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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 ‘缸아리 무덤’의 子息사랑… “엄마 품 같은 독에서 安息을”[강인욱 世上萬事의 起源]|東亞日報

韓國 ‘缸아리 무덤’의 子息사랑… “엄마 품 같은 독에서 安息을”[강인욱 世上萬事의 起源]

  • 東亞日報
  • 入力 2024年 5月 20日 22時 23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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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떠난 아이 ‘저승 幸福’ 起源… 子宮 빼닮은 缸아리를 棺으로 使用
韓半島의 독무덤, 世界 最古 水準… 三國 王陵 못지않았던 馬韓 독무덤
2m 大型 독에 族長-遺物 함께 묻어… 東南亞 구슬 發見돼 海上交流 痕跡

마한 유적지에서 발견된 옹관들. 기원전 2세기∼기원후 6세기 충청·전라 지역에 걸쳐 있던 마한은 독특한 독무덤 문화를 형성했다. 길이 2m가 넘는 수백 kg의 대형 항아리를 만들어 시신과 각종 보석 및 유품을 넣기도 했다. 사진 출처 국립나주박물관
馬韓 遺跡地에서 發見된 甕棺들. 紀元前 2世紀∼紀元後 6世紀 忠淸·全羅 地域에 걸쳐 있던 馬韓은 獨特한 독무덤 文化를 形成했다. 길이 2m가 넘는 數百 kg의 大型 缸아리를 만들어 屍身과 各種 寶石 및 遺品을 넣기도 했다. 寫眞 出處 國立나주博物館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慶熙大 史學科 敎授
《7000年 前부터 韓半島에 독무덤


돌아가신 분을 缸아리에 모신 무덤을 ‘독무덤(甕棺墓)’이라고 한다. 좀 生疏해 보이지만 世界에 널리 퍼져 있는 風習이다. 韓國에서는 約 7000年 前부터 독무덤이 使用되었고, 1970年代까지도 湖南地域에서 使用되었다. 特히나 三國時代 榮山江 流域에서 1500年 前에 만든 독무덤은 世界的으로 獨特하다.2m가 넘는 大型 缸아리 무덤에 族長과 貴族을 華麗한 黃金 遺物과 함께 묻었기 때문이다. 왜 馬韓 사람들은 三國의 다른 나라와 달리 巨大한 缸아리에 貴族과 族長을 모셨을까.



고인돌과 함께 世界的으로 類例가 없는 韓國만의 독무덤에 숨겨진 이야기를 살펴보자.》



缸아리에 무덤을 쓰는 風習은 유라시아 一帶에 널리 퍼져 있는데, 特히 韓國은 世界的으로 가장 빨리 독무덤을 만든 나라 中 하나이다. 釜山 영도구 동삼동에서는 約 7000年 前에 쓴 독무덤이 發見되었다. 이는 이웃恨 日本이나 中國은 勿論이며 世界的으로도 손꼽힐 程度로 빠르다. 빗살무늬土器度 독무덤으로 使用되었으니, 慶南 晉州 상촌리에서 發見된 新石器時代 집자리 바닥에서 3個의 독무덤이 發見되었다. 먼저 世上을 떠난 家族을 化粧하고 遺骨을 집에 함께 모셔 두며 그들을 기렸다는 證據이다. 事實 世界에서 土器를 가장 먼저 使用한 地域이 東아시아이니 독무덤이 가장 먼저 發達한 것도 當然하다.

