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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透寫本色’ 李在五 의 直擊彈|新東亞

‘透寫本色’ 李在五 의 直擊彈

“國民에게 希望 주려면 現 한나라당 指導部 물러나야”

  • 組成式│東亞日報 新東亞 記者 mairso2@donga.com│

    入力 2009-09-11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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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守舊的 保守와 改革的 保守의 衝突地點에 내가 서 있다
    • 大統領과 자주 通話하며 世上 걱정 한다
    • 早期 全黨大會 拒否는 旣得權 死守하려는 守舊的 行態
    • 빨리 政治 中心에 서기 위해선 黨代表度 한 方法
    • 和合 當事者인 나를 빼고 自己네끼리 和合하겠다는 건 獨走(獨走)
    • 박근혜와 會同?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어야
    • 돈 封套 들고 왔다가 退字 맞은 사람 많다
    • 아내보다 먼저 新婚房 이불 편 情報課 刑事들
    ‘투사본색’ 이재오 의 직격탄

    ● 1945年 慶北 營養 出生 <BR>● 1964年 中央大 農村經濟學科 入學<BR> ● 1965年 韓日會談 反對示威로 除籍 <BR>● 民主守護靑年協議會長, 國際人權委員會 韓國支部 事務局長, 全國民族民主運動聯合 祖國統一委員長, 민중당 事務總長 <BR>● 1996年 중앙대 經濟學과 卒業 <BR>● 한나라당 院內總務, 事務總長, 院內代表, 最高委員 <BR>● 現 中央大 國際大學院 招聘敎授

    서울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李在五(64) 前 議員 집은 23坪짜리 單獨住宅이다. 大門 앞에는 흰 無窮花나무가 서 있다. 이 집으로 移徙 올 때 심었다니 23年째 그렇게 서 있는 셈이다. 大門을 열면 키 작은 담벼락을 따라 壅塞하기 짝이 없는 庭園이 ㄱ字로 펼쳐진다. 담벼락을 境界로 이웃 두 집이 바싹 붙어 있다. 衰落한 權力을 象徵하듯 꽃은 보이지 않고 수풀이 우거져 있다.

    ‘權力 2人者’ 소리를 듣는 이 前 議員은 財産이라고는 이 집밖에 없다고 밝혔다. 不動産도 없고 株式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2008年 3月 18代 總選 當時 公開한 財産은 3億1523萬8000원. 그의 말이 事實이 아니라고, 다시 말해 그에게 숨겨둔 財産이 있다고 主張할 어떠한 根據도 없기에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나는 그가, 살아온 길이 對照的이고 數百億원臺 財産家로 全國에 不動産을 깔아놓았던 李明博 大統領과 그토록 意氣投合했고 只今도 통한다는 게 좀체 믿기지 않았다. “안 맞을 것 같은 사람들이 합쳐야 일이 된다”는 그의 說明을 들어도 말이다.

    인터뷰는 週末 이틀에 걸쳐 그의 事務室과 집에서 6時間 동안 進行됐다. 記事는 1, 2部로 나눴다. 1部에서는 政治 얘기를, 2部에서는 그의 삶을 다뤘다. 保守 陣營 一部에서 ‘빨갱이’, 進步 陣營에서 ‘變節者’ 소리를 듣는 그가 鬪爭으로 點綴된 自身의 人生事를 이토록 昭詳하게 털어놓은 적은 없다.

    구릿빛 皮膚와 짙은 눈썹이 印象的인 그는 인터뷰 내내 微笑를 잃지 않았지만 때로 한숨을 내쉬었고 오래 삭인 듯한 憤怒의 자락을 드러내기도 했다. ‘避할 수 없는 盞’인 朴槿惠 前 한나라당 代表와 關聯된 質問을 맞아서는 말을 삼키느라 숨을 골랐다.

    ‘1部’ 돌아온 實勢



    그는 “山이 내 生活”이라고 말했다. 洞네 뒷山에 每日 올라가고 日曜日엔 北漢山 冠岳山 水落山 道峯山에 오르는데 主로 혼자 다니고, 한 달에 한두 番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名山을 찾아갈 때만 山岳會員들과 어울린다고 한다. 내가 알기로 山에 혼자 오르는 사람은 大體로 생각이 많거나 意志가 굳은 사람, 或은 삶의 孤獨과 덧없음을 觀照하는 사람이다.

    “山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切迫하게 呼訴하는 사람이 적지 않아요. 經濟의 基準은 庶民입니다. 나는 政治를 그렇게 해왔습니다. 相對的으로 없는 사람이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 政治라고. 두 番째로 李明博 政府가 하려던 게 政治改革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4·19革命, 5·16쿠데타, 10月 維新, 그리고 전두환 軍事叛亂과 光州虐殺을 겪었습니다. 産業化로 國民이 먹고살게 되었지만, 産業化 過程에 自由와 人權, 民主主義가 抑壓됐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그래서 오늘날 여기까지 온 거죠.”

    여기서 잠깐 그의 表現에 留意할 必要가 있다. 12·12쿠데타를 ‘전두환 軍事叛亂’으로, 光州民主化運動을 ‘光州虐殺’로 表現하는 사람이 한나라당 議員들 中에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얘기를 마저 듣자.

    ‘투사본색’ 이재오 의 직격탄

    2007年 11月27日 서울驛에서 有勢하는 한나라당 이명박 大選候補와 李在五 議員.

    “여기서 더 뛰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産業化 過程에 생겨난 不合理한 制度나 慣習을 淸算하지 못했어요. 政治는 反省에서 出發합니다. 우리가 李明博 政府를 세운 건 노무현 政府나 김대중 政府, 金永三 政府 等 우리가 記憶할 수 있는 政府들이 잘못한 點을 고치기 위해서죠. 그것이 생각만큼 빨리 進陟되지 않으면 政府를 세운 사람들로서는 좀 답답하지 않겠어요.”

    “물을 바꾸는 게 쉽지 않다”

    ▼ 물고기가 級數 맞는 물에서 놀아야 하듯이 議員님(便宜上 質問할 때는 議員으로 表記함)은 왠지 맞지 않는 環境에서 苦生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고기가 물에서 놀아야 하는데, 물이 썩으면 물을 바꿔야 하지요. 그래야 고기가 살지. 물을 바꾸려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요.”

    李 前 議員은 政治哲學을 묻자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이 나라의 크고 작은 權力이 정의로워야 해요. 正義의 基準은 公職者의 不淨腐敗가 없어지는 것이죠. 둘째, 모든 領域에서 公平해야 합니다. 機會와 社會的 條件이 누구에게나 公平해야지요. 셋째, 모든 國民이 幸福하게 살 權利를 가져야 합니다. 幸福의 程度는 希望의 程度에 따라 달라집니다. 政治란 國民에게 希望과 幸福을 保障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社會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오랜 民主化鬪爭을 하면서, 監獄에 살면서 가졌던 꿈이고 價値觀이고 哲學입니다. 그걸 槪念的으로 말하면 共同體自由民主主義입니다. 自由民主主義에 共同體的 價値觀을 附與하는 거죠. 그 核心은 正義와 公平, 幸福입니다.”

    ▼ 이명박 政權의 2人者라는데, 맞나요?

    “무슨 2人者? 1人者가 있을 뿐이지.”

    ▼ 어떤 뜻으로 하는 말씀인지.

    “權力에 무슨 2人者가 있나요. 權力은 1人者만 갖는 거지. 뭘 보고 나를 2人者라고 하는지 알 수 없어요. 내가 무슨 職責이 있나, 자리가 있나.”

