玄周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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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周燁
個人 情報
出生 1975年 7月 27日 ( 1975-07-27 ) (48歲)
서울特別市 江南區 驛三洞
國籍 大韓民國
192cm
몸무게 123kg
選手 經歷
高等學校 휘문고등학교
大學校
KBL 드래프트 1998 KBL 드래프트 / 1라운드 / 1順位
淸州 SK 나이츠 에게 指名됨
프로 選手 經歷 1998年 ~ 2009年
포지션 스트레치 抛
클럽 經歷
選手
1998-1999 대한민국 淸州 SK 나이츠
1999-2005 대한민국 釜山 KTF 매직윙스
2001-2003 대한민국 常務
2005-2009 대한민국 昌原 LG 세이커스
國家代表팀
1992 대한민국 大韓民國 U-19
1993-1997 대한민국 大韓民國 U-22
1994-2005 대한민국 大韓民國
指導者
2017-2020 대한민국 昌原 LG 세이커스

玄周燁 (玄周燁, 1975年 7月 27日 ~ )은 大韓民國 의 前 籠球 選手, 指導者, 放送人이다.

1998年 淸州 SK 나이츠 에 드래프트 1順位로 指名되어 프로에 데뷔하였다. 그의 現役 프로 籠球 選手 時節 닉네임 매직 히포 , 포인트 포워드 이며 歷代 大韓民國 프로 籠球 選手 中에는 가장 NBA級에 近接했던 選手였다. 釜山 아시안 게임 中國 과의 決勝戰에서 4쿼터 4秒를 남기고 突破 및 레이업 슛을 성공시키면서(이른바 까마귀 作戰) 勝負를 延長戰으로 끌고 갔으며, 延長戰에서 6得點을 記錄하여 뉴델리 아시안 게임 以後 20年 만의 金메달 에 寄與하였다.

學歷 [ 編輯 ]

幼年 時節 [ 編輯 ]

1975年 7月 27日 서울 에서 衣類製造業을 하는 아버지 현진구(玄晉具)와 大韓民國 女子 代表팀 에서 活躍한 籠球 選手 出身인 어머니 홍성화 (洪性華) 사이에서 膝下 3男 中 막내로 出生하였다. 그의 위로는 세 살 위의 두 雙둥이 兄이 있다. 그의 本貫은 連奏 (延州)이다.

서울 都城初等學校 6學年 時節 偶然히 籠球를 하겠다는 決心을 하고 휘문中學校에 入團 테스트를 받았다. 當時 키도 작고 籠球 實力이 不足하였던 그는 테스트를 通過하지 못했으나 공교롭게도 서울 휘문中學校로 學校를 配定받아 籠球特技生이 아닌 一般學生으로 휘문中學校를 入學하고 다시 籠球部의 門을 두드렸다. 그리하여 比較的 늦은 나이인 휘문中學校 1學年 때 籠球를 始作하게 된 현주엽은 1學年 동안은 늘 벤치를 지켰으며 2學年이 돼서야 코트에 첫 出戰을 하게 된다. 현주엽은 휘문中學校 2學年 때까지 自身의 어머니가 籠球選手 出身이었다는 事實을 몰랐다고 한다. 自身의 競技를 觀覽하러 온 어머니를 현주엽의 籠球 코치가 알아보는 것이 契機가 되었다. [1] 運動選手 生活을 하였던 어머니는 현주엽이 籠球選手가 된 後 恒常 周圍 사람들이나 先後輩들에게 禮儀를 지킬것을 强調하였다고 한다. 현주엽은 그 當時 NBA 籠球 비디오를 보면서 籠球練習을 했고 그의 롤모델 籠球選手는 매직 존슨이었다. 매직 존슨을 憧憬하여 2008年까지 줄곧 백넘버 32番을 달았다.

