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치 요시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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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요시타카
大? 義隆
오우치 요시타카의 초상화. 명문 말미(그림 왼쪽 맨 끝줄)에 요시타카의 계명인 '용복사전서운주천대거사(竜福寺殿瑞雲珠天大居士)'가 보인다. 류후쿠지 소장.
오우치 요시타카의 肖像畫. 名文 末尾(그림 왼쪽 맨 끝줄)에 요시타카의 誡命人 '용복사展서운주千對擧事(?福寺殿瑞雲珠天大居士)'가 보인다. 類후쿠지 所長.
오우치 마름모
오우치 마름모
無事 情報
時代 센고쿠 時代 (??時代)
出生 에이쇼 (永正) 4年 11月 15日 ( 1507年 12月 18日 )
死亡 덴分 (天文) 20年 9月 1日 [1] ( 1551年 9月 30日 )
改名 祈禱마루(?童丸, 兒名) [1] →요시타카(義隆)
別名 수誡命(受領名): 스오노스케(周防介) [1]
尊稱: 오우치노스케(大?介) [1]
誡命 類후쿠지逃奴 서운주千對擧事(?福寺殿瑞雲珠天大居士) [1]
幕府 무로마치 幕府 (室町幕府) 스誤 (周防)? 나가토 (長門)? 이와미 (石見)? 不젠 (豊前)? 지쿠젠 (筑前)의 슈고 (守護) [1]
主君 아시카가 요시하루 (足利義晴)→ 요시테루 (義輝)
官位 種5爲하 (?五位下) [1] 、種5位相(?五位上) [1] 、社쿄노다以後(左京大夫) [1] 情5爲하 (正五位下) [1] 스오노스케 (周防介)、 지쿠젠老카미 (筑前守)、 種4爲하 (?四位下) [1] 다자이노다이니 (大宰大?) [1] 、四爻에노곤노스케(左兵衛?佐) [1] 、種4位相 [1] 、孝婦勞困老다이스케(兵部?大輔) [1] 情4爲하 (正四位下) [1] 이요노스케 (伊予介) [1] 種3位 (?三位) [1] 、始終(侍?) [1] 、情3位(正三位)、兵部卿(兵部卿) [1] 種2位 (?二位) [1]
氏族 오우치 氏 (大?氏)
父母 아버지: 오우치 요시오키 (大?義興), 어머니: 나이吐 히로料理 (?藤弘矩)의 딸 도쿄都노(東向殿)
兄弟姊妹 오미야히메(大宮?, 요시미 마社料理吉見正?의 否認)、 요시타카 、女子 兄弟( 오토모 要視시게 의 情實)、女子 兄弟( 호소카와 모치打카 의 情實)、女子 兄弟(이치조 后事後油一?房冬의 否認)、 히로오키 (弘興)、女子 兄弟(아시카가 요시코레足利義維의 否認)
配偶者 情實 마데노코地 사다코(万里小路貞子 , 마데노코地 스에후사万里小路秀房의 딸)
繼室 小槻氏 吳사이 夫人おさいの方 )
側室 나이토 오키모리 (?藤興盛)의 딸, 히로하시 가네스에?橋兼秀의 딸 ? ??院御新造、服部多門의 딸 ? 이코마 否認(生駒夫人)、오하라 氏(大原氏)
子女 슈코(珠光)、오우치 요시타카(大?義尊)、마다 가메쓰루마루(問田?鶴丸, 요시노리義?)、오이시 요시打네(大石義胤)
兩者 하루모치 (晴持) 요시나가 (義長, 하루히데晴英) 오자키노 쓰步네(尾崎局, 모리 다카모토 의 否認)
墓所 다이네이지(大寧寺, 日本 야마구치 縣 나가토 時 )

오우치 요시타카 ( 日本語 : 大?義隆 おおうち よしたか [ * ] )는, 日本 센고쿠 時代 의 武裝, 슈고 다이묘 利子 센고쿠 다이묘 이다. 스誤 의 再請官印 出身으로 센고쿠 다이묘 로 발돋움한 스誤 오우치가 의 第16代 堂主이다.

