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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承旼·安哲秀 支持하던 그룹 당겨야 民主黨 執權”|新東亞

“劉承旼·安哲秀 支持하던 그룹 당겨야 民主黨 執權”

前 民主硏究院 副院長 최병천의 親企業 進步主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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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記者

    jayko@donga.com

    入力 2022-10-29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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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운’이 가진 高卒 멘탈리티

    • 어머니·全泰壹·마르크스의 影響

    • ‘抑强扶弱’ 말고 ‘芙江負約’하자

    • 李在明, 판을 完全히 잘못 읽고 있다

    • 文政府는 온건 正義黨 政權이었다

    • 野, 與 왼쪽 立證하려 안달하지 말라

    10월 6일 ‘신동아’와 인터뷰하기에 앞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한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지호영 기자]

    10月 6日 ‘신동아’와 인터뷰하기에 앞서 寫眞 撮影을 위해 포즈를 取한 최병천 新成長經濟硏究所 所長. [지호영 記者]

    10月 6日 서울 汝矣島. 최병천 新成長經濟硏究所 所長이 불러준 住所로 갔을 때 唐慌했다. 門 앞에는 잘 알려진 保守 性向 硏究所의 看板이 附着돼 있었다. 門을 열자 崔 所長이 손을 흔들며 記者 一行을 맞았다. 看板의 속事情을 물으니 冊(‘좋은 不平等’)을 내면서 硏究所를 꾸리게 돼 아직 整理 中이라는 答을 들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套였지만 實은 伏線 같다고 생각했다. 冊을 읽고 난 뒤 그를 두고 ‘保守와 對話가 可能한 進步’라고 여기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自身이 ‘고운’이라 했다. ‘高’等學校 ‘運’同權. 한때 ‘고운 世代’가 있었다. 1987年과 1992年 사이. 그러니까 6月 抗爭이 터지고 金永三 政府가 出帆할 즈음까지. 高等學生도 으레 革命的 雰圍氣에 휩쓸렸다. 1973年生인 그도 그 世代의 一員이었다. 그는 ‘故出’이라고도 했다. 勞動 現場으로 들어간 大學生들을 ‘學生運動 出身 勞動者’ 一名 학출이라고 불렀다. 그는 고운 出身이라 故出이었다. 歐露工團 3工團 비디오 헤드 만드는 工場에서 勞動者로 일하기 始作해 독산동, 天安에서 일했다. 電氣鎔接 資格證도 땄다.

    故로 이 사람은 進步 안에서도 非主流다. 巨創한 運動團體의 리더 職銜을 가져본 적이 없다. 最終 學歷은 碩士課程 修了라는데, 스스로는 “高卒 멘탈리티를 갖고 있다”고 했다. “孤雲이긴 했지만 大學 學生運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스스로의 長點이자 短點이 “學生運動 出身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陣營 內에서도 네트워크가 없는 單獨者다. 이것만으로도 剛한 好奇心을 불러일으키는 人物이다. 그에게 ‘境界人 같다’고 말을 건네니 “맞다”는 答이 돌아왔다. 그는 “進步에 오랫동안 몸담고 進步에 愛情을 갖고 있으면서도 進步 主流에 批判的 視線을 갖고 있다”고도 했다.

    ‘이너서클’ 언저리

    외딴섬에 孤立돼 있는 사람 같지는 않다. 어쨌든 더불어民主黨 싱크탱크인 民主硏究院 副院長을 했고 韓國社會輿論硏究所(KSOI) 副所長을 지냈으며 高(故) 朴元淳 서울市長의 마지막 政策補佐官으로 일했다. 汝矣島에는 그 各各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차고 넘친다. 그런데 博士級 人力도 櫛比한 政黨에서 ‘高卒 멘탈리티’로 政策 要職을 두루 꿰찼다. 成功談에 끼워 넣음직한 스토리다. 執權與黨의 核心部는 아니었지만 ‘이너서클’ 언저리에 있었다. 或是 그는 只今 ‘아웃사이더 마케팅’을 하는 게 아닐까. 그런 疑心이 들 刹那에 그가 말했다.

    “高(故) 신영복 先生께서 ‘變革은 邊方에서 일어난다’는 表現을 쓴 적이 있다. 實際로는 中心部의 邊方에서만 變革이 일어난다고 봐야 한다. 아주 邊方은 世上 돌아가는 걸 알 수가 없고 資源도 動員할 수 없다. 中心 한복판에 있으면 變革할 理由가 없고. 그래서 實際로는 中心部의 邊方에서만 變革이 일어난다고 봐야 하는데, 내가 그런 位置에 있는 사람인 셈이다.”



