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리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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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政 要人들 오른쪽 뒷줄 첫番째가 차리席, 뒷줄 左路부터 송병조 , 金九 , 曺盛煥 ,로우 조완구 , 이동녕 , 이시영

차리席 (車利錫, 1881年 ~ 1945年 9月 9日 )은 韓國 의 獨立運動家이다. 大韓民國 臨時政府 에서 主로 活動하였다. 一名은 서입환(徐立煥)이고 號는 동암(東岩)이다. 平安北道 宣川郡 出身.

生涯 [ 編輯 ]

1881年 7月 27日 平安南道 宣川郡 에서 아버지 차시헌(車始軒)과 어머니 서시은(徐始恩)의 4男 2女中 셋째아들로 出生하였다. 本貫은 沿岸 (延安)이다.

어려서 漢學을 修學하고 1900年 平壤 숭실學校 正規中等課程 5年制에 入學하여 1904年 第1回로 卒業하였다.

1908年 島山 安昌浩가 設立한 大成學校 敎師로 赴任하여 後學 養成에 힘쓰며, 안창호 양기탁 이 主導한 新民會 平壤支會 評議員으로 活動하였다.

1911年 初代總督人 데라우치總督 暗殺 謀議事件人 新民會 105인 事件 으로 投獄되어 日帝로부터 8年을 言渡받고 3年을 服役하였다. 3·1 運動 以後 1919年 上海로 亡命하여 獨立黨 幹部로 活動하였다.

1921年 大韓民國 臨時政府 의 獨立新聞 編輯局長을 歷任했으며, 1922年 時事책진회와 興士團 遠東委員部에 參與하였다. 1932年 大韓民國 臨時政府 國務委員 等을 歷任했다.

1943年 5月 重慶에서 열린 '在中 韓人大會'에서. 寫眞 왼 쪽이 尤史 金奎植. 두 番째 줄 오른쪽에서 두 番째가 차리席

[[파일:Kwangbeokkun 194002.jpg|섬네일|160px|오른쪽|맨 앞줄 左路부터 ( 박찬익 , 조완구 , 金九 , 이시영 , 차이석
두 番째 줄 맨 왼쪽 성주식 , 오른쪽 김붕준
맨 뒷줄 왼쪽부터 曺盛煥 , 趙素昻 , 이청천 , 이범석 , 이름

1935年 11月 大韓民國 臨時政府 祕書長 에 選出되었다. [1] 1939年 10月 25日 大韓民國 臨時政府 國務委員에 選出되었다. 1940年 9月 大韓民國 臨時政府 國務委員 兼 祕書長에 選出되었고, 1944年 4月 다시 大韓民國 臨時政府 國務委員兼 祕書長에 再選되었다.

1945年 8月 쓰촨省 重慶에서 光復 消息을 接하고 還國準備로 인한 過勞로 9月 5日에 쓰러져 病院에 入院하였다. 9月 9日 還國 直前 死亡하였다. 死亡하기 直前 ”光復이 되었는데 왜 歸國하지 못하고 죽어야 하느냐“며 病床에서 애통해 했다 한다.

事後 評價 [ 編輯 ]

차리席 先生은 海外 革命運動子 가운데 特히 强力한 精神力을 所有하시기로 有名했다. 卓越한 事務處理의 能力이나 病 中에서도 最後의 一角까지 맡으신 使命을 完遂한 剛한 責任感은 韓國 獨立運動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해도 過言이 아니다. 1948年 社會長 當時 이시영 , 金九 의 追慕淡 中에서 [2]

大韓民國 政府 에 依해 1962年에 독립장이 徐薰되었고, 1995年 9月의 이 달의 獨立運動家 에 選定되었다.

家族 [ 編輯 ]

차리席은 本妻 康里性(康利聖,1879年 出生)과 1899年 結婚하여 일찍이 4男을 얻었으나 어려서 잃고, 膝下에 1911年 영애와 1918年 영희 두딸을 얻었다, 否認 康里姓은 日帝의 逼迫을 被害 차리席의 부름에 1922年에 中國 상하이로 두 딸과 함께 가서 生計를 잇기 위하여 밥집을 하며 物心兩面으로 尹奉吉, 李奉昌義士 等의 祕密結社 場所를 提供하고 祕密을 維持하였다.