    ▼ 보이지 않는 힘 아니겠습니까.

    “내게 보이지 않는 힘이 있나요?”

    ▼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지요.

    ‘투사본색’ 이재오 의 직격탄

    2007年 8月13日 이명박 候補에 對한 檢察의 도곡동 땅 關聯 中間搜査 結果 發表에 抗議하러 大檢察廳을 찾은 한나라당 議員들이 正門 앞에서 비를 맞으며 籠城하고 있다. 雨傘 아래 가운데 있는 사람이 李在五 議員.

    “(웃음) 내가 시골 面書記 하나도 就職 못 시키는데 무슨 보이지 않는 힘이 있나요.(웃음) 나는 한番도 2人者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2人者인 것처럼 보인 적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고.”

    ▼ 實勢라는 表現도 씁니다. 2人者와는 조금 다르지만. 김대중 政權의 권노갑, 朴趾源氏처럼.

    “그 사람들은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實勢인지 모르지만 나는 자리에 없잖은가, 只今. 그러니까 實勢는 맞는데 ‘잃을 室’字의 實勢(失勢)地. 내가 뭐 勢力이 있나. 나는 野人이고 大學敎授일 뿐이죠.”

    ▼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만한 理由가 있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게 비칠 만한 言行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겠지. 大統領께서 서울市長에 出馬할 때 내가 選擧對策本部長을 맡아 서울市長選擧를 總括하지 않았습니까. 또 大統領候補로 나섰을 때 競選캠프의 實質的 責任者였지. 黨內 競選을 치를 때 黨에서 李明博 大統領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國會議員은 나 하나밖에 없었어요. 兄님(이상득 議員)이야 兄弟 사이니 그런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 처음 始作할 때 말입니까.

    “그렇죠. 누가 있었나요. 아무도 없었지요. 한나라당 안에 이른바 李明博系라고 할 수 있는 議員이 있었나요. 사람들이 그런 걸 記憶하고 뭐라 말할 수는 있겠지. 서울市長, 大統領 될 때 恒常 내가 옆에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權力이란 걸 놓고 보면 나는 2人者도 實勢도 아니야. 그런데 남들은 그렇게 안 봅니다. 내가 美國에 간 것도 그래서죠. 野黨 10年 해보니 政權을 잡지 않고는 나라를 변화시키기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일을 했던 거지, 政權을 잡아 무슨 權力을 行使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서울市長 選擧對策本部長, 서울市長 引受委員長을 맡았지만 이 大統領의 서울市長 在任 4年 동안 單 한 件의 人事請託이나 다른 付託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只今도 마찬가지예요. 아마도 相當數 한나라당 議員이 靑瓦臺 人事首席한테 한두 番씩은 電話했을 겁니다. 누구 어디 좀 付託한다고. 나는 只今까지 單 한 桶도 請託電話를 넣은 적이 없어요.”

    ▼ 單 한 番도?

    “單 한 番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 良心입니다. 그런 걸 거짓말 할 수 있나. 權力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해 政權 創出에 參與한 것이므로 公的으로 일할 處地가 아닌 只今 그런 일에 關係하면 그야말로 權力을 行使하는 거지요.”

    예나 只今이나 實勢의 基準은 最高 權力者와의 距離다. 李 前 議員은 只今 얼마나 가까운 距離에 있을까.

    ▼ 사람들이 議員님을 實勢라고 부르는 건 大統領과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건 否定할 수 없지 않겠어요? 같이 걸어온 길이, 함께 만들어온 歷史가 있으니까. 내가 否認한다고 否認될 수 없겠죠.”

    “大統領 財産과 比較한 적 없어”

    李 前 議員과 李明博 大統領의 因緣은 1964年 韓日屈辱修交會談 反對鬪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當時 이 前 議員은 中央大 救國鬪爭委員會 委員長으로, 이 大統領은 高麗大 商科大 會長 및 總學生會長 職務代行으로 韓日會談 反對鬪爭을 벌였다.

    “그때는 누가 各 大學의 代表라는 程度만 알았어요. 李 大統領을 깊이 알게 된 것은 6·3 同志會 活動을 하면서부터입니다.”

    6·3 同志會는 1964年 6月3日 韓日會談에 反對하는 大學街 示威를 主動했던 사람들이 만든 모임이다. 李 大統領은 1992年 6·3 同志會長을 맡았는데, 그때 副會長이 李 前 議員이었다. 李 前 議員은 2003年 第16代 6·3 同志會長을 맡았다.

    “일을 같이 한 것은 15代 國會 때지요. 1996年 總選에서 나는 은평구에서, 大統領께서는 종로구에서 當選됐습니다. 나는 初選이었고 大統領께서는 再選이었지요. 둘 다 신한국당이었지요.”

    15代 國會 때 두 사람이 意氣投合한 契機는 두 가지였다. 李 大統領의 京釜運河 構想에 李 前 議員이 깊이 共感했고 反對로 이 大統領은 이 前 議員의 行政區域 改編案에 積極 贊成했다.

    “알려진 얘기지만, 그때 이 大統領께서 京釜運河에 對한 構想을 죽 說明하셨는데, 漠然히 運河를 하겠다는 게 아니라 具體的인 數値, 卽 物流 量과 모래자갈, 總工事費가 얼마인지 매우 具體的으로 얘기하시더라고요. 國家에 對해 이렇게 깊이 硏究하는 사람은 大統領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서 내가 그랬죠. ‘兄님, 大統領 하시라’고. 나는 在野에서 運動만 하다가 議員이 됐기 때문에 國會에서 別로 어울릴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主로 어울린 사람이 이명박 議員, (민중당 出身으로) 나와 함께 當選된 金文洙, 이우재 議員 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議員이 選擧法 違反 問題로 일찍 그만뒀잖아요. 辭退하고 美國으로 떠났지요. 그때 내가 그랬어요. 國會議員 於此彼 오래 할 것도 아닌데 未練 갖지 말고 다음에 서울市나 나라를 經營할 計劃을 세워보자고.”

    ▼ 人生觀이나 世界觀이 크게 다를 것 같은데 어떻게 意氣投合이 됐는지 궁금하네요.

    “일을 두고 이야기할 때 意氣投合하는 거죠. 政治人과 政治人이 만나면 일을 두고 얘기해야 正常的인 關係지, 사인(私人)도 아니면서 사사로운 얘기만 한다면 公認이 아니잖아요.”

    ▼ 大選 때 도곡동 땅 問題를 비롯해 이 大統領의 莫大한 不動産을 두고 是非가 벌어졌을 때 곤혹스러우셨겠습니다. 財産이라고는 달랑 집 한 채인 議員님과 영 딴판이잖아요.

    “남들 이야기, 다른 世上 이야기니까.”

    ▼ 그래도 가장 가까운 사람인데.

    “가까운 사람이긴 해도 그런 건 다른 世界 이야기니까. 도곡동 땅 疑惑은 事實이 아니라고 밝혀졌잖아요. 또 서울市長 出馬할 때 한 番 걸렀던 問題이기에 나는 事實이 아니라고 確信하고 있었어요. 나는 한番도 大統領 財産과 내 財産을 比較한 적이 없으니까.”

    ‘투사본색’ 이재오 의 직격탄

    多情했던 한때. 2006年 2月 朴槿惠 한나라당 代表가 李在五 院內代表한테 54송이의 노란장미를 生日膳物로 받으며 활짝 웃고 있다.

    ▼ 쉽지 않은 일인데….

    “서로 尊重해주면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大統領께서 不當한 方法으로 財産을 모은 것도 아니잖아요.”