오우치 第15代 堂主였던 오우치 요시오키(大?義興)의 嫡男으로 어머니(요시오키의 情實)는 나이吐 히로料理(?藤弘矩)의 딸이다. 스誤(周防) ? 나가토(長門) ? 이와미(石見) ? 아키(安芸) ? 不젠(豊前) ? 지쿠젠(筑前)의 슈고(守護)를 맡았다. 官位는 種2位(?二位) 兵部卿(兵部卿) 兼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 兼 侍從(侍?)이다.

요시타카의 時代 오우치는 領土上으로 全盛期를 맞이하였고, 文化面에서도 오우치 文化 라 불리는 全盛期였으나, 그의 文治(文治) 政治에 不滿을 품은 가신 스에 다카後嗣(陶隆房)의 謀反으로 요시타카와 그 一族은 自決하였다.

生涯 [ 編輯 ]

幼年期에서 少年 時節까지 [ 編輯 ]

에이쇼 4年( 1507年 ) 陰曆 11月 15日 스誤 , 나가토 의 태수(太守) 오우치 氏 第15代 堂主 오우치 요시오키 의 赤字로 오우치 氏 邸宅(大?氏館)에서 태어났다. [2] 어머니는 요시오키의 正室로, 오우치가 다스리던 地域 가운데 하나인 나가토의 슈고다이(슈고 代理) 나이吐 히로料理 의 딸이다. [3] [4]

兒名은 祈禱마루(?童丸 , きどうまる)라 하였는데, 이는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마사히로 (政弘) 等 오우치 歷代 堂主들이 使用해 온 이름이기도 했다. 요시타카는 어려서부터 赤字의 地位를 明確히 굳히고, 同時에 오우치 집안에서 歷代로 代물림되다시피 했던 家督 相續 過程에서 發生하는 內紛을 豫防하기 위해서 그렇게 命名된 것이기도 했다.

요시타카는 어렸을 때는 乳母나 많은 女子들에게 둘러싸여 成長했고, 少年 時節에는 스케逃奴 님(介殿?)라고 불렸는데, 이는 스오노스케(周防介)의 略稱으로 오우치 堂主의 地位로 世襲되어 온 것이었고 요시타카가 赤字로서 取扱되었다는 證左이기도 했다. [5] 한便 요시타카가 스오노스케가 된 해는 明確하지 않지만, 에이쇼 17年(1520年) 時點에서는 요시타카가 스케逃奴 님으로 記錄되고 있어서(『高嶺太神宮?記』) 이 무렵에 스誤노스케로 敍任되지 않았나 여겨지고 있다. [6] 한便 이 時期를 전후하여 쇼군(?軍) ? 아시카가 요시打네 (足利義稙)로부터 이름者 한 글字를 받아 元服(元服)을 行하고 요시타카(義隆) [a] 라 이름하였다. [6]

家督 相續 [ 編輯 ]

元服을 行한 뒤인 다이에이 (大永) 2年( 1522年 )과 4年( 1524年 )에 아버지 요시오키를 따라 아키 로 出陣하였다. 이때에는 5月에 別動隊를 거느리고 이와쿠니 요코地(岩?永興寺)로 해서 6月에 이쓰쿠시마 (?島)로 들어가, 7月에 스에 오키後嗣 (陶興房)와 함께 아키 다케다 氏(安芸武田氏)의 사토카나 酸性(佐東銀山城)을 攻擊한다. 그러나 8月 아마고 側으로부터 援軍으로 온 모리 모토나리 (毛利元就)에게 敗해 退却한다. 그리고, 山人 (山陰)의 아마고씨와도 交戰한다. [6] [7]

이 무렵에 교토의 舊敎(公卿)인 마데노코地 히데後嗣(万里小路秀房)의 딸 사다코(貞子)를 正室로 맞이하였다. [6] 이러한 渦中에 다이에이 3年( 1523年 )에 닝보의 난 (寧波の?)李 勃發하고, 以後 오우치 氏는 東中國海의 貿易을 獨占하게 된다.

