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구 (192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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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구
(尹鼎求)
出生 1927年 4月 7日 ( 1927-04-07 )
死亡 2018年 11月 18日 ( 2018-11-18 ) (91歲)
國籍 일본 제국의 기 日本 帝國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學歷 釜山水産大 卒業
職業 漁夫, 企業人, 漁業人
父母 윤광선 (아버지), 남궁자頃 (어머니)
配偶者 박혜준
子女 윤도영, 尹建永, 윤혜영
親戚 윤치호 (할아버지), 윤용구 (兄), 윤명구 (동생)

윤정구 (尹鼎求, 1927年 4月 7日 ~ 2018年 11月 18日 )는 大韓民國 의 企業人, 漁業人으로, 制動産業의 遠洋船長, 考慮遠洋 常務, 專務理事, 副社長, 오양水産 社長을 歷任했다. 大韓民國 현대 첫 遠洋操業船인 지남호 의 船長이었다. 1957年 6月 李承晩 大統領 의 名으로 最初로 大韓民國 最初로 海外 操業에 나섰다. 親日派 윤치호 의 孫子였다.

制動産業 遠洋漁業開拓船長, 童話 船團長, 童話 사모아 駐在員, 考慮遠洋漁業 常務, 專務理事, 考慮遠洋漁業 副社長 等을 거쳐 1990年 5月 까지 오양水産 代表理事 社長을 지냈으며, 水産技術協會 理事를 歷任했다. 또한 童話에 在職 當時에는 海外 最初의 派遣원으로 勤務하기도 했다. 1990年 5月 오양水産 拷問이 되어 1998年 6月 까지 在職했다.

生涯 [ 編輯 ]

初期 活動 [ 編輯 ]

佐翁 윤치호 의 孫子이자 윤광선 과 그의 夫人 남궁자京義 次男으로 태어났다. 外할아버지는 社會事業家, 啓蒙運動家이자 作家인 漢書 남궁억 이다. 農林長官을 지낸 梧堂 윤영선은 그의 큰아버지였고, 서울大學校 副總長과 總長을 지낸 윤일선 , 商工長官, 서울市長, 4代 大統領을 지낸 윤보선 은 7寸 아저씨이며, 서울市長과 內務長官을 지낸 윤치영 은 再從祖父가 된다.

1948年 釜山水産大學 (現 부경대學校 )를 卒業하고 배를 타기 始作하였다. 以後 여러 船舶의 乘務員으로 일하다가 심상준 制動員兩會社 에 入社, 지남호 의 船長이 되었다.

1957年 6月 에는 李承晩 大統領의 特別 指示로 지남호 를 몰고 印度洋을 가게 되었다. 이때 農林部 水産漁撈課長 남상규, 漁業指導館 이제호 外에 水産振興院 職員들이 同乘했고, 美國 에서 特別히 招聘해온 참치잡이 經歷自認 모르간 等이 同乘하였다.

現代韓國 最初의 遠洋漁船 지남호 [ 編輯 ]

1957年 6月 26日 最初로 지남호 를 타고 印度洋 원釀造業에 나섰다. 이때 釜山港 1埠頭 海洋警備隊 講堂에서 政府 關係者와 水産團體長들이 參席한 가운데 盛大한 記念式까지 擧行됐다. [1] 이때 農林部 指導員인 이제호 等을 帶同하고 出港, 釜山港을 出港한 지남호 日本 시모노세키港 에 入港해 給油 및 普及을 받은 뒤 臺灣 東쪽 海上에서 語法 訓鍊과 漁場 探索을 위한 첫 試驗操業을 했으나 失敗하였다.

李承晩 大統領이 直接 '南쪽으로 배를 몰고 가 나라의 살 길을 찾아라'는 뜻에서 배 이름도 지남(指南)호로 지어준 배였다. [2] 印度洋으로 내려가 試驗操業을 하는 것이 任務였지만 참치라고는 듣도 보도 못한 그와 船員들이었다. 美國의 援助次官 32萬6千달러를 들여 1949年 導入한 배도 沿近海 試驗操業에 活用됐지만 별다른 成果를 거두지 못한 골칫거리였다. [2] 그러나 그는 지남호 를 맡아 印度洋 航海를 强行한다.

6月 29日 지남호는 뱃머리를 南쪽으로 向했다. 逆境은 곧 찾아왔다. "唯一하게 참치 連勝語法을 가르쳐주기 위해 同乘했던 美國人이 臺灣 近處에서 낚시줄을 던지다 허리를 甚하게 다쳐 배에서 내리고 말았어요." 빈손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두고 苦悶하였다. [2] 그는 落膽한 船員들을 불러모았다. "戰爭의 慘禍에서 아직 完全히 벗어나지 못한 가난한 祖國을 생각하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試驗操業을 성공시키자." 多幸히 臺灣에서 참치連勝漁船을 잠깐 탄 적이 있는 船員이 1名 있었다. [2]

물을 아끼기 위해 洗手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劣惡한 狀況을 겪으며 出港한 지 한달 보름이 훌쩍 지난 光復節에 처음으로 참치 漁獲에 成功한다. 지남호는 印度洋에 첫 連勝낚시를 던졌다. 사람 키만한 黃다랑어들이 물 밑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을 본 尹 船長과 船員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2] 참치 操業에 成功한 後 차곡차곡 쌓인 참치는 보름 뒤 10t에 이르렀다. "참치라는 말도 그때는 없었어요. 日本말로 마구로라고 하거나 튜나(tuna)라고 불렀죠."