    ▼ 熱心히 일하신 代價겠지요. 그렇지만 財産 規模나 莫大한 不動産에 비춰 보면 部(富)에 對한 價値觀이 議員님과는 크게 다르죠.

    “나는 富에 對한 槪念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 건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죠.”

    그는 “大統領 되고나서 몇 番이나 만났느냐”는 質問에 “그거는 뭐…” 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거북스러워하는 表情이다. 자꾸 묻자 마지못해 “한番도 안 만났다고 하면 남들이 믿겠느냐”고 反問했다.

    ▼ 通話도 자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같은 世上에 사는데 電話도 안 하고 살면 되겠어요?”

    ▼ 大統領과 電話하는 건 특별한 거지요. 아무나 합니까.

    “나와의 關係에서 電話쯤이야….”

    ▼ 通話하면 主로 무슨 얘기를 하십니까.

    “(웃음) 뭐 世上 걱정 한다고 보면 되지요.(웃음)”

    ▼ 最近엔 어떤 對話를 나누셨죠?

    “元來 私的인 얘기는 안 하는 사이입니다. 主로 일 얘기하죠.”

    ▼ 大統領에게 便紙도 쓰신다면서요?

    “競選過程이나 大選 때 내가 大統領과 時間的으로나 空間的으로 떨어져 만나지 못할 때 便紙를 쓴 적이 있지요. 요즘은 電話로 하는데 便紙 쓸 거 뭐 있습니까.”

    ▼ 電話는 主로 議員님이 하시나요?

    “내가 主로 하고요. 大統領께서도 하시고요.”

    ▼ 通話는 다이렉트로 하나요, 아니면 누가 連結해줘서?

    “主로 다이렉트로 하지요.”

    ▼ 아, 亦是 實勢시네요.

    우리는 같이 웃었다.

    “眞짜 執權黨 맞나”

    한나라당은 最近 9月 早期 全黨大會 開催 問題로 內訌을 겪었다. 早期 全黨大會는 이른바 李在五界 議員들이 强力히 要求하고 있다. 早期 全黨大會를 통해 指導部를 바꾸고 이 前 議員을 黨 前面에 내세우려는 속셈이다. 勿論 親李(MB) 直系나 親朴 쪽에서는 反對한다.

    ▼ 早期 全黨大會에 對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 4·29 再補闕選擧에서 慘敗한데다 盧武鉉 前 大統領이 돌아가신 以後 政治權을 整理할 必要가 提起됐지요. 與黨이 國民에게 새로운 希望을 주려면 全黨大會를 통해 指導部를 바꿔야 할 必要가 있습니다. 只今 黨이 갈라져 있잖아요. 執權 中盤期의 動力을 끌어 모으기 위해선 現 指導部가 물러나야 해요. 그런데 指導部가 물러나지 않으니. 再補選 慘敗 責任에 對해 國民의 理解를 求하지는 않고 政派的 잣대만 들이대니….”

    ▼ 답답하시겠네요.

    “답답하죠. 뭐하는 黨인 줄 모르겠어. 政權을 創出한 執權黨 하는 꼴이. 甚하게 말하면 可觀이지. 政權 잡을 때 國民에게 約束한 게 있잖아요. 政治를, 社會를, 經濟를 어떻게 바꾸겠다고. 그런 걸 糖이 推動해야지. 그런데 推動은커녕 政府 하는 일에 엇拍子만 놓으니. 事案마다 對處하는 걸 보면 眞짜 執權黨이 맞나 疑心이 들어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누구처럼 作定하고 그의 火를 돋울 생각은 없지만 그가 인터뷰 내내 部處처럼 微笑만 지었다면 아마도 내가 火가 났을지 모른다.

    ▼ 全黨大會 열리면 黨代表로 나설 건가요?

    “그건 열려봐야. 열릴지 안 열릴지 只今은 모르니까.”

    ‘투사본색’ 이재오 의 직격탄

    美國 존스홉킨스 大學 硏修를 마치고 돌아온 이 前 議員은 現在 중앙대 國際大學院 招聘敎授다.

    ▼ 反對者들은 來年 初에 열자는 거죠?

    “말이 來年 草地. 이番에 안 하면 事實上 물 건너 간 거지. 定期國會 前에 못하면 못하는 겁니다. 해 넘기면 地方選擧 準備하기 바쁜데 언제 全黨大會를 하겠어요. 그야말로 旣得權 社收支. 그런 게 守舊的 行態란 말이지. 그토록 權力의 守舊的 行態를 批判하면서 정작 黨은 늘 守舊的 行態에 머무르고 있단 말이지. 그런 게 안타깝지요.”

    그는 黨과 靑瓦臺가 따로 노는 原因을 사람의 問題로 診斷했다.

    “責任 맡은 사람의 能力이 問題지. 黨도 靑瓦臺도. 政局 풀어나가는 能力의 問題예요. 政務的 判斷의 問題이고. 政務首席室뿐 아니라 모든 首席과 長官이 政務的 判斷을 해야 합니다. 所管 業務를 잘해야 하는 건 當然하고.”

    촛불事態 때도 內閣과 靑瓦臺가 無能해 初期에 解決할 機會를 놓쳤다고 指摘했다.

    “協商 自體는 國際關係를 尊重해 그대로 두더라도 國民이 不安해하고 誤解하는 部分에 對해 政府끼리 諒解해 措置할 수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內閣과 靑瓦臺 參謀陣이 無能해 허둥대기만 했어요. 내가 美國에서 보니 아무것도 아닌 問題던데. 불씨는 쇠고기지만 背景엔 執權 初期 政權에 對한 反感과 警告가 깔렸던 거지.”

    “財産家는 公職 辭讓해야”

    李明博 政府에 對한 期待는 參與政府의 實情(失政)에 따른 相對的 期待感이기도 했다. 그런데 執權 初부터 ‘고소영’이니 ‘강부자’니 해서 民心과 乖離되면서 國政이 흔들렸다. 李 前 議員은 “政權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診斷했다.

    “(大統領職)引受위 때부터 國民의 感情을 헤아리지 못했어요. 政權 交替에만 神經 쓰고 政治를 어떻게 할지에 對해선 疏忽했던 거죠.”

    그는 지난해 2月28日 長官 人事聽聞會 때 “財産이 많은 사람은 公職 提議가 오면 스스로 辭讓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이 事實을 言及하자 그는 持論인 듯 公職과 財産의 相關關係에 對해 熱을 내면서 說明했다.

    “그때 내가 세게 얘기했지. 眞짜 火가 많이 났거든요. 任命權者野 細細한 건 잘 모르고 內定할 수 있죠. 推薦이 들어오는 대로. 그러면 當事者가 알아서 判斷해야죠. 自身이 國務委員 할 資格이 있는지. 나는 돈이 있다는 것만으로 누구를 나무란 적은 없어요. 돈이 많으면 좋지. 稅金도 많이 내고. 그런데 政治는 있는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을 위해 存在해야죠. 國民 多數가 없는 사람에 屬하니까. 財産이 많으면 그것을 잣대로 事物을 보게 돼요. 없는 사람 處地를 理解하기 어렵죠. 政策이나 法案을 財産家 視角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그런 態度는 公職에 適合하지 않죠.”

    ▼ 그 基準으로는 李明博 大統領도 該當되지 않나요?

    “國民이 選出했잖아요. 그런 줄 알고 뽑은 건데. 그리고 나중에 (社會에) 還元했잖아요. 300億원인가. 任命職과는 다르죠.”

    ▼ 돈 많은 사람들은 首肯하기 힘들겠는데요. 돈과 公職이 무슨 相關이냐고.