康里姓은 1932年 紅커우공원 천장절 記念式에서 尹奉吉義士 爆彈投擲 成功으로 血眼이 된 日本이 상하이 臨時政府 要因들에 對한 逮捕命令을 내리자 항저우로 臨時政府를 옮긴 後 流浪의 길을 걷던 中 1937年 中日戰爭이 勃發함에 따라 1940年頃 둘째딸 차영희만 데리고 平壤으로 돌아와 日帝 監視下에 解放 때까지 苦楚를 當하였다.

첫째딸 차영애는 부친 차리席과 함께 人性學校 敎員 等으로 中國에 남아 事實婚 진장권(1935.1.5.結婚, 中國)과 獨立運動을 하였다.

本妻인 康里性 女史는 解放 後 서울 麻浦區 連喜洞 498番地에서 둘째딸 차영희의 家族과 함께 生活하다가 1961年 4月 14日 死亡했다. 1961年 4月 18日 孝昌園 愛國先烈 墓域에 자리한 차리席 墓所에 合掌(1961年 4月 16日 東亞日報 訃告, 民族問題硏究所 2018.11.26. 孝昌園 受難史는 왜 解放 以後에도 持續되었나? ? 孝昌公園, 結局 愛國先烈墓域으로 남다. 植民地 備忘錄 41. 이순우 責任硏究員 參照)되었다.

中國에서 本部인 康里成果 不得已 떨어져 지내던 차리席은 31歲 寡婦인 紅梅穎果의 사이에서 1944年 庶子 영조를 낳았다.

獨立運動家 차리席의 첩 紅梅穎果 庶子아들 차영조 帽子는 光復 直後 차리石耳 死亡하고 歸國해 서울에서 지내다. 6.25 動亂 때 避難地 忠南 扶餘에서 힘들게 살았다. 그러다가 1963年 當時 外務長官이던 崔德新 을 만나 長官 公館의 附屬室에 들어가 生活했다. 獨立運動 하던 臨政時節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최덕신은 차영조를 2年制 夜間 高等公民學校에 넣어주었고 卒業하자 大經商業高等學校에 편입시켜주었다. 長官 退任 後 私邸로 돌아갈 때도 차영조 帽子와 함께했다. 최덕신의 어머니뿐 아니라 夫人 류미영度 이들 帽子를 잘 챙겨주었다. 최덕신이 西獨大使로 간 後에도 母子는 최덕신의 自宅에서 지냈다. [3]

李榮薰, 獨立運動家 차리席의 後孫 詐稱 [ 編輯 ]

서울대 經濟學科 敎授 出身인 李榮薰 李承晩 學堂 校長이 2019年 自身이 獨立運動家 차리席 先生의 外曾孫이라 主張했다. 하지만 차리席의 庶子인 차영조는 이영훈은 차리席 先生의 外曾孫子가 아니다고 밝혔다. 차리席 先生의 庶子인 차영조 獨立有功者遺族會 先生은 MBC와의 인터뷰에서 “큰아버지의 둘째 딸의 딸과 30年前부터 交流하고 있는데 그분(이양자敎授)에게 確認했더니 李榮薰 名譽敎授는 나의 큰아버지의 外曾孫子日 뿐이다. 차리席 先生의 外曾孫子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에 對해 이영훈은 “高(故) 차리席 先生은 自身의 外祖母의 둘째 叔父로, 外外症從祖父라 해야 마땅하나 줄여서 外曾祖父라 했다”고 解明했다. 차리席 先生의 直系 後孫이 아닌 先生의 큰兄인 次元石氏의 外曾孫子다. 卽 次元石氏의 딸의 딸의 아들이 李榮薰이라는 것이다. [4]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煆鍊生, 《先月》 (煆鍊生 지음, 강영매 飜譯, 범우사, 2007) 521페이지
  2. “韓國의 獨立運動家” .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11月 7日에 確認함 .  
  3. ““獨立運動 집안 숨기려 性을 바꿔 살았다”” . 示唆IN. 2018.11.17.  
  4. ““外曾孫子? 팔게 따로 있지” 차리席 先生 외아들, 이영훈 敎授에 一鍼” . 國民日報. 2019.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