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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單獨]臨政 國璽, 100年 流浪 끝내고 故國 품으로|동아일보

[單獨]臨政 國璽, 100年 流浪 끝내고 故國 품으로

  • 東亞日報
  • 入力 2019年 1月 21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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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運動 100年, 2020 東亞日報 100年]
紅塵 議政院 議長의 美居住 孫子, 寄贈 遺言에 夫人이 實物 첫 公開
“紅塵 胸像 建立될 4月 國會 寄贈”… 韓國 떠난지 46年만에 美서 歸還

1919년부터 쓰인 ‘임시의정원印’ 국새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관인(왼쪽 사진)과 인주를 묻혀 찍은 모습. 뉴욕=박용 특파원 parky@donga.com
1919年부터 쓰인 ‘臨時의정원印’ 國璽 大韓民國 臨時政府 議政院 관인(왼쪽 寫眞)과 印朱를 묻혀 찍은 모습. 뉴욕=舶用 特派員 parky@donga.com
올해 大韓民國 臨時政府 樹立 100周年을 맞아 臨政의 國璽(臨時의정원 관인·官印)가 46年 만에 韓國으로 돌아온다.

臨政 臨時의정원 議長 및 國務令을 지낸 만오 紅塵(晩悟 洪震·1877∼1946) 先生의 孫子며느리 신창휴 氏(85·美國 居住)는 最近 동아일보와의 單獨 인터뷰에서 “紅塵 先生의 銅像이 國會에 建立되는 날 男便이 保管해 온 臨時의정원 官印을 國會에 寄贈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官印은 오늘날 國會 格인 臨時議政院의 各種 公文書에 찍었던 圖章이다. “大韓民國은 最高 權力이 臨時의정원에 있음”(1927년 改正 臨時約憲 第2條)을 비롯한 臨政 臨時憲法 條項으로 볼 때 臨政의 正統性을 象徵하는 國璽 가운데 하나에 該當한다. 臨政과 더불어 中國에서만 4000km를 옮겨 다녔고, 紅塵 先生의 孫子인 故(故) 석주(錫柱) 氏의 도일과 歸國, 도미까지 100年 동안 바다를 4番 건너며 數萬 km를 이동한 官印이 韓國에서 제자리를 찾는 셈이다.

申 氏가 本報에 公開한 이 官印은 ‘臨時議政院印(臨時議政院人)’이라고 새겨진 검은色 木製 圖章이다. 석주 氏는 이 官印이 “할아버지(紅塵)가 1945年 충칭에서 갖고 돌아왔다. 1919年부터 議政院 印章으로 쓰인 臨時議政院人”이라고 說明한 文書를 남겼다. 석주 氏는 6·25戰爭을 비롯한 激動의 現代史 속에서도 刻苦의 努力 끝에 이 官印을 穩全히 간직해 왔다. 1973年 美國 移民 뒤에도 祖父의 業績이 제대로 評價받길 바라며 여러 次例 官印을 韓國에 寄贈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16年 87歲로 눈을 감았다.

官印은 中國 상하이에서 첫 臨時의정원 會議가 열린 지 100周年이 되는 올 4月 10日에 맞춰 寄贈될 것으로 展望된다. 文喜相 國會議長室은 “臨政 100周年을 맞는 올해 國會圖書館에 臨時議政院의 마지막 議長을 지낸 紅塵 先生의 胸像을 建立한다”며 “象徵的 意味가 큰 4月 10日 前 官印이 故國에 돌아올 수 있도록 胸像 建立을 서두르고 있다”고 밝혔다. 文 議長은 “李 官印은 臨時의정원을 象徵하는 物件”이라며 “歷史的으로 所重한 이 官印을 後孫에 길이 保全할 것”이라고 밝혔다.

臨政 國璽 100年間 바다 4番 건너… 紅塵 家門, 목숨처럼 지켰다 ▼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홍진 선생의 손자며느리 신창휴 씨가 18일 미국 동부 모처에서 동아일보와 채널A에 단독 공개한 
임시정부 의정원 관인 등 도장 4개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그는 남편 홍석주 씨(홍진 선생의 손자·2016년 작고)의 유언에 
따라 이 도장을 소중히 보관해 왔다. 뉴욕=박용 특파원 parky@donga.com
臨時政府 議政院 議長을 지낸 紅塵 先生의 孫子며느리 신창휴 氏가 18日 美國 東部 某處에서 동아일보와 채널A에 單獨 公開한 臨時政府 議政院 官印 等 圖章 4個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그는 男便 홍석주 氏(紅塵 先生의 孫子·2016年 작고)의 遺言에 따라 이 圖章을 所重히 保管해 왔다. 뉴욕=舶用 特派員 parky@donga.com

“男便이 숨지기 석 달 前 이 圖章을 꺼내더니 ‘나 代身 잘 保管했다가 할아버지 胸像이 세워지는 날 國家에 寄贈해 달라’는 遺言을 남겼습니다.”

