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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不安한 未來를 살다가 그림 德分에 現在를 오롯이 산다”|신동아

“늘 不安한 未來를 살다가 그림 德分에 現在를 오롯이 산다”

꽃 그리는 畫家로 돌아온 歌手 박혜경의 告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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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영 記者

    kjy@donga.com

    入力 2022-10-2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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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2 때 無酌定 上京해 안 해본 알바 없다

    • 엄마의 ‘男便’이자 自負心이기에 바르게 컸다

    • 非主流 音樂으로 主流 市場에서 큰 사랑받아

    • 詐欺당한 後 成大 手術 받고 歌手 生命 끊어질 뻔

    • 꽃 德에 歌手로 再起, 숨은 才能도 發見



    “各樣各色의 꽃들과 한 女人, 새, 나비가 어우러져 따사로운 기운을 뿜어낸다.”

    “여러 色깔을 썼는데도 全體的인 色感이 조금도 촌스럽거나 幼稚하지 않다. 그림을 專門的으로 배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9月 29日 서울 江南區 삼성동 코엑스에 展示된 歌手 박혜경의 그림을 보고 觀客들이 보인 反應이다. 事實 記者도 놀랐다. 노래 잘하는 박혜경이 音樂이 아닌 그림으로 이토록 大衆의 耳目을 끌 거라고는 豫想하지 못했다. 박혜경은 이날 ‘幸福한 돼지’ 그림으로 有名한 한상윤 作家와 컬래버 展示를 펼쳤다. 박혜경에겐 火가 데뷔戰이었다.

    “제가 直接 그린 앨범 재킷 寫眞을 보고 한상윤 作家가 그림을 그리도록 이끌었어요. 컬래버 展示도 한 作家가 提案했고요. 展示한 作品들을 3週 동안 完成하느라 每日 밤을 새우다시피 했어요. 아직은 畫家라는 말이 쑥스럽지만 그림을 그리는 동안 너무나도 幸福했어요. 늘 未來에 對한 걱정을 안고 살던 내가 只今은 오롯이 現在를 사는 느낌이에요.”



    展示場에서 만난 박혜경은 더할 나위 없이 幸福해 보였다. 꽃을 피우며 환하게 웃는 그의 그림 속 女人처럼. 이날의 氣分 좋은 餘韻을 안고 10月 4日 그를 다시 만났다. 많은 히트曲을 내며 舞臺에서 큰 사랑을 받다가 聲帶結節로 歌手 活動을 그만뒀던 그가 全혀 接點이 없는 ‘꽃을 그리는 畫家’로 새롭게 出發하기까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華奢한 원피스에 帽子를 쓰고 約束 場所에 나타난 그는 展示會가 끝나고 사흘이 지났는데도 疲困한 氣色이 歷歷했다. 그 理由를 묻자 그가 배시시 웃으며 말門을 열었다.

    “展示한 作品 中 가장 큰 사이즈인 100號짜리 그림만 빼고 모두 팔렸어요. 그림을 그려달라는 注文도 많이 받았고요. 한상윤 作家의 얼굴에 먹漆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展示할 그림을 完成한 것에 滿足하고 있었는데 많은 분이 좋아해 주시니 꿈만 같아요.”

    박혜경은 9월 29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전시회를 열고 화가로 데뷔했다. [지호영 기자]

    박혜경은 9月 29日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展示會를 열고 畫家로 데뷔했다. [지호영 記者]

    먼 親戚 査頓집 다락房에서 키운 꿈

    그는 “노래가 내 삶 自體라면, 그림은 나를 살게 하는 滋養分”이라고 表現하며 初等學校에 들어가기도 前부터 歌手를 꿈꾸던 어릴 적 自身을 떠올렸다.

    “6~7歲 때부터 노래하는 사람을 꿈꿨어요. 할머니가 서울에서 라디오를 보내주셨는데 거기서 나오는 노고지리의 노래를 들으며 妙한 魅力을 느꼈죠. 제 故鄕은 全羅北道 鎭安郡 정천면 봉황리의 작은 部落이에요. 煉炭도 없어서 나무를 때는 깡촌이었죠. 시골 우리 마을에 敎會가 있었는데 엄마는 佛敎 信者인데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公演할 機會를 만들어주려고 저를 敎會에 보내셨어요. 그 德에 크리스마스 公演 때마다 舞臺를 獨차지하고, 初等學校 때는 合唱團 先生님의 勸誘로 獨唱 大會에 나갔어요. 그때부터 혜은이, 조용필 先輩님 같은 歌手가 되고 싶었어요. 當時 三寸들이 ‘TV가이드’라는 雜誌를 즐겨 봤는데 거기에 歌手나 演藝人 志望生을 募集하는 廣告가 많았어요. 서울에 가야 歌手가 될 수 있겠구나 싶어 中2 때 無酌定 上京했죠.”