    그의 故鄕은 講院 旌善이다. 아버지는 鑛夫였다. 江原 사투리가 느껴지지 않았는데, 다섯 살 때 서울로 移徙했고 主로 동대문구에 살았다고 했다. 自身이 基層 民衆의 情緖를 갖고 있단다. 誇張이나 被害意識이 아니다. 그의 집은 零細民, 그러니까 오늘날의 基礎生活受給對象者였다.
    그는 冊 첫 張에 “1938年 태어나, 限平生 勞動하다, 2020年에 돌아가신,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윤길순 女史와 그 時代를 함께했던 모든 어르신들께 이 冊을 바칩니다”라고 썼다.

    進步 人士들이 쓰는 冊에는 老年 世代를 言及하는 것 自體가 드문데.

    “그런 類의 進步 쪽 情緖에 나는 不滿이 많다. 貧困이 深刻한 世代는 75歲 以上 後記 老人에 集中돼 있다. 1930~40年代生이 여기에 該當한다. 이분들이 舞鶴 世代, 初卒 世代다. 우리나라의 不平等 問題는 실은 世代 問題다. 壓縮 成長하는 過程에서 이분들은 社會保障制度에 들어오는 過程이 한 拍子 늦었다. 國民年金 死角地帶에 該當하는 境遇도 많았다. 1次 베이비부머 初入에 該當하는 60代 初盤의 境遇 國民年金 加入率이 60%를 넘는다. 卽 1次 베이비부머 初入 世代가 老人의 主流를 形成하면 실은 老人 貧困 問題도 解決되는 거다. 基礎年金 100%를 할 게 아니라, 後期 老人에게 集中해야 한다.”

    어머니는 무슨 일을 했나.

    “工場을 다니셨고 그 뒤에 빌딩 淸掃夫 일을 하셨다. 이태리타월 같은 걸 팔러 다니시기도 했고. 우리 집은 가난하다는 생각을 恒常 갖고 살았다. 中學校 時節, 어머니가 親舊네 집 派出婦를 해서 부끄러웠다. 나이가 들면서 부끄러워했던 나 自身이 더 부끄러웠다.”

    高等學校 때 運動圈이 된 契機는 가난이었나.

    “가난 때문이기도 했고, 또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괴롭히는 아빠, 괴롭힘당하는 엄마’ 같은 프레임을 갖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엄마의 便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社會로 投影됐다. 돌아가신 분 中에 나에게 가장 많은 影響을 미친 세 사람을 꼽으라면 어머니, 全泰壹, 마르크스다.”

    그렇다면 思想的으로 剛한 衝擊을 준 텍스트도….

    “‘전태일 評傳’과 카를 마르크스의 冊이다. 마르크스的 思考의 核心은 歷史的 分析과 唯物論的 分析이다. 普通 歷史 唯物論이라고 表現하는데, 現代的으로 解釋하면 歷史的 分析과 經濟學的 分析이다. 내 冊에서도 歷史的 分析을 試圖했다. 마르크스的 思考方式이 남아 있는 것이다. ‘方法論 마르크스’가 있고 ‘結論 마르크스’가 있다. ‘結論 마르크스’는 革命하자는 거다. 나는 ‘方法論 마르크스’의 傳統을 이어가려 했다.”

    3黨에서도 3黨 出身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은 더불어민주당을 두고 “국민의힘의 왼쪽을 입증하려 안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지호영 기자]

    최병천 新成長經濟硏究所 所長은 더불어민주당을 두고 “國民의힘의 왼쪽을 立證하려 안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지호영 記者]

    바꿔 말하면 ‘結論 마르크스’에 더는 關心이 없다는 뜻이 된다. 그는 市場·競爭·利潤·企業의 重要性을 强調했다. 發話者를 지우면 進步 政策通이 꺼낸 말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冊을 읽어보면 親企業的인 마인드가 읽힌다.

    “‘反企業 進步主義 하지 말고 親企業 進步主義를 하자’ ‘抑强扶弱 말고 芙江負約하자’가 내 메시지의 核心이다.”

    運動圈 時節부터 親企業 마인드가 있었나.