    “公職은 奉仕地. 奉仕를 하려면 自己 것을 내놓을 줄도 알아야 하고.”

    그는 해마다 農村奉仕活動을 한다. 그게 여름休暇란다. 이番 여름엔 水災 地域을 一週日間 둘러보고 왔다. 忠南 錦山의 人蔘밭에 가서 썩은 人蔘을 들어내고 깻잎 農場에서 깻잎을 따고 全南 順天에 가서는 물이 찬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를 따냈다.

    “내가 아는 長官한테 말했어요. 8時間 勤務하면 2時間만 事務室 지키고 6時間은 現場에서 보내라고. 國民의 苦衷은 現場에 있지 冊床 書類 속에 있지 않다고. 現場 속으로 들어가 발로 뛰는 行政. 그게 바로 李明博 政府의 特徵인데, 그렇지 못하니 답답하죠.”

    “참고 또 참았다”

    黨內 一部에서는 이 前 議員이 長官과 같은 責任 있는 자리를 맡아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에 對해 그는 “一理 있는 말이지만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내가 뭐 長官 하려고 政權 잡은 것 아니지 않아요?”

    ▼ 자리에 앉아야 公式的으로 일을 할 것 아닙니까.

    “特定 部處 業務에 關係없이 庶民의 苦衷을 解決하고 公職者 不淨腐敗를 剔抉하고 權力이 깨끗해지는 데 이바지하는 役割을 해야죠. 그 點에서 가장 좋은 게 國會죠. 國政 全體를 監視하니까. 黨이 政權을 創出한 主體이고 내가 黨人(黨人)이잖아요. 黨이 民主政黨으로 改革政黨으로 거듭날 때 政權을 뒷받침하는 힘이 생기지요.”

    ▼ 政治란 뜻이 맞는 同志끼리 集團이나 勢力을 形成해 하는 거죠. 一部에서 “李 大統領의 政治的 同志라고는 李在五밖에 없는데 李在五가 中心에 서지 못하고 外郭에 있으니 ‘兄님政治’ 얘기가 나오고 소망교회派가 어떻다는 둥 이 政權이 中心을 못 잡는다”는 指摘이 있습니다. 李 議員께서 빨리 政治 中央舞臺로 進入해야 MB도 成功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런 點도 있지요.”

    ‘투사본색’ 이재오 의 직격탄

    情報部에서 調査 받다 盲腸이 터진 이 前 議員은 腹膜炎으로 拘置所에서 痲醉도 없이 12番 手術을 받았다.

    ▼ 于先 생각해볼 수 있는 게 黨代表인데요.

    “그것도 方法이지. 그런데 맘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웃음)”

    ▼ 黨內에서 李在五 議員을 牽制하고 警戒하는 목소리가 꽤 있죠? 最近 서울市黨委員長에 選出된 권영세 議員도 言論 인터뷰에서 이 議員의 役割論을 否定하는 얘기를 했더군요.

    “그 사람들 事情이 있겠지요. 내가 黨의 中心에 서면 不便한 사람들이 있겠지.”

    ▼ 가장 흔한 얘기가 “黨 和合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거죠.

    여기서 그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黨 和合이 뭐냐.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합치는 거죠. 그런데 한쪽은 쏙 빼버리고 한쪽만 있으면 黨 和合이 되나요. 親朴 쪽에서 ‘李在五가 들어오면 黨 和合이 안 된다’고 하는데, 自己네끼리만 있으면 그게 和合인가요, 獨走(獨走)地. 正말 和合을 願한다면 같이 모여서 같이 해야지. 和合의 當事者가 나인데 나를 밖으로 밀어내놓고 自己네끼리 和合한다는 건 앞뒤가 안 맞지요. 私心에 찬 억지論理입니다.”

    ▼ 大選 直前 親朴系로부터 ‘오만의 極致’라는 攻擊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왔지요? 그때 나간 건 잘못을 認定해서입니까.

    “競選에서 진 쪽에서 내가 있으면 協助하지 않겠다고 해서. 大選을 치르려면 서로 協助해야 하는데 한쪽이 나 때문에 안 하겠다니 내가 그만두겠다고 한 거지. 그런데 내가 그만뒀는데도 協調가 안 됐어요. 그러니 그 要求가 正當한 게 아니었던 거지.”

    그는 悽然한 表情으로 “只今까지 한나라당에서 참고 또 참아왔다”고 했다.

    ▼ 在野 氣質이 한나라당과 잘 안 맞지요?

    “그래도 適應했으니 院內總務도 하고 事務總長도 하고 院內代表도 하고 最高委員도 한 것 아니겠어요? 나의 政治的 信念은 大韓民國이 發展하려면 保守勢力이 變해야 한다는 겁니다. 保守의 本流라는 한나라당이 時代 흐름에 맞게 變化·發展하지 않으면 大韓民國 政治도 發展하지 못해요. 내가 民衆黨 해봤잖아요. 말로는 進步政黨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選擧하면 表 안 주잖아요.”

    “박근혜, 만나고 싶지만…”

    ▼ 생각하신 것만큼 한나라당이 變化했나요?

    “어쨌든 李明博 大統領을 輩出했잖아요. 中道實用的인 價値觀을 가진 사람, 守舊的 報酬가 아니라 改革的 保守의 價値觀을 가진 사람이 大統領이 됐다는 것 自體가 發展이지요. 여기서 조금 더 發展해야죠. 率直히 한나라당 안에 李在五 같은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이 왜 없겠어요?”

    ▼ 그런 사람들이 主流인가요?

    “只今까지는 그랬죠. 그래서 酒類 자리를 내놓지 않으려는 거지.”

    ▼ 10月에 서울 은평乙 再補選이 이뤄지면 出馬하실 거죠?

    “봅시다. (再補選이) 있는지 없는지.”

    그는 7月21日 自身의 트위터에 ‘韓非子(韓非子)’에 나오는 ‘一家已歸 社內무공(一家二貴 事乃無功: 한 집안에 貴한 사람이 둘 있으면 일하는 데 成果가 없다)’이라는 句節을 올렸다가 削除했다. 박근혜 議員을 겨냥한 것이라는 指摘 때문이었다. 이에 對해 묻자 그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좋은 말이라서 別생각 없이 올렸다”고 대수롭잖게 말했다.

    ▼ 朴 前 代表에 對해 요즘 黨 안팎에서 批判하는 輿論이 있지요? 自身의 政治的 立地만 생각해 黨과 政府에 協助하지 않는다고. 黨 和合에도 도움 안 되고.

    “그 點은 노코멘트입니다. 그분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죠.”

    ▼ 그쪽은 議員님과는 到底히 한길로 못 간다는 생각을 굳힌 것 같죠?

    “그건 모르죠.”

    ▼ 政權 잡기 前에는 그럴 수 있다 쳐도, 政權 出帆 後에도 繼續 對立角을 세우잖아요?

    “그게 自己들 政治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의 말에서 찬 기운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가 벼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사본색’ 이재오 의 직격탄

    大門 안쪽에 선 夫婦. 李 前 議員은 結婚 첫날부터 手配者로 쫓기는 身世였다.

    ▼ 政治的 理念이나 價値觀이 많이 다르죠, 그쪽과는?

    “서로 意見이 다른 사람이 모여 하나의 價値觀을 만들어내는 게 政黨이잖아요. 똑같은 생각만으로 모이면 共産黨이고 階級政黨이지.”

