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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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라
훈族 의 王
在位 434年 ~ 453年
前任 블레다 , 壘가
共同在位子 블레다
後任 엘라크 , 에르나크
身上情報
出生日 406年
死亡日 453年 3月
父親 門트주크
配偶者 크레카 , 일디코
아틸라의 最大 版圖 (434-453)

아틸라 ( 라틴語 : Attila , 古代 노르드어 : Atli 아틀리 →끔찍한 者 , 獨逸語 : Etzel 에體 [ * ] , 406年 ~ 453年 )는 훈族 最後의 王이며 유럽 훈族 가운데 가장 强力한 王이었다. 5歲頃 게르만 民族 大移動期에 東유럽 北部의 넓은 地域을 支配하는 大帝國을 建設하였다. 神의 채찍이라 불릴 程度로 東西유럽의 모든 國家들을 恐怖에 떨게 만들었던 人物이다. 453年 아틸라가 죽은후 곧 훈帝國은 崩壞되어 버렸다.

生涯 [ 編輯 ]

아틸라는 434年 부터 죽을 때까지 18年 程度, 유럽 에서 最大의 帝國을 支配했으며, 그의 帝國은 中部 유럽부터 黑海 , 도나우江 부터 발트海 까지 이어졌다. 그는 그의 三寸 루아가 죽자 그의 兄 블레다 (Bleda)와 共同으로 王位에 올랐다는 說과 블레다가 實質的인 王이고 아틸라는 2人者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설이있다.

卽位 [ 編輯 ]

어찌되었건 아틸라와 블레다는 서로 사이가 좋은 便은 아니였는데 443年 블레다가 疑問의 죽음을 當한다. 블레다의 죽음에 關해서는 아직 事實이 確實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사냥 途中 事故로 인한 죽음이라는 說과 아틸라가 暗殺했다라는 說이 있다. 블레다가 죽은 뒤 아틸라는 훈族의 唯一한 王으로 인정받게 된다. 아틸라는 東로마를 攻擊 콘스탄티누스의 故鄕인 나이서스를 地球上에서 사라지게 하는 한便 東로마의 수많은 都市를 侵攻하여 東로마에게서 莫大한 돈을 貢物로 받게 되었다.

號노리아 公主의 請婚 [ 編輯 ]

450年 , 서로마 皇帝 발렌티니아누스 3歲 의 누이 號노리아 公主가 아틸라에게 請婚한다. 號노리아 公主는 동생을 皇帝 자리에서 몰아내려는 陰謀를 꾸미다 發覺되어 東로마로 追放된 狀態였다. 以後 콘스탄티노폴 宮闕에 監禁당하여 修道僧 水準의 禁慾的인 生活을 강요받고 있었다. 아틸라는 請婚에 卽刻 應하며 그 持參金으로 서로마 帝國의 班을 要求한다. 그러나 皇室과 事前에 論議된바 없는 請婚이였기에 서로마側은 卽時 拒絶하였다. 그러나 아틸라는 이를 無視하고 서로마 侵攻의 名分으로 삼았다.

서로마 侵攻 [ 編輯 ]

아틸라는 451年 軍隊를 이끌고 갈리아 (現在의 프랑스 )로까지 進擊, 오를레앙 까지 나아갔으나 카탈라禹눔 戰鬪(샬롱 戰鬪) 에서 서로마 將軍 아에티우스 를 만나 大敗한 後 退却한다. 以後 452年 에 이루어진 2次 遠征에서는 이탈리아를 攻擊하였으며 結局 서로마의 발렌티니아누스 3歲 皇帝를 數도 라벤나 에서 몰아내祈禱 하였다. 서로마는 協商團을 派遣하여 아틸라에게 强化를 提案했고, 아틸라는 이를 받아들여 退却하였다. 協商內容에 對해서는 具體的으로 傳하여 지는 바가 없으나 相當한 金額에 協商金을 提供했을 것이라고 推定되고 있다.

死亡 [ 編輯 ]

아틸라는 453年 , 새로 얻은 첩 일디코(Ildiko)와의 結婚式을 치른 날 밤에 死亡한다. 死因에 對해서는 일디코에 依한 暗殺, 腹上死 , 過飮 으로 인한 窒息死 , 動脈에서 나온 피에 인한 窒息死 等 推測이 茂盛하다. 아틸라의 帝國은 그의 죽음과 함께 消滅했으며, 意味 있는 遺産도 남아있지 않다. 아틸라가 어디에 묻혔는지에 對해 알려진 바가 없다. 賣場에 參與했던 者들은 모두 殺害當했기 때문이다.

外貌 및 人種 [ 編輯 ]

로마인과 그리스人에 記錄에 依하면 惡意的으로 描寫하여 歪曲한 部分도 많지만 相當한 記錄에 아틸라가 金髮이라는 記錄도 存在한다. 6世紀 李敎師가 프로코피우스 等이 남긴 記錄에서 훈族과 게르만족의 混血性을 斟酌할 수 있다.

文化에 끼친 影響 [ 編輯 ]

아틸라의 名聲과 그에 對한 恐怖는 全 유럽에 擴散되었다. 이탈리아, 갈리아, 게르마니아, 그리스, 스칸디나비아에서 그를 素材로 한 수많은 小說과 傳說, 그림, 演劇, 오페라, 彫刻 作品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後에 유럽의 歷史에서 傳說的인 人物로 생각되어, 歷史家들은 아틸라를 偉大하고 高貴한 王으로 描寫하고 있으며 아틸라는 세 篇의 노르드 社가 (saga)에서 重要한 役割을 맡기도 하였다. 니벨룽겐의 半指 에서는 훈族의 王 에첼로 登場한다. 그러나 거의 大部分에서는 中世 그리스도교의 影響으로 아틸라는 殘忍한 野蠻人 王으로 記憶되어 왔다. 주세페 베르디는 아틸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1846 아틸라(오페라) 를 發表한다.

評價 [ 編輯 ]

西歐人에게 아틸라는 恐怖의 代名詞다. 無數한 異民族이 유럽을 侵略했지만 아틸라가 이끌었던 훈族만한 恐怖를 膳賜했던 것은 칭기즈칸의 몽골族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戰士로서의 그의 資質은 個人의 能力보다는 훈族의 王이라는 側面에서 評價되어야 한다. 野蠻族에 對한 西歐의 온갖 偏見과 捏造에도 不拘하고 그는 無知 몽매한 싸움꾼이 아니었다. 그는 自己 民族의 强點과 弱點을 正確하게 把握하고 있었으며, 新技術을 導入해서 全力을 補强하는 革新家이기도 했다. 또 黃金을 멀리할 程度로 剛한 節制力이 있었고 自身의 運命에 對한 剛한 自信感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偉大함은 유목不足에 지나지 않던 훈族을 巨大한 國家로 키워냈다는 點이다. 두려움과 黃金으로 部下들을 統制한 點이나, 自身들의 戰鬪스타일에 맞는 戰爭形態를 찾아낸 것 亦是 그가 훈帝國의 王으로서 이룬 業績들이다. 자꾸만 뿔뿔이 흩어지려 하는 部族들을 엮어내어 自身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方式의 戰爭으로 歷史에 남은 것 이것이 훈族 王 아틸라의 眞面目이다.


出處 [ 編輯 ]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帝國 쇠망사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