    서울에 緣故가 있었나요.

    “없었어요. 먼 親戚의 査頓집 다락房에서 살았어요. 엄마가 보내주는 下宿費로는 生活하기가 어려워 粉食집 서빙에 스티커 붙이기, 傳單紙 돌리기 等 別의別 알바를 다했어요. 歌手로 데뷔하고 나서도 돈을 벌기 前까지 알바를 繼續했어요.”

    삶이 고달팠을 법한데요.

    “열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때부터 줄곧 高生의 連續이었어요. 想像할 수 없는 苦生이었지만 하나도 고생스럽지 않았어요. 나한텐 꿈이 있으니까요. 歌手가 돼서 동생들을 공부시키고 엄마를 幸福하게 해주는 게 제 꿈이었어요. 꿈을 이루기 위해 안 해본 알바가 없어요. 아비 없는 子息이라는 말을 들을까 봐 늘 바르게 살려고 努力했고요. 난 엄마의 男便이자 自負心이자 自矜心인데 엄마를 속상하게 하면 안 되잖아요.”

    꿈에 한발 더 다가가기 위해 中3 때 뮤지컬을 始作했다. 오디션을 봐 첫 뮤지컬인 MBC 創社特輯劇 ‘癡聾이와 또롱이’의 主人公을 따냈다. 靑少年 歌謠祭에 나가 賞도 여러 番 받았다. 1995年 MBC 江邊歌謠祭에 ‘Easy’라는 名稱의 듀엣으로 參加한 적도 있다.

    “歌手가 되려면 大學歌謠祭나 江邊歌謠祭에 나가야겠더라고요. 大學生 身分이 必要해 명지전문대에 들어갔다가 江邊歌謠祭에서 떨어진 後 그만뒀어요. 歌手가 되고 나서 慶熙大 포스트모던音樂科에 進學했지만 休學했어요. 工夫에 趣味가 없어요.”

    極甚한 스트레스로 成大 手術까지

    그는 1997年 ‘더더’라는 그룹으로 비로소 歌謠界에 데뷔한다. 以後 獨步的이고 獨特한 音色으로 큰 사랑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3옥타브 미나 派까지 올라갈 程度의 高音을 비브라토 없이 眞性으로 내는 歌手는 찾아보기 힘들다. 더구나 그의 音色은 허스키한 듯하면서도 맑고 여려 妙하게 사람을 끄는 魅力이 있다는 評을 받았다. 그 德分에 非主流인 인디音樂을 하는 歌手임에도 그의 노래는 酒類 市場에서 人氣를 끈다. 더더 1輯에 收錄된 ‘내게 다시’를 비롯해 ‘告白’ ‘안녕’ ‘빨간 運動靴’ ‘하루’ ‘너에게 주고 싶은 세 가지’ ‘約束’ ‘呪文을 걸어’ ‘레몬트리(Lemon Tree)’ ‘사랑과 友情 사이’가 代表的이다.

    한창 잘나가다 聲帶結節로 舞臺를 떠났어요. 健康이 惡化된 特別한 理由가 있나요.

    “제가 백지영 같은 主流 大勢 歌手는 아니었어요. 인디音樂으로 틈새市場을 攻掠해 分에 넘치게 사랑을 받았어요. 제 노래가 38篇의 廣告에 CM송으로 쓰였죠. 데뷔 앨범부터 레몬트리까지 안 된 앨범이 없어요. 레몬트리 하나로 所屬社가 빚을 다 갚았을 程度로요. 感氣에 걸린 狀態에서도 노래를 錄音했을 만큼 聲帶가 健康한 便이었는데 레몬트리 앨범을 내고 나서 事件事故에 휘말려 힘든 時間을 보냈어요. 그 때문에 聲帶에 問題가 생긴 거예요. 스트레스가 너무 甚해서요.”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 있나요.