郊勞쿠 (享?) 元年( 1528年 ) 12月 아버지가 死亡하면서 요시타카는 22歲로 오우치의 家督을 相續받았다. [5] 오우치 집안에서는 家督 相續을 즈음해서 一族 家臣들 사이에 內訌이 일어나는 것이 거의 常例나 다름없었지만, 요시타카가 家督을 相續받을 때에는 그러한 內訌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요시타카의 동생인 히로오키(弘興)가 夭折하여 요시타카 外에 다른 家督을 다툴 만한 親族이 없기도 했고, 더불어 重臣인 스에 오키後嗣의 補助가 크게 한몫하였기 때문이다. [8]

郊勞쿠 2年( 1529年 ) 12月 23日, 교토의 朝廷으로부터 種5位相 棺위를 받았다. [5] 이듬해 郊勞쿠 3年( 1530年 ) 10月 9日에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같은 社쿄노다以後(左京大夫)로 任命되었다.

勢力 擴大 [ 編輯 ]

郊勞쿠 3年( 1530年 )부터 요시타카는 규슈 로 出陣하였다. 기타큐슈의 霸權을 놓고, 奔告 (豊後)의 오토모 氏(大友氏)와 지쿠젠 (筑前)의 쇼니 氏 (少?氏)와 對立한다. 그리고, 가신 스機 오키쓰라 (杉興運), 스에 오키後嗣에게 君을 맡겨 쇼니 氏 를 攻擊한다. 그리고, 傳統的인 日本의 水軍(海賊) 勢力인 히젠 (肥前)의 마쓰라 氏 (松浦氏)를 服屬시킨다. 나아가 기타규슈 沿岸을 平定해 對中國 · 對朝鮮 貿易의 利權을 掌握한다. 그러나, 스機 오키쓰라에게 命하여 行했던 쇼니 氏 攻擊은 쇼니의 中신 留潮地 이에카네 (龍造寺家兼)의 反擊을 받아 크게 敗하고 失敗로 끝난다.( 다테나와테 戰鬪 )

덴分 元年( 1532年 ) 오토모 氏가 쇼니 氏와 結託해 侵攻해 오자, 조후(長府, 야마구치縣 시모노세키視 )에서 陣을 친다. 기타큐슈 攻掠의 大義名分을 얻기 위해 요시타카는 교토의 調整에 自身에게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 官職을 除授해 줄 것을 要請하였으나, 失敗한다.

덴分 3年( 1534年 ) 留潮地 이에카네 와 祕密裏에 結託해 쇼니 氏로부터 離叛시키고, 쇼니 氏 勢力의 弱化를 圖謀한다. 그리고 스에 오키後嗣에게 命하여 오토모 氏의 本據地인 奔告를 攻掠하게 하였으나 失敗하였다(세이바카하루 戰鬪). 한便으로 요시타카는 기타히젠(北肥前)의 규슈 單다이 (九州探題) ? 媤父카와 요시나가(?川義長)를 쳐서 媤父카와 氏를 滅亡으로 몰아갔다.

그 해 高나라 天皇 (後奈良天皇)의 卽位에 맞춰 요시타카는 교토 調整에 전(錢) 2千 管(貫)을 寄附하고 [b] 다음해 自身에게 다자이노다이니 官職에 任官될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要請하였다. 高나라 天皇은 一旦 允許하는가 싶다가 하루 만에 取消하였다고 한다.

덴分 5年( 1536年 )에 요시타카는 마침내 朝廷으로부터 다자이노다이니에 任官되는데 成功했다. 기타큐슈 攻掠의 大義名分을 얻은 요시타카는 9月에 留潮地 氏와 함께 히젠 다쿠 性(多久城)에서 쇼니 스케모토 를 攻擊, 쇼니 氏를 滅門시키고 기타규슈 平靜을 大部分 達成하였다. 이때, 留潮地 本家 堂主인 留潮地 다네미쓰 (龍造寺胤?)를 히젠의 슈고多이로 임명한다.