    2004年 8月 그는 “한나라당은 民主化와 産業化 勢力의 結合體”라며 “解冤(解寃)相生을 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그러면서 當時 박근혜 代表最高委員에게 “維新獨裁를 謝過하고 淨水場學會 理事長을 내놓으라”고 要求했다. 이 일을 言及하자 그는 웃으면서 “朴 議員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했다.

    ▼ 그런 게 只今까지도 두 분이 和合하지 못하는 데 影響을 끼친 게 아닌가 싶어서요.

    “和合하지 못할 일이 있겠어요?”

    ▼ 두 분이 和合하면 黨이나 國家 發展에 도움이 되겠죠?

    “난 언제든지 열린 姿勢입니다. 지난 일은 빨리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 해원상생이 아니어도 말이죠?

    “서로 和合해 함께 가다보면 해원상생이 될 수도 있겠죠. 그때 그런 얘길 한 건 그 問題가 政治的 爭點이 됐기 때문이었죠. 當時 與黨에서 提起한 過去淸算이 이슈였잖아요.”

    그는 “그쪽에 만나자는 얘기는 안 했느냐”는 質問에 暫時 沈默했다. 自身의 感情을 꾹꾹 누르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자리 봐가면서 발 뻗으라고, 서로 形便 봐가면서 해야죠. 만나자 해도 안 만날 줄 뻔히 알면서 자꾸 만나자고 하는 건 相對方을 어렵게 하는 거니까. 時間 가다 보면 만나게 되겠지. 같은 黨에서 政治하면서 어떻게 안 만나겠어요. 於此彼 어느 한쪽이 一方的으로 뭘 할 수 있는 時代는 지났잖아요.”

    ▼ 저쪽에서도 만나자는 얘기는 없었나요?

    “勿論이죠. 나야 만나고 싶지요. ”

    ▼ 再補選과 早期 全黨大會가 霧散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내가 中央大 敎授잖아요.”

    그는 10個月間의 美國 硏修에서 돌아온 後 지난 4月부터 母校인 중앙대에서 國際大學院 招聘敎授로 講壇에 서고 있다. 존스홉킨스대학 國際關係大學院에서 硏究한 ‘東北亞平和繁榮共同體’와 ‘共同體 自由民主主義’가 그의 講義 主題다.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지”

    “때가 오지 않으면 기다릴 줄 알아야지. 때가 아닌데 意欲만 앞서서 무엇을 하려 들면 未來를 그르칠 수 있지요. 기다리든지, 아니면 판을 엎든지 해야 하는데 只今은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판을 엎을 狀況이 아니잖아요.”

    ▼ 판을 엎을 만한 支持勢力이 없지 않나요? 예전만 못하잖아요?

    “예전엔 내가 무슨 勢力이 있었나요. 大統領 만들 때 얘기지. 안 되면 기다려야지. 기다리는 것도 아름다운 거요.”

    ▼ 繼續 기다릴 순 없잖습니까. 政權 創出 主役으로 責任感도 있을 텐데.

    “길이 있겠지, 기다리다보면. 사람들에게 내가 必要하지 않느냐, 그건 아니잖아요. 李在五가 이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잖아요. 그럴 때 기다릴 줄 알아야지.”

    ▼ 지나온 삶을 한마디로 要約하신다면?

    “긴 터널을 지나온 鬪爭의 삶이었지. 싸워서 얻은 게 아니라면 내 것이 아니라는 게 民主化運動하면서, 不淨腐敗와 싸워오면서 얻은 敎訓입니다. 個人이나 國民이나 마찬가지예요. 空짜로 얻어진 歷史는 없어요. 美國의 歷史는 美國 國民이 피 흘려 일군 것입니다.”

    그의 透寫本色이 드러난다.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鬪士의 피. 歷史를 鬪爭의 産物로 보는 進取的 時刻.

    ▼ 政治人生에서 마지막 큰 싸움을 앞둔 것 아닌가요?

    “이제는 싸우더라도 周邊을 配慮하려고 해요. 只今까지는 옳은 일이면 내가 나서서 싸워야 한다는 게 내 哲學이었어요. 하지만 이명박 政權이 들어섰잖아요. 내가 이루려던 일의 한 段階가 끝난 거죠. 옳은 일이라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가 나선다는 걸 배웠어요. 只今부터는 굳이 鬪爭하지 않더라도….”

    ▼ 黨 안팎의 狀況은 다시 한番 싸울 것을 要求하고 있죠?

    “그렇다고 내가 鬪爭을 回避하거나 겁내는 건 아닙니다.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죠. 싸움을 能事로 생각하면 안 되지만.”

    ▼ 大統領이 議員님을 負擔스러워하지는 않을까요. 議員님을 둘러싸고 紛亂이 끊이질 않으니.

    “뭐 人間의 깊이를 서로 잘 아니까. 政治的 狀況 때문에 부담스러워할 關係는 아니지. 내가 國民이나 國家에 負擔 주는 일을 한 게 없잖아요.”

    ▼ 서로에게 어떤 補完財가 되죠?

    “내가 정의롭지 않은 일이나 남한테 被害 끼치는 일을 하지 않잖아요. 늘 옳은 일에 自身을 내던졌고.”

    ▼ 李 大統領의 長點이라면?

    “忍耐心이 剛하죠. 大統領께서는 많이 참으면서 智慧를 얻는 것 같아요.”

    ‘2部’反骨(反骨)의 길

    오늘날 族譜(族譜) 하면 케케묵은 냄새가 나지만, 더러 어떤 사람의 情緖나 氣質을 理解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재오 前 議員은 小說家 이문열氏와 같은 載寧(載寧) 李氏다. 載寧 李氏 家門에는 反骨의 피가 흐른다. 그 象徵的 人物은 某恩功(茅隱公) 이오다. 高麗 中期 上將軍을 지낸 載寧 李氏 中始祖 소봉(小鳳)의 孫子인 이오는 李成桂의 쿠데타로 高麗가 亡하자 忠臣들과 함께 杜門洞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쫓겨나와 定着한 곳이 慶南 咸安郡 산인면 모곡리다. 그는 집 周邊에 담을 쌓고 自身이 살아있는 동안 子孫들에게 담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嚴命했다. 사람들은 이 地域을 담안마을, 或은 고려동으로 불렀다. 밖은 朝鮮王朝 領土지만 안은 高麗의 流民이 居住하는 곳이라는 뜻에서다.

    朝鮮朝에서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李 代表的 人物이다. 嶺南學派의 巨頭인 갈암은 退溪((退溪) 李滉(李滉)의 性理學을 繼承한 人物로 肅宗 때 大司憲·吏曹判書에 올랐으나 政爭에 휘말려 10年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 死亡했다.

    “嶺南 南人의 代表的인 後裔가 우리 載寧 이가(李家)지요. 嶺南에서는 財利(載李)라고 하지요. 載寧 李街에는 벼슬한 사람이 別로 없어요. 내가 在野를 오래 한 것도….”

    李 前 議員의 말에는 祖上에 對한 自負心이 묻어났다. “뭔가 通한다”는 내 말에 그가 “뼈다귀는 못 속인다, 이거지” 하고 웃었다.

    “DNA는 못 속인다고, 그래서 境遇 바른 소리 잘하고 適當히 살지는 않지, 우리 집안 來歷이.”

    그의 號 南山(南山)도 그런 뜻을 담고 있다. 1980年代 初 광주교도소에 收監돼 있을 때 옆房에 있던 홍남순 辯護士가 ‘南人의 脈을 잇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여준 것이다.

