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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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 事件을 描寫한 揷畵 (1914年 7月 12日에 發行된 이탈리아의 新聞 《라 도메니카 델 코리에레》(La Domenica del Corriere))
사라예보 事件과 關聯된 地圖

사라예보 事件 (사라예보 事件)은 1914年 6月 28日 現在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의 首都인 사라예보 에서 일어난 事件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帝國 의 皇位 繼承者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外스터라이히에스테 對共 조피 超테크 폰 好엔베르크 餘工作 夫婦가 靑年 보스니아라는 民族主義 組織에 屬한 18歲의 靑年이자 大學生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 에게 暗殺된 事件이다. 이 事件은 第1次 世界 大戰 의 導火線이 되었다.

事件 經過 [ 編輯 ]

프린치프는 세르비아系 보스니아人으로 전 남슬라브人들의 統一, 具體的으로는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帝國 으로부터 獨立하여 獨立國인 세르비아 와 합칠 것을 願하였다(남슬라브 運動). 그리고 오스트리아 皇太子가 軍隊의 査閱을 보기 爲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의 首都 사라예보를 訪問할 것이라는 消息을 듣자 가브릴로 프린치프 네델코 車브리노비치 및 4名의 革命家 學生들이 陰謀를 準備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帝國 內에서 게르만人과 슬라브人이 平等하게 지내게 하려는 計劃을 세우고 있었으나 세르비아 民族主義 團體는 이러한 穩健 政策이 오히려 세르비아人의 結集 意志를 약화시킨다고 여겼다. [1]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帝國 內에 슬라브系 民族이 同等하게 同盟에 參與할 수 있는 第3의 王國을 樹立하려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構想은 統一된 單一 民族 國家를 熱望하는 세르비아人들에게 威脅이 되었다. [2]

皇太子 夫婦가 탄 車는 一次的으로 밀랴츠카 江 隣近에 있던 네델코 車브리노비치 가 던진 爆彈 을 맞아 테러 를 當했으나, 뭔가가 날아오는 것 같이 보였던 運轉士가 速度를 높이는 바람에 車 뒷바퀴에 맞고 뒤따라오던 車 밑에서 터져, 16名이 重傷을 입었다. 한便 페르디난트는 自己 때문에 많은 사람이 다쳤을 거라고 생각했고 모든 사람들이 말렸음에도 不拘하고 모든 日程을 取消하고 病院으로 가기로 했다. 經路를 變更해 다른길로 가기로 했으나, 失手로 運轉士에게 미리 말하지 않아 運轉士는 길을 잃고, 라틴 校 隣近의 골목에 숨어 있던 프린치프가 달려나와 銃 두 발로 皇太子 夫婦를 暗殺했다. 事件이 있은 直後 市民들은 세르비아人을 襲擊하고 그들의 가게를 掠奪하였다. [3]

事件의 影響 [ 編輯 ]

事件이 發生한 사라예보는 오스트리아의 領土였으며 프린치프 또한 오스트리아領 보스니아에 사는 세르비아人日 뿐 세르비아 國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세르비아 王國 러시아 帝國 의 支援을 받으며 남슬라브 運動을 慇懃히 부추기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帝國은 이 事件을 口實로 세르비아와 戰爭을 決心했다. 세르비아와 戰爭 을 하기 위해서 同盟國 獨逸 帝國 의 協助를 要請했고, 여기서 外交史 最大 失手로 評價되는 “白紙 手票”를 빌헬름 2歲 가 約束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帝國 을 無條件 支援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1878年 에 締結된 瀆汚 同盟 에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元來 이 同盟은 獨逸 帝國이 主導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帝國이 따르는 構造였음에도, 1908年 오스트리아-헝가리 帝國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合倂한 보스니아 危機 때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帝國이 主導하고 獨逸이 따라가는 것으로 顚倒되어 있었다. 비스마르크 는 일찍이 이것은 戰爭 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警告한 바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獨逸이 건네준 白紙 手票 를 믿고 7月 23日 세르비아에 다음과 같은 內容의 最後通牒을 보낸다. 答辯 時限은 48時間이었다.

  1. 모든 反(反)오스트리아 團體를 解散할 것.
  2. 暗殺에 關聯된 모든 者를 處罰할 것.
  3. 半(反)오스트리아 團體에 關聯된 모든 管理를 罷免할 것.
  4. 여기에 關聯된 當事者를 調査하는 데 오스트리아 管理가 세르비아로 들어가 도울 것을 許容할 것.

이 條項들을 내민 오스트리아의 속셈은 세르비아가 最後通牒을 拒否하는 것이었다. 이 最後通牒이 노린 것이 무엇이었냐에 對해서는 歷史家들 사이에 論爭이 많다. 各 條項들이 세르비아의 主權과 自尊心을 짓밟는 項目들이어서 戰爭 을 意圖했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는 意見도 있다. 오스트리아가 보낸 最後通牒에는 最後通牒을 拒否했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內容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르비아 駐在 오스트리아 大使館은 이 最後通牒을 "時限이 定해진 要請文"으로 分類해서 세르비아 政府에 傳達했다. [5]

생길지도 모를 破局을 避하고 싶었던 세르비아 政府는 1, 2, 3項까지는 屈辱을 참고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4項은 到底히 받아들일 수 없는 要求 條件이었고, 結局 세르비아는 이 最後通牒을 拒否한다.

오스트리아는 바라던 바를 이루었기 때문에 7月 28日 , 세르비아에 戰爭을 宣布했고, 러시아 7月 29日 總動員令을 내렸다. 獨逸의 빌헬름 2歲 러시아 프랑스 第3共和國 에 同時에 最後通牒을 發했다. 러시아에 對한 最後通牒은 “總動員令을 解除하라. 안 그러면, 戰爭 狀態로 看做한다. 12時間 내 答辯하라.”였는데, 러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에는 “萬一 獨逸이 러시아와 戰爭 狀態로 들어가면 프랑스는 어떤 行動을 取할 것인가. 18時間 內 答辯하라.”라고 發했다. 프랑스는 프랑스의 國家 利益에 따라 行動한다고 答辯했다.

8月 1日 , 獨逸이 러시아에 宣戰布告를 했고, 以後 各國은 서로 宣戰布告를 했다. 그러나 戰爭은 7月 28日 부터 始作된 것이었다.

主犯 [ 編輯 ]

共犯 [ 編輯 ]

寫眞 [ 編輯 ]

各州 [ 編輯 ]

  1. 구학서, 《이야기 世界史 2》 청아출판사, 2002, p.468, ISBN   89-368-0090-6
  2.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쿠오 바디스 歷史는 어디로 가는가 1》 정초일 驛, 푸른숲, 2002, p.208, ISBN   978-89-7184-339-0
  3. 후프, p.212
  4. 歷史敎育協議會, 《나만 모르는 유럽史》 양인실 驛, 某멘토, 2004, p.223, ISBN   978-89-91136-02-1
  5. 프레더릭 모턴 (2009年 10月 26日). 《夕陽 녘의 왈츠 - 諸國의 崩壞와 第1次 世界大戰의 勃發(Thunder at Twilight: Vienna 1913/1914)》. 주영사. 399쪽. ISBN   978-89-959217-9-1 .