덴分 6年( 1537年 ) 무로마치 幕府 12代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 (足利義晴)로부터 교토로 와서 幕府 政治에 參加해 달라는 要請을 받고 上京을 試圖하지만, 山人을 統一하고 南下해 오는 아마고 氏에 沮止되고, 더욱이 令國 經營에 專念하기 위해 上警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덴分 7年(1538年) 쇼군 ? 요시하루의 仲介로 요시타카는 自身의 宿敵이었던 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와 和親한다.

덴分 8年( 1539年 ) 아버지 代부터 오우치를 補佐해 왔던 스에 오키後嗣가 病으로 死亡하였다.

덴分 9年( 1540年 ) 아마고 쓰네히社 (尼子?久)의 孫子 ? 아키히社 (詮久, 後날의 하루히사晴久)가 아키로 侵攻하였고, 오우치에 從屬되어 있던 모리 모토나리 의 巨星(居城) 요시다코오리 酸性(吉田郡山城)에서 衝突한다(요시다코오리 山城 戰鬪). 요시타카는 오키後嗣의 아들인 다카後嗣 (後날의 스에 하루카打)를 總大將으로 하는 援軍을 보내 아마고 軍을 擊破한다.

以後 아마고 氏에 對한 攻勢를 거듭하여 덴分 10年( 1541年 ) 아마고 便에 서 있던 다케다 노부자네(武田信?) ? 노부시게(信重) 等 아키 다케다氏 (安芸武田氏)와 도모다 오키후지(友田興藤) 等 도모다 氏 (友田氏)를 滅門시키고 아키를 完全히 오우치 勢力 아래에 두게 된다.

文治 體制 [ 編輯 ]

덴分 10年( 1541年 ) 11月, 아마고 쓰네히社가 死亡하고 이듬해인 덴分 11年( 1542年 ) 1月에 요시타카 自身이 直接 軍事를 이끌고 이즈모 國(出雲?)으로 遠征하여 아마고 氏의 거成人 갓산도다 性(月山富田城)을 包圍 攻擊하였으나, 支配下 高쿠진(?人) 領主들의 背信으로 하루히사에게 大敗하였다(갓산도다 星 戰鬪). 이 敗戰으로 寵愛하던 兩者 오우치 하루모치를 잃고 領土며 政治에 對한 關心을 잃게 된 요시타카는 以後 文治派 사가라 多케토(相良武任) 等을 重用하게 되었다. 때문에 武斷派 스에 다카後嗣(陶隆房)나 나이토 오키모리(?藤興盛) 等과 對立하게 된다.

덴分 16年( 1547年 ) 덴류誌의 僧侶 사쿠겐 슈料 (策彦周良)를 犬名士로 任命해 明나라로 派遣하였다. 이것이 마지막 犬명선이었다. 朝鮮에도 僧侶 癸酉書堂(稽?西堂)을 보냈다.

덴分 17年( 1548年 ) 留潮地 다네老父 (龍造寺胤信)와 同盟을 맺었다. 다네老父는 요시타카로부터 그의 이름者 한 글字를 받아서 다카노部(隆信) 로 이름하였다. 다카노부는 오우치의 힘을 背景으로 家督 相續에 不滿을 품었던 家臣들을 찍어 누를 수 있었다.