    “親企業 進步主義와 反企業 進步主義를 가르는 分岐點은 社會主義 情緖를 基盤으로 한 運動圈 마인드를 아직 갖고 있느냐 廢棄했느냐에 있다. 社會主義 文化의 磁氣場 안에 있으면서 工場으로 갔다. 1991年 蘇聯 崩壞, 1993年 文民政府 出帆을 起點으로 ‘학출’의 相當數가 撤收했다. 나도 뒤늦게 社會主義가 正말 틀렸는지, 틀렸다면 왜 틀렸는지 알기 위해 獨學했다. 스웨덴 사민主義를 熱心히 工夫했다. 그러면서 스웨덴 사민主義 勢力이 가진 經濟政策的 有能함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企業하기가 좋은 나라이면서도 福祉國家를 建設할 수 있다는 論理 아닌가.

    “맞다. 스웨덴은 投資 促進型 福祉國家다.”

    投資와 福祉國家가 따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確信을 갖게 됐다는 건가.

    “그렇다. 社會主義 理論 自體가 反企業 進步主義다. 社會主義에서 사민主義로 돌아오는 過程은 半企業 進步主義에서 親企業 進步主義로 돌아오는 것과 같다. 企業을 搾取의 空間이 아니라 革新의 主體로 보는 거다. 다만 勞動과 資本 사이의 힘의 均衡은 그것대로 追求한다. 또 社會福祉는 自營業者와 어르신 等 非(非)勞動을 包含한다.”

    그는 民主勞動黨에서 오랜 期間 活動했다. 민노당 盆唐 뒤 進步新黨에 合流해 서울市黨 副委員長도 지냈다. 그런 그는 2012年 19代 國會 開院과 함께 민병두 當時 民主統合黨(現 민주당) 議員의 補佐官으로 國會에 들어왔다.

    進步政黨에서 民主黨으로 왜 옮겼나.

    “민주노동당에는 크게 세 個의 派(派)가 있었다. NL(民族解放 系列)과 PD(民衆民主 系列), 그리고 내가 屬한 SD(社會民主主義 志向)다. 민주노동당 內 1黨은 NL이고 2黨이 PD였다. 나는 제3세력인 셈이지.”

    3黨에서도 3黨….

    “그렇다. 민주노동당은 元來 福祉國家라는 表現을 쓴 적이 없다. NL과 PD는 革命理論이기 때문에 사민主義와 福祉國家를 嫌惡하는 論理 構造를 갖고 있다. 民主黨이 2010年 無償給食을 내건 걸 보고 나는 路線 轉換으로 理解했다. 노무현 政府 時節 열린우리당은 ‘反獨裁 民主化’ 어젠다는 있지만 勞動·福祉·財閥 等 社會經濟 어젠다는 脆弱했다. 그게 민주노동당이 먹고살 수 있던 理由였다. NL과 PD 共히 이념적 偏向性이 있지만, 어젠다에서 未來 志向性을 띠었으니까. 그런데 無償給食을 통해 민주당이 進步政黨化하고 있다고 봤다. 그러면 여기(민주노동당) 있을 理由가 없는 거지.”

    福祉國家에 關한 限 이 사람은 뜻을 굽힐 생각이 없다. 近來 만난 進步人士 中 이 程度로 純度 높은 福祉國家論者를 본 記憶이 없다. 이내 옛 둥지에 對한 날 선 批判이 이어진다.

    “NL, PD와 親하게 지내는 건 내 關心事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福祉國家를 實際로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가 重要했다. 유럽에서 사민당과 勞動黨은 執權 勢力이다. 執權을 志向하지 않는 政黨은 큰 意味가 없다. 나는 綠色黨이나 海賊當 有(類)에 關心 있는 사람이 아니다. 동아리에는 關心이 없다. 그러니 나에게는 民主黨으로 옮기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元來 路線 中心으로 思考한다. 내가 大學校에서 學生運動을 안 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네트워크에 엮이지 않기 때문인가.