아제르바이잔에서 발견된 3500년 전 독무덤 내부 모습. 독무덤 양식은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발견되는데, 항아리에 시신을 넣으면 
마치 자궁 속 태아 같은 모습이 되어 고인에게 명복을 빌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아제르바이잔에서 發見된 3500年 前 독무덤 內部 모습. 독무덤 樣式은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發見되는데, 缸아리에 屍身을 넣으면 마치 子宮 속 胎兒 같은 모습이 되어 故人에게 冥福을 빌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그런데 왜 굳이 돌아가신 분을 보내는 管으로 缸아리를 使用했을까. 가장 큰 理由는 胎兒를 품은 子宮을 연상시키는 外觀 때문이다. 實際로 缸아리 속에 사람을 넣으면 어머니의 품에 안긴 모습처럼 된다. 무덤이 가지는 眞正한 意味는 죽음이 그 사람의 消滅이 아니라 저승에서 더욱 幸福한 삶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데에 있다. 卽, 저승에서 다시 태어나는 第2의 子宮과 같은 곳이다.

이런 까닭에 世界 곳곳에서 독무덤은 共通的으로 어려서 世上을 떠난 아이들의 무덤으로 많이 쓰였다. 南韓에서도 독무덤으로 有名한 全南 羅州 一帶에서는 1970年代까지도 아이의 무덤으로 缸아리를 使用했다. 近代的인 醫學이 發達하기 前에는 傳染病 같은 여러 疾病에 束手無策이었으니 幼兒 死亡率은 매우 높을 수밖에 었었다. 그렇다고 子息에 對한 사랑이 달랐겠는가. 世上의 빛을 제대로 못 보고 떠난 아이에 對한 未安한 마음에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라는 念願을 담으며 독무덤을 쓴 것이다.

父母님의 사랑을 담은 독무덤은 三國時代가 되면서 換骨奪胎하여 榮山江 一帶의 族長들이 使用하는 大型 古墳으로 成長한다. 成人 男子가 들어가도 넉넉할 程度로 2m가 넘는 規模의 缸아리를 구워서 世界에서 가장 큰 독무덤을 만들어 썼다.

전남 나주 신촌리 고분군에서 나온 마한의 금동관. 사진 출처 국립나주박물관
全南 羅州 신촌리 古墳群에서 나온 馬韓의 金銅冠. 寫眞 出處 國立나주博物館

巨大한 독무덤을 만드는 것은 決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흙으로 그 巨大한 크기를 빚어서 휘거나 터지지 않게 골고루 구워내야 하기 때문이다. 馬韓 사람들은 一般的인 土器 가마를 改良해서 새롭게 巨大한 土器 가마를 建設해 독을 구워냈다. 그렇게 구워진 數百 kg의 甕棺이 무덤까지 40km가 넘는 길을 移動해 運搬됐다. 독무덤을 만들고 쌓는 過程은 줄잡아 6個月 以上이 所要되고 數百 名이 動員되는 行事였다. 게다가 그 안에는 華麗한 金銅冠, 金銅신발과 고리자루칼(環頭大刀) 等 다양한 遺物이 들어갔다. 三國의 어떤 王族 무덤과 比較해도 뒤지지 않았다.

世界的으로도 獨特한 馬韓의 독무덤은 백제가 이 地域에 進出하면서 羅州 복암리의 巨大한 古墳群으로 完成되었다. 羅州 복암리의 古墳群은 特異하게도 여러 무덤을 層層이 쌓아서 마치 아파트처럼 만들어졌다. 다른 사람의 무덤에 몰래 끼워 넣는 ‘帖裝’이 아니라 서로 터를 讓步해 가며 餘裕 있게 자리를 만든 것이다.

복암리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무덤도 나왔으니, 겉은 百濟 스타일로 돌무덤 房을 만들었고 그 안에는 마한식의 독무덤을 넣은 것이다. 백제에 服屬되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백제의 무덤을 만들어 썼지만, 속으로는 自身의 自主性을 지키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古墳의 外形도 巨大하고 一律的으로 쌓지 않고 그야말로 自由奔放하게 다양한 形態로 쌓았다. 다양한 地域과 活潑하게 交流하는 開放性과 自身만의 獨自性을 함께 내세운 痕跡이다.