덴分 19年( 1550年 ) 야마구치에 예수회 宣敎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가 到着했다. 처음에 오랜 旅程으로 꼬질꼬질한 차림이 된 하비에르는 面談하러 오라는 요시타카의 命令에 추레한 차림 그대로 뭔가 요시타카를 위한 아무런 膳物도 하나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요시타카를 만나러 왔고, 요시타카를 만난 자리에서도 요시타카의 '放蕩함'이나 當時 日本의 宗敎였던 佛敎 에 對해 다이묘가 나서서 保護하는 잘못된 것이라거나, 當時 다이묘들 사이에서 一般的이었던 藍色(男色) 等을 요시타카 面前에서 非難을 늘어놓는 等 禮儀를 크게 잃은 모습을 보여, 요시타카는 그에게 不快함을 느끼고 基督敎 傳道 許可를 주지 않았다. 이에 하비에르는 基나이(畿?) 地域을 떠돌게 되었다. 같은 해 스에나 나이토 等이 謀反을 일으킬 것이라는 情報가 퍼져, 요시타카는 一時 오우치君을 거느리고 邸宅에서 籠城을 벌일 準備를 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叛亂 消息은 單純한 뜬所聞으로 그쳤고, 側近인 레이제이 다카土曜(冷泉隆豊)가 武斷派에 對한 討伐을 進言하였으나, 요시타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덴分 20年( 1551年 ) 4月 下旬에 요시타카는 다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面談하게 되었다. 하비에르는 基나이를 떠돌면서 배운 經驗으로 처음 日本에 왔을 때와는 달리 貴人(貴人)을 만나 뵐 때에는 外觀이 重視된다는 點을 깨닫고, 요시타카와의 두 番째 面談에서 秀麗한 服裝을 갖추고 나아가 珍奇한 文物들을 바쳤다. 이때 하비에르가 요시타카에게 바친 物品은 本來는 교토의 天皇에게 奉呈할 計劃이었던 포르투갈의 印度 總督과 孤兒 社交(司?)의 親書 外에 望遠鏡 ? 洋琴(洋琴) ? 치時計(置時計) ? 有利 물酒煎子 ? 거울 ? 眼鏡 ? 冊 ? 그림 ? 小銃 等이었다고 한다. 하비에르의 戰略은 奏效하여 그와의 두 番째 面談에서 洽足해한 요시타카는 마침내 하비에르에게 基督敎 傳道를 許諾했고, 그 據點으로 當時 廢札되어 있던 빈 절間 多이도지(大道寺)를 받게 된다. 이것이 예수회의 日本 基督敎 傳道의 始作이었다.

야마구치 遷都 計劃과 다이네理智의 便 [ 編輯 ]

다이네이지 境內에 있는 오우치 요시타카의 墓所. 다이네이지는 나가토 時에 所在하고 있다.

武斷派와의 關係가 惡化되는 가운데 요시타카는 야마구치 遷都 計劃을 세웠으나 [9] 덴分 20年( 1551年 ) 8月 末에 요시타카와 險惡한 關係가 되어 있던 武斷派 스에 다카後嗣 等(스誤 國의 슈고다이)李 「교토의 相議」(京都の上意) [10] 를 받았다는 名分으로 謀反을 일으켰다. 重臣 나이토 오키모리(?藤興盛, 나가토 國 슈고다이)도 이를 默認하여 요시타카를 救援하지 않았다.

요시타카는 親戚인 쓰와노(津和野)의 요시미 마社料理 (吉見正?)에게 依支하고자 하였으나 暴風雨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어 나가토 후카가와(深川)의 査察 다이네이지 (大寧寺)로 가서 그곳에서 籠城한다. 요시타카를 끝까지 따랐던 오우치 一門의 重臣 레이제이 다카土曜가 奮戰하여 몇 次例 勝利下祈禱 하였으나, 이미 數的으로 요시타카가 不利한 狀況이었다. 요시타카는 더는 이 狀況을 打開할 可望이 없음을 깨닫고, 9月 1日 10時頃 自決하였다. 가이샤쿠(介錯)를 맡은 것은 레이제이 다카土曜였다. 享年 45歲였다. [1]

오우치 요시타카가 죽기 直前에 읊은 句節은 「攻擊을 하는 者, 攻擊을 當하는 者, 어느 누구나 모두 하나이니,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如露亦如電 ?作如是?) [11] 이라」(討つ者も 討たるる者も 諸(もろ)ともに 如露亦如電(にょろやくにょでん) ?作如是?(おうさにょぜかん))라고 傳한다.

요시타카의 親아들 요시타카(義尊)도 9月 2日에 스에 軍에게 逮捕되어 殺害되었다. 요시타카 富者의 죽음으로 스誤 오우치 집안은 事實上 滅亡하였다. [c] 또한 이때 스오에 머무르고 있던 散調 緊要리(三?公?)나 니兆 다다後嗣(二?尹房)를 비롯한 많은 구게(公家)들도 이 謀反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산조 긴요리는 가이 國 의 센고쿠 다이묘 다케다 신겐 의 情實 散調 夫人의 아버지로 신겐의 匠人이다).