選手 經歷 [ 編輯 ]

고려대 時節 (1994-1998) [ 編輯 ]

휘문고 時節부터 超高校級으로 分類되던 현주엽은 高麗大와 延世大 兩校 關係者들의 熾烈한 競爭속에 스카우트 提議를 받아오다 고3때인 1993年 3月 31日 記者會見을 열고 高麗大學校 籠球部 進學을 發表한다. [2] 以後 현주엽이 밝힌 바에 따르면 1993年 3月 大學聯盟戰에서 高麗大가 8强 進出에 失敗하는 것을 目擊하고 고려대 進學을 決定하였다고 한다. 이미 大學 最强의 戰力을 갖추고 高大에 줄곧 勝利를 거두던 連帶에 들어가기보다는 聯隊와의 對決에서 劣勢에 있던 古代에 들어가서 自身의 價値를 立證해보이고 싶어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주엽이 大學進學後 첫 出戰한 大會인 MBC杯 大學籠球에서 古代는 年代를 맞아 28點差로 大敗하게 된다. 이 競技後 古代는 選手 全員이 머리를 짧게 깎고 切齒腐心하여 敗者復活戰을 통해 決勝에 올라와 다시 連帶를 만나 勝利를 거두었고, 다시 最終決勝戰에서 古代는 聯隊에 始終一貫 리드를 當했으나 試合終了 1分을 남기고 古代 양희승이 同點을 만드는 데 成功하였다. 이 同點狀況에서 현주엽이 速攻으로 終了 直前 0.4秒를 남기고 會心의 레이업을 試圖하였고 連帶 김택훈의 反則으로 얻은 自由投 2個를 모두 沈着하게 성공시키면서 古代의 優勝을 이끌었다. [3] 大學舞臺 첫 大會에서 世間의 期待만큼의 活躍을 벌이지 못한 현주엽은 大會 後 인터뷰를 통해 自身은 이番 大會를 통해 모든面에서 先輩들보다 不足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高校籠球와 大學籠球의 엄청난 差異를 느꼈다고 對答했다. [4] 그러나 이 後 현주엽은 파워 포워드로서의 팀內 立地를 탄탄히 다지게 되고, 古代는 전희철, 金炳哲, 양희승, 玄周燁, 신기성이라는 베스트 5 體制를 構築하며 大學舞臺에서 乘勝長驅하게 된다.

이처럼 고려대학교가 連勝街道를 疾走하자 世間의 關心事는 高麗大가 70年代末에 이룩했던 最多連勝 49連勝을 깨고 50連勝을 達成할것인가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1995年 가을철 大學籠球 聯盟戰 豫選 첫 競技에서 현주엽이 발목 負傷으로 빠진 古代는 當時 弱體였던 弘大에 3點差로 덜미가 잡히며 20連勝에서 連勝을 마감했다. [5] 以後 古代는 다시 한동안 連勝을 이어갔지만 50連勝에 近接하지는 못하였다. 고려대학교는 充分한 全力을 갖췄음에도 현주엽이 卒業하기전까지 끝내 籠球大잔치에서는 연세대학교가 이루어내었던 大學팀 優勝을 達成하지 못하였다.

현주엽은 허재에 이어 大學 1學年때부터 國家代表팀에 選拔된 選手가 되었다.

SK 나이츠 時節 (1998-1999) [ 編輯 ]

