던 저에게 해주신 말씀을 只今도 잊을 수 없다”는 대목이 登場한다. 그는 平素 日本 學生들에게 世宗大王, 李舜臣, 柳寬順, 安昌浩 等 韓國 偉人에 對해 講演하기도 했다. 예컨대 柳寬順을 두고는 “韓國의 잔 다르크로 불린다”고 紹介하고, 安昌浩에 對해서는 “韓民族 獨立運動의 아버지로서 日本의 卑劣한 侵略과 끝까지 싸운 偉大한 鬪士로서 몇 番이나 監獄에 投獄됐다”고 說明한 것이다.

    唱歌學會가 發行하는 日本 綜合日刊紙 세이쿄新聞 ‘歷史의 巨人’ 코너를 통해 柳寬順을 紹介하기도 했다. 極右 勢力의 힘이 存在하는 日本 社會의 雰圍氣를 생각하면 선뜻 할 수 없는 行動이다. 이수성 前 總理는 이에 對해 “日本 社會에서 이런 行動은 보통의 勇氣로는 不可能하다”면서 “이케다 會長과 같은 人物이 삐뚤어진 日本 社會를 바로잡으려고 努力하는 限, 韓國과 日本의 未來는 希望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케다 會長은 實際로도 韓國의 歷史와 文化, 學術에 精通하다. 韓國을 ‘文化帶은(文化大恩)의 나라’이자 ‘兄님의 나라’ ‘스승의 나라’라고 여러 番 말할 程度로 韓國에 對한 愛情이 각별한 便이다. 過去 日本이 朝鮮에 加한 侵略에 對해 只今도 謝罪하고 反省해야 한다고 主張하는 良心的 知識人이기도 하다. 김삼열 獨立有功者遺族會 會長의 回顧는 特히 印象的이다.

    “2000年 4月, 소카대 卒業式에 招待받아 처음으로 이케다 先生을 뵙게 됐는데, 그때 나는 性急하게도 日本이 韓國을 侵略해 많은 苦痛을 받았으나 日本이 眞率하게 反省하지 않아 遺憾이라고 말했다. 이에 이케다 先生은 韓國과 日本은 가장 가까운 나라로, 未來志向的인 關係를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努力하겠다고 말하며 日本은 謝罪하고 反省해야 한다고 强調했다. 더욱이 1000名이 넘는 日本 靑年들이 모인 소카대 講堂에서, 내가 日本의 잘못을 指摘하고 未來志向的인 韓日關係를 爲해 日本이 反省해야 한다는 內容을 講演할 수 있도록 配慮해 주셨다. 그때 받은 이케다 先生의 配慮는 只今도 잊지 않고 있다.”

    1994년 10월 일본 오사카에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과 부인 가네코 여사. [SGI]

    1994年 10月 日本 오사카에서 韓服을 입고 寫眞을 찍은 이케다 다이사쿠 會長과 夫人 가네코 女史. [SGI]

    이수성 前 總理의 記憶

    이케다 會長은 1988年 서울올림픽 때는 蘇聯을 訪問해 올림픽 參加 約束을 直接 받아내기도 했다. 또 日本 極右 勢力의 攻擊을 받으면서도 在日 韓國人의 參政權 保障을 主唱했다. 그를 두고 在日 韓國人 權益의 代辯者라는 評이 나오는 理由다. 韓國外大 名譽哲學博士 學位 授與式에 祝辭者로 나선 이수성 前 總理 亦是 “1999年 在日 韓國人의 參政權 保障을 主唱한 이케다 先生을 長時間 만나면서 내 마음에 남은 感動은 말할 것도 없다”고 했다.

    이케다 會長은 SGI 結成일을 記念해 1983年부터 每年 1月 26日에 平和 提言을 發表한다. 個中에는 韓半島 問題를 다룬 事例도 몇 次例 있었다. 假令 南北 頂上會談 開催(1985), 非武裝地帶의 平和的 利用(1986), 離散家族을 위한 再會交流센터 開設(1994), 한·中·日 友好 靑年 敎育交流 推進(2005), 한·中·日 環境 協約 制度 마련(2016) 等이다. 日本人으로서 그가 韓國에 가진 負債감과 愛情을 同時에 確認할 수 있는 대목이다. 韓國 社會에서 如前히 그의 行步를 注目하는 理由다.



    고재석 기자

    고재석 記者

    1986年 濟州 出生. 學部에서 歷史學, 政治學을 工夫했고 大學院에서 映像커뮤니케이션을 專攻해 碩士學位를 받았습니다. 2015年 下半期에 象牙塔 바깥으로 나와 記者生活을 始作했습니다. 流通, 電子, 미디어業界와 財界를 取材하며 經濟記者의 文法을 익혔습니다. 2018年 6月 동아일보에 入社해 新東亞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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