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암
(趙鳴岩,
1913年
1月 10日
~
1993年
5月 8日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詩人 兼 劇作家 및 大衆音樂 作詞家로 活動하였던 前職 政治人이었다.
主要 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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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本名인
조영출
(趙靈出)로도 널리 불린다. 只今까지 確認된 露骨的인 軍國家요 中 2/3街 조명암 歌詞로 親日人士로 名單에 올랐다.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서는
文化語
로
祖靈출
이라고 부른다. 作詞家로 活動하면서
이가실
(李嘉實)이라는 藝名을 비롯하여
김다인
(金茶人),
琴韻彈
(金雲灘)이라는 이름을 使用했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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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忠淸南道
牙山
에서 出生하여 지난날 한때
江原道
鐵原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後날
江原道 金貨
에서 成長하였으며 아버지가 일찍 死亡한 뒤 어려운 家庭 環境 때문에
金剛山
에서
運炭
(雲灘)이라는
법명
을 얻어
佛敎
僧侶
로 있다가
1930年
한용운
의 推薦을 받아 佛敎界가 運營하던
寶城高等普通學校
에 入學한 特異한 經歷을 갖고 있다.
1932年
부터 詩 作品을 發表하며 文筆 活動을 始作하였고,
1934年
에 《
東亞日報
》 新春文藝에 當選되면서 本格的으로 作詞가 活動에 들어갔다.
1936年
에는
日本
에 留學하여
와세다 大學
佛文科에 入學하여 修學했다. 留學 中에도 繼續 大衆歌謠 歌詞를 發表하였는데, 多數의 人氣曲을 輩出해 日帝 强占期의 作詞家로는
박영호
와 雙璧을 이룬다. 조명암의 家事는 박영호에 비해 섬세한 面이 돋보였다.
日帝强占期
末期에 映畫 《그대와 나》의 主題歌를 作詞
[2]
하였고, 代表的인 親日 歌謠들人 〈아들의 血書〉, 〈決死隊의 妻〉, 〈血書支援〉, 〈2千5百萬의 感激〉를 作詞한 바 있다. 그가 作詞한 軍國 歌謠는 總 9篇이 알려져 있다.
[3]
劇作家로도
1944年
〈勝利에의 길〉이라는 親日 演劇의 脚本을 썼다.
[4]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選定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中 音樂 部門에 包含되었고,
2009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光復 後에는
朝鮮演劇同盟
과
조선문학가동맹
에 加入하여
左翼
系列에 加擔했다. 〈獨立軍〉, 〈論介〉를 비롯해
낙랑극회
가 文化劇場, 민중극장과 共同 公演하여 많은 觀客을 모은
안영일
演出의 〈偉大한 사랑〉(1947)李 演劇同盟 時期의 代表作이다.
1948年
越北하여 北韓 藝術界에서 重用되었고,
韓國 戰爭
中에는
朝鮮人民軍
을 위한 〈祖國保衛의 노래〉를 發表하는 等 陣中 歌謠를 作詞하며 活潑히 活動했다.
北韓에서 高位職인 文化性 浮上,
民族藝術劇場
總長,
朝鮮文學藝術總同盟
副委員長 等을 歷任하여,
大韓民國
에서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꿈꾸는 白馬江〉, 〈新羅의 달밤〉, 〈
船艙
〉, 〈알뜰한 當身〉, 〈
木浦는 港口다
〉, 〈花柳春夢〉, 〈고향초〉, 〈落花流水〉, 〈眞珠라 千里 길〉과 같은 日帝 强占期의 히트曲들은 作詞者의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1988年
越北 藝術人들이 解禁된 後에야 作詞者가 조명암임을 밝힐 수 있었다.
古典인 《
春香傳
》을 再解釋하여 民族歌劇人 〈春香傳〉(1960)을 執筆
[5]
했는데, 이 作品은
金正日
의 특별한 關心을 받아 1980年代 後半 再創作되면서 北韓 公演系에서 重要한 作品으로 取扱되고 있다.
[6]
1973年
에 國旗勳章을 받고
김일성賞
桂冠詩人이 되었다.
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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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옥희, 이영미, 이순진, 李承姬 (2006年 12月 15日). 《植民地時代 大衆藝術人 事前》. 서울: 소도. 320~322쪽쪽.
ISBN
9788990626264
.
- “越北詩人 조명암 詩全集 出刊”. 聯合뉴스. 2003年 5月 22日.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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