臨時政府 議政院 議長과 國務令을 지낸 만오(晩悟) 紅塵 先生의 孫子며느리 신창휴 氏(85)가 18日(現地 時間) 美國 東部 某處에서 進行된 東亞日報 및 채널A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2016年 87歲로 作故한 男便(홍석주)의 遺言대로 圖章을 安全한 某處에 두고 家寶로 지키고 있다”고 했다. 그는 保安을 理由로 인터뷰 場所 公開를 極口 꺼렸다.

取材팀이 確認한 臨時政府 議政院 官印 等 圖章 4個는 만오 先生이 1945年 中國 충칭(重慶)에서 허리춤에 차고 歸國한 허리띠 및 지퍼가 달린 藍色 주머니에 담겨 있었다.

申 氏에 따르면 男便 洪 氏는 이 圖章을 목숨처럼 지켰다. 6·25戰爭, 日本 留學(交換敎授), 美國 移民 等 重要한 일이 있을 때마다 恒常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그는 “男便이 6·25戰爭 避亂 當時 圖章주머니를 베개에 돌돌 말아 넣고 잠을 잘 때도 그 베개만 썼다”며 “家族들에게도 圖章이 어디에 있는지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1943년 중국 충칭에서 열린 재중자유한인대회에서 총주석 자격으로 연설하는 만오 홍진 선생의 모습. 한시준 단국대 교수 제공
1943年 中國 충칭에서 열린 在中自由限人大會에서 總主席 資格으로 演說하는 萬五 紅塵 先生의 모습. 한시준 단국대 敎授 提供

그는 取材팀에 洪 氏가 家族에게 남긴 ‘紅塵 圖章 및 文書 元本’이라는 3張짜리 文書도 公開했다. 文書에는 “永久 家寶로 保管할 것, 햇볕과 濕氣에 쬐이지 말 것”이란 當付 事項과 說明이 빼곡했다.

‘臨時議政院人(臨時議政院印)’이라고 새겨진 가로 5cm, 높이 6cm의 검은色 木材 道場에는 ‘1919年부터의 議政院 印章’이라는 說明이 있었다. 洪 氏는 이 文書에 “臨時議政原因은 1919年 4月 臨時의정원 樹立 때부터 唯一한 圖章으로 臨時政府 및 大韓民國의 正統性을 象徵한다”며 “가장 重要한 것”이라고 적었다.

‘紅塵(洪震)’이라고 새겨진 玉돌로 만든 작은 道場에는 ‘寬容’ 및 ‘公文書’에 쓰였다는 말도 있었다. 이 外 만오 先生이 1919年 4月 中國으로 亡命하기 前 法官과 辯護士로 일하며 썼던 그의 本名 홍면희(洪冕熹)가 새겨진 圖章, 또 다른 號 ‘萬戶(晩湖)’가 새겨진 圖章도 1點씩 있었다.

申 氏는 “媤祖父께서는 ‘獨立運動을 하는 義兵들에게 罰을 줄 수 없다’며 法官을 그만두고 辯護士로 일하다 中國으로 亡命했다”며 “家産까지 팔아 獨立運動을 위해 떠난 뒤 남은 家族들이 日帝의 監視 및 生活苦로 힘들게 살았다고 들었다”고 했다.

그의 男便 洪 氏는 生前 臨時의정원 議長을 지내며 獨立運動을 이끈 祖父의 業績이 世上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을 늘 안타까워했다. 이에 코닥에서 일했던 洪 氏와 藥師 申 氏 夫婦는 直接 祖父의 業績을 再照明하는 일에 매달렸다. 申 氏는 “正確한 金額은 기억나지 않지만 國家에서 獨立有功者에게 주는 支援金 大部分을 紅塵 學術大會 開催 및 紅塵 先生 硏究서 出版에 썼다”며 “男便이 ‘祖父의 胸像이라도 세워 달라’는 遺言을 남긴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申 氏는 “男便의 遺言대로 國會에 胸像이 세워진다니 그날 내 손으로 이 圖章을 國家에 寄贈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紅塵 先生은 左右, 與野를 떠나 民族이 모두 하나가 되길 願하셨다”며 “臨時政府 100周年이 되는 올해 媤祖父의 維持를 받들어 韓國이 하나로 똘똘 뭉쳐 훌륭한 나라를 建設했으면 좋겠다”고 當付했다.


▼ [單獨]紅塵 先生, 唯一하게 臨政 行政-立法 首長 모두 歷任

만오 紅塵 先生은 우리나라 議會政治의 기틀을 마련한 獨立運動의 巨木이다. 臨時政府 硏究의 權威者인 한시준 단국대 敎授는 “臨政에서 行政府 首班(國務令)과 立法府 首班(臨時의정원 議長)을 모두 지낸 분은 紅塵 先生이 唯一하다”며 “가장 오랜 期間 議長으로 活動하며 議會政治의 기틀을 닦은 분”이라고 說明했다.

