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놀트 쇤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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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놀트 쇤베르크, 로스앤젤레스, 1948.

아르놀트 쇤베르크 ( 獨逸語 : Arnold Schonberg , 1941年 以後: Arnold Schoenberg, 1874年 9月 13日 ~ 1951年 7月 13日 )는 오스트리아 에서 태어나 美國 으로 歸化한 作曲家, 音樂理論 家이자 音樂敎育家이다. 쇤베르크의 家計는 에 基盤을 둔 유대人 집안이다. 1933年 獨逸 에서 國家社會主義 勞動者黨 이 政權을 獲得하자 美國으로 逃避하였으며, 1941年에 美國 國籍을 取得하였다.

쇤베르크는 20世紀 前半期의 가장 影響力있는 作曲家 中의 하나였으며, 造成音樂 의 解體에 寄與한 中心人物 中 하나이다. 長調와 短調에 基盤한 造成 의 解體는 時期的으로 1906年과 1909年 사이에 이루어졌다. 쇤베르크는 12音技法 을 確立한 張本人 中의 한 名이며, 12音技法은 音列主義 音樂으로 發展하여 現代音樂 에서 많은 作曲家들의 音樂에 繼承되었다.

生涯 [ 編輯 ]

쇤베르크는 에서 헝가리 出身의 구두公認 사무엘 쇤베르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作曲家 本人의 說明에 依하면 9歲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始作하였으며, 獨學으로 作曲을 工夫했다고 한다. 學窓 時節에 폴카와 行進曲을 썼으며, 1889年 父親의 死後에는 家族의 生計를 책임지기 위하여 學校를 自退하고 銀行의 職員硏修課程에 參與한다.

쇤베르크의 記憶에 依하면 그가 作曲家 또는 藝術家로서 音樂的 基礎를 確立해준 人物이 세 名이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音樂理論, 始作, 그리고 哲學의 基本을 傳授해준 오스카 아들러였으며, 둘째는 倫理, 道德, 그리고 "慣行 그리고 普遍的 土俗性에 對한 抵抗"을 일깨워준 茶빗 요제프 바흐였으며, 셋째는 1895年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인 폴리휨니아에 첼리스트로 入團하면서 알게 된 指揮者 알렉산더 젬린스키 이다. 이 指揮者는 쇤베르크의 才能을 看破하고 그의 初期作을 연주할 수 있는 機會를 마련해주고, 作曲授業도 몇 個月間 해주었다. 쇤베르크는 그러나 作曲에 對한 大部分의 知識은 브람스, 바그너, 말러, 바흐, 그리고 모차르트와 같은 大家를 통한 硏究를 통하여 獲得하였다고 主張한다.

쇤베르크는 20代에 오페레타 의 管絃樂 編曲으로 돈을 벌면서 絃樂 6重奏 《 淨化된 밤 》(1899年)과 같은 作品을 썼다. 後에 그 作品을 管絃樂으로 編曲하여 現在는 그의 가장 有名한 作品 中 하나가 되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는 쇤베르크의 作品 《 구레의 노래 》를 接했을 때 그의 才能을 認定했다. 구스타프 말러 는 쇤베르크를 門下生으로 두고 自身이 죽은 뒤에 그의 뒤를 봐 줄 사람이 없음을 걱정했다. 쇤베르크는 말러의 影響을 받았으며, 말러를 “聖者”로 여겼다.

하지만 쇤베르크의 作品은 大衆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7年 에 《室內 交響曲 第1番》李 初演되었을 때 聽衆은 적었으며 反應도 熱狂的이지 않았다. 1913年 에 그 曲이 알班 베르크 , 안톤 베베른 , 알렉산더 젬린스키의 曲과 함께 다시 演奏되었을 때 聽衆은 소리지르며 非難했다. 後에 쇤베르크의 歌曲이 공연되는 동안에는 亂動이 始作되어서 警察이 出動했다고 한다. 쇤베르크의 音樂은 그 동안 西洋音樂의 土臺를 이루던 造成 을 解體하는 것이었으므로 極端的인 反應을 보였던 것이다. 그의 門下生들과 추종자들은 그를 音樂의 가장 重要한 人物로 보았지만, 評論家들은 그가 發表한 作品들에 對하여 好意的이지 않았다.

後에 쇤베르크는 12音 技法을 만들었다. 이는 後에 音列主義 로 發展하게 되는데, 그의 弟子들이 그 技法을 받아들이면서 2次 빈 音樂派를 結成했다. 그들 中에는 안톤 베베른 , 알班 베르크 한스 아이瑟러 가 있다. 그는 音樂理論家度 名聲을 쌓았는데, 그의 代表的 著書로 《華城 理論》(Harmonielehre)이나 《音樂 作曲의 基礎》(Fundamentals of Music Composition)가 있다. 이 著書들은 오늘날에도 出版되어 音樂理論과 作曲의 敎育에 있어서의 比重있는 參考資料로서의 役割을 하고 있다.

쇤베르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只今( 1914年 )까지가 '平凡한' 時代였다면 우리 時代의 音樂은 아주 달라야 한다."

그 해에는 抽象 美術 精神 分析 療法 이 登場하였다. 그當時에는 많은 知識人들이 생각의 흐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로 들어가 다시 反復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01年(Gurrelieder-구레의 노래. 1911年 完成)부터 1910年(Five Pieces for Orchestra)까지 쇤베르크의 音樂은 누구보다도 더 急激히 바뀌었다.