1998年 3月 9日 힐튼호텔에서 열린 프로籠球 新人 드래프트에서 현주엽은 全體 1順位로 淸州 SK의 指名을 받았다. 當時 SK의 안준호 監督은 드래프트에서 구슬 뽑기로 1順位 指名權을 받게 되자 ‘優勝이야’를 외쳤다고 한다. SK는 그 指名權으로 바로 현주엽을 指名했고 이렇게 해서 현주엽은 SK에 이미 迎入돼 있던 徐章勳 과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그러나 SK의 運命은 안준호의 바람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또 다른 期待株였던 外國人 選手 토니 러틀랜드의 不振과 더불어, 현주엽과 서장훈은 微妙한 自尊心 對決과 포지션의 重複으로 不調和를 보였고 이 때문에 SK는 優勝은커녕 플레이오프조차 오르지 못하고 만다. 그 責任을 물어 1998年 11月 26日 안준호 監督은 시즌 途中 更迭되고 起亞의 技術顧問이었던 최인선이 SK의 새 監督으로 赴任하였다. 현주엽의 프로 첫해 個人成跡은 뛰어났다. 34競技에 出戰하여 平均 23.94 得點, 6.35 리바운드, 4.65 어시스트를 記錄했다. [1] 이듬해 시즌에서 현주엽은 스몰포워드로의 成功的인 變身을 이루어내며 서장훈과 前年보다 나아진 팀웍을 보였다. 이에 SK는 正規시즌 1位를 달리고 있었으나, 시즌 트레이드 申請 마감日 하루前인 1999年 12月 24日 크리스마스 이브날 SK는 현주엽을 골드뱅크의 조상현 + 現金 4億원과 맞바꾸는 超大型 트레이드를 斷行하며 大膽한 勝負手를 띄웠다. [6] [7] 이는 최인선 監督이 이원재 團長에게 한 强力한 要請에 따른 것이었다. 최인선은 현주엽의 3番자리(스몰 포워드)가 不滿이었다. 優勝을 위해 3番에 올라운드 플레이어보다 機動力 좋고 確實한 슛터를 願했던 그는, 이대로라면 챔피언戰에 進出하더라도 現代를 만나면 勝算이 없을것이라고 내다봤다. 當時 SK는 創團 以後 현대에게 12戰 全敗를 記錄하고 있었다. 트레이드 直後, SK는 곧바로 트레이드 效果를 보이면서 乘勝長驅, 結局 챔피언戰에서 만나게 된 現代를 4勝 2敗로 누르고 優勝컵을 들어올렸다. 失敗했으면 最惡의 自充手로 記錄됐을 이 트레이드는, SK의 優勝으로 인해 ‘優勝을 위한 마지막 퍼즐찾기’로 籠球歷史에 記錄되었다.

트레이드 뒷얘기 [ 編輯 ]

트레이드 消息을 최인선 監督이 아닌 新聞記者에게서 처음 듣게 된 현주엽은 트레이드 直後 인터뷰를 통해 최인선 監督에게 對한 人間的인 失望을 吐露하기도 했다. 애初에 현주엽의 트레이드는 현주엽과 최인선의 不和 때문이라는 主張이 한 媒體를 통해 說得力있게 提起되었다. [8] 이에 따르면 1999年 12月 14日 현대와의 競技에서 逆轉敗 當하고 亂後 최인선은 敗北의 責任이 현주엽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自尊心이 强한 현주엽은 이에 抗命하여 負傷을 핑계로 다음 競技인 16日 LG戰을 보이콧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 競技인 19日 新世紀戰에서 다시 현주엽은 워밍업까지 마치고 競技에 나설 準備를 하였으나 이番엔 최인선의 報復이 이어졌다. 현주엽을 故意로 출전시키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競技였던 23日 동양戰은 현주엽에게 SK에서의 마지막 競技가 된다.

또한 이 媒體에 따르면, SK는 골드뱅크와 接觸하기전 三星과 먼저 接觸한 것으로 알려졌다. SK의 이원재 團長은 현주엽을 내보내더라도 좋은 팀에 보내고 싶어했다. 實際로 현주엽은 SK의 指名을 받기전 三星으로의 入團을 願했던 것으로 알려졌고, 三星 亦是 현주엽의 迎入을 懇切히 願해 드래프트 1次 指名權을 딸 目的으로 前年度 시즌 막판 競技에서 故意 敗北를 했다는 疑惑을 받기까지 했다. [9] 그러나 實狀 SK는 優勝 可能圈에 있던 三星의 全力增加를 願하지 않아 三星에 對한 玄周燁 트레이드 打診은 시늉내기로만 끝났다. 結局 현주엽은 SK의 優勝에 障礙가 되지 않는 弱體 골드뱅크로 트레이드된다.

