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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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作家 情報
出生 1921年 5月 2日 ( 1921-05-02 )
日帝强占期 京畿道 安城郡
死亡 2003年 3月 8日 ( 2003-03-08 ) (81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國籍 大韓民國
言語 韓國語
職業 是認
文學評論家
隨筆家
書畫家
大學 敎授
學歷 日本 도쿄 高等師範學校 專門學士 (1944年 3月)
經歷 한국문인협회 理事長
중앙대학교 講師
이화여자대학교 講師
慶熙大學校 敎授
인하대학교 名譽敎授
宗敎 佛敎
筆名 號(號) 는 片雲(片雲)
活動期間 1949年~2003年
장르 時, 評論, 隨筆, 書畫
受賞 1959年 亞細亞 自由文學賞
國民勳章 동백장
國民勳章 모란장
서울特別市 文化相
3·1 文化相
大韓民國 藝術院賞
大韓民國 文學賞
1996年 金冠文化勳章
配偶者 김준
子女 1男 3女
主要 作品
詩文學 作品
《共存의 理由》
《해마다 봄이 되면》

조병화 (趙炳華, 1921年 5月 2日 ~ 2003年 3月 8日 )는 大韓民國의 是認 이다.

本館 漢陽(漢陽) 이고 雅號(雅號) 는 片雲(片雲)이며 京畿道 安城 에서 出生하였다. 1940年 경성사범학교 卒業 을 거쳐 이듬해 1941年 日本 으로 건너가, 1944年 日本 도쿄 高等師範學校 物理化學科에서 專門學士 學位 를 取得하고 歸國하였다. 1945年 8·15 光復(乙酉 解放) 後 경성사범학교(1945~1946), 제물포고등학교 (1947~1948), 서울高等學校 (1948~1955)의 敎師를 지냈다. 1949年 詩集 《버리고 싶은 遺産》으로 文壇에 登場하였다. 그는 都會人의 哀傷을 平易한 手法으로 노래하여 많은 사람들의 共感을 불러일으켰다. 1955年 중앙대학교 講師, 1957年 이화여자대학교 講師 等을 거쳐 後날 慶熙大學校 文理科大學 學長, 慶熙大學校 敎育大學院長, 世界詩人大會場, 世界詩人大會 大韓民國 國際 理事長, 大韓民國 藝術院 會長, 한국문인협회 理事長, 한국시인협회 名譽 係關詩人 , 인하대학교 名譽敎授 等을 지냈다. 1959年 아시아 自由文學賞 等을 비롯하여 國民勳章 동백장, 모란장, 서울市 文化相, 3·1 文化相, 藝術院賞, 大韓民國 文學賞, 金冠 文化勳章 等을 받았다.

詩集으로 《하루만의 위안》, 《人間高度》, 《밤의 이야기》, 《時間의 宿所를 더듬어서》, 《共存의 理由》, 《남남》 等이 있다.

2003年 3月 8日 別世했다. 享年 83歲.

學歷 [ 編輯 ]

名譽 博士 學位 [ 編輯 ]

家族 關係 [ 編輯 ]

賞勳과 追慕 [ 編輯 ]

  • 1959年 亞細亞 自由 文學賞
  • 1974年 한국시인협회賞
  • 1981年 서울市文化相
  • 1985年 대한민국예술원上
  • 1986年 國民勳章 모란장
  • 1990年 3.1文化相
  • 1992年 大韓民國文學大賞
  • 1996年 大韓民國金冠文化勳章
  • 1997年 5·16民族賞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各州 [ 編輯 ]

  1. 나중에 서울 又石大學校 에 倂合되었으며 以後 서울 又石大學校 또한 高麗大學校 에 統廢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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