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要 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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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인
조영출
(趙靈出)로도 널리 불린다. 只今까지 確認된 露骨的인 軍國家요 中 2/3街 조명암 歌詞로 親日人士로 名單에 올랐다.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서는
文化語
로
祖靈출
이라고 부른다. 作詞家로 活動하면서
이가실
(李嘉實)이라는 藝名을 비롯하여
김다인
(金茶人),
琴韻彈
(金雲灘)이라는 이름을 使用했다.
忠淸南道
牙山
에서 出生하여 지난날 한때
江原道
鐵原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後날
江原道 金貨
에서 成長하였으며 아버지가 일찍 死亡한 뒤 어려운 家庭 環境 때문에
金剛山
에서
運炭
(雲灘)이라는
법명
을 얻어
佛敎
僧侶
로 있다가
1930年
한용운
의 推薦을 받아 佛敎界가 運營하던
寶城高等普通學校
에 入學한 特異한 經歷을 갖고 있다.
1932年
부터 詩 作品을 發表하며 文筆 活動을 始作하였고,
1934年
에 《
東亞日報
》 新春文藝에 當選되면서 本格的으로 作詞가 活動에 들어갔다.
1936年
에는
日本
에 留學하여
와세다 大學
佛文科에 入學하여 修學했다. 留學 中에도 繼續 大衆歌謠 歌詞를 發表하였는데, 多數의 人氣曲을 輩出해 日帝 强占期의 作詞家로는
박영호
와 雙璧을 이룬다. 조명암의 家事는 박영호에 비해 섬세한 面이 돋보였다.
日帝强占期
末期에 映畫 《그대와 나》의 主題歌를 作詞
[2]
하였고, 代表的인 親日 歌謠들人 〈아들의 血書〉, 〈決死隊의 妻〉, 〈血書支援〉, 〈2千5百萬의 感激〉를 作詞한 바 있다. 그가 作詞한 軍國 歌謠는 總 9篇이 알려져 있다.
[3]
劇作家로도
1944年
〈勝利에의 길〉이라는 親日 演劇의 脚本을 썼다.
[4]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選定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中 音樂 部門에 包含되었고,
2009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光復 後에는
朝鮮演劇同盟
과
조선문학가동맹
에 加入하여
左翼
系列에 加擔했다. 〈獨立軍〉, 〈論介〉를 비롯해
낙랑극회
가 文化劇場, 민중극장과 共同 公演하여 많은 觀客을 모은
안영일
演出의 〈偉大한 사랑〉(1947)李 演劇同盟 時期의 代表作이다.
1948年
越北하여 北韓 藝術界에서 重用되었고,
韓國 戰爭
中에는
朝鮮人民軍
을 위한 〈祖國保衛의 노래〉를 發表하는 等 陣中 歌謠를 作詞하며 活潑히 活動했다.
北韓에서 高位職인 文化性 浮上,
民族藝術劇場
總長,
朝鮮文學藝術總同盟
副委員長 等을 歷任하여,
大韓民國
에서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꿈꾸는 白馬江〉, 〈新羅의 달밤〉, 〈
船艙
〉, 〈알뜰한 當身〉, 〈
木浦는 港口다
〉, 〈花柳春夢〉, 〈고향초〉, 〈落花流水〉, 〈眞珠라 千里 길〉과 같은 日帝 强占期의 히트曲들은 作詞者의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1988年
越北 藝術人들이 解禁된 後에야 作詞者가 조명암임을 밝힐 수 있었다.
古典인 《
春香傳
》을 再解釋하여 民族歌劇人 〈春香傳〉(1960)을 執筆
[5]
했는데, 이 作品은
金正日
의 특별한 關心을 받아 1980年代 後半 再創作되면서 北韓 公演系에서 重要한 作品으로 取扱되고 있다.
[6]
1973年
에 國旗勳章을 받고
김일성賞
桂冠詩人이 되었다.
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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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옥희, 이영미, 이순진, 李承姬 (2006年 12月 15日). 《植民地時代 大衆藝術人 事前》. 서울: 소도. 320~322쪽쪽.
ISBN
9788990626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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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越北詩人 조명암 詩全集 出刊”. 聯合뉴스. 2003年 5月 22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