골드뱅크 클리커스 時節 (1999-2001) [ 編輯 ]

골드뱅크는 玄周燁 迎入效果를 톡톡히 보았지만, 플레이오프 進出에는 失敗했다. 이듬해인 2000年 현주엽은 무릎을 크게 다쳤고, 手術과 再活로 인해 00-01年 시즌에는 코트에 나서지 못한 競技가 더 많았다. 平均 得點이 16.7得點으로 떨어졌고 팀 成跡도 곤두박질쳤다.

常務 時節 (2001-2003) [ 編輯 ]

2001年 6月 14日 현주엽은 常務 에 入隊하였다.

01-02 시즌 籠球大잔치에서 常務는 김주성이 이끄는 前年度 優勝팀 중앙대를 制壓하며 優勝을 하였고 현주엽은 大會 最優秀選手賞(MVP)과 리바운드賞을 받았다. [10]

현주엽은 常務 服務中 出戰한 2002年 釜山 아시안게임 男子 籠球 決勝戰에서 中國에 劇的 逆轉勝을 이끌어 내는데 決定的 寄與를 하였다. [11] 當時 中國은 NBA 指名 1順位에 빛나는 야오밍이 包含되어 있었고, 韓國은 始終一貫 中國에 리드를 當해 終了 3分 17秒를 남기고 71-84로 뒤지며 敗色이 짙었다. 이때 김진 代表팀 監督은 作戰타임을 부른후 현주엽과 김승현을 交替 投入하는 마지막 勝負手를 띄웠다. 현주엽의 미들슛과 골밑突破, 그리고 김승현의 가로채기와 어시스트가 빛을 發하며 韓國팀은 무더기 得點을 엮어나가기 始作했다. 마침내 4쿼터 終了 4.7秒를 남기고 현주엽이 드리블에 이은 大膽한 골밑突破로 레이업슛을 成功, 同點을 만들면서 勝負는 延長戰으로 넘어갔다. 延長戰에서도 김승현과 현주엽의 活躍은 이어졌고 102-100로 競技를 마무리 지으며 20年만에 男子籠球 아시안게임 金메달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2002年 12月 현주엽은 또 다시 무릎을 다쳐 手術臺에 올라 治療와 再活에 1年 餘의 時間이 걸렸다.

현주엽은 2003年 8月에 轉役하였다.

코리아텐더 푸르미/KTF 매직윙스 時節 (2003-2005) [ 編輯 ]

현주엽의 상무 入隊와 거의 비슷한 時期에 골드뱅크는 팀명을 코리아텐더로 變更하였고, 以後 財政難에 시달리던 코리아텐더는 현주엽의 復歸가 몇달 지나지 않은 2003年 11月, 籠球團을 KTF에 賣却하였다. KTF에서는 常務 時節 因緣을 맺은 추일승 監督이 司令塔을 맡았다. 두番의 무릎手術을 거치며 현주엽의 플레이 스타일은 포스트업보다 어시스트 爲主의 外郭플레이로 바뀌어 갔고, 그의 專賣特許인 몸을 날려 레이업슛을 쏜 後 바닥으로 쓰러지는 플레이 또한 回數가 줄어갔다. 이 무렵부터 포인트 포워드라는 말을 듣기 始作하였다.

LG 세이커스 時節 (2005-2009) [ 編輯 ]

04-05 시즌이 끝난뒤 현주엽은 自由契約 選手(FA) 資格을 얻게 된다. 그 동안 萬年 最弱體 팀들에서 活躍하면서 優勝을 願했는데 그러지 못한 恨을 풀기 위해 變化를 願했다. 그 中 LG를 選擇하면서 移籍하게 된다. 球團에서 最高 待遇로 모셔오게 된다. 에피소드로 신기성度 함께 迎入할 수 있었으나 샐러리캡과 포지션 重複을 理由로 같이 뛰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무릎負傷은 그에게서 運動能力과 함께 攻擊 本能까지 앗아가 버렸다. LG로 移籍한 06-07 시즌부터는 마침내 平均 得點이 한자릿數로 떨어졌고, 마지막해였던 08-09 시즌에는 6.73까지 下落했다. [12]