    “埋沒費用이 別로 없지. 선·후배와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있는 사람은 네트워크도 斷絶해야 한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三星 半導體 工大, 現代 未來車 工大

    韓國 進步는 財閥 偏向 政策, 新自由主義 偏向 政策, 非正規職 濫用 政策이 不平等을 심화시켰다고 본다. 그의 命名대로라면 ‘3代 積弊론’이다. 그가 보기에는 잘못된 通念이다. 韓國은 GDP(國內總生産) 對比 輸出 比重이 매우 높은 나라다. 輸出이 잘되면 不平等은 增加한다. 韓國 經濟의 輸出 主力은 如前히 製造業을 營爲하는 大企業이다. 한데 이것은 ‘좋은 不平等’이다. ‘나쁜 平等’보다는 낫다. 그러니 大企業의 役割이 重要하다. 그는 ‘企業大學’을 積極 檢討할 必要가 있다면서 例示로 “三星 半導體 工大, 現代 未來車 工大, SK 情報通信 工大, 네이버 웹툰 大學”을 言及한다.

    韓國 經濟에서 財閥의 役割을 强調한 장하준 케임브리지對 敎授의 意見과도 비슷해 보인다.

    “張 敎授는 財閥을 擁護하는 性格이 强하고 나는 大企業을 擁護하는 性格이 좀 더 剛하다.”

    張 敎授는 비즈니스에서 오너십의 役割을 强調하는 것 아닌가.

    “나는 財閥, 大企業, 産業은 區分해야 한다고 본다. 財閥 槪念의 核心은 少數 家門이 작은 持分으로 過度한 影響力을 行使하는 것이다. 財閥 槪念과 根本的으로 衝突하는 건 株式會社 槪念이다. 다만 韓國 現代 經濟史에서 財閥도 功過가 있다. 그런 意味에서 財閥改革은 漸進的으로 해야 한다. 그런 點에서 張 敎授와는 强調點에 差異가 있다.”

    財閥改革論者들이 文在寅 政府에 여럿 參與하지 않았나.

    “朴正熙에 對한 가장 正確한 評價는 經濟成長에 寄與한 獨裁者라는 것이다. 財閥도 비슷하다. 支配構造는 不公正했으나 效率的이었다. 旣存의 財閥改革 運動은 財閥 體制가 가지는 빛과 그림자 中 그림자를 繼續 浮刻했다. 完全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折半의 프레임이다.”

    그는 “민주당의 一部는 스타트업·벤처는 贊成하고, 大企業을 反對한다”면서 “現實과 동떨어진 發想이다. 스타트업·벤처 亦是 大企業과 聯動해서 發展하는 게 一般的”이라고 했다. 이어 “스타트業 成功의 指標는 ①上場 ②엑시트(M&A)다. 달리 表現하면 大企業이 되거나, 大企業에 팔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말한 사람이 民主黨 所屬임을 考慮하면 破格的 主張이다.

    冊을 보면 1997年 IMF(國際通貨基金) 危機가 韓國 經濟에 반드시 나쁜 게 아니었다는 뉘앙스도 읽힌다.

    “IMF 當時 苦痛을 겪은 분들의 아픔을 共感한다. 다만 歷史를 길게 보면 塞翁之馬의 性格이 있었다. 日本式 모델에 가까웠던 韓國 資本主義가 美國式 모델로 轉換되는 分岐點이 됐다. IMF는 우리 社會에 세 가지로 影響을 미쳤다. 먼저 그 自體로 國民的 쇼크로 作動했다. 또 政治를 바꿀 에너지로 이어지면서 政權이 交替됐다. 그리고 이건희 三星電子 會長의 役割이 宏壯히 重要했다. 或是 三星 半導體와 우리나라 電子産業이 日本을 越等히 앞서고 있다는 건 알고 있나?”

    過去에 三星을 取材한 적이 있어 알고 있다.

    “나는 率直히 말해 몰랐다. 最近 몇 年間 工夫하면서 알게 됐는데 깜짝 놀랐다. 日本 經營學者들이 쓴 ‘三星에서 배워야 한다’는 類의 冊들을 보면 1993年 프랑크푸르트 新經營 宣言 以後에도 三星 內部에서는 이 會長의 말이 잘 안 먹혔다고 한다. 그러다 IMF가 터지니 이 會長이 構造調整을 奬勵한다. 三星이 리딩 企業이었기 때문에 다른 財閥도 三星式 構造調整을 재빨리 模倣한다. 그前까지 韓國 資本主義는 文魚발 經濟로 象徵되는 領土 擴張 戰略을 폈다. IMF 以後 負債比率을 急激히 줄이면서 組織을 효율화했다. 中國 經濟의 負傷과 디지털化라는 變化에 宏壯히 機動的으로 對應하는 組織으로 바뀌었다. 質的 轉換의 分岐點이었다.”