    “한상윤 作家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난 오롯이 現在를 살고 있다’고. 너무 어릴 때부터 가장 노릇을 했어요. 그 때문에 동생들이 다 媤집, 장가가고 나니 그제야 제 未來가 걱정되더라고요. ‘내가 노래를 못 하게 되거나,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없거나, 固定 收入이 없거나 하면 나는 누가 責任支持?’ 하고요. 책임질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러다 누군가의 말에 속아 덜컥 事業을 벌였어요.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다 쏟아부었죠. 처음에 가게가 너무 잘됐어요. 그래서 權利金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데 그 일로 建物主와 法廷다툼까지 벌였어요. 結局 제가 이겼지만 이것저것 다 떼고 나니 남는 게 없었어요. 그 過程에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어요. 그걸 견디다 보니 聲帶에 폴립이 생겼죠. 두 番에 걸쳐 聲帶에서 혹을 떼고 나니 그 자리가 붙지 않아 노래할 수 없었어요.”

    한상윤이라는 因緣

    박혜경이 자신을 화가의 길로 이끈 한상윤 작가(왼쪽)와 컬래버 전시를 선보였다. [지호영 기자]

    박혜경이 自身을 畫家의 길로 이끈 한상윤 作家(왼쪽)와 컬래버 展示를 선보였다. [지호영 記者]

    試鍊을 堪當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나는 살아야 하니, 하늘 아래 나를 책임져 주는 사람이 없으니 歌手 그만두고 찾은 職業이 플로리스트예요. 어릴 적부터 꽃을 좋아했어요. 登校길에 꽃에 精神이 팔려 遲刻한 적도 여러 番이에요. 그렇게 좋아하는 꽃과 늘 함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車 두 臺를 팔아 留學을 갔어요. 프랑스 파리와 英國 런던에서 工夫하며 2015年 플로리스트 專門家 過程 디플로마를 取得했죠. 現地에서 인정받는 가장 훌륭한 先生님들에게 배웠고 그때 딴 플로리스트 디플로마가 3個예요. 韓國에서 歌手를 못 하니 中國에 가서 플로리스트로 活動했고요. 말이 안 통해 힘들기도 했지만 代身 예쁜 꽃을 每日 接하며 다른 걱정을 잊어버릴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神奇하게도 목 狀態가 좋아져 다시 노래할 수 있게 됐어요.”

    목 狀態가 完全히 回復됐나요.

    “只今은 노래하는 데 아무 支障이 없어요. 목소리가 微細하게 달라졌지만 더 彈力이 생겼어요. 예전 목소리가 왜 안 나오나 神經 썼더니 누군가 이렇게 말해 주더군요. 只今 목소리를 받아들이라고요. 그렇게 하니 마음이 便해졌어요. 只今은 꽃을 그리는 畫家 兼 歌手로 幸福하게 살고 있어요.”

    한상윤 作家가 畫家의 길로 이끌었다죠.

    “事實 처음 그림을 그려보라고 勸한 건 상윤이가 아닌 다른 知人이에요. 오래前 알고 지내던 畫家 동생이 내가 많이 힘들어하니까 ‘종이를 사가지고 그림을 그려봐’ 하더라고요. 그래서 色鉛筆로 그림을 그렸더니 ‘그림이 와 이리 特異하노!’ 하면서 아크릴물감으로 그려보라고 했어요. 아크릴물감을 사다가 앨범 재킷을 그렸더니 ‘언니야, 正말 그림을 안 배운 사람이 맞나?’ 하면서 그림을 繼續 그리라고 하더군요. 매니저가 홍대 隣近에 複寫하러 갔다가 만난 한 美大 敎授님이 그림 그린 사람을 紹介해 달라고 했대요. 色感을 어떻게 이렇게 잘 썼냐면서요. 宏壯히 有名한 갤러리의 館長님度 그 그림을 絶對 버리지 말고 딱 10作品만 그려서 갖고 있으라고 했는데 移徙를 다니다 잃어버렸어요. 그러고 十數 年이 흐른 뒤 한 作家를 偶然히 만나면서 本格的으로 그림을 그리게 됐죠.”

    한 作家와 박혜경은 平素 서로를 ‘누나’ ‘上潤妸’라고 부를 程度로 親하다. 박혜경은 한 作家를 “내가 믿고 依支하는 동생이자 매니저 같은 存在”라고 했다.

    노래처럼 그림도 “박혜경답기를”

    박혜경이 직접 그린 앨범 재킷 앞면과 뒷면(오른쪽). 박혜경 제공

    박혜경이 直接 그린 앨범 재킷 앞面과 뒷面(오른쪽). 박혜경 提供

    두 사람의 因緣은 어떻게 始作됐나요.