1877年 名門家 後裔로 태어난 紅塵 先生은 1904年 法官養成所를 卒業하고 平壤에서 辯護士로 일했다. 1919年 3·1運動 直後 同志들을 糾合해 仁川에서 13度 代表者 大會를 開催하고 漢城政府를 組織한 뒤 中國 상하이로 亡命했다. 그해 9月 漢城政府를 法統으로 統合 臨時政府가 出帆하는 데 큰 寄與를 했다.

1921年 5月에는 이동녕 孫貞道에 이어 臨時의정원의 3代 議長으로 選出됐고 이어 1939, 1942年에도 議長에 選出됐다. 韓 敎授는 著書에서 “紅塵 先生이 理念과 黨派를 超越한 人物이었기에 左右翼 勢力이 參與한 統一議會에서 議長으로 選出될 수 있었다”고 評價했다.

紅塵 先生은 臨時議政院의 마지막 議長이었고 臨政 還國 뒤 의정원을 繼承한 非常국민회의 議長으로도 選出됐다. 紅塵 先生의 後孫이 議政院 官印을 保管하게 된 데에는 이 같은 事緣이 있다.

紅塵 先生이 1945年 12月 1日 還國하면서 가져온 議政院 文書는 孫子 홍석주 氏가 保管하다가 國會에 寄贈해 1974年 國會圖書館이 發刊했다. ‘大韓民國’이라는 國號가 最初로 規定된 ‘大韓民國 臨時約憲’(憲法) 改正案 草案(原本)과 建國綱領, 光復軍 作戰報告 等 貴重한 資料들이었다. 臨時政府 文書는 이들 資料 말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議政院 文書를 穩全하게 保存해 後代에 남긴 것 亦是 紅塵 先生의 큰 貢獻으로 評價된다.

紅塵 先生은 1946年 9月 9日 病患으로 숨을 거뒀고 葬禮式은 9月 13日 金九 先生, 李承晩 博士를 비롯해 各界 人士가 雲集한 가운데 盛大하게 擧行됐다.


[單獨]金九 主席-光復軍 官印은 6·25때 行方不明

大韓民國 臨時政府 議政院의 官印은 現在 所在가 確認된 臨時政府의 唯一한 國璽다. 臨政은 26年間 臨時 憲章 制定과 5番의 改憲을 거치며 停滯가 變化했지만 大體로 議會가 中心에 있었다. 1927年 3次 改正 憲法에는 “大韓民國은 最高 權力이 臨時의정원에 있음”(제2조)을 明示했다.

大韓民國 臨時政府는 1945年 還國 當時에는 朱錫製였다. 한시준 단국대 敎授는 “還國 當時 臨政은 黨·政·郡의 形態였고 主席과 總司令官, 議政院 官印의 價値는 동렬이었다”고 說明했다. 그러나 金九 主席이 使用한 主席의 官印은 政府 文書와 함께 6·25戰爭 때 行方不明됐다. 池靑天 將軍이 썼던 韓國光復軍 總司令官의 官引道 마찬가지다. 北韓에 두 個의 官印이 남아 있을 可能性도 없지 않지만 이番에 公開된 議政院 官印은 所在가 確認된 唯一한 國璽인 셈이다.

國會의 紅塵 先生 胸像 建立 案件은 2003年 發議됐다가 第16代 國會 任期 滿了로 廢棄됐다. 國會는 2010年 5月 ‘紅塵 臨時의정원 議長 記念展示실’을 國會圖書館에 設置했으나 胸像 建立에는 合意하지 못했다.

韓 敎授는 “紅塵 先生 孫子 홍석주 氏가 胸像 建立과 관인 寄贈을 協議하러 韓國에 7, 8番 왔을 때마다 만났다”며 “석주 氏가 ‘살아 있을 때 꼭 이 問題를 解決하고 싶다’고 했는데 끝내 生前에 結實을 못 봤다”고 說明했다. 洪 氏의 아내 신창휴 氏는 2017年 7月 本報와의 通話에서 “男便이 이 問題를 解決하지 못해 便하게 돌아가시지도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文喜相 國會議長이 就任 後 紅塵 先生 胸像 建立을 다시 推進했고 지난해 11月 23日 國會 本會議에서 建立 案件이 마침내 通過(재석 議員 226名, 贊成 196名)됐다. 文 議長은 通過 直後 “紅塵 議長님의 賞(像)을 建立하는 것은 議會民主主義의 歷史的 價値를 保全하고 獨立精神의 참뜻을 繼承하는 崇高한 일”이라고 遺族에게 便紙를 보냈다.

조종엽 記者 jjj@donga.com/뉴욕=舶用 特派員/박효목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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