요시타카는 오우치 집안이나 領地 百姓들의 動向을 把握하지 못했고、교토의 溝橋와 같은 生活을 志向하며 中央 志向的인 姿勢를 貫徹했으므로 스奧義 國政을 無視하고 臨時 課稅를 늘린 것이 悲劇으로 이어졌다는 視角도 있다. [12] 또한 요시타카의 죽음으로 明나라나 朝鮮과의 貿易도 斷絶되었다.

人物 · 逸話 [ 編輯 ]

南緯見積위갑주(藍韋肩赤威甲?). 日本의 重要文化財로 덴分 11年(1542年) 5月 20日에 오우치 요시타카가 이쓰쿠시마 神社 (?島神社)에 捧納한 五五尿路이 (大鎧)이다. [13]

家督 相續 [ 編輯 ]

  • 오우치氏는 家督 相續으로 몇 番의 內亂이 發生했지만, 요시타카가 相續 받을 때는 例外였다. 아버지 요시오키의 힘도 있었지만, 오우치가 歷代로 보면, 요시타카의 政權 初期가 가장 安定的이었다(그가 自力으로 相續鬪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末年에 文弱해진 原因이 되지 않았느냐는 見解도 있다).

政治 · 文化面에서의 [ 編輯 ]

  • 요시타카는 文化的 關心이 많아, 文治主義적 센고쿠 다이묘로 알려져있다. 散調니시 社네打카 (三?西?隆) 等의 文化人과 交流하고, 와카(和歌)와 렌카(連歌), 文藝 等 교토風 구게 文化에 關心이 많았다. 또, 교토 調整에 돈을 바쳐가며 官職을 얻고자 했고, 小쿠타이(관복) 차림으로 牛車를 타고 다니는 等 貴族的 趣味를 가진 人物이었다고 傳해진다. 學問에서도 古書를 좋아했던 것이나 花押(花押)의 形式 等을 보아도 復古主義的 性格을 가진 人物이라 飼料되고 있다. 그러나 오우치 집안 歷代 堂主들은 代代로 그러한 傾向이 剛해 딱히 요시타카의 問題點이라고만 할 수는 없으며, 이 무렵 야마구치는 西쪽의 교토 (西の京)라 불릴 만큼 繁榮期를 맞이하고 있었다.
  • 政策에 있어서도 保守的으로 奢侈禁止令과 地勢 徵收에 關한 法令을 頒布하였다. 査察과 紳士의 復興을 위해 많은 寄附를 했으며, 다자이노다이니로 任命된 뒤에는 多子以後다이니로서 自身이 내리는 命令을 多以後센(大府宣) [d] 이라 부르기도 했다. 나아가 요시타카와 가신단의 官位도 다른 센고쿠 다이묘들처럼 멋대로 自稱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교토 朝廷에 奏請해 받은 實際 官位였다. [8] 이와 같이 復古的인 政治形態를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 明나라 , 朝鮮 과 貿易해 왔고, 더 나아가 오우치氏는 間레이 家門인 호소카와 氏(細川氏)와 싸워 大明貿易(勘合貿易)을 獨占한다. 朝鮮으로부터는 大藏經 等 書籍을 輸入하여 獨自的으로 오우치板(大?版)으로 다시 出版한다. 또한 요시타카는 야마구치의 市價를 교토風의 조방제 都市로 整備하고, 城郭을 쌓지 않고 오우치 管을 居所로 使用하였다. 基督敎 宣敎師로 日本에 온 예수회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招請하여 야마구치에서의 基督敎 傳道를 許諾하는 等 改名的인 人物이기도 하였다.
  • 生前 周邊 拘泥의 武士들에게 敬畏의 對象이었는데, 하코자키 宮(箱崎宮)을 再建한다거나 이쓰쿠시마 神社 (?島神社), 尤史 神宮 (宇佐神宮) 等 많은 紳士들을 極盡히 保護하여 스님들의 評判이 높았고 文化인, 구게들로부터도 「末世의 道人」(末世の道者)이라는 稱頌을 받았다.
  • 當時 하카타(博多)의 氣溫 야마가社(祇園山笠)의 街키야마(?き山)는 12個였는데 요시타카가 야마구치의 기온회(祇園?)로 여섯 個를 나누어 가져가면서 하카타 氣溫 야마가社의 街키야마가 6個가 되었다. [14]
  • 朝鮮 中宗 37年에 該當하는 덴分(天文) 11年( 1542年 )에 朝鮮의 김안국 (金安國)에게 書信을 보내어 走者 가 註釋한 《五經新株》(五經新註)와 角樓機(刻漏器)를 求하였고, 金安國은 當時 朝鮮에서 使用하는 經典의 註釋書는 停戰(程傳)의 《周易》, 好轉 (胡傳)의 《春秋》, 菜田 (蔡傳)의 《書經》, 主戰(朱傳)의 《詩經》, 井州(鄭註)의 《禮記》이며, 朝鮮에서 通用되는 經典들은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새로 註釋한 것은 없다고 回答하였다고 한다(《 異稱日本戰 》). 마쓰시타 겐린은 오우치 요시타카가 要請한 신주란 영락 (永樂) 13年( 1415年 )에 名의 永樂帝가 編纂하게 한 《五經大全株》(五經大全註)를 가리키는데 朝鮮에는 이 冊이 들어오지 않아서 金安國이 이렇게 對答한 것이고, 以後 名의 배가 이 冊을 싣고 日本으로 왔지만 오우치 요시타카는 이를 보지 못했다고 說明하고 있다.