    “내가 나오는 ‘슈가맨’이라는 프로그램을 한 作家가 偶然히 보고 펑펑 울었대요. 聲帶結節로 歌手를 抛棄하다시피 했던 내가 노래를 끝까지 부르는 모습을 본 거죠. 그때 ‘박혜경이라는 歌手를 찾아야겠다. 찾아서 幸福을 傳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대요. 그런 마음으로 저를 찾아 ‘다시 노래해 줘서 고맙다’며 幸福한 돼지 그림을 膳物했어요. 그러다 제가 그린 앨범 재킷을 보고 그림을 그리라고 勸誘했어요. 이番 컬래버 展示도 한 作家가 먼저 提案했어요. 國內外에 여러 展示 日程도 잡았고요. 展示할 作品을 짧은 期間에 完成한 것도 상윤이 德分이에요. 상윤이에게 누가 될까 미친 듯이 熱中해 그렸거든요. 상윤이가 처음에 저한테 畫家를 勸하며 제 앨범 재킷 뒷面에 있던 노래하는 새 그림이 자꾸 생각난다고 했어요. ‘누나가 좋아하는 노래하는 새와 꽃을 그려보라’는 말도요. 걔는 내가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저한테 ‘누난 해낼 거야, 누나의 감을 믿어봐, 누나는 플로리스트잖아’ 하면서 勇氣를 북돋워줬어요. 상윤이의 믿음과 期待를 저 亦是 저버리고 싶지 않았고요.”

    이番 展示會에서 가장 人氣 있었던 作品으로 그는 ‘幸福이 配達되었어요’라는 題目의 作品을 꼽았다. 예쁘게 微笑 짓는 女子의 온몸에 꽃이 있는 그림이다.
    “엄마가 서른두 살에 혼자 돼 人生을 熾烈하게 사셨어요. 나중에 커서 女子가 됐을 때 같은 女子로 엄마를 바라보며 물었어요. ‘다른 데 시집가지 않고, 男子親舊도 만들지 않고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요. 그랬더니 엄마가 ‘너희들이 내 養分을 빨아먹고 조랑조랑 예쁘게 피면 되는 거야’ 하시더군요. ‘女子는 幸福을 키우고 피우고 가꾼다’면서요. 그걸 예쁘게 表現한 게 ‘幸福이 配達되었어요’라는 作品이에요.”

    가장 큰 100號 그림은 뭘 그린 건가요.

    “레몬트리에 제 생각과 作品을 담았어요. 成大 手術을 하고 다시 목 狀態가 完璧해져서 앨범을 냈을 때의 재킷 그림 하나, 꽃을 그리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기에 해피버스데이를 象徵하는 플라워 케이크, 그동안 배우고 해왔던 플라워 裝飾들, 想像 속 나비를 楕圓에 담아 나무에 걸었어요. 왜 나비냐고 사람들이 물어봐요. 나비도 꽃이었다는 主題로 그린 그림이죠. 밤이 되면 나비가 꽃을 피우는 것 같다고 想像하면서요. 楕圓에 그림을 넣은 건 제가 楕圓을 미치도록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男子 親舊가 예전에 그 楕圓이 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는 ‘잇즈 마이 월드(It’s my world)’라고 答했어요. 내 世上이라는 意味죠.”

    畫家로서 앞으로 어떤 말을 듣고 싶은가요.

    “제 생각이 깨알같이 담긴 日記에 이런 祈禱가 적혀 있어요. ‘이 世上에서 가장 獨步的이고 特別한 목소리를 가진 歌手가 되게 해주세요.’ 그 祈禱가 이뤄져 제 얼굴을 몰라도 목소리는 많이 아세요. 나다운 목소리로 非主流 歌手임에도 큰 사랑을 받았어요. 歌手가 됐을 때 발라드를 불러보라고 누군가가 勸誘했어요. 그때 엄마에게 말했어요. ‘난 100萬 張 파는 歌手보다 3萬 章을 팔아도 내가 하고 싶은 거 할래’라고요. 제 목소리만 듣고도 사람들이 ‘저건 박혜경 노래다’ 하고 알아주는 것처럼 제 그림도 ‘저건 박혜경 그림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한텐 最高의 讚辭예요. 저는 앞으로도 남들이 쓰지 않는 다양한 예쁜 色을 다 써서 꽃을 그릴 거예요. 神이 人間을 만들면서 寶物을 숨겨놓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죽을 때까지 寶物을 찾아보라고요. 歌手라는 寶物 하나를 찾았으니 두 番째 寶物도 신나게 찾아보려 해요.”