印度洋 참치 兆劃 成功 [ 編輯 ]

그 해 8月 윤정구는 지남호를 이끌고 다시 印度洋 니코發아일랜드 海域에 到着하였다. [1] 當時 그의 指示에 따라 낚시를 던진 16名의 船員들은 사람 키만한 巨大한 물고기(새치) 한 마리를 잡는 瞬間 喊聲을 터트렸다. [1] 後날 그는 “當時 漁獲量이 0.5톤 程度에 不過했지만 純粹 우리 技術과 우리 船員들의 努力으로 얻은 結實이라는 데 감격스러웠다”고 말했다. 지남호는 하루 0.5~1톤씩 모두 10톤 假量의 漁獲高를 올리고 108日만인 10月 4日 釜山港 으로 돌아왔다. [1]

지남호의 印度洋 操業消息은 當時 싱가포르 에서 發行되는 英字新聞에 報道돼 李承晩 大統領이 알게 됐고, 지남호가 잡은 새치는 釜山에서 飛行機로 景武臺로 공수돼 李承晩 大統領에게 바쳐졌다. [1] 이때 李承晩 大統領은 새치를 참치로 알고 記念撮影까지 했다. [1]

尹 船長은 試驗操業 成功에서 自信感을 얻어 1958年 1月 다시 지남호를 이끌고 南太平洋 사모아 近海에 첫 商業操業에 나섰다. [2] 1958年 1月 다시 지남호를 이끌고 出港, 南太平洋 사모아 近海에서 1年 3個月間 操業해 눈다랑어, 黃다랑어 等 100餘톤의 漁獲高를 올렸다. [1] 以後 그의 참치 操業 成功을 契機로 制動産業에서는 지남호 1號, 2號, 3號로 增員하여 漁獲에 나섰다.

그뒤 윤정구는 制動産業 遠洋漁業開拓船長이 되었다가 童話로 옮겨 童話 船團長 等으로 活動하였다. 한때 그는 童話의 사모아 駐在員이 되었는데, 이는 韓國 企業이 海外基地에 駐在員을 派遣한 첫 事例였다. [3]

漁業, 企業 活動 [ 編輯 ]

1995年 까지 現場에서 일하다 오양水産 社長을 끝으로 隱退했다. [1] 以後 그는 株式會社 童話의 常務가 되었다가 考慮遠洋 의 常務가 되었다. 다시 1976年 考慮遠洋漁業 專務理事, 1979年 考慮遠洋漁業 副社長 等을 거쳐 考慮遠洋 의 社長을 지내기도 했다. 1969年 7月 5日 에는 동영化學株式會社 監査役을 맡기도 했다. [4] 1973年 7月 에는 業務報告次 日本을 다녀오기도 했다.

1980年 9月 에는 오양水産 의 代表理事 社長이 되었으며 1985年 9月 26日 에는 맛살, 젖갈類 外에도 오징어 튀김구이인 오양진美시리즈를 開發하였다. [5]

1990年 5月 까지 오양水産 代表理事 社長을 지냈으며, 水産技術協會 理事를 歷任했다. 1990年 5月 오양水産 拷問이 되어 1998年 6月 까지 在職했다. 1991年 11月 13日 第5回 越海水産相 功勞賞, 1994年 6月 4日 한국원양어업협회 功勞牌 等을 受賞하였다.

2007年 6月 27日 遠洋漁業 發展 功勞로 강무현 海洋水産部 長官 으로부터 海水部長官 感謝牌를 授與받았다. [6]

賞勳 經歷 [ 編輯 ]

家族 關係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照 [ 編輯 ]

  1. 遠洋漁船 1號 지남호 船長 윤정구氏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韓國日報 2007.06.27
  2. "먼 南쪽 바다서 나라 살길 찾았다" Archived 2016年 3月 10日 - 웨이백 머신 釜山日報 2007. 06.2
  3. 每日經濟 1973年 8月 16日子 4面, 經濟面
  4. 每日經濟 1969年 7月 5日子 2面, 經濟面
  5. 每日經濟 1985年 9月 26日子 10面, 經濟面
  6. 韓國 遠洋漁業 50周年 國際심포지엄 開催 뉴스와이어
  7. “茫茫大海서 참치 처음 낚던 感激 아직도 생생” 서울新聞 2007年 8月 5日子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