스에 다카後嗣 및 武斷派와의 對立 [ 編輯 ]

  • 요시타카가 一問 內에서 家臣들의 信任을 잃게 된 決定的인 契機는 無斷波인 스에 다카後嗣가 强力히 밀어붙인 아마고 攻擊이었고, 그 戰鬪에서 敗한 것도 한 原因으로 여겨지고 있다.
  • 다카後嗣와 對立한 原因은 文治, 武斷派의 對立外에 스에씨가 以前에 橫領한 도다이지 의 옛 領地를 返還하도록 요시타카가 命令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 點에서도 요시타카의 復古的인 面貌를 엿볼 수 있다.
  • 오우치 氏는 후다이 家神이 領地를 다스리고 이를 土臺로 여러 領地를 다스리는 一種의 聯邦制 國家였다. 이 때문에 그들과 緊密한 信賴關係를 가지지 않는다면, 相當히 危險해질 수 있었다.
  • 적남이 死亡한 뒤에는 文弱한 傾向에 빠졌다고 보는 見解가 多數이지만 實際로는 文治派를 形成하여 다이묘 自身과 謹愼(近臣)들로 構成된 가신단에 依한 다이묘 權力의 强化를 圖謀한 것이었다. 때문에 政治的 權力은 强化되었지만 軍事的인 面에서는 슈고다이羅 豪族들에게 一任하였기 때문에 도리어 슈고다이의 獨自性을 强化시키는 꼴이 되어 버렸다. 다만 한便으로 보면 租稅 徵收 等의 行政 權限의 大部分을 야마구치에 있던 浮橋닌(奉行人)이나 그들이 派遣한 군다이(郡代, 文治派를 構成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掌握되고, 軍事 活動이 低調해지면서 軍事的 權限을 背景으로 하던 슈고多이들의 오우치 家門 內의 發言力이 喪失되고, 이로 因해 스에 다카後嗣 等 슈고다이가 오히려 窮地에 몰렸다는 見解도 있다.