一般人들은 三國만 생각할 뿐 馬韓은 잘 모른다. 歷史는 勝者의 觀點에서 쓰이기 때문에 馬韓에 對한 內容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考古學者들의 努力으로 世上 어디에도 없는 독무덤을 일구어낸 馬韓 사람들의 眞正한 모습이 밝혀졌다.

왜 馬韓 사람들은 독무덤을 巨大하게 만들었을까. 馬韓 사람들의 독무덤은 그 起源이 約 2400年 前 滿洲 一帶의 古朝鮮에서 始作되었다. 當時 古朝鮮의 靑銅器가 馬韓地域으로 傳來되면서 독무덤度 함께 傳來되었다. 三國時代로 접어들며 扶餘와 高句麗에서 始作한 백제 勢力이 南쪽으로 勢力을 擴張하며 馬韓은 萎縮되었다.

結局 只今의 羅州 一帶까지 밀려오게 되자 馬韓의 사람들은 그 以前부터 만들었던 독무덤을 보란 듯이 커다랗게 만들어서 三國의 다른 나라와 區別되는 自身들만의 自尊心을 드러냈던 것이다. 비슷한 時期에 慶州의 新羅는 匈奴의 後裔를 自處하며 北方地域의 무덤과 비슷한 돌무지 무덤과 金冠을 만들었다. 이렇듯 指導者의 무덤은 單純한 무덤을 떠나서 그 나라 사람들의 決然한 意志를 보여주는 場이었다.

馬韓의 독무덤은 自主性과 함께 海上 交流의 象徵이기도 했다. 베트남, 印度, 필리핀 等 東南아시아 一帶에도 規模는 작지만 馬韓의 것과 비슷한 독무덤이 發見된다. 馬韓의 무덤에서는 구슬과 같이 東南亞에서 輸入한 遺物들도 함께 發見되었다. 古朝鮮에서 始作된 馬韓의 독무덤은 海上 交流를 통해 東南亞로 이어진 셈이다.

독무덤은 韓國을 代表하는 特色 있는 遺物인 同時에 바다와 陸地를 잇는 韓國의 國際性을 보여주는 遺物이다. 最近 中國은 ‘一對一로’를 내세우면서 陸上과 海上의 실크로드를 獨占하려고 했다. 하지만 陸上과 바다를 잇는 交流의 길은 바로 馬韓에도 있었다.

이렇듯 世界的 價値가 있는 馬韓의 독무덤이지만 全羅道 地域에서는 世界遺産으로 指定된 고인돌만 有名할 뿐 馬韓의 독무덤이 가진 價値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가 워낙 高句麗, 백제, 新羅의 三國 中心의 歷史에 익숙한 탓이다. 생각해 보면 크지도 않은 韓半島에서 榮山江 流域의 馬韓, 東海岸의 옥저, 東濊, 挹婁, 그리고 江原道의 藝脈까지 우리도 모르는 잊혀진 韓國史의 主役이 너무나 많다.

투박해 보이는 缸아리로 만든 독무덤에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먼저 世上을 떠난 家族을 다시 어머니 품으로 돌려보내려는 애틋한 사랑이 숨어 있다. 사람들은 무덤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무덤에 있는 그 누군가는 살아生前 누군가의 사랑하는 家族이었다.

事實 무덤은 먼저 떠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 實現된 空間이다. 榮山江 流域의 독무덤이 世界的인 價値를 지니는 理由는 單純히 아름답거나 巨大해서가 아니라 가장 普遍的인 어머니의 사랑과 父母에 對한 애틋함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5月은 家族의 달, 感謝의 달이다. 그래서일까. 華麗한 黃金이나 사람을 壓倒하는 建築物은 없지만, 어머니의 따뜻한 品이 있는 缸아리 무덤이 우리에게 더욱 남다른 意味로 다가온다.


강인욱 慶熙大 史學科 敎授
#하아리 무덤 #子息 사랑 #저승 幸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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