    그가 提示한 데이터에 따르면 不平等은 1997年이 아니라 1994年 始作됐다. 그는 原因이 1992年 8月 24日 韓中修交 締結에 있다고 했다. 이로 因해 纖維·가죽·신발産業에서 수많은 勞動者가 일자리를 잃었다. 이들이 道·小賣業, 宿泊·飮食業, 不動産·賃貸業으로 移動했다. 代身 中國의 急成長으로 韓國 大企業이 特需를 누렸다. 上層의 所得이 急增하자 下層과의 隔差가 더 커졌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쁜 일과 좋은 일이 共存”韓 時期였다.

    批判理論 있으나 國政運營 理論 없는…

    進步의 스타 知識人인 金尙祚·張夏成·홍종학 敎授가 모두 文在寅 政府에서 長官級 要職을 맡았지만 世上이 平等해진 것 같지는 않다. 執權與黨이 多數黨이었으니 누가 妨害해서 못했다고도 말할 수 없는데.

    “多數黨 程度가 아니라 國會 先進化法의 制約을 받지 않는 180席 以上 政黨이었지. 張夏成 前 政策室長은 SOC(社會間接資本) 豫算을 팍 줄이는 데 큰 役割을 했다. 韓國 進步經濟學界의 相當數는 批判理論은 갖고 있는데, 代案的 國政運營 理論은 갖고 있지 않은 거다.”

    文在寅 政府는 進步 陣營이 25年間 蓄積해 온 어젠다를 거의 받아들였다고 主張했다. 그 德에 支持率이 任期 末까지 45% 안팎을 維持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맞다. 盧武鉉 前 大統領이 進步性向 有權者와 생각이 다를 境遇 ‘突擊 앞으로’를 한 스타일이라면, 文在寅 前 大統領은 進步性向 有權者의 意見을 反映하려 努力했다. 말하자면 盧 前 大統領은 韓美 FTA(自由貿易協定)를 包含해 政策的으로 옳았지만 政務的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門 前 大統領은 政務的으로 安定됐지만 政策的인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둘 다 正答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 支持層과 같이 變해야 한다. 나는 冊을 통해 우리 支持層이 모여 있는 廣場에 論理 爆彈을 던졌다. ‘여러분 우리가 그동안 틀렸습니다. 같이 바뀝시다’라고. ‘民主黨이 틀렸다거나 門 前 大統領이 틀렸다거나 親文(親文)李 틀린 게 아니라 우리가 틀렸습니다’라고.”

    方向이 바뀌면 中途나 改革保守 有權者 그룹도 넘어올 수 있어 보인다.

    “只今 가장 마음 둘 곳 없는 사람들은 民主主義와 福祉를 贊成하되 經濟 最一線에 있는 改革 陣營 有權者들이다. 이들은 過去에 유승민과 安哲秀를 支持하던 그룹이고, 彈劾 聯合의 한 축이었다. 그들을 당기면 민주당이 多數派가 된다. 그들을 놓치면 少數派에 安住하는 勢力이 된다.”

    그는 文在寅 政府가 推進한 最低賃金의 急激한 引上이 敗着이었다고 본다. 그의 말대로라면 進步의 集團知性이 誤謬를 일으킨 事例다.




    2018년 9월 6일 서울 광화문 이마빌딩에서 열린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 [동아DB]

    2018年 9月 6日 서울 光化門 이마빌딩에서 열린 所得主導成長特別委員會 第1次 全體會議. [東亞DB]

    小企業이 中企業으로 크는 길은 오래 걸린다. 最低賃金을 올리는 건 빠르니 ‘5年 單任 政權’으로선 所得主導成長이 政務的으로 效率的인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랬겠지. 그런데 政務的 效率性과 政策的 整合性을 同時에 充足해야 한다. 政策的 副作用이 생기면 나중에 政務的 逆風도 반드시 맞는다. 最低賃金을 成長率+CPI(消費者物價指數) 合計보다 너무 많이 올리면 ‘일자리 衝擊’이 發生한다. 3代 低附加價値 産業 從事者가 約 1000萬 名이다. 그쪽 産業 從事者들에서 剛한 反感이 생긴다.”

    所得主導成長에 反對했는데 2018年 所得主導成長 特委에는 왜 參與했나.