그가 絃樂 四重奏 作品番號 7과 室內 交響曲 作品番號 9를 完成했을 때 그는 그의 作風을 完成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番째 四重奏 作品番號 10과 세 個의 피아노 小品 作品番號 11을 作曲했을 때, 火星에 添加音을 집중시키는 것이 實際로 演奏되었을 때 協和音과 不協和音 사이에 別 差異를 느끼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쇤베르크 自身이 音樂을 反復하거나 發展할 必要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當時의 音樂은 含蓄的이고 省略的이었다.

第1次 世界大戰 은 그에게 큰 고비가 되었다. 軍에 服務하면서 曲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었고, 그 時期에는 그의 未完成 作品만 남게 되었다. 戰爭이 끝난 後 그는 音樂의 質感을 單純하게 만들 수 있는 方法을 찾게 되었고 12音 技法을 만들게 되었다. 쇤베르크는 그의 親舊 Josef Rufer와 散策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獨逸 音樂의 優位를 100年 동안 지속시킬 發見을 했다네."

이 말은 誤解의 餘地가 많다. 하지만 이는 獨逸과 오스트리아의 敗戰을 빗대어 表現한 쇤베르크만의 嘲笑的인 유머인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모차르트와 바흐처럼 되고 싶어하는 野望을 담고 있기도 하다.

쇤베르크는 많은 作品을 發表함으로써 그의 技法이 過去의 音樂을 踏襲하지 않는 音樂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頂點은 《모세와 아론》인데, 그는 三分의 二 假量을 썼지만 完成하지 않았다. 結局 오페라는 모세가 表現하지 못할 程度로 苦痛스러워서 소리치는 部分인데, 쇤베르크가 그 自身을 어떤 豫言者로 생각하여 더以上 作品을 쓸 수 없지 않았겠냐는 說도 있다.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쓴 作品에서 그는 (傳統火星은 쓰지 않았지만) 傳統的인 和音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의 그는 自身의 音樂이 過去로부터 完全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現在까지도 쇤베르크의 技法에는 論難의 餘地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音樂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反面 어떤 사람은 이 音樂에 깊게 共感하기도 한다.

쇤베르크는 畫家이기도 했다. 그의 作品은 프란츠 마르크 바실리 칸딘스키 의 作品과 같이 展示되어도 좋을 程度였다고 한다. 演劇과 詩, 그리고 政治 問題와 유대人들에 對한 冊도 썼다.

1933年 쇤베르크는 나치에 依해 유럽에서 追放되어 1941年 에 캘리포니아로 移住했다. 1951年 로스앤젤레스 에서 別世 했다.

主要 作品 [ 編輯 ]

管絃樂曲 [ 編輯 ]

  •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作品番號 5(1902~3)
  • 室內 交響曲 1番 마長調 作品番號 9(1906)
  • 5個의 管絃樂 小品 作品番號 16(1909)
  • 管絃樂 變奏曲 作品番號 31(1925~6)
  • 室內 交響曲 2番 내림 마短調 作品番號 38(1906, 39)
  • 主題와 變奏曲 사短調 作品番號 43b (1943)

協奏曲 [ 編輯 ]

  • 바이올린 協奏曲 作品番號 36(1934,6)
  • 피아노 協奏曲 作品番號 42(1942)

室內樂 [ 編輯 ]

  • 絃樂 4重奏 라長調(1897)
  • 絃樂 6重奏 淨化된 밤 作品番號 4 (1899)
  • 絃樂 4重奏 1番 라短調 作品番號 7(1904/5)
  • 絃樂 4重奏 2番 올림 바短調 作品番號 10(1907/8)
  • 木管 5重奏 作品番號 26(1924)
  • 絃樂 4重奏 3番 作品番號 30(1927)
  • 絃樂 4重奏 4番 作品番號 37(1936)
  • 絃樂 3重奏 作品番號 45(1946)
  • 幻想曲 作品番號 47(바이올린과 피아노, 1949)

피아노 [ 編輯 ]

  • 3個의 小品 作品番號 11 (1909)
  • 6個의 작은 小品 作品番號 19(1911)
  • 모음曲 作品番號 25(1921)
  • 2個의 小品 作品番號 33(1928,31)

歌曲 [ 編輯 ]

  • 6個의 管絃樂 歌曲 作品番號 8(1903~5)
  • 架空의 庭園에서의 15個의 詩 作品番號 15(1908~9)
  • 마음의 나뭇잎 作品番號 20(1911)
  • 달에 홀린 피에로 作品番號 21(1912)

合唱 [ 編輯 ]

오페라 [ 編輯 ]

  • 期待( 獨白劇 ) 作品番號 17(1909)
  • 幸福한 손(音樂이 있는 드라마) 作品番號 18(1910~13)
  • 오늘부터 來日까지 作品番號 32 (1928~9)
  • 모세와 아론 (1930~32, 未完成)

일화 [ 編輯 ]

쇤베르크는 13 恐怖症 이 있었다. 그의 後期作品人 오페라 《모세와 아론》의 題目을 옳은 綴字法인 "Moses und Aaron"으로 하지 않고 "Moses und Aron"으로 한 것은 綴字의 알파벳 個數가 13이 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自身이 13日에 태어났다는 事實을 不吉한 徵兆로 생각했다. 甚至於 者自身이 76歲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까지 했는데, 76의 자리數 두 個를 合하면 7+6=13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77番째 生日을 보내기 두 달 前에 죽었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