隱退 宣言 [ 編輯 ]

2009年 6月 24日, 현주엽은 現役 隱退를 宣言하고 그 다음날 記者會見을 가졌다. 記者會見場에는 무릎手術 後遺症으로 木발을 짚고 들어섰다. 選手生活中 가장 記憶에 남는 瞬間을 묻는 質問에 2002年 아시안 게임 金메달을 땄을 때를 꼽았고 아쉬운 것으로는 優勝을 해보지 못한 것이라고 對答했다. 마지막 所感으로는 팬들에게 籠球를 좀 잘했던 選手로 記憶됐으면 좋겠다고 傳했다.

解說委員 [ 編輯 ]

以後에는 暫時 籠球와 距離를 두면서 野人으로 지내게 된다. 그러던 中 고려대 切親인 신기성 의 推薦을 받아 2014年 籠球 解說家로 데뷔하며 MBC 스포츠플러스 의 籠球解說委員으로 活動하였다.

監督 經歷 [ 編輯 ]

LG 세이커스 時節 (2017-2020) [ 編輯 ]

2017年에 契約이 滿了된 프로籠球의 名將이었던 김진 監督의 後任으로 昌原 LG 세이커스 의 第7代 監督으로 選任됐다.

코치도 華麗했는데 全 동부 監督이었던 김영만은 首席코치를 맡게 되었고 以後 LG 創團멤버였던 박재헌 코치와 三星 프랜차이즈였던 강혁 코치를 두었다.

하지만, 現役 隱退 以後 제대로 된 指導者 授業이 없었고 코치조차 맡지 않은 바람에 農具契와 籠球팬들은 憂慮를 表示했다.

結局, 球團 歷代 最低性的인 2017-2018 시즌 17勝 9位 沒落과 2019-2020 시즌에도 9位를 包含해서 繼續된 成績 不振으로 인해 契約 滿了 後 辭退했다. 後任으로 조성원 명지대 監督이 赴任하게 된다. [13]

조성원 監督은 팀의 創團 첫 最下位를 當했으나 한시즌 最低 17勝이 아닌 19勝으로 그나마 體面을 지켰다.

無官의 帝王 [ 編輯 ]

현주엽은 華麗하였던 個人 成跡에 비해, 唯獨 優勝과는 因緣이 없었다. 1990年代 그와 함께 大學籠球 全盛期를 보냈던 籠球大잔치 스타들이 프로에 와서 大部分 한番 以上의 優勝을 經驗해 본 것에 비해 현주엽은 9年의 프로生活 동안 單 한番도 챔피언 決定戰에 나가보지 못하였다. 99-00시즌 SK가 正規리그 1位를 달리며 팀을 優勝시키는가 했지만 시즌 途中 트레이드되며 SK의 優勝을 지켜봐야만 했고, 그 以後로 優勝에 가장 近接했던 瞬間은 06-07시즌 LG에서 活躍하고 있을 때로 팀을 正規리그 2位에 올려놓으며 優勝 可能性을 엿보기도 했지만 플레이오프 4强戰에서 LG의 外國人 選手 파스코의 審判 暴行事件이 얽히면서 KTF에게 敗하고 만다. 그나마 아시안 게임 金메달이 唯一한 優勝 經歷이다.

플레이 스타일 [ 編輯 ]

  • 발은 느리지만 70cm에 達하는 서전트 점프 能力으로 골밑을 掌握하고, 센터出身치고는 보기 드물게 드리블 能力과 아웃렛 패스 能力이 좋아서 高校 時節부터 한 競技 平均 5個의 어시스트를 記錄했다. 大學時節부터 種種 멋진 덩크슛을 성공시켜 팬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기도 했다.