    그는 解放둥이다. 1945年 1月 江原道 墨湖에서 태어났다. 그의 父親은 日帝 强占期에 日本에서 電氣技術을 배우고 돌아와 江原道 炭鑛地帶에 定着해 電氣技師로 일했다. 1948年 炭鑛이 門을 닫자 그의 家族은 故鄕인 慶北 營養으로 돌아왔다. 3兄弟 中 둘째인 그의 父親은 땅이 없어서 小作을 했다.

    校長 轉勤反對 示威 主動

    가난한 時節이었다. 少年 李在五는 親舊들과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속피를 긁어내 나무에 倍인 물을 빨아먹었다. 껍질은 집에 가져가 물에 우려내 밀가루와 섞어 떡을 해먹었다. 戰爭이 한창이던 1951年 그의 洞네親舊 한 名이 흙가루로 만든 떡을 먹다가 氣道가 막혀 숨지기도 했다.

    4남1女 中 3男인 그와 父親의 나이 差異는 38歲.

    “나도 그런 性向이 있는데,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얘기를 잘 안 하셨다. 무슨 일을 家族과 相議해서 한 적이 없다. 어머니는 그게 늘 不滿이었다. 두 분이 두 살 差異인데, 何如間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多情하게 말하는 걸 한 番도 못 봤으니까.”

    漢陽 조氏人 그의 어머니는 文學的 素養이 깊었다. 小說을 많이 읽고 子息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걸 즐겼다. 그가 中學生 때 小說에 心醉하고 뒷날 國語敎師를 한 데에는 어머니의 影響이 컸다.

    어릴 적 그의 꿈은 農村指導者였다. 李光洙의 ‘흙’에 나오는 허숭과 沈熏의 ‘상록수’ 主人公 박동혁이 그렇게 멋지게 보일 수 없었다. 當時 農村에는 靑少年社會敎育運動인 4H俱樂部(클럽)가 活氣를 띠고 있었다. 그는 中學生 때 麵의 4H俱樂部聯合會 會長으로 活動하고 高等學生 때는 慶北 4H聯合會長을 맡을 程度로 이 運動에 熱誠的이었다.

    그의 透射的 氣質이 첫선을 보인 것은 1960年 營養高等學校 1學年 때다. 校內 讀書클럽을 이끌던 그는 그해 4·19街 일어나자 校長 轉勤反對 示威를 主導했다. 學生들에게 尊敬받던 영양고 校長이 慶北 敎育監에게 밉보여 시골 中學校로 發令 난 것에 憤慨해서였다. 이 事件으로 그는 營養警察署 留置場에서 20餘 일을 보냈다.

    高等學校 卒業 後 그는 英陽郡靑 書記로 特採됐다. 農作物 栽培技術 普及과 管理가 주된 業務였다. 그해 여름 外地에 나갔던 親舊들이 놀러왔는데, 그들과 얘기하면서 衝擊을 받았다.

    “英 물이 다른 거라. 나는 만날 寸 이야기만 하는데 얘들은 서울이 어떻고 釜山이 어떻고 工場이 어떻고. 그래서 農村運動을 하더라도 좀 더 배우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해 10月 郡廳書記를 그만두고 大學 入試工夫를 始作했다. 때마침 중앙대 慶尙大에 農村社會開發學科가 생겼다. 5·16軍事政府가 農村指導者를 養成하기 위해 國策事業으로 新設한 學科였다. 3個月間 敎科書와 參考書를 달달 외우며 工夫한 끝에 그는 1964年 中央大 農村社會開發學科에 合格했다. 入學成績이 좋아 4年 奬學生 待遇였다.

    4H俱樂部 活動 經歷을 인정받은 그는 科代表를 맡았다. 入學 後 열흘 만에 大學街에서 韓日屈辱修交會談 反對示威가 始作됐다. 그는 科代表 및 慶尙大 代議員으로서 示威의 先頭에 섰다. 6月3日 戒嚴令이 宣布됐다. 이른바 6·3事態다. 軍人들이 大學에 進駐했고 休校令이 떨어졌다.

    이듬해 韓日會談 國會 批准을 앞두고 또다시 激烈한 示威가 벌어졌다. 2學年이던 그는 중앙대 救國鬪爭委員長으로서 다른 大學과 連繫하면서 中央大 示威를 主動했다. 8月에 衛戍令이 떨어졌고 戒嚴當局은 示威主動 學生들을 索出하기 始作했다. 學校에서 除籍당한 그는 手配者 身分이 돼 逃避生活을 했다. 그가 逮捕된 것은 韓日修交 批准이 이뤄진 後였다. 收拾 局面이라 ‘拘留 29日’이라는 가벼운 處罰에 그쳤다.

    ‘拷問警官’ 이근안과의 만남

    1966年 4月 그는 軍에 入隊했다. 强制 徵集이었다. 1969年 滿期除隊를 한 後 復校 申請을 했다. 하지만 學生處長은 當局의 指示라며 拒否했다. 이 일이 反獨裁民主化鬪爭에 나선 契機가 됐다.

    “얼마나 荒唐했던지. 軍隊 3年 갔다 오면 當然히 復校시켜줄 줄 알았다. 卒業하면 農村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復校를 안 시켜주니 慘澹했다. 그때 느꼈다. 個人이 아무리 幸福하게 살려 해도 社會的 條件이 안 맞으면 안 되는구나. 個人의 希望이라는 것이 政治的 條件에 依해 左右되는구나. 내가 뭘 하려면 먼저 軍事獨裁政權부터 무너뜨려야겠구나. 그때부터 運動을 始作한 거다.”

    그는 民主化鬪爭을 하면서 維新治下에서 네 番, 6共 때 한 番 모두 5次例 拘束됐다. 그가 처음 拘束된 것은 1973年 서울大生 維新反對 示威와 關聯해서다. 當時 서울 永登浦 장훈고等學校 敎師이던 그는 自身이 이끌던 民主守護靑年協議會 會員들과 함께 거리에 油印物을 뿌리며 서울大生 示威를 支援했다. 警察은 그를 示威 背後操縱 嫌疑로 逮捕했다. 이때 治安本部 對共分室에서 그를 調査한 사람이 뒷날 拷問警官으로 惡名을 떨친 이근안氏였다.

    “그때만 해도 이근안이 그렇게 有名하지는 않았다. 잡혀간 사람이 別로 없었으니까. 在野에서는 내가 가장 먼저 拷問을 當한 셈이지. 웃기는 것은 擔當檢事가 李漢東이었다는 거야. 나중에 내가 우리 黨의 代表로 모시기도 했으니까.”

    當時 治安本部 對共分室은 南山 1號 터널 앞에 있는 붉은 甓돌집이었다. 거기서 그는 알몸으로 兩손과 兩발이 묶인 채 얼굴에 덮인 물手巾에 고춧가루가 쏟아지는 拷問을 當했다. 숨이 막혀 氣絶했다 깨어나면 다시 고춧가루를 쏟아부었다. ‘北韓에서 돈 얼마 받아왔느냐’는 게 主 新聞內容이었다. 서울大 維新反對 示威의 背後를 北韓으로 몰고 가려는 脚本이었다. 檢察로 넘겨진 그는 李漢東 檢事 앞에서 嫌疑事實을 强力히 否認했다.

    “事實대로 말하라기에 調書內容을 否認했지. 그러자 李漢東 檢事가 ‘이 사람은 다시 좀 갔다와야겠네’ 하더라고.(웃음) 다시 對共分室에 가서 맞고 오라는 얘기지. 겁주는 거였지.”