    어머니에게 배운 智慧, 타고난 熱情

    이미 찾은 거 아닌가요.

    “畫家의 길이 險難하니 그 寶物을 抛棄하지 않고 찾아볼 거예요. 한 作家의 손을 잡고 가고 있어요. 或是 내가 모를까 봐 한 作家에게 ‘누나 그림 괜찮은 거지?’ 하고 繼續 물어요. 그러면 한 作家가 ‘누나, 只今 잘하고 있어. 그런데 어느 程度 가면 딜레마에 빠지니까 지켜볼 거야. 누구 얘기 듣지도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누나만 幸福하면 돼’ 하고 引導해 주죠.”

    이番 展示會 브로슈어에 그는 自身을 ‘노래하는 플로리스트’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14살에 上京해 歌手가 되고 成大 手術로 彷徨하다 꽃을 만났다. 예쁘다, 예쁘다 하니 그 꽃의 에너지로 神奇하게 다시 노래할 수 있게 됐고 이제는 그 꽃을 그린다”고 紹介했다. 꽃을 裝飾할 때도, 노래할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그는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그 에너지가 얼마나 剛한지 ‘곧 무너질 것 같아도 決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 原動力이 뭔가요.

    “엄마의 말씀이 나를 지치지 않게 해요. 엄마는 ‘이렇게 執拗하니 넌 뭘 해도 되겠다’고 말씀했어요. 제가 한때 所屬社에 묶여 있었던 적이 있어요. 하늘을 찌르는 氣勢를 지닌 분이 그 會社 代表였는데 그분이 계신 호텔로 찾아가 무릎 꿇고 얘기했어요. 契約 解止해 달라고, 여기선 안 될 것 같다고요. 그 代表님도 저한테 ‘넌 뭘 해도 되겠구나’ 하셨어요. 只今 그림을 執拗하게 그리는 것도 그런 氣質 德分인 것 같아요. 熱情으로 치면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다고 自負해요.”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요.

    “병든 外할머니, 外할아버지와 홀로 남겨진 媤어머니를 奉養하면서 우리 네 男妹의 옷을 다 만들어 입혔어요. 그런 渦中에 同好會 活動을 하며 詩集도 내셨고요. 참으로 지혜롭고 賢明한 분이죠. ‘서울에서 危險한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말을 걸어 危險하다는 생각을 除去하라’는 엄마의 助言 德에 危機를 謀免한 적이 있어요. 歌手로 한창 活動할 때 택시技士가 나를 性暴行하려고 山으로 끌고 갔어요. ‘아저씨 제가 歌手인데 제 노래를 들려드릴게요’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저는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이렇게 苦生했고 힘든 時間을 보냈다’고 찬찬히 얘기해 줬죠. 그랬더니 그 記事가 ‘正말 훌륭한 사람이네요. 내가 나쁜 마음을 먹고 끌고 왔는데 꼭 훌륭한 歌手가 되라’며 無事히 보내줬어요. 그런 엄마가 계셔서 저한테 幸福이 配達된 것 같아요.”

    살면서 길을 잃었을 때 마음에 새기는, 人生의 羅針盤 같은 座右銘이 있나요.

    “‘櫓를 젓다가 櫓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이 말을 떠올리면 마음이 便해져요.”

    只今은 어떤 길을 가고 있나요.

    “完璧히 그림에 沒頭하고 있어요. 한 作家의 도움으로 年末까지 잡혀 있는 展示가 10個가 넘어요. 國內뿐 아니라 海外에서도 展示해요. 展示 準備를 하며 間間이 舞臺에서 노래도 해요. 單獨 公演은 아니지만 大衆 앞에서 노래할 機會가 繼續 주어져 기쁘고 感謝할 뿐이에요.”

    인터뷰를 마치며 그에게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所望을 묻자 豫想치 못한 答이 돌아왔다. 亦是 박혜경은 마지막까지 박혜경다웠다.

    “파리 近郊에 지베르니라는 작은 마을이 있어요. 印象派 巨匠 모네가 43年間 居住한 곳이에요. 모네는 거기서 여러 作品을 完成하고, 꽃이 滿發한 庭園을 가꿨어요. 모네 庭園이 있는 그 마을에서 ‘3個月살이’를 하고 싶어요.”



    김지영 기자

    김지영 記者

    放送, 映畫, 演劇, 뮤지컬 等 大衆文化를 좋아하며 人物 인터뷰(INTER+VIEW)를 즐깁니다. 요즘은 팬덤 文化와 不動産, 流通 分野에도 특별한 關心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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