個人事 [ 編輯 ]

  • 어린 時節의 逸話로 아이들이 돈을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요시타카는 自身도 銅錢을 갖고 놀고 싶다고 護衛 스機 시게노리(杉重矩)에게 말했는데, 시게노리는 「主君이 되실 분께서 銅錢 같은 더러운 것을 보시는 것은 두렵습니다」(主君となるべき人が、?のような汚らわしい物を見るのは恐れ多い)라며 銅錢을 黃金 고카이(?)로 꿰어서 고카이째로 銅錢을 汚物 속에 던져 넣었고, 이를 요시타카에게 보여주어 돈이라는 것을 武士는 賤하게 여겨야 하는 것임을 인식시켜 주었다고 한다(『武者物語』).
  • 요시타카는 主導(衆道)를 좋아하여 예수회 宣敎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基督敎의 立場에서 藍色을 非難하는 發言을 하자 激怒해서 하비에르를 내쫓아 버렸다는 逸話도 있다(센고쿠 時代 日本의 武將들 사이에서 主導 卽 同性愛는 一般的인 것이었다).
  • 요시타카가 스에 다카後嗣를 寵愛했을 때는 말을 타고 다섯 時間을 걸려서 만나러 갔다고 하며, 다카後嗣가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와카를 남기고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 『蔭德太平機』(陰?太平記) 等에는 「又四?隆景は、容姿甚だ美なりしかば、義隆卿 男色の寵愛?からずして」라는 한 文章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가 요시타카와 主導 關係에 있었다고 記錄되어 있는데, 이 冊은 歷史書가 아닌 文學으로써의 側面이 剛하여 信用할 만한 資料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다카카게 ? 스에 다카後嗣 外에도 세이老視로(?ノ四?), 야스토美 겐나이(安富源?) 等이 요시타카의 寵愛를 받았던 人物이라고 傳하고 있다.

家計 [ 編輯 ]

各州 [ 編輯 ]

出處 [ 編輯 ]

  1. 御?生翁甫 1980 , 21쪽.
  2. 福尾 1989 , 49쪽.
  3. 『大?系?』
  4. 『?藤譜?』
  5. 福尾 1989 , 50쪽.
  6. 福尾 1989 , 51쪽.
  7. 福尾 1989 , 206쪽.
  8. 福尾 1989 , 52쪽.
  9. https://scholar.princeton.edu/sites/default/files/tconlan/files/da_nei_yi_long_noqian_du_ji_hua_.pdf
  10. ?補訂正編年大友史料19?112P
  11. 佛經 金剛經의 사구게 句節이다.
  12. 米原 1988 , 宮本義己「義隆の最期」.
  13. ?島?の文化財 - 藍韋肩赤威甲? - ?島??育委員?、2020年3月5日??。
  14. 福岡市の文化財 (福岡市HP)

說明 [ 編輯 ]

  1. 「요시」(義)라는 글字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시카가 將軍價의 돌림字를 下賜받은 것으로 養子인 오우치 하루모치나 요시나가(하루히데)도 마찬가지로 쇼군으爐로부터 그 이름者 한 글字를 받았다.
  2. 이 무렵 교토 調整은 全國的인 戰亂으로 인해 교토가 荒廢해진 가운데 天皇의 卽位式度 제대로 치르지 못할 程度로 貧窮의 極을 달리고 있었다. 高나라 天皇도 天皇으로 卽位하고 나서 卽位式을 치르지 못해 10年 뒤 다이묘들의 誠金을 寄附받아서 그 돈으로 卽位式을 擧行할 수 있었다.
  3. 다이묘로써 오우치 집안은 滅亡했지만 오우치의 書類 집안 卽 오우치 모치모리(大?持盛)의 먼 後孫으로 誤와리 國 (尾張?)으로 移住한 우시쿠 야마구치 氏(牛久山口氏)가 있어 에도 時代 (江?時代) 다이묘로써 우시쿠 番(牛久藩)의 번주로 幕府 末期까지 存續하였다.
  4. 多子以後의 最高 長官인 다자이老所致(或은 곤노所致)나 다자이노다이니가 多子以後 所屬 現地 機構들에게 내리는 命令을 말한다.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오우치 요시오키
第16代 스誤 오우치가 堂主
1528年 ~ 1551年
後任
오우치 요시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