    1審에서 懲役 3年, 2審에서 2年刑이 宣告됐다. 그가 두 番째로 拘束된 것은 1977年 2月 서울 갈현동 大成高 敎師로 在職할 때였다. 當時 그는 劇團 ‘狀況’을 만들어 代表 兼 演出家로 活動하고 있었는데, ‘移民’이라는 假名을 썼다. 移民은 時事月刊誌 ‘신동아’에 每달 演劇評論을 쓰기도 했다. 檢閱이 嚴格했기 때문에 迂廻的인 方式을 擇할 수밖에 없었다. ‘狀況’은 主로 日帝 强占期 民族의 受難을 素材로 한 創作物을 公演했다.

    어느 날 團員들끼리 MT를 가서 維新治下 人權彈壓을 諷刺한 10分짜리 單幕劇을 卽席에서 演出했다. 그 얘기가 中央情報部 귀에 들어갔다. 그는 緊急措置 9號 違反으로 拘束됐고 劇團은 解體됐다. 設立된 지 3年 만이었다.

    세 番째 拘束된 것은 1979年 8月. 이른바 오원춘 事件(安東敎區 가톨릭農民會 事件)에 連累돼서다. 이 事件은 不良감자種子 被害補償運動을 成功的으로 主導한 農民 오원춘氏를 情報部가 拉致·暴行한 데 對해 가톨릭교회가 大規模 祈禱會와 街頭촛불示威를 벌이면서 불거졌다.

    “10分이면 된다”

    “국제앰네스티(國際人權委員會) 韓國支部 事務局長을 할 때였다. 金壽煥 樞機卿한테 電話가 왔는데, ‘安東에서 오원춘 事件 祈禱會를 하는데 같이 내려가자’는 거야. 樞機卿 말이니 無條件 따랐지. 김승훈 神父와 함께 車를 타고 내려갔다.”

    安東에 내려가 祈禱會에 參席한 그는 樞機卿 講論이 끝난 다음 韓國의 人權彈壓 實相에 對해 講演했다. 行事가 끝난 後 700餘 名의 參席者가 聖堂 밖으로 나가 夜間촛불示威를 벌였다.

    “다음날 서울로 올라와 出勤했는데, 情報部 要員이 찾아와 ‘갑시다’ 하더라고. 10分이면 된다면서. 잠깐 確認할 게 있다고. 우리는 그 소릴 하도 많이 들어서…(웃음). 내가 ‘10分이 10年이 되겠지’ 하자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고.”

    그는 南山 情報部 監察室로 끌려가 20日假量 調査를 받았다. 거기서 盲腸이 터졌다. 急性이었다. 情報部는 꾀病이라며 手術을 해주지 않다가 腹膜炎으로 번지자 西大門警察署로 移送시켰다. 警察署 앞 한 個人病院에서 手術을 받았는데, 搜査官의 재촉에 醫師가 서두르다가 假題, 솜, 실 따위를 뱃속에 남긴 채 縫合해버렸다.

    “서대문구치소에 갇혔는데, 一週日 만에 곪아서 터져 나왔다. 12番이나 再手術을 했다. 痲醉도 없이, 拘置所 안에서. 그 흉터가 只今도 남아 있다.”

    그는 옷을 헤쳐 흉터를 보여줬다. 깊게 파인 고랑 같은 흉터 몇 個가 뒤엉켜 있었다.

    10·26 直後인 1979年 11月 그는 拘置所 안에서 한 次例 더 拘束됐다. 애初 그의 拘束事由는 緊急措置 9號 違反이었다. 10·26으로 緊急措置가 消滅되면서 釋放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出所度 못한 채 남민전(南朝鮮民族解放戰線準備委員會) 事件에 連累돼 國家保安法, 反共法 違反罪로 재구속됐다. 그가 이끌던 民투(韓國民主鬪爭國民委員會)가 남민전 傘下 團體라는 理由에서였다. 當局은 남민전을 光復 以後 最大의 自生 共産主義 組織이라고 發表했지만 뒷날 造作된 事件으로 밝혀졌다. 2006年 3月 民主化運動關聯者 名譽回復 및 補償審議委員會는 남민전 關聯者 29名을 民主化運動 關聯者로 認定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點은 그때 裁判에 關與했던 檢事가 박철언 前 議員이라는 것.

    “다른 건 記憶 안 나고 이 말은 생각난다. 維新體制에 反對한 被告人은 長期間 社會로부터 隔離해야 한다고. 懲役 15年을 求刑하더라고. 惡毒하기보다는 좀 頂上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지.”

    그는 이 事件으로 4年間 獄살이했다. 두 사람은 1996年 15代 國會에서 만났다. 朴氏는 자민련 議員이었다.

    “議員會館 로비에서 마주쳤는데 내 눈길을 避하더라고. 그래서 쫓아가 ‘朴 議員님, 제가 李在五입니다. 처음 들어왔으니 잘봐주십시오. 나는 지난 일은 다 잊었습니다’라고 人事를 했지. 그러자 ‘在野活動 오래 하셔서 國會議員이 잘 맞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더라고.(웃음)”

    1982年 大田矯導所에 收監돼 있던 그는 在所者 人權鬪爭을 하면서 23日間 斷食했다. 그해 父親이 돌아가셨다. 그 事實을 알려주려 面會를 왔던 큰兄은 동생이 斷食鬪爭하는 걸 보고 차마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는 이듬해 出所할 때까지 이미 世上을 뜬 父親에게 間間이 便紙를 써 보냈다. 母親은 1993年에 世上을 떠났는데, 그때도 臨終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父母 얘기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두 분 다 臨終을 못 지켰으니 큰 不孝를 한 거지. 서울拘置所에 있을 때 아버지께서 面會 와서 이런 말을 했다. ‘네가 한 일이 옳다고 생각하면 監獄生活이 便할 테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고될 것이다.’ 또 어머니는 ‘여기도 사람 사는 데 아니냐. 마음 크게 먹어라’고 나를 慰勞했다. 父母님은 한 番도 내가 한 일에 對해 ‘왜 그런 짓 하냐’고 나무란 적이 없었다.”

    그가 다섯 番째로 拘束된 것은 1989年 4月. 전민련(全國民族民主運動聯合) 祖國統一委員長으로서 汎民族大會를 推進하는 過程에 문익환 牧師의 訪北 背後 嫌疑로 拘束됐다. 當時 그는 汎民族大會 實務會談을 하러 板門店으로 가다가 逮捕됐다. 當時 이 事件을 指揮한 서울地檢 公安2部長이 崔炳國 한나라당 議員이다.

    그가 5次例 拘束되면서 宣告받은 刑量을 다 合하면 懲役 12年6個月이다. 하지만 實際로 服役한 期間은 6年10個月이다. 減刑이나 赦免 等으로 刑期가 줄었기 때문이다.

    “來日부터 잡으러 갈게”

    이쯤에서 그의 아내와 아이들 얘기가 궁금해진다. 正常的인 家庭生活을 維持하기가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結婚式부터 跛行이었다. 朴正熙가 僅少한 差異로 김대중을 누르고 第7代 大統領에 當選되던 해인 1971年 10月의 일이다.

    元來 그가 잡아놓았던 禮式時間은 10月9日 낮 12時. 場所는 서울 南山드라마센터였다. 그런데 前날 金芝河 詩人한테서 連絡이 왔다. 原州天主敎區에서 原州MBC 問題로 徹夜籠城을 하는데 내려와서 籠城을 이끌어달라는 거였다. 自己네는 3日間 해서 人力이 바닥났다면서. 그는 낮에 내려가 밤새 籠城하고 다음날 낮 12時쯤 原州에서 出發했다. 서울에 到着하니 3時쯤 됐다. 그런데 主禮가 보이지 않았다.

