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석연 (畫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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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석연 (元錫淵, 1922年 - 2003年 11月 5日 )은 大韓民國 의 畫家, 作家이다. 西洋畫家이자 鉛筆畫家이며 1945年 美國 公報院에서 첫 個人展示會를 연 以後 60餘年間 鉛筆畫 를 主로 그렸다. 靜物과 事物 等을 主로 그렸으며 精密한 鉛筆畫로 有名하였다. 그가 鉛筆畫 로 그린 作品 中 '개미'가 有名하여 一名 '개미畫家'로도 불렸다.

國內外에서 37次例 個人展을 가졌다. 그는 特히 개미의 生態系를 造形化한 作業으로 有名하다. [1] 一生을 鉛筆 한자루에 맡기고 다른 樣式의 作品行爲를 拒否했으며 特히 개미의 生態系를 造形化하는 作業으로 有名하였다. [2] 獨立運動家 兼 政治人 佐翁 윤치호 의 孫女사위이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그는 1922年 黃海道 莘川 에서 8男妹 막내 아들로 出生하였다. 원석연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해 黃海道에서 있었던 美術大會에서 特選을 받았다. 書藝家였던 아버지의 後援과 激勵로 日本 으로 留學, 가와바다(川端)에 美術學校 入學하였다. 學窓時節 그는 石膏 데생을 그리라는 敎師의 指示를 拒否하기도 했다. 그에 依하면 속이 텅 비어있고 生命力이 없는 石膏 를 그려야 할 理由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이어 그는 '事物을 있는 그대로 描寫하는 것은 카메라가 하는 것이고 畫家는 鉛筆로 事物의 裏面, 곧 生命을 그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그에 依하면 鉛筆 線에는 리듬이 있고 마무리가 있으며 그래서 生命이 存在하는 것이라 한다. 鉛筆 線에는 詩와 哲學이 있다는 것이다. 1945年 初 解放 直前에 韓國으로 들어왔다가 몰래 太極旗를 그려서 사람들한테 나누어주다 逮捕되어 刑務所에 갇히기도 했다.

데뷔 [ 編輯 ]

1945年 美 公報院에서 展示會를 하였다. 그런데 展示會 當時 돈이 없어 額子가 없이 종이만 壁에 붙여 展示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評價가 좋아 當時 박득수 , 李穗根 等 先輩들이 "드디어 韓國에 鉛筆畫가 생겼다"고 반겼다고 한다. 1946年 美國 公報院 에 採用되어 그림을 繼續 그렸으나 1950年 避難 當時 그림 大部分이 流失되었다. 1945年 美國 公報院에서의 첫 個人展을 始作으로 60餘年 동안 鉛筆畫를 主로 그렸는데 德分에 그는 美術界에서 '時代의 異端兒'라 불리기도 했다. 많은 量의 鉛筆畫를 남겨, 大韓民國 國內에서 그에 匹敵할 例를 찾을 수 없을 程度로 그는 平生 鉛筆畫 作家로 有名하였다.

美 公報院을 退職한 以後에는 個人畫家로 西洋畫, 靜物畫, 鉛筆畫를 그렸다. 그는 主로 鉛筆火를 많이 남겼는데, 一般的으로 鉛筆은 그림을 그리기 前에 밑그림으로 그리기 위해 쓰는 境遇가 大部分인데, 이때문에 그를 모르는 一般人이나 美學者들은 單純히 鉛筆로 그렸다는 것만으로 그의 作品을 貶下하였다. 2004年 10月 에 열린 관훈동 갤러리 展示會에 出品되었던 作品들은 避難 以後의 作品들이다. 원석연의 冊床을 열어보면 數千個의 몽당 鉛筆이 가득히 있었다 한다. 靜物, 淸溪川 의 板子村, 줄에 매달린 굴비, 개미, 마늘 . 號費 鐵條網, 엿가위석쇠 等을 그렸으며 黑白으로 그렸다.

畫家, 藝術 活動 [ 編輯 ]

45年 美國公報院에서의 첫 個人展以後 지난 2001年 10月 서울 갤러리아트사이드에서 열린 八旬回顧展까지 여러 番 作品會를 開催했다. [3]

한便 鉛筆로 밑그림을 그리다가 그 魅力에 빠졌다는 그는 “鉛筆로 線을 잘못 그리는 境遇가 있으면 그 종이를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始作해야 하기 때문에 油畫보다 더 어려운게 鉛筆畫”라고 한다. [4]

그는 一生 동안 수많은 개미와 개미 떼를 描寫한 그림을 國事實的으로 그렸다. 이로써 그에게는 '개미 畫家'라는 別名이 붙기도 했다. 1953年 作品' 개미'를 비롯해 50年代에 그린 여러 篇의 개미 그림이 있다. 그 中 한 개미 作品은 타이어 자국과 고무신 自國 等의 새겨진 땅위레 數千마리의 개미가 登場한다. 이 作品은 종이의 變色과 毁損이 있었지만 2000年代 以後 復元했다. 그는 개미 그림을 그리기 위해 直接 개미들을 觀察하였고, 한番은 琉璃管에 개미를 넣고 기르면 觀察했다고한다.