    “只今도 페이스북에서 내 이름과 最低賃金을 같이 檢索하면 數十 個의 글이 뜰 것이다. 나는 所得主導成長에 批判的인 立場이라는 걸 알고도 採用한 境遇다. 率直히 말하면 生計 問題가 1順位였다. 勿論 內部에서 役割을 할 생각도 있었다. 內部에서 어떤 생각과 어떤 苦悶을 하는지 經驗할 수 있는 機會였다. 實際로 큰 도움이 됐다.”

    文在寅 政府가 推進한 綜合不動産稅 印象은 어떻게 보나

    “綜不稅에는 住宅分 綜不稅와 土地分 綜不稅가 있다. 2021年 住宅分 綜不稅가 2018年과 對備하면 對象者가 3倍, 課稅額이 14.3倍 늘었다. 제精神이 아닌 거다. 나는 大選 直後 ‘政權交替 促進歲’라고 表現했다.”

    어지간한 政策 다 해봤다

    正義黨이 민주당의 2中隊가 아니라 민주당이 正義黨의 1中隊라고 主張했더라.

    “政策 觀點에서 보면, 民主黨과 區分되는 進步政黨의 特徵은 進步的 勞動政策과 進步的 福祉政策이다. 이 두 가지를 談論으로 만들어서 내놓은 게 所得主導成長이다. 그러니까 文在寅 政府는 穩健 민노당 或은 穩健 正義黨 政權이었다고 봐야 한다. 1997年 外換危機 以後 韓國 進步 勢力이 25年間 主張한 進步 政策을 實踐한 25年짜리 進步 政府였다. 文在寅 政府는 왜 進步 政策을 펴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進步 쪽 敎授들은 正말 世上 物情 모르는 분들이다.”

    知識人 사이에는 많지 않나.

    “많다. 왜냐하면 世上과 팩트에 關心이 없거든. 그분들 보라고 쓴 冊이다. 그분들이 하라는 대로 해서 작살났다는 걸 아는 게 重要하다. 文在寅 政府 經濟政策은 2018年·2019年·2020年 以後 세 局面을 區分해서 봐야 한다. 2018年은 賃金主導成長論, 2019年은 老人主導成長論을 폈다. 2020年부터는 코로나 經濟危機 管理 政策을 썼다. 그건 잘했다. 2018年은 副作用이 컸다. 福祉政策에서는 공도 있다. 癡呆 國家 責任制, 健康保險 非給與의 給與化 및 保障性 强化, 雇傭保險 死角地帶의 部分的 解消는 잘한 일이다. 잘했건 못했건 (進步가 主張한) 어지간한 政策은 다 해봤다는 게 重要하다. 그러니 지난 大選에서 巨大 談論이 없어진 것이다.”

    水位가 높다. 我軍도 果敢하게 挑發한다. 論爭的이며 찰지다. 體面을 살려줘야 할 線·後輩가 없기 때문에 나온 자유로움 같다. 누가 따지고 들면 데이터로 反駁해 주겠다는 自信感도 느껴진다. 當身들이 잘못해 機會를 날렸다는 反感도 읽힌다. 進步 陣營의 뜨거운 감자에 關해서도 묻고 싶어진다.

    민주당과 민주노총의 關係는 어떻게 設定돼야 하나.

    “民主勞總은 最大 規模의 勞動組合 代表體다. 나는 大韓老人會度 마찬가지 脈絡에서 보는데, 이념적 스펙트럼과 無關하게 大衆組織은 尊重해야 한다. 다만 民主勞總의 中心은 上位 10% 大企業과 公共部門이다. 上層勞動을 主로 代表한다. 유럽의 勞總은 國政 運營의 主體로서 經驗이 많다. 國政 運營의 파트너라는 마음으로 政策을 苦悶한다. 反面 民主勞總은 戰鬪的 組合主義 傳統이 워낙 剛해서 問題 提起를 主로 하지 國政을 책임지는 姿勢로 政策을 提案하는 境遇가 別로 없다. 民主黨이 (민주노총의) 提案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면 안 된다는 얘기다. 事案別 連帶가 옳다.”

    上位 中産層人 勞組가 讓步해야 한다는 主張도 있다.