에피소드 [ 編輯 ]

  • 中學校 때까지만 해도 1年 先輩 윤제한 , 2年 先輩 박준영 에 밀려 벤치워머였고, 이 때의 樂은 같은 벤치워머人 徐章勳 과 訓鍊을 제끼고 水泳場에 놀러가는 것이었다고 한다(MBC 무릎팍 道士-2013年 8月 15日 徐章勳便).
  • 高麗大學校 時節, ABC大會 덩크슛 콘테스트에서 백보드를 부순 덩크슛을 炸裂한 적이 있다.
  • 常務에서 除隊한 뒤 찍은 證明寫眞이 盧武鉉 前 大統領과 恰似해 보여서 디씨인사이드 籠球 갤러리의 유저들은 그에게 '盧武鉉注葉', '街카'라는 別名을 붙였다.
  • 隱退 後 事業을 하였지만, 17億 원을 知人에게 詐欺당하기도 했다.

受賞 [ 編輯 ]

選手 [ 編輯 ]

放送人 [ 編輯 ]

放送 活動 [ 編輯 ]

TV 프로그램 [ 編輯 ]

現役時節 出演作 [ 編輯 ]

隱退後 出演作 [ 編輯 ]

廣告 [ 編輯 ]

유튜브 [ 編輯 ]

2021年 2月 1日 먹放 콘텐츠를 다룬 《먹보스 쭈엽이》 유튜브 채널이 오픈되었다.

弘報大使 [ 編輯 ]

  • 2000年 한국이웃사랑회 親善大使
  • 2005年 高麗大學校 開校 100周年 記念 行事 弘報大使

事件 [ 編輯 ]

家族 [ 編輯 ]

그는 2007年 6月 21日 弘益大學校 佛語佛文學科 出身의 一般人 박상현과 結婚하였다. 膝下에는 현준희와 賢俊욱이라는 두 아들이 있다.

  • 아버지 : 현진구 (1944年 ~ 2009年 4月 2日)
  • 어머니 : 홍성화
  • 配偶者 : 박상현 (1979年 ~ )
    • 長男 : 현준희 (2009年 ~ )
    • 次男 : 賢俊욱 (2010年 ~ )

各州 [ 編輯 ]

  1. SPORTS 2.0 2008年 10月 3號
  2. 한겨레 1993年 4月1日 “휘문 玄周燁 고려대 간다”
  3. 京鄕新聞 1994年 4月3日 “안암골 虎狼이 "大(大)逆轉쇼””
  4. 스포츠서울 1994年 4月 2日 “玄周燁,高麗 優勝의 "一等功臣",인터뷰” Archived 2014年 7月 14日 - 웨이백 머신
  5. 京鄕新聞 1995年 10月30日 “高麗大 20連勝 마감 弱體 弘益에 덜미”
  6. 京鄕新聞 1999年 12月25日 “玄周燁=조상현+4億원'빅딜'”
  7. [최창환의 백 투 더 KBL] ‘X-MAS 빅딜의 追憶’ 현주엽-조상현 맞트레이드 Archived 2014年 7月 14日 - 웨이백 머신
  8. 스포츠투데이 1999年 12月 27日 “玄周燁 트레이드 眞짜 理由 .. 玄周燁 抗命과 崔監督의 斷罪”
  9. 京鄕新聞 1998年 2月 27日 “三星 ‘부끄러운 져주기”
  10. 東亞日報 2002年 1月16日 “상무, 中央大 꺾고 籠球大잔치 첫 優勝”
  11. 聯合뉴스 2002年 10月14日 “아시안게임-<籠球> 韓國, 20年만의 金메달(綜合)”
  12. 오마이뉴스 2009年 6月 29日 “陞遷하지 못한 이무기, 玄周燁 ”
  13. 프로籠球 LG 玄周燁 監督, 再契約 不發…"스스로 辭意 表明" - 뉴스1
  14. 前職 籠球選手 玄周燁 飮酒運轉 立件 - 聯合뉴스
  15. 玄周燁, 學暴 疑惑에 "惡意的으로 지어낸 말…搜査 依賴" - 聯合뉴스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김진
第7代 昌原 LG 세이커스 監督
2017年 4月 21日 ~ 2020年 4月 9日
後任
조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