國展, 公募展 拒否 [ 編輯 ]

鉛筆만으로도 굴비, 호미, 낫, 가위, 鐵網과 같은 事物을 精密하게 描寫한 그림은 極事實畫임에도 不拘하고, 先(禪)敵이면서도 哲學的인 느낌을 준다. [5] 그는 平生 “내 그림을 評價할 만한 사람은 없다”는 固執으로 平生 國展이나 公募展에 出品하지 않은 채 37回의 個人展만을 가졌으며 言論의 인터뷰 要請에도 좀처럼 應하지 않았다. [5]

스물여덟의 나이에 ‘素描家로서 一家를 이뤘다’는 評을 들을 程度로 그는 出衆한 實力을 가지고 있었다. [6] 그러나 그는 孤獨했고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6] 否認 윤성희에 依하면 원 畫伯은 “‘누가 나를 審査하겠느냐’며 公募展 出品도 마다한 채 ‘내 일을 할뿐’이라며 妥協이라곤 모르고 平生 그림만 그리던 분”이라 한다. [7]

生涯 後半 [ 編輯 ]

그는 生前에 '개미는 自身이 맡은 일을 죽는 瞬間까지 혼지 않는다. 일개미는 日만하고 兵丁개미는 일개미를 지켜준다. 人間亦是 平生 自身의 所任愛 忠實해야한다' 고 입버룻처럼 말했다 한다. 作品 中 1959年 石窟庵 의 文殊菩薩賞을 鉛筆로 그린 石窟庵 文殊菩薩은 鉛筆로 그른 것이 아니라 一一이 數千個의 點을 찍어 製作한 것이라 한다. 石窟庵 文殊菩薩 을 完成하기 위해 그는 直接 慶州 石窟庵 을 訪問, 3個月間 石窟庵에서 滯留하며 生活했다 한다. 石窟庵 文殊菩薩에서 그는 文殊菩薩賞의 세워 든 오른팔, 菩薩像 손에 든 盞,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자락 等의 결을 事實的으로 描寫했다. 그의 作品의 特徵은 絶對 지우개를 使用하지 않았는데, 主로 黑白火가 많지만 鉛筆 하나로 일곱가지 色相을 그려낸다고 한다.

2001年 展示會를 하였다. 2002年 10月 의 八旬戰에서는 細密한 描寫의 개미그림을 비롯해 청계천邊 板子村그림과 農村風景및 낫 갈쿠리等 鐵物을 그린 鉛筆火를 發表했다. [3] 그는 作品 大部分 鉛筆로 그린 黑白 鉛筆畫를 많이 그렸으며 西洋畫, 靜物畫 等도 있다. 作品으로는 靜物, '苦痛과 歡喜의 二重奏'. '朴正熙 前 大統領 生家' [8] , 動物, 마을 風景, 솔방울, 마늘 시리즈, 굴비, 明太, 꽁치, ‘병아리와 거미’,‘둥지’,‘성난 波濤’,‘석쇠와 生鮮’, 釜山 避難地에서 그린 개미(1953), 마늘(1997), 臨終 直前에 그린 문수菩薩像 等이 있다.

2003年 11月 5日 持病인 肝癌으로 死亡하였다. 서울 도봉구 쌍문동 한일병원에서 발인 後 葬禮式은 辟除火葬場에서 擧行되었다. [9] 當時 그의 나이 享年 81歲였다.

作品性 [ 編輯 ]

밑그림 程度로 認識되던 鉛筆畫를 堂堂한 美術 장르로 끌어올리기로 하고 藝術的 勝負를 걸었다. 西歐文化에 阿附하는 旣存 畫壇의 風土에 對한 一種의 批判이기도 했다. [10]

戰爭의 傷痕과 激動期의 人間群像을 隱喩한 精巧한 개미群像의 그림을 비롯, 無彩色의 종이 鉛筆 素材로 剛하면서도 선(禪)적인 이미지를 표출시켰던 鉛筆畫家다. [7]

일화 [ 編輯 ]

그에 依하면 "鉛筆畫가 油畫보다 쉽다는 先入見이 있으나 實際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10] 그는 그림에 對한 執念은 徹底하였다 한다. 지우개를 使用하지 않았다는 事實은 우리를 한 番 더 놀라게 만든다. 그는 鉛筆로 線을 잘못 그리면 종이를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始作해야 하기 때문에 鉛筆畫가 油畫보다 더 어렵다고 하였다. 그는 作家노트를 통해서는 鉛筆 線에는 '음(音)'과 '色(色)'이 있다고 主張했다. 平素에도 그는 鉛筆로 일곱 가지 色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見解였다.

評價 [ 編輯 ]

鉛筆은 그림을 그리기 前에 밑그림으로 그리기 위해 쓰는 것이라 그를 모르는 一般人이나 美學者들은 單純히 鉛筆로 그렸다는 理由로 그의 作品을 貶下하였다. 그러나 2000年 代에 와서야 鉛筆畫度 一種의 作品으로 認定되기 始作했고, 그는 自身만의 造形言語와 作品世界를 完成시켰을 뿐더러 '鉛筆畫'를 데생과는 差別되는 하나의 獨立的 美術장르로 昇格시켰다는 評價를 받고 있다.

鉛筆畫라는 理由만으로 作品을 貶毁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늘날 그는 鉛筆火를 데생과는 差別되는 獨立的 美術 장르로 昇格시켰다는 評價를 받을 程度로 造形言語와 作品世界를 인정받는다.

美術評論家 윤범모는 그의 作品傾向에 對해 “오랜 觀察과 內密한 形象化 作業으로 이루어지는 원석연 畫伯의 그림은 그 作業過程을 통해 自己를 觀照하는 行爲와 같다”면서 “비록 事物의 形象을 極事實的으로 描寫하고 있지만 形象 그너머의 다른 世界로 우리를 引導한다”고 說明했다. [5]

家族 關係 [ 編輯 ]

기타 [ 編輯 ]

그의 개미 그림들을 새마을 運動이 한창이던 時期에 근면함을 象徵하는 作品으로 評價된다. 또한 개미그림에 나오는 개미들 中 머리와 다리가 끊어진 개미들은 짓밟힌 弱者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表現한 것이라 한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