    “保守 버전의 積弊論이다. 道德的 非難을 위한 프레임이다. 韓國 兩極化의 實體는 大企業 正規職과 非正規職 사이에 있지 않다. 高附加價値 大企業과 低附加價値 零細企業 사이에 있다. 올바른 解法은 法과 制度의 改革인데 結局 稅金과 社會安全網, 階層 사다리 政策이 重要하다. 政治權이 하면 될 일이다. 讓步는 엉뚱한 槪念이다. 三星電子 職員이 洞네 食堂 勞動者에게 月給을 讓步해야 한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왼쪽보다 有能함이 重要하다

    李在明 民主黨 代表가 交涉團體 代表演說에서 ‘基本社會’를 主張했다. 結局 基本所得 하자는 얘기인데.

    “李 代表가 판을 完全히 잘못 읽고 있다. 城南市長이나 京畿道知事와 大選候補의 成功 經路는 다르다. 地自體에서는 옆 洞네 안 주는데 우리 洞네만 돈 주면 좋아할 수 있다. 全國的으로 돈을 준다고 하면 그 돈 어디서 나오는지부터 聯想하게 된다. 基本所得과 國土保有稅는 進步 內部에서 主導權을 잡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이 代表는 이미 進步 內部에서 主導權을 잡았다. 本人의 미션은 中途 擴張이다. 李 代表 本人에게 損害다.”

    ‘좋은 不平等’이 나오자 수많은 言論이 그를 찾았다. 記者와 인터뷰하는 渦中에도 연신 記者들에게서 電話가 걸려왔다. 仔細히 보면 妙한 脈絡이 있다. 그의 冊은 保守 性向 日刊紙와 經濟誌에서 關心 받는다. 進步 性向 日刊紙는 그를 (現 時點까지) 인터뷰하지 않았다. 그의 主張이 不便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의 處地에서 보면 고약한 일이다. 그는 ‘우리가 틀렸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막상 그 ‘우리’의 磁場 안에서 酒類 意見이 되지 않는다면 무슨 所用이란 말인가. 進步 內部에서 討論되지 않는데 民主黨이 움직일 理가 있겠는가. 그래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親企業’은 민주당 主流의 雰圍氣上 어려워 보인다. 民主黨이 成長을 前面에 앞세우면 報酬와 어떻게 差別化할 수 있나.

    “2012年 大選에서 박근혜 候補가 經濟民主化를 主張했다. 그렇다고 박근혜를 報酬가 아니라 進步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나? 民主黨이 親企業을 標榜한다 해서 민주당을 反勞動으로 생각하는 集團이 누가 있겠나. 최장집 고려대 敎授가 말했듯 韓國 民主主義 特徵은 運動에 依한 民主化다. 나를 包含해 民主黨 政治人 大部分이 運動圈 出身이다. 過去에는 親勞動을 主張하거나 鮮明한 差別化 戰略을 펴서 非主流 總結集 路線을 追求해야 했다. 45% 結集 戰略이다. 效果가 있던 理由는 45%도 안 되는 勢力이었기 때문이다. 只今은 保守와 國民의힘이 허약해졌고 進步와 민주당은 過去보다 훨씬 더 剛해졌다. 그러니 51% 以上을 確保하는 多數派 戰略이 必要하다. 그런데 자꾸 45% 差別化 戰略에 戀戀한다. 自害 戰略이다.”

    말한 대로 保守는 過去보다 弱해졌다. 한데 민주당은 相對가 剛하다고 하면서 자꾸 幽靈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韓國 社會를 움직이는 中心 世代는 40·50世代다. 민주당은 이들 酒類 世代의 支持를 받는 政黨이다. 그런데 민주당 政治人 大多數는 非主流 世界觀을 갖고 있다. 主人意識이 아니라 나그네 意識을 가진 나그네 政黨인 거다. 文在寅 政府 時節 민주당은 國民의힘의 왼쪽임을 立證하려는 强迫觀念을 가졌다. 國民의힘의 왼쪽임을 立證하려 안달하지 않아도 된다. 國民의힘보다 有能함을 立證하면 그것으로 充分하다.”

    신동아 11월호 표지.

    新東亞 11月號 表紙.



    고재석 기자

    고재석 記者

    1986年 濟州 出生. 學部에서 歷史學, 政治學을 工夫했고 大學院에서 映像커뮤니케이션을 專攻해 碩士學位를 받았습니다. 2015年 下半期에 象牙塔 바깥으로 나와 記者生活을 始作했습니다. 流通, 電子, 미디어業界와 財界를 取材하며 經濟記者의 文法을 익혔습니다. 2018年 6月 동아일보에 入社해 新東亞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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