    “한 달 前에 付託해놓고 온 건데 데모하러 돌아다니느라 確認하는 걸 잊어먹었던 거야. 이 兩班이 나한테서 連絡이 없으니 그날 登山을 가버렸어.(웃음) 그 兩班 登山코스를 알기에 山 밑에 가서 기다렸지. 만나서 ‘主禮가 登山 가면 어떡하느냐’고 따지니까, ‘나도 오늘인가 來日인가 싶었는데 連絡이 없기에 자네한테 또 事情이 생겨 못하는 줄 알았지’ 하더라고.(웃음)”

    禮服도 問題였다. 집에 붙어있을 때가 없어 洋服을 맞춰놓기만 하고 假縫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兩쪽 팔 길이가 다른 洋服을 걸쳤다. 와이셔츠와 넥타이는 親舊 것을 빌렸다. 式場에 나타난 情報部 姨母 大領이 祝賀金을 건네면서 속닥였다. “오늘은 祝賀하고. 手配가 떨어졌으니 來日부터 잡으러 갈게.”

    新婚旅行은 慶州로 떠났다. 修學旅行 온 學生들로 넘쳐 房을 求할 수 없었다. 몇 時間 돌아다닌 끝에 개川가에서 旅人宿 하나를 찾아내 新婚 첫날밤을 보냈다. 旅人宿에서 심부름 하는 女子가 자는 門間房이었다. 다음날 그는 釜山으로 튀었고 夫人 혼자 서울 불광동에 마련한 新婚집으로 올라왔다.

    “아내가 門을 여니 新婚房에서 종로서 情報課 刑事들이 우리가 아직 덮어보지도 못한 이불을 깔아놓고 앉아 있더라는 거야. 아내가 그 자리에서 氣絶해 西大門病院에 入院했지.”

    그가 收監生活 하는 동안 집안生計는 婦人의 몫이었다. 夫人은 衰落한 집안의 無男獨女였다. 어릴 때 어머니 어깨너머로 배운 바느질이 돈벌이가 됐다. 韓服 바느질房을 내고 몇 가지 장사를 하면서 겨우 生計를 꾸려나갔다.

    그는 2女1男을 뒀다. 딸 둘은 結婚했고 아들은 軍服務를 마친 後 大學 4學年에 在學 中이다. 아이들은 高等學校 다닐 때까지 情報課 刑事들을 아버지 親舊로 여겼다. 刑事들은 許久한 날 집에 없는 그를 代身해 洞事務所에서 零細民에게 나눠주는 라면과 쌀을 타서 집에 갖다주곤 했다.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일 理가 없었다.

    “距離感이 꽤 있었지. 어릴 때 하도 떨어져 살아서. 데면데면했지 뭐. 내가 무슨 말해도 잘 먹히지 않고. 커서는 그런 게 없어졌지만.”

    그는 “民主化鬪爭 하면서 家族한테 안겨준 건 없지만 한 가지는 確實하게 심어줬다”고 自負心을 내비쳤다.

    “옳게 살아야 한다는 것, 不淨腐敗하면 안 된다는 것. 이 精神은 온 家族이 共有하고 있다. 가끔 내가 없을 때 누가 집에 찾아와 뭘 놓고 갈 때가 있다. 그럼 다음날 반드시 돌려준다. 子息들이 그거 하나는 確實히 배웠다. 秋夕 때 과일箱子가 들어오면 딸들이 ‘이거, 賂物 아니야’ 했을 程度니까.”

    그는 3線 하는 동안 歲費를 받으면 地區黨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면 地區黨에서 그의 夫人에게 300萬원씩 月給을 보내줬다는 것이다.

    “‘4線이 되면 無條件 歲費 封套를 當身 앞으로 보내주겠다’ 約束했다. 그런데 떨어졌지 않나.(웃음) 집사람은 只今이 가장 幸福하다고 한다. 중앙대 招聘敎授 月給이 나오기 때문이다. 한 달에 250萬원 나오는데 稅金 떼고 220萬원이 집사람 通帳에 入金된다. 집사람은 國會議員 할 必要 없이 敎授나 繼續하라고 한다.”

    “食事 때마다 서글펐다”

    ▼ 돈에 對해 潔癖症이 있나.

    “돈이 생기면 쉽게 일을 하려 한다. 政治를 돈으로 하려면 안 된다.”

    ▼ 그래도 政治하려면 돈이 必要하지 않나. 더욱이 무리를 이끌려면.

    “있으면 좋겠지. 나하고 親한 議員들은 무슨 일 있으면 다들 自己 돈 낸다. 美國 갈 때도 議員들이 돈 모아서 飛行機票도 끊어주고….”

    ▼ 몇몇 企業體에서 돈 대줬다고 하던데.

    “企業體는 무슨? 내가 그걸 받기나 하겠나.”

    ▼ 깨끗하게 사는 건 좋은데 家長으로서 問題가 있는 것 아닌가.

    “사는 데 別로 不便하지 않다. 이 生活이 몸에 배어 없으면 없는 대로 산다. 家族도 마찬가지다.”

    ▼ 李 大統領과 親한 企業人이 건넨 돈 封套를 拒絶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2007年 競選 때다. 누군가를 보내 돈封套를 건네기에 그 자리에서 돌려보냈다. 이런 건 (記事로) 쓰지 않으면 좋겠다.”

    側近에 따르면 政治權 人士들 中에도 그에게 돈 가져왔다가 退字 맞은 사람이 여럿 있다고 한다. 後援金도 50萬원 以上이면 ‘賂物 性格이 있다’며 돌려보낸다고 한다.

    ▼ 가까운 親舊 中에 企業人이나 財力家가 없나.

    “類類相從이라고 어떤 企業人이 내 周邊에 얼씬거리겠나. 자칫 빨갱이 도와준다고 亡하기 十常이지. 이番에 美國에 가서 앨라배마의 現代工場과 텍사스의 三星工場을 가보고 南美에 進出한 韓國企業들을 둘러보면서 企業이 愛國者라고 느꼈다. 企業이 돈 안 벌면 나라 亡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企業人들과 얘기를 나눠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美國에 가 있을 때 그는 버지니아州에서 살았다. 그가 硏修를 했던 존스홉킨스대 國際關係大學院 敎授인 주용식氏의 집이었다. 두 男子가 自炊를 했다고 한다. 그는 “食事 때만 되면 서글펐다”고 털어놓았다.

    “밥도 가끔 했지만 主로 라면이나 국수, 감자, 고구마를 많이 먹었다. 밥을 하면 飯饌도 해야 하니.”

    존스홉킨스大는, 學部는 몬트리올에 있지만 國際大學院은 워싱턴에 있다. 그는 自轉車로 通學했다. 1時間20分 距離였다. 어느 날 내리막길에서 過速하다가 5m쯤 날아가 거꾸로 처박히는 事故를 當했다. 步道블록 턱을 들이받아 땅바닥에 머리가 부딪혔는데 헬멧이 박살났다. 그는 2週間 病院에 다니며 治療를 받았다.

    그의 집 居室엔 ‘不勞無榮(不勞無影)’이라는 懸板이 걸려 있다. ‘努力하지 않으면 榮光이 없다’는 뜻이다. 家訓을 묻자 “가난하더라도 정의롭게 살자”라는 ‘古典的인’ 對答이 돌아왔다. 內心 共感하면서도 짐짓 이렇게 물어봤다.

    ▼ ‘正義’ 이런 말은 지난 時代의 單語 아닌가.

    “그렇지만 그게 核心이지. 나